남정철

 




<colbgcolor=#191919><colcolor=#FFF> '''조선귀족 자작'''
'''남정철
南廷哲 | Nam Jung-chul'''
南廷哲
1840년(헌종 6) 4월 27일 ~ 1916년 6월 30일
1. 개요
2. 생애
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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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말기의 관료, 친일반민족행위자. 본관은 의령(宜寧)[1], 자는 치상(穉祥), 호는 하산(霞山). 초명은 남상철(南商哲)인데, 생원시에 급제한 1865년부터 문과에 급제한 1882년 사이에 정철(廷哲)로 개명하였으며, 동생으로 남정필(南廷弼)[2]이 있었다.

2. 생애


1840년 4월 27일 한성부에서 개국공신 남재의 16대손인 남홍중(南弘重)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남홍중은 1852년(철종 3) 식년시 생원시에 3등 23위로 급제하여# 남평현감을 지냈다.#
1865년(고종 2) 식년시 생원시에 3등 2위로 급제하였으며#, 곧 음서로 정5품 세자익위사익위(世子翊衛司翊衛)에까지 올랐다. 1882년(고종 19) 10월 20일 증광시 문과에 병과 11위로 급제하였다.# 직후 정5품 홍문관교리(校理)에 제수된 것#을 시작으로, 정3품 성균관대사성·종2품 평안도관찰사·종2품 사헌부대사헌·정3품 승정원도승지·정2품의 형조판서·예조판서·한성부판윤 등의 고위직을 지냈으며, 갑오개혁을미개혁 등으로 관제 개편이 이뤄지고 난 이후에도 1896년 함경북도 관찰사·의정부찬정, 1897년 내부대신 겸 군부대신, 1898년부터 중추원의관·홍문관학사·궁내부특진관·장례원경·시종원경·태의원경·홍문관특진관 등을 1907년 초까지 중복 역임하였다.
한편, 그는 본래 성리학자 출신으로 수구파였다. 갑신정변김윤식과 함께 청군 출병을 요구해 개화파의 정변을 좌절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으며 1896년 아관파천 때도 고종의 환궁을 앞장서서 교섭하기도 했었다.
심지어 1907년 7월 헤이그 특사사건을 빌미로 고종이 이토 히로부미와 총리대신 이완용 등에 의해 순종에게 강제로 양위하였는데, 양위식이 있었던 19일 남정철은 궁내부특진관에 임명되어# 왕실의 전례(典禮) 및 의식(儀式) 등에 대한 임금의 자문에 응해야 했던 직무상 양위식 집행에 참여해야 했음에도 불구, 당시 궁내부 대신 박영효·시종원경 이도재(李道宰) 등과 함께 양위식 집행에 거부하여 불참했다가 21일 이완용과 법부대신 조중응의 탄핵을 받고# 다음날 22일 아침 고종 폐위 반대 투쟁을 주도한 교무과장 이갑과 시종무관 어담, 고종 폐위 반대 투쟁에 참여한 군인들을 저지하지 못한 대한제국군 시위대 보병 제1연대 제3대대장 임재덕(林在德), 고종 폐위 반대 발언을 한 군무국장 겸 연성학교장 이희두 등과 함께 법부에 압송되어#2 8월 22일에 곤장 80대를 맞았다.#
그런데, 이때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것인지 정적인 이완용에 협력하게 되었다. 그해 9월 3일 경효전(景孝殿)에서 열린 명성황후의 기신제(忌辰祭)에 참석하여 길들인 말 1필을 하사받고# 정2품에서 종1품으로 품계가 올랐으며#, 이후 황실의 큰 행사에 제술관(製述官)으로 임명되어 참여하다가 1909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1910년 6월 10일 평화협회(平和協會) 발기총회에 회장으로 선임되었는데#, 평화협회는 일진회의 한일 병합 청원 찬성에 찬조하기 위해 설립된 추진단체였다. 경술국치 직후에는 남작의 작위를 수여받으면서 조선귀족이 되었다.# 1911년 귀비 엄씨가 사망하자 장례에 참여하였다.
1916년 6월 30일 사망하여 남작 작위는 아들 남장희(南章熙)[3]가 습작하였다.
이로 인해 아들인 남장희와 함께 친일반민족행위자 목록에 등재되었다.

3. 여담


글씨를 잘 써서 덕수궁 대한문 현판을 직접쓰기도 했다.
매천야록에 따르면, 남정철은 내부 대신 자리를 노리고 당시 외부협판 김홍륙의 첩과 자신의 첩이 자매 관계를 맺게 해서 내부 대신 자리를 얻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후 남정철의 첩이 '''김홍륙과 정을 통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를 알게 된 김홍륙의 첩은 남정철이 베푼 연회에 난입해서 남정철에게 욕을 퍼부으며 '첩 간수도 제대로 안 하고 남의 애정에 훼방이나 놓는 네가 그러고도 대신이냐'며 따졌고, 이로 인해 다른 손님들에게 제대로 망신당한 남정철은 다른 일을 핑계로 세 번이나 상소를 올려 내부 대신 자리에서 물러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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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2세손 종(鍾) '''정(廷)''' 항렬.[2] 초명 남상필(南商弼). 1873년(고종 10) 식년시 생원시에 2등 2위로 급제하였으며# 1886년(고종 23) 정시 문과에 병과 8위로 급제하였다.#[3] 1877년(고종 14) ~ 1953. 1891년(고종 28) 정시 문과에 병과 16위로 급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