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동궁
1. 개요
寺洞宮
대한제국의 별궁. 한성부 중부 관인방, 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관훈동 인사동길 30번대 홀수 지역[1] 일대에 있었다.
2. 상세
고종의 5남 의친왕 이강이 살던 집이자 의친왕부(義親王府)가 있었던 곳이다. 이름은 궁이 있던 동네의 별칭 '사동(寺洞)'에서 유래했다.[2][3]
의친왕의 5녀 이해경의 증언에 따르면, 의친왕은 결혼 직후엔 계동궁에 머물렀다가 친왕 책봉 이후부터 사동궁에 머물렀다고 한다. 의친왕부(義親王府)는 1906년(광무 10년)에 생겼는데, 의친왕은 친왕 책봉받기 직전인 1899년부터 미국에서 머물다 1905년 무렵에 귀국했기에 그 이후부터 거주한 듯 하다. 1908년에는 양관(洋館)을 세웠다.
일제강점기 이후 사동궁은 '이강공저(李堈公邸)'[4] 로 불렸다가 1930년에 일제가 의친왕을 강제로 공 위에서 물러나게 하고 장남 이건이 뒤를 이은 후에는 '이건공저(李鍵公邸)'로 불렸다. 그리고 8.15 광복 후 다시 의친왕이 소유하면서 다시 사동궁으로 불렸다.
3. 마지막
그러나 8.15 광복 후 사동궁은 몰락했다. 왕공족 신분이 사라지고 평민이 되어 생활이 궁핍해진 의친왕에게 박응래라는 사람이 접근해 사동궁 일부를 팔라고 강요했고, 결국 1946년 불과 200만 원에 내놓았다. 그러자 미군정이 사동궁은 사유재산이 아닌 국가재산이니 대법원장에게 얘기해 구 이왕직에서 관리하도록 하였으나 대법원에서는 이를 묵살했다. 그리고 1948년 박응래는 사동궁을 다른 사람에게 팔았다.
대한의사협회는 1955년 11월 12일 종로구 관훈동 옛 사동궁의 일부를 매입하여 대한의사협회 회관을 마련했다. 이 건물은 1960년 11월 화재로 사라지기까지 5년 동안 서울시의사회와 함께 사용했다. 또한 종로구 인사동11길 19[5] 는 1946년 박응래에게 팔렸다가 다음 해에 최시화의 소유가 되어 1955년경에 옛 사동궁 한옥 한 채[6] 에 요정 ‘다성’[7] 이 들어섰다. 서울시는 2004년에 이 집을 사들여 2005년에 허물고 ‘서인사 마당 공영 주차장’으로 만들어 사용 중이다.[8] 또한 그 주변의 보존 상태가 양호한 한옥 하나를 수리해 '인사동 홍보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1965년 종로구 인사동 192번지 82호의 사동궁 양관 자리 일부와 종로구 견지동 87번지 1호 등에 종로예식장이 들어섰다. 1986년에는 종로예식장 자리와 그 주변을 선경이 사들여 SK건설빌딩(인사동 192번지 18호)이 들어섰다.
SK건설 빌딩 동쪽에는 사동궁의 영욕을 직접 보았을 오래된 회화나무 한 그루가 있다. 현재 사동궁 터엔 이 나무 외에 옛 역사를 증명해 줄 흔적이 전혀 남아있지 않다.
4. 구성
사동궁의 규모는 굉장히 컸으며 전성기 때는 지금의 견지동 일부도 영역이었다 한다.
운현궁처럼 서양식 건물 1채에 수십 동의 한옥이 있었다. 내전 부분은 지밀 12칸, 행각 42칸, 구주방 14칸, 신주방 34칸, 침방 8칸, 유모방 12.5칸, 서행각 18칸, 이상궁방 18칸, 한상궁방 18칸, 안상궁방 23칸, 동행각 22칸이었고, 외전 부분은 사랑 20칸, 행각 30칸, 방회청 8.5칸, 행랑 16칸, 외행각 12칸, 창사루 100칸, 즉 총합 426.5칸의 규모였다.
5. 역대 종주
'''◎ 일본이 만든 왕공족에 공가의 일원으로 편입당했다. 자세한 내용은 왕공족 문서 참고.'''
1. 의친왕 이강(義親王 李堈, 1877 ~ 1955)
2. 이건(李鍵, 1909 ~ 1990) - 의친왕의 뒤를 이어 공가를 세습하게 되면서 ‘이건공저’로 불리었으나 실제로 관리하지 않고 끝내 일본으로 귀화하여 국내로 되돌아오지 않았다.
'''◎ 해방 후 왕공족 지위를 잃고 사동궁 매각 후, 사동궁의 주인 대신 봉사손으로서 가문을 계승하고 있다.'''
1. 이곤(李錕, 1919 ~ 1984) - 끝내 일본에 귀화한 이건을 대신해 1955년 의친왕 사후 가문을 계승해 사손이 되었다.
2. 이준(李浚, 1961 ~ ) - 현재 사손(嗣孫)[9]
6. 여담
- 한국기원의 모태인 한성기원이 자리를 잡지 못할 때 의친왕은 자신의 사위 이학진(李鶴鎭)[10] 을 통해 설립자 조남철에게 사동궁의 한옥 15칸을 기원으로 제공하였고, 한성기원은 사동궁에 자리를 잡으며 조선기원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의친왕도 가끔 바둑두는 것을 재미있게 바라보았다고. 그리고 해방 후 이름을 대한기원을 거쳐 한국기원으로 바꾸어 오늘날까지 이어온다. 다만, 사동궁 매매 이후 조선기원 역시 이사를 갔다. 처음엔 명동성당 건너편 저동의 2층짜리 적산가옥(敵産家屋)으로 옮겼다. 그러다 종로구 관철동을 거쳐 현재의 성동구 마장로에 정착했다.
[1] 구 지번주소 종로구 관훈동 196번지.[2] 이 일대가 원동(園洞), 대사동, 승동, 탑동 등 절과 관련된 지명이 많아 붙여진 별칭이다.[3] 인사동의 사동과 이 사동이 같다.[4] 보통 고종이 '''덕수궁''' 이태왕, 순종 - 의민태자가 '''창덕궁''' 이왕이 되었다고 의친왕과 흥친왕 역시 사동궁 이강 공, 운현궁 이희 공이 정식 명칭인 줄 아는 사람들이 많은데 사실 고종, 순종의 궁호는 일본 천황 밑의 왕족으로 붙는 미야케의 개념으로 공족이 된 이강과 이희는 미야케를 쓸 수 없었다.[5] 구 지번 주소 종로구 견지동 85-18[6] 사랑채였다고 한다.[7] 한동안 '도원'으로 잘못 알려져 있었으나 의친왕의 후손이 '다성'이라고 알려주었다.[8] 이 상황을 증언하는 출처인 책 《대한민국 사용후기》의 저자 J. 스콧 버거슨은 2005년 이 한옥이 헐리는 과정을 보고 사라져가는 문화에 무심한 한국 사람들에게 안타까움을 느낀다고 했다.[9] 여기서부터는 사동궁에 거주한 경험이 없다.[10] 4녀 이해숙의 남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