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맹기
李孟基
1925년[1] 3월 4일 ~ 2004년 12월 9일
1. 개요
대한민국 해군의 제독. 이성호 제독에 이어 6대 해군참모총장을 지냈다. 해군사관학교 1기로 해사 출신 첫 해군참모총장이다.[2] 후임자는 동기인 함명수 제독이었다.
재계나 해운업계에선 대한해운 창업주로 알려져 있으며, 본관은 전주(全州)[3]#, 아호는 해성(海星)이다.
2. 생애
1925년 3월 4일 경상북도 고령군 개진면 신안리[4]#에서 아버지 이찬범과 어머니 김현이 사이의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고향에서 소학교를 졸업하고 16세 되던 1940년 가족 전체가 일제의 압정을 피해 만주로 이주하는 바람에 그는 다롄의 제1중학교에 입학하여 1945년 졸업하였다.
1945년 8월 8.15 광복을 맞아 귀국하였고 1946년 2월에 해군사관학교에 1기[5] 로 입학하여 같은 해 12월 15일에 해군 소위로 임관되었다. 이후 해군본부 감찰총감에 올랐으며, 6.25 전쟁 당시에는 LST-802, 즉 철옹함의 함장으로 근무했다가 해군포술학교 초대 교장에 취임하기도 했다. 1952년 함정교육단장, 1954년에는 상륙전대 사령관, 1959년 5월부터 1960년 11월까지는 한국함대 부사령관[6] , 참모장, 훈련사령관 등으로 근무했고 1960년 11월에 함대사령관[7] 에 임명되어 1961년 9월까지 역임했다.
1961년 9월 해군참모차장이 되었고 같은 해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 국가재건최고회의가 구성되자 최고위원에 임명되었다. 이듬해인 1962년 9월 마침내 제6대 해군참모총장에 임명되었으며, 1964년 해군 중장으로 예편한 후에 대한해운공사 사장에 취임했고, 1968년 민영화로 대한해운공사 사장직을 사임한 후 코리아해운을 창업해 부동산 투자를 멀리하고 국가관에 기반한 내실 경영을 해왔다.
이후 옥포장학회를 설립하여 해운 및 조선 관련 학과 재학생 및 임직원 자녀 등에게 장학금을 지원하는 등 장학사업에 힘을 쏟았고, 해성사회윤리문제연구소 등을 통해 연구사업에도 관심을 가졌다. 또한 한국선주협회 회장, 대한민국재향군인회 18~21대 회장, 대한상공회의소 감사, 한국해양소년단연맹 회장, 전국경제인연합회 상임이사, 한국해사재단 이사장 등을 지내며 사회활동에 힘을 아끼지 않았다.#
1991년 8월 31일 한국해양대학교로부터 명예 경영학박사 학위를 수여받기도 했으며#, 이후 대한해운 명예회장으로 있다가 2004년 12월 9일에 노환으로 작고했다.#
[1] 실제로는 1923년생이라고 한다.#[2] 해사 1기는 4명이나 해군참모총장을 배출했다. 이는 선배였던 상선사관들이 조기 퇴역함에 따라 승진 속도가 빨라졌기 때문이었다. 육사 출신 첫 육군참모총장 서종철(1969년 취임)보다 7년이 빨랐다. 공군사관학교 출신 첫 공군참모총장인 윤자중 대장이 1979년에 공군총장에 오른 걸 생각하면 17년이 빨랐다. 다만 공사는 1기부터 4년제가 적용됐고 늦게 설립된 탓에 공사 n기가 해사 n+6기와 육사 n+8기에 상당한다. 윤자중 공군참모총장이 있을 당시 해군참모총장은 해사 4기인 김종곤 대장으로 오히려 공사의 진급속도가 더 빠른 편이었다. 왜냐면 워낙에 해사가 초기에 참모총장을 잡은 탓에 1962년부터 1981년까지 19년을 해사 1기에서 4기까지의 사람들이 차지했기 때문이다.[3] 의평군파 16세 기(基) 항렬.[4] 전주 이씨 의평군파 집성촌이다.#[5] 동기생들로 함명수·김영관·장지수 등이 있는데, 이 세 사람 모두 해군참모총장직을 역임했으며, 각각 7대, 8대, 9대로 모두 이맹기의 후임자들이었다.[6] 현재의 해군작전사령부[7] 지금의 해군작전사령관에 상당하는 위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