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헌황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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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종황제의 후궁으로, 명성황후 사후 사실상 고종의 황후나 마찬가지였던 여성이다. 영친왕의 어머니로 보통 엄 귀비[1] 라고 불린다.
2. 생애
8살 때 궁녀로 입궐해서 명성황후의 시위상궁으로 있었다가 고종의 승은을 입게 되었다. 이 사실을 안 명성황후는 엄 상궁을 궐 밖으로 쫓아냈다. 그 후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죽자 고종은 엄 상궁을 다시 불렀고, 아관파천에도 개입해서 고종, 순종과 함께 러시아 공사관으로 갔다.
1897년, 44세에 영친왕을 낳은 후[2] 정식 후궁의 첩지를 받게 되어 귀인, 1900년엔 순빈(淳嬪), 1901년에 순비(淳妃)로 봉해졌다. 고종황제는 엄씨를 황후로 세우고 싶어 했으나 큰 반대에 부딪혔다. 엄씨의 신분이 원래 궁녀(평민)였고,[3] 숙종이 세워놓은, "후궁은 왕비가 될 수 없다"[4] 는 법도 때문.[5]
1903년 12월, 결국 황후 바로 아래이자, 후궁 중에서 가장 지위가 높은 황귀비의 직책을 받는 걸로 이 문제는 정리되었다.[6] 그러나 황후가 없는 상황에서 가장 지위가 높은 후궁이었으니 실질적으로는 황후로 대우받았고, 복색도 황후의 복색이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황귀비로서의 의전일 뿐, 황후의 의전은 아니었다. 순헌황귀비 엄씨는 조선왕조 역사상 중궁이 세상을 떠난 후 계후(繼后)를 들이지 않은 채 후궁으로서 정궁(正宮)의 지위를 사실상 대신한 보기 드문 사례였다.[7] 을미사변 이후 명성황후의 국장까지 치른 후에도 고종은 황후 자리를 비워둔 채 엄씨를 황귀비로 책봉했을 뿐 계후를 맞이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태자비 민씨와 사별한 황태자 순종이 부황의 황후 자리가 비었음에도 부황보다 먼저 새 태자비를 맞이했다.
사진을 보면 그리 미인은 아닌데, 이를 두고 조선 시대와 현재의 미의 기준이 달랐기 때문이라고 보기도 하지만 당대에도 엄씨는 박색(못생겼음)으로 평가됐다. 반면에 일부 야사에 의하면 명성황후와 똑같이 생겨서 고종황제의 총애를 받았다 한다. 고종을 모시던 시종원 부경 정환덕의 말에 따르면, 선녀가 하강한 듯 하여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미인이었다고 한다. [8]
성격이 당찬 여걸이었는지, 일본인들이 유학이라는 명목으로 일본에 끌고 간 영친왕을 귀국시키지 않자 "학교에 방학도 없느냐?! 홋카이도로 여행을 갔다는데, 그럴 시간이 있으면 그것보다 부모를 만나게 해주는 것이 도리 아니냐!!"라고 항의했다고 한다. 드세기로 이름난 데라우치 마사다케 총독에게 말이다.
경술국치 직후인 1911년 7월 20일에 덕수궁에서 갑작스럽게 장티푸스에 걸려 57세로 사망했다. 일본은 장티푸스에 전염될 수 있다며 어머니의 죽음 때문에 귀국한 영친왕이 그녀의 시신 가까이에 가는 걸 막았다. 한 때 이 이유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아 이 일이 일본의 만행으로 잘못 알려져 있던 적이 있다[9] . 황귀비의 묘소는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청량리에 있는 영휘원(永徽園)이며, 같은 울타리 안에는 영친왕의 장남 이진이 잠든 숭인원(崇仁園)이 있다. 엄씨를 제사지내기 위해 1929년에 세운 덕안궁이 칠궁을 구성하는 마지막 사묘이다.
영친왕을 일찌감치 순종황제의 후계자로 만들 생각이었기 때문에 영선군, 의친왕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한다. 의친왕은 생모가 죽은 뒤였던데다 살아 있을 때도 명성황후 때문에 별 다른 힘이 없었던 탓에 엄 귀비가 원하는대로 영친왕이 후계자가 되었다. 후계자에 탈락한 건 의친왕의 탕아 기질 때문이였다고도 하는데 판단은 알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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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에 있는 여자가 순헌황귀비 엄씨, 왼쪽은 아들인 영친왕.
3. 근대 교육과의 접점
나름대로 교육에 신경을 많이 써서, 양정의숙, 진명여학교, 숙명여학교[10] 의 설립에 관여했고[11] , 이화학당과 배재학당에 후원금을 보냈다. 이 때 자신의 사재를 출연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숙명여자대학교의 경영권의 일부를 구 한국 황실과 영친왕이 갖고 있었는데, 광복 후 이로 인한 소송이 발생했을 때 영친왕 귀국조차 고깝게 여길 정도로 황실을 냉대한 이승만 정부가 이 권리를 인정해주지 않아 결국 황실 측이 패소했다고 한다. 하지만 엄 귀비가 기부한 토지는 숙명여대의 소유로 인정받아서, 서울시가 몇 번이나 뺏으려고 했지만 매번 재판에 지고 있다. 정작 엄귀비에게 하사받았다는 토지 문서는 행방이 묘연하여, 숙명여대에서 계속 찾으려고 하고 있다. 문서 관리는 소중히, 제대로 하자.[12]
4. 대중문화에서
4.1. 영화
4.2. TV
- 서미애 - 2002년 KBS2 드라마 《명성황후》
- 김자옥 - 2002년 MBC 특집극 《너희가 나라를 아느냐》
- 김주령 - 2018년 tvN/넷플릭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 김하영 - MBC 예능 《신비한TV 서프라이즈》
[1] 사실 '귀비'는 '황귀비'의 준말이 아니다. 황귀비는 ‘황후+귀비’란 뜻으로 명나라 때 만들어졌으며 최고로 높은 후궁이며, 명·청대에 귀비는 황귀비보다 한 단계 낮은, 별개의 품계였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순헌황귀비가 경술국치 이전까지는 '황귀비'로 불리다가 경술국치 이후로는 '황'자가 빠지고 그냥 '귀비'로 호칭되는데, 대한제국이 멸망하고 황제가 이왕(李王)으로 격하된 상황에서 '''황'''귀비라는 호칭을 쓰기 부적합했던 것이기 때문일 수 있다. 이 탓에 귀비가 황귀비의 준말로 잘못 아는 사람들이 많은 편이다.[2] 나이가 나이인 만큼, 아들을 낳기 위해 북한산에 산신각까지 짓고 백일 기도를 올렸다고 한다. 이때 만든 약사불과 산신탱화가 남아있다고 한다. 서울 남산에 있는 와룡묘(臥龍廟) 제석전에서 엄 귀비가 빌어 영친왕을 낳았고, 나중에 엄 귀비가 와룡묘 안에 삼성각을 지어주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역사적 근거가 부족하다.[3] 아마 이 점이 가장 크게 작용한 것 같다.[4] 이 때문에, 후궁 출신으로서 왕비가 된 인물은 희빈 장씨가 마지막이다. 궁녀신분에서 승은을 입어 후궁이 된 점은 두 사람 다 같지만, 장씨는 그당시 재벌수준의 부를 축적한 역관 집안의 딸이자 중인 신분으로, 엄씨와는 상당히 차이나는 출신이였다.[5] 근데 고종 실록상 기록에 의하면 1906년 10월 24일 종2품 대신 노영경 등이 순헌황귀비의 황후 승격을 건의하고 있지만 고종이 오히려 망설이는듯한 태도로 그대들이 말하는 "중대한 예"를 이렇게 갑작스럽게 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6] 당시 그녀가 무슨 칭호를 받아야 하는지를 놓고 논의를 했는데, 내장원경 이용익이 당나라 양귀비의 예를 들어 귀비로 하자고 했다가 나라를 망하게 만든 후궁과 비교했다는 이유로 여러 대신들이 그를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요구한 일이 있었다. 송우혜의 『마지막 황태자 시리즈1-못생긴 엄 상궁의 천하』에 의하면, 이용익의 말을 들은 엄 상궁이 자존심이 상해 이용익의 반대파를 움직여 꾸민 일인데, 고종은 충신인 이용익을 보호하려고 꼼수를 부려 겉으로는 들어주는 척했지만 어물쩍거리며 미루다가 이용익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보내 위기를 피하게 했고, 뒤이어 베트남으로 가서 곡식을 사오라는 명을 내려 공을 세우게 해 없던 일로 만들었다고 한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내부대신 이건하가 건의한 '황귀비'로 의견이 모아졌다(『마지막 황태자 시리즈1-못생긴 엄 상궁의 천하』에선 엄 상궁이 황후가 못 될 바엔 미녀인 양귀비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싶었다는 내용이 있는데 일화의 일부가 잘못 알려진 것일 가능성이 있다.).[7] 비슷한 예로 태조의 후궁인 성비 원씨, 문종의 후궁인 숙빈 홍씨 등이 있다. 원씨는 신덕왕후 사후 성비에 봉해진 뒤론 거의 대부분의 국가 현안에 관여할 권한을 부여받고 후궁임에도 태종에게서 어머니 대접을 받았다. 홍씨는 당시 세자빈이었던 현덕왕후 사후에 내궁이라는 별호를 따로받고 무려 '''명나라의 공인'''도 받아, 실질적인 왕비 역할을 하였다.[8] 위에 나온 것처럼 고종이 총애하던 신하인 이용익이 '''칭호를 귀비로 결정하자고''' 했다가 사형당할 뻔했다. 당시 기준으로 불경스러운 말을 했다가는 다른 대신들에 의해 인생이 끝장났을 것이다.[9] 일제강점기 당시의 일본 측의 만행을 꼽으라면 한도 끝도 없지만, 이건 상식이 있다면 당연히 막아야 할 일이다. 괜히 사망자의 시신에 접근하는 것을 허용했다가, 전염병이 사방팔방으로 퍼지는 참사가 벌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2014 서아프리카 에볼라 유행 당시에 아프리카 각국의 정부가 에볼라에 감염되어 사망한 사람들의 시신에 접근하지 못하게 한 이유가 이것이다. 참고로 조선 후기부터는 전염병으로 죽을 경우 사망자의 자손도 되도록 부모의 시신에 접근을 안하는건 '''당연한 상식'''이었다.[10] 처음 이름은 명신여학교였으나, 곧 숙명여학교로 바뀌었다. 옛 이름의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는데, 숙명여자대학교에는 명신관이라는 건물이 있고, 숙명여자중학교와 숙명여자고등학교의 학교법인 명칭은 명신여학원이다(본래 숙명여중고도 숙명여대와 함께 숙명학원 소속이었으나, 2013년 재단이 분리됨).[11] 양정의숙은 순헌황귀비의 7촌 조카 엄주익이, 진명여학교는 순헌황귀비의 사촌 동생(순헌황귀비의 아버지의 양자가 되었기 때문에 남동생이기도 하다) 엄주원이 설립했는데, 실제로는 순헌황귀비의 명으로 설립했다는 말이 있다. 숙명여학교는 초대 교장인 이정숙이 설립자이기도 하다는 말이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순헌황귀비가 설립한 걸로 알려져 있다.[12] 비슷한 사례로 남태평양의 피지는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것을 증명한 독립 증명서를 분실했다.[13] 순헌황귀비와 같은 영월 엄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