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개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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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김개남(金開南)[1]
'''본관'''
도강 김씨
'''출생'''
1853년 9월 15일 태인현 종송리 지금실[2]
'''사망'''
1894년 12월 3일 조선 전라도 전주부 초록바위
'''국적'''
조선
'''아명'''
기선(琪先)
'''본명'''
기범(箕範)[3]
'''별칭'''
김개남대접주, 개남장(開南丈) 또는 개남장군(開南將軍)[4]
>"개남아 개남아 김개남아. 수천 군사 어디다 두고 짚둥우리에 묶여 가다니 그게 웬 말이냐."'
>"개남아 개남아 진개남아 수많은 군사 어데 두고 전주야 숲에 유시(遺屍) 했노."
>
>그가 잡혀갔을 때 백성들이 부른 노래
1. 개요
2. 생애
3. 여담


1. 개요


조선 말기의 인물로서 동학농민운동에서 전봉준과 더불어 대표적인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본관은 도강(道康)[5], 자는 기선(箕先)·기범(箕範).

2. 생애


1853년 9월 15일 전라도 태인현(현 전라북도 정읍시 산외면 정량리 원정마을)[6]#에서 아버지 김대현(金大鉉)과 어머니 익산 이씨(益山李氏) 사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중농 가정으로 선비 대우를 받던 집안에서 태어났으므로 김개남은 어릴 적부터 학문도 어느 정도 배우며 자랐다. 어린 나이에 비하여 친화력과 담력도 큰 편이라서 개구쟁이로도 유명했다고 한다.[7]
20대 후반이 되어서 김개남은 전봉준을 처음으로 만났고 30대가 되어서는 동학을 접한다. 이 시기 김개남은 전국을 떠돌아다니면서 다양한 경험을 했고 동학의 2대 교주였던 최시형과도 인연을 맺었다. 그리하여 자신도 동학에 입교했으며 동학의 포교 활동이나 교조 신원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김개남은 지도력이 뛰어나서 전라도 지역의 다른 접주들과 함께 많은 군중을 동원하는데 앞장섰고 전라도 지역의 동학 집단에서 전봉준, 손화중 등의 인물처럼 영향력있는 지도자가 된다.
전봉준이 1894년 동학농민운동을 일으키자 김개남은 1300여 명의 군중을 이끌고 백산에서 동학 농민군과 합류했으며 봉기 당시 손화중과 함께 부지도자 격의 위치에서 동학 농민군을 이끌었다.[8][9] 이후 전주성을 점령하고 전주 화약이 체결되면서 농민군은 일시 해산되었지만 집강소에서 활동을 계속하며 남원을 중심으로 임실, 장수, 무주 등에서 농민 자치 행정을 펼쳤다. 하지만 동학 농민군 중에서도 강경파였으며 반(反)봉건주의 성향이 강했기에 다른 곳의 집강소에 비해 급진적인 모습을 넘어 과격했었다.[10] 동학 농민군을 조직해 양반이라는 이유만으로 죽여 2차 봉기 때 흥선대원군의 지시에도 양반들의 민보군은 청나라군이나 동학 농민군보다는 관군이나 일본군에게 협력하게 된다. 실제로 민보군은 경복궁을 습격한 일본군을 경계하는 사림이 다수였지만 김개남의 과격함+명분론에 입각한 반청주의+깍뜻한 일본군의 대접으로 관군이나 일본군보다 적극적으로 토벌에 나서게 된다.[11]
전봉준이 2차 봉기를 일으켰을 때 김개남은 여기에 합류하지 않았다. 그래서 공주 우금치 전투 때도 김개남 부대는 참전하지 않았고 10월 경에야 움직였다. 김개남은 1만여 명의 동학 농민군을 인솔하여 여러 수령들을 가렴주구의 혐의로 처형하고 북진하여 청주 방면을 공격하였다. 하지만 전술적으로 공격은 실패했고 일본군과의 전투에서도 패배하면서 김개남의 군대도 와해되기에 이른다. 이에 정읍 태인으로 피신했지만 임병찬의 고발로 인해 체포되었다.[12] 결국 붙잡힌 김개남은 1894년 12월 13일 전라감사 이도재[13]에 의해 즉결 처형당해 효수된다.[14][15]

3. 여담


전봉준과는 같은 동학 농민군 지도자로서의 친분과 단결력도 있었지만 충돌하는 것도 있었다. 급진파였던 김개남은 전봉준이 근왕주의적 태도를 보이는 것을 껄끄럽게 여겼다. 전봉준이 "탐관오리만 족치자"는 입장이었다면 김개남은 "봉건주의 자체를 족치자"는 입장이었다. 물론 이들이 반봉건과 반외세를 외쳤다는 점에서 동지 입장이었지만 그들의 현실 대처 방법과 속도는 분명 차이가 있었다.
죽기 전에 남긴 말에 따르면 흥선대원군과 접촉이 있었다고 한다. 2차 봉기와 관련되는 것인데 흥선대원군이 밀사를 보내 재봉기를 부추겼다는 것이다. 하지만 전봉준은 이를 부정했다.
김개남이 스스로 '개남국왕(開南國王)'이라 칭하고 조선을 타도하려 했다는 의혹도 있다.
김개남이 죽고 난 후 후손들은 힘들게 살았다고 하는데 후손들은 김개남이 소장하고 있던 책들을 불태워야 했고 역적의 핏줄이라며 다른 이로부터 손가락질을 받았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동학농민운동의 재평가와 함께 김개남 또한 재평가되면서 후손들도 이제는 당당하게 살 수 있다고 한다. 사실 이건 김개남한테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고 다른 동학 농민군 지도자인 전봉준 또한 마찬가지였다. 동학농민운동이 실패한지 거의 60년 넘게 동학 농민군은 역적으로 취급받다가 박정희 정부가 출범하고 나서야 비로소 위대한 민중 혁명이라고 긍정적으로 평가받게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지방에서는 동학 농민군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도 많은데 동학농민운동을 취재하러 갔던 언론인들이나 지식인들이 지방에서 동학 농민군을 토벌했던 관군의 후손들과 만나 인터뷰를 하면 "동학군이 무슨 혁명군이냐? 다 역적이다!"라는 반응을 접하고 놀라는 일도 많다고 한다.
김개남의 효수당해 잘려진 목을 두고 전봉준의 목이라고 엉터리로 표기된 경우가 많았다. 심지어 1990년대 초반만 해도 동학농민운동 기념관에서 김개남의 사진을 가지고 전봉준의 목이라고 엉터리 설명을 달았다가 비난을 받고 고치던 적도 있다.
박경리대하소설 토지에 나오는 '김개주'라는 인물이 김개남을 본뜬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개남의 고택터가 남아있는데 그동안 밭으로 사용되어 왔다. 하지만 2017년 발굴 조사를 통해 유물이 발굴되면서 현재 정읍시가 복원 사업을 추진 중이다.
2019년 SBS 드라마 녹두꽃에서는 연극배우 김정호가 열연하였는데 실제 역사적 사실과 최후가 매우 다르게 그려졌다. 실제 역사에서는 처형되지만 드라마에서는 22회에서 술을 거하게 들이키고 '나는 배불리 먹었으니 봉명산 구경이나 1번 가볼까나?'라는 외침과 함께 김개남의 저택에 습격한 관군들과 혼자서 싸우지만 전투 도중 총에 먼저 맞으면서 분전하다가 끝내 중과부적으로 전사하고 만다.
김개남이라고 알려져 있는 사진은 도강김씨 족보에 나와있는 얼굴과 초상화로 그려진 얼굴과 아예 다르며
족보에 나와있는 얼굴과 초상화 그림이 흡사한걸로 보아 저 사진은 김개남이 아닐 확률이 매우높다

[1] 원래 이름은 김영주(金永疇)였으나 동학농민운동 당시 '''조선의 남쪽을 새로 열자'''는 의미에서 '개남(開南)'으로 고쳤다고 한다.[2]전라북도 정읍시 산외면 지금실[3] 족보에 실린 이름이 김영주(金永疇), 본명은 김기범이다.[4] 동학농민운동 시기에[5] 28세손 '''영(永)''' 영(泳) 항렬.[6] 전라북도 정읍시 산외면 동곡리 713번지 지금실마을에도 김개남 장군 고택터가 있는데 어린 시절 이주하여 살아온 곳이라 한다.[7] 소문에 따르면 학문 분야에서는 병서경세유표를 즐겨 읽었고 장난 분야에서는 돼지를 놓고 서리질을 했다고 하니 정말 범상치 않았던 같다.[8] 이 과정에서 김개남은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할 수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천민들로 이루어진 부대였는데 핍박받는 자들이 모인 부대답게 양반 같은 기득권층에 대한 적개심이 강했다. 그래서 그들에게 곤욕을 치른 양반들이 많았다.[9] 김개남의 부대는 가는 곳마다 양반들이 사는 집을 발견하면 몰려가서 양반들을 구타하고 양반들의 딸들을 끌고 와서 김개남의 부대원들과 강제로 결혼을 시키기까지 했다. 그래서 양반들이나 지주들은 김개남의 부대를 증오했으며 김개남의 부대를 제압하기 위해 '민보군'이라는 민병대를 만들어 싸우기까지 했다.[10] 김개남은 지역의 수령들과 협조하는 것을 거부했다. 심지어 전봉준에게 협조하는 태도를 보였던 전라감사 김학진과도 상종을 안 할 정도였다. 게다가 전라도에서만 설치되어 있던 집강소를 경상도에도 설치하려고 동학 농민군을 보내기도 했다.[11] 실제로 일본군은 겨우 1개 대대였고 관군의 전투 의지는 매우 낮은 상태였기에 주력은 양반들의 민보군이였고 일본군도 이들을 높게 대우하며 작전권도 일부 양도하는 등 극진히 대접했다.[12] 김개남의 친손자인 김환옥의 증언에 따르면 김개남의 힘이 세서 전라감사가 손발에 대못을 박아서 가둬놓았다고 한다. 이 말은 자신의 할머니인 김개남의 부인으로부터 직접 들은 것이라 한다.[13] 1848~1909. 전봉준 체포로 진급되었지만 단발령에 반대하며 상소를 올리고 벼슬을 그만두기도 했다. 나중에 다시 복직했지만 일본의 침탈을 견제했으며 1907년 고종이 강제 퇴위당하자 분노하여 퇴위에 찬성한 대신들을 죽이고 고종을 다시 복위할 계획을 꾸미다가 체포되어 복역하다가 병으로 세상을 떠난다.[14] 하지만 이 사형은 전라감사의 독단이었다. 동학농민운동 이전인 갑오개혁에서 그런 식의 사형을 금지했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전봉준과 손화중은 한양으로 압송되어 교형으로 처형되었다. 그래서 이 판결은 조선과 일본 간의 갈등으로 이어졌는데 일본이 독단적으로 일을 처리한 전라감사를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조선 정부가 경위를 해명하고 노력한 후에야 마무리되었다.[15] 김개남이 처형된 이후 원수진 사람들이 김개남의 고기내장을 빼앗아 씹기도 했고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고 황현매천야록은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