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용

 

李文鎔, 1900년 ~ 1987년
1. 개요
2. 생애
3. 논란
4. 기타
5. 같이보기


1. 개요


자칭 고종의 딸. 한국의 안나 앤더슨(Anna Anderson)[1]이라고 할 수 있다.

2. 생애


이문용의 주장에 따르면, 생모 염씨는 궁녀였다가 고종 황제의 승은을 입어 이문용을 임신하였다고 한다. 당시는 순헌황귀비 엄씨가 기세등등했던 때라, 염씨는 사가로 쫓겨나고 이문용을 낳은 직후 사약을 받았다. 이에 유모가 갓난 아이였던 이문용을 데리고 경상북도 김천에 피신, 숨어 살았다고 한다.[2] 하지만 양부가 사망하고 양모가 이문용의 재산을 챙겨 달아나면서, 이문용은 걸인으로 살게 된다. 그러다가 생모 염씨의 친구였던 상궁에게 거둬져 유복하게 자랐고, 진명여학교[3]에 다니며 신교육을 받았고 결혼도 했다. 그러나 남편은 익사하고 유복자까지 병사하는 불행을 겪는다.
해방 후 이문용은 좌익 활동과 연루되어 복역하였고, 출감 후 자신이 고종 황제의 딸이라고 주장하였다. 1972년 유주현이 잡지 사상계에 이문용의 일생을 다룬 <문용옹주>라는 소설을 연재하였으며[4] 이를 원작으로 한 드라마 <황녀>가 1974년 MBC에서 방영되면서 센세이션을 일으켜 다음 해 전라북도 도지사의 주선으로 태조 이성계의 영정을 모신 경기전 일각에 기거하게 되었으며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그러나 처음부터 황녀로서 궁에서 살았다고 해도 불행한 삶을 살았을 것이다. 영친왕, 덕혜옹주와 마찬가지로 조선총독부유학을 명분으로 일본으로 끌고 갔을 것이고, 지옥 같은 유학 생활을 보내고, 자신의 의견과 상관없이 일본과 결혼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영친왕과 덕혜 옹주가 그랬던 것처럼, 불행한 삶을 살다 갔을 가능성이 높다.

3. 논란


이문용이 황녀라는 주장의 근거는 '''본인의 주장'''과 '고종 황제와 닮았다'는 이면용[5]의 주장뿐이다. 이문용이 황녀라는 근거는 그 외에는 어디에도 없다. 이방자 여사가 생존했던 당시에도 이문용과 만남이 주선되었으나, 이방자 여사가 극구 거절해 일반 방문객 자격으로 만나는 데 그쳤다. 이때 이방자 여사가 낙선재로 들어와 살 것을 권유했다고 하는데, 오히려 드라마 방영 당시 낙선재 측에서는 2회나 고종 황제에게 그런 딸은 없었다고 주장했으며, 이문용이 사망한 때에도 고종의 딸임을 부인하였다. 전주 이씨 대동 종약원에서 "공식기록이 전혀 없다"면서 이를 부정하였고, 당시 생존해 있던 조선의 마지막 궁녀 성옥염 상궁도 "임금과 하룻밤만 자도 당호가 붙는 법인데[6], 임신까지 했다면 상궁들끼리 모를 리가 없다.[7]고 부인했다.
다만 제정 러시아아나스타시야 니콜라예브나 로마노바 공주를 자칭했던 안나 앤더슨의 주장이 DNA 검사를 통해 거짓말로 밝혀진 것과는 달리, DNA 검사 등 고종황제의 딸이 아니라는 명확한 증거가 없기 때문에 세간에서는 고종의 숨겨진 딸로 믿는 사람도 더러 있다.
여기서 문제는 '''자칭''' 왕위 계승 권리를 주장하는 무리는 서구왕조 외에 한국 황실에도 대단히 많다는 것이다. 옛 황실의 후손(황손)들은 이문용 역시 그러한 무리 중 하나로 비정할 뿐이다. 실제로 매년 제향 날짜에 맞춰 홍유릉을 방문하면 저 스스로 숨겨진 황손이라 주장하는 사람들을 1명 ~ 2명쯤은 쉽게 만나 볼 수 있다. 중요한 사실은 이들 대부분 주장하는 내용이 '''고종 황제, 혹은 황족 누구누구와 닮아서'''라는 것뿐이라는 점이 문제다. 더욱이 대한제국 황실은 후손이 귀해 말미엔 거의 적서차별이 없다시피 했고[8] , 의친왕비 김덕수는 남편이 밖에서 얻어 온 자식 대부분을 사동궁에서 직접 먹이고 입혔다. 순헌황귀비가 권세를 누린 햇수도 실제 몇 년 되지도 않을 텐데,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할까? [9]

4. 기타


  • 종교는 기독교였으며, 장례또한 기독교식으로 지냈다.##

  • 박근혜당시 한마음병원 이사장과 만난적이 있으며, 박근혜 이사장의 배려로 사망때까지 약 처방을 해주었다고 한다.##

5. 같이보기



[1] 자신을 러시아 제국아나스타시야 니콜라예브나 로마노바 공주라고 주장한 여성. 가족들과 함께 총살당할 때, 홀로 극적으로 살아남아 탈출했다고 주장했다. 아나스타시야 공주가 살아남았다는 이야기가 끊임없이 돌았고, 미국 애니메이션으로도 만들어졌다. 하지만 안나 앤더슨의 머리카락과 조직을 검사한 결과는 제정 러시아 황실과 혈연이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아나스타시야 공주의 시신이 발견되어, 안나 앤더슨은 사기꾼으로 밝혀졌다.[2] 현재 이문용이 살았던 마을은 '황녀의 마을'이라 하여 관광 상품화되어 있다.[3] 참고로 진명여학교순헌황귀비 엄씨와 친정 엄씨 가문이 설립한 학교 중 하나이다. 엄씨 일가는 진명여학교 외에도 숙명여학교양정학교(男)도 설립했다.[4] 2010년 <황녀>라는 제목으로 재출간되기도 하였다.[5] 정미칠적 이재곤의 아들[6] 조선 후기가 되면 워낙 왕손이 귀해 지다보니 책봉 인플레(...)가 있었다. 조선 초기만 해도 워낙 왕손들에 많아서 같은 서자녀여도 어머니의 신분에 따라(간택후궁or궁녀출신)대접을 달리 했고, 후궁 따위의 첩지는 대왕대비의 생신 같은 경사스런 날을 축하하는 의미로 여러 명을 한 번에 처리했으나, 워낙 손이 귀해지다보니 어머니의 신분이 천출이든 아니든 왕의 자식이기만 하면 적자 못지 않은 귀한 취급을 받았고, 후궁 한 명 한 명이 귀해지게 된 것. 인조 이후로는 대군이 봉해진 경우가 없었고, 철종은 아예 영조의 서자의 서자의 서자의 서자였다.[7] 궁녀가 왕과 동침하게 되면 하루아침에 종 5품 승은상궁이 되어 그동안의 업무에서 해방되고 거처와 심부름할 궁녀를 받는다.왕실의 새로운 어른(왕자녀를 낳을수도 있다)이 생긴것이므로 궁녀들도 알고 있어야만 한다.[8] 인조대 이후로는 대군의 칭호를 받은 이가 없다. 즉, 왕비가 왕자를 낳더라도 한명만 낳았거나(아들이 하나뿐이면 자동적으로 그 아들이 세자가 되는데, 세자는 왕이 되지 못하고 요절하거나 폐위되지 않는 한 봉호나 군호를 따로 받지 않는다), 아들을 낳지 못해 후궁 소생의 왕자를 왕으로 세웠고, 후궁 소생의 왕자마저도 없어서 먼 친척뻘인 철종, 고종 등을 겨우 세울 정도 였으니 적서차별을 할 겨를이 없었다.[9] 명성황후는 실제로 저랬다. 의친왕의 생모 귀인 장씨, 순헌황귀비 엄씨가 대표적인 피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