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인현동 호프집 화재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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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 직후의 모습.
1. 개요
2. 사고 상황
2.1. 비상구가 없었나?
2.2. 내부 구조 문제
3. 기타
4. 유사 사례
5. 둘러보기


1. 개요


1999년 10월 30일 오후 6시 55분에 인천광역시 중구 우현로83번길 10(인현동 27-43)에 있는 '라이브2 호프집'에서 일어난 대형 화재 사고. 씨랜드 청소년수련원 화재사고가 일어난 후 4개월 밖에 안 된 시점에서 일어난 사고로, '''사망 56명, 부상 78명'''의 대참사로 정부 수립 이래 3번째 규모의 대형 화재 사고였다.[1]
인천 최대의 유흥가였던 동인천역 인근의 구도심 상권은 이 사고가 터져버림으로써 상권은 물론 도심마저 구월동관교동으로 넘어갔으며, 타격이 동인천역뿐만 아니라 주안역동암역의 상권까지 영향을 줘서, 결국에는 세 지역 상권은 같이 망하고, 원도심의 위치도 자연스럽게 무너졌다. 다른 도시의 원도심과 다르게 인천 원도심에 해당하는 중구동구가 무척 피폐한 이유[2]가 여기에 있다.

2. 사고 상황


문제의 인현동 '라이브2호프'는 4층짜리 상가 건물로 지하에는 노래방, 1층에는 고깃집, 2층에는 호프, 3층에는 당구장이 있었다. 당시 지하 노래방은 내부 수리 공사 중이었는데, 이곳에서부터 불이 나 올라오기 시작했다. 화재의 원인은 노래방에서 일하던 10대 아르바이트생 2명의 '''불장난'''.[3] 노래방에서 시작된 불은 진압되었으나, 화염과 유독 가스가 지상 입구에서 지하 노래방을 잇는 벽의 소재를 타고 3층까지 올라간 것이 문제. 화염과 가스가 출입구를 가득 채웠으니 그 위층의 사람들은 출입구를 통해 내려올 수도 없는 상태였다.
다행히 1층은 화재를 금방 알아채 대피했고 '''3층''' NBA당구장에 있던 사람들도 창문을 깨고 뛰어내리면서 부상자는 있었지만 사망자는 없었다. 모든 사망자는 2층 호프집에 집중되어 있었다.
당시 호프집은 마침 학교 축제가 끝난 뒤 뒤풀이를 하던 인천 지역 고등학생들이 꽉꽉 들어차 있었다. 사망자 대부분도 이들이었다.[4] 이 때는 인천 지역 고등학교 축제가 몰려있던 시즌이었는데, 축제가 끝난 직후라 모두 학생임을 드러내는 교복을 입고 있었다. 이 때문에 사고 후에도 계속 질타가 나오게 되었다.
특히 사고가 난 동인천 권역에는 여러 학교들 주변에 유흥가가 많았던 것도 문제이다. 당시 뉴스 동영상을 보면 알겠지만 "마땅히 놀 곳이 없다"라며 한탄하는 해당 지역 학생 인터뷰도 있었다.

2.1. 비상구가 없었나?


비상구가 있었다면 이 정도로 심각한 사망자가 나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실 불 자체는 이미 화재 시작 후 30분 만에 진압되었고 모두 비상구로 탈출하는 일만 남은 상태였다. 하지만 있던 비상구를 베니어 합판으로 막아버렸고 내부 수리를 하면서 창문도 개폐식이 아닌 통유리로 바꾼 데다가, 간판으로 쓰려고 모두 판자를 붙여놓은 상태였기 때문에 창문으로 뛰어내리는 것 마저 여의치 않은 상황이었다. 호프집이 2층이었기에 창문에서 뛰어내린다면 어딘가 부러지기는 하더라도 최소한 죽지는 않았을 상황이었다.[5]
거기다가 호프집 주인[6]의 정신나간 조치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화재로 고등학생들이 빠져나가려고 하자 대왕코너 화재사고 때처럼 '''"돈 내고 나가라."라며 유일한 출입구를 막은 것이다.''' 결국 마지막 출입구까지 봉쇄된 채 유독가스에 노출된 학생들은 그 자리에서 모두 질식사하였다.

2.2. 내부 구조 문제


당시 호프집 내부는 탁자와 의자가 꽉꽉 들어차 있었고, 50여 평 정도 규모의 공간에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앉아있었으며 사람이 돌아다닐 만한 통로는 겨우 한 사람이 빠져나갈 만한 아주 비좁은 공간밖에 없었다. 계단 역시 폭 1~2m 정도의 아주 좁은 계단이라 겁에 질려 우왕좌왕하는 사람들 때문에 완전히 정체 상태였으며, 불이 나자 계단이 굴뚝 역할을 해 연기를 윗층으로 올려보냈다.
내부 구조물들 역시 주로 인화성 물질로 만들어져 있던 탓에 불이 붙으면서 치명적인 유독가스를 뿜어냈다. 사고 후 경찰의 부검 결과 밝혀진 사망자 대부분의 사인도 유독가스로 인한 질식사였다. 일부 사람들은 환풍구를 통해 탈출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하였으며 그 결과 환풍구까지 시체로 꽉꽉 메워져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처음 화재가 시작된 지하 노래방 천장에 설치된 비상 소화 장치인 스프링클러도 수리한다는 명목으로 모두 제거된 상태였다. 스프링클러만 제대로 달려 있었어도 초기 진화가 가능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업소는 사실 1999년 3월에 안전 기준 미달로 적발되어 중구청으로부터 영업장 폐쇄 명령을 받은 상태였으나 화재 당시 업소 주인[7]이 인수하여 무허가 영업을 하고 있었다. 뇌물로 공무원들을 매수했기에 가능한[8] 불법 영업이었고 사고 후 뇌물을 받은 공무원들 역시 구속되었다.

3. 기타


2004년 사고지점 인근에 인천학생교육문화회관이 생기면서 위령비가 건립되었다.[9]
사망한 학생의 90%가량은 인천 앞바다에 뿌려지는 형태로 장례를 치렀다.
1990년대까지 인천의 중심지로 잘 나갔던[10] 인현동은 이 사건으로 인해 도심으로서의 상징성을 관교동구월동에 넘겨줬고, 상권도 몰락했다.[11]
만악의 근원인 호프집 주인은 사고 직후 도주했다가, 며칠 후에 자수했는데도 불구하고 변호사 타령을 하거나 뇌물 같은 거 주지 않았다는 등 여전히 당당한 태도를 유지해 사방팔방에서 어그로를 끌었다. 이후 5년간 교도소에서 복역한 이후 CCM 가수로 변신하면서 교도소 등을 돌며 찬양 사역을 하고 있다는 기사 댓글 달린 기사가 2007년도에 나오면서 피해자들을 다시 분노케 했었다. 후술된 2014년 기사에 보면 그래도 몇 년간은 공연 때마다 자신의 과오를 반성하는 발언은 했다는 듯하다. 물론 이와 별개로 분노의 반응은 당연하며 이 정도로 면죄부를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CCM가수가 된 주인과, 화재현장에서 돈 내고 나가라고 입구를 막았다가 혼자 도망친 명의상 사장은 별개의 인물이니 혼동하지 말 것. 뭐 이놈이나 그놈이나 그게 그거지만... 2013년도까지는 꾸준히 활동한 모양이지만 그 이후 행적은 불분명하다. 기사
반면 호프가 있던 건물주는 참사 이후에도 건물주로서의 책임을 지고 매번 학생교육문화회관 앞 위령비에 가서 피해자들의 넋을 위로해주고 있다. 건물주 본인도 화재 당시 3층 당구장에서 뛰어내려 전치 3개월의 부상을 입었으며, 친구의 조카도 이곳 화재로 인해 희생되었다고 한다.
2011년 SK 와이번스김성근 감독 해임 후 이만수 감독대행이 자리를 메꿀 적, SK 와이번스 갤러리의 갤러들이 통구이 드립을 치자 이에 대항하여 이 사고로 고인드립을 쳤다.
당시 피해자로 전신 3도 화상을 입은 곽은희 씨는 이후 2000년 방송된 그것이 알고 싶다-화상 그 후 편에 등장하여 화제가 된 적이 있다. 한동안은 공부를 위해서 안면성형수술도 하지 않은 채 학업에 전념하여 일리노이 주립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귀국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 방송에서 곽은희 씨는 얼굴을 드러내고 생활하고 있으며 화상 환자들은 전염병을 가진 사람이 아니니 노골적으로 피하지만 말아달라고 호소했다.
2007년 2월 20일에 공개된 당시 신인 가수 SAT의 이게 나예요[12] 뮤직비디오는 이 사건을 소재로 만들어졌으며 호프집 장면 이후에 나온 내용은 '''모두 실제 있었던 일'''이었다고 한다. 업타운이 동년 12월에 발표한 노래 UPT Paradoxxx에서 이 사건을 비판하는 내용이 등장하였으며, 김금희의 소설 '경애의 마음'은 이 사건을 모티브로 하였다.
이 사건이 1981년 인천직할시(현 광역시)가 승격하게 된 이래 인천 지역의 최악의 인명사고이기도 한다. 2위는 9명이 숨지고 6명이 다친 세일전자 화재이며, 번외로 2002년에 있었던 북성동 여인숙 화재 및 매몰 사고와 2015년 강화도에 있었던 캠핑장 화재 사고도 있으며 당시 사망자는 6명, 5명으로 각각 기록되었다.[13]
사고 당시엔 미성년자이면서 호프집에 갔다는 이유로 오히려 학생들을 매도하는 여론도 많았다. 이에 인천시내 15개 고교생 대표들이 이러한 여론 및 교육계, 기성세대를 꾸짖기 위해 성명서를 만들고 토론회 등을 열려 했으나, 인천시교육청은 오히려 이를 저지했다.
한편 이 상가 건물은 수리 후 영업을 하고 있다.[14]
2019년은 참사 20주기가 되는 해[15]이지만 유가족들은 10월 30일 인천 중구청의 지원을 받지 못하고 연안부두에서 팔미도를 가는 유람선에 탑승해서 추모의식을 치러야 했단 안타까운 소식이 전해졌다. 당초 유족들은 30인승 배를 지원해줄 것을 요구했지만 중구청은 자체 행정선이 없어 인천시에 지원을 요청했는데 30인승 이상 행정선은 어로 단속 때문에 지원이 불가해 11인승 배만 줄 수 있다 해서 벌어진 일이었다고 한다. #
2019년 11월 참사 20주기를 맞아 오마이뉴스에서 특별기획 기사들을 냈다.
① "사고 나면 언제나 힘없는 사람들이 희생양" 젊은이 57명 앗아간 참사... 학교는 죽은 아이들을 퇴학시키려 했다
② 이재원 유족회장 "인현동 화재 참사로 기억해야" 질식사한 내 아들... 국가는 20년을 침묵했다
③ 눈물의 배삯 1만2000원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야" 그 부모들은 왜, '뽕짝 춤판' 옆에서 오열했나
④ 고 이지혜양 어머니 "알바생이라며 보상에서 제외" 아르바이트 첫 날 죽은 열여덟 내 딸... 나라가 두번 죽였다
2020년 넷플릭스 드라마 보건교사 안은영에 이 사건을 모티브로 한 설정이 있다. 은영이 학생일 때 사건으로 대사로만 언급되지만, 화재 당시 처참한 모습으로 죽은 선배들이 은영의 눈에 보였다고 한다.

4. 유사 사례


아래 사건들은 유흥주점 화재로 청소년들이 사망한 참사들이다.
  • 대구 향촌동 디스코텍 화재사고 (1983. 04. 19.) - 25명 사망, 67명 부상.

5. 둘러보기




[1] 1위는 대구 지하철 참사, 2위는 대연각 화재사건이다. 대구 지하철 참사가 이동수단 사고로 취급받을 경우 대연각호텔 화재가 건축물 화재 사고 관련 인재 사고 1위가 된다.[2] 본토 한정이다. 신도시쪽과 무관하다.[3] 초기에는 전기 스파크로 인해 노래방 바닥에 있던 시너에 불이 붙은 것이라고 경찰이 발표했으나, 나중에 노래방 아르바이트생들이 청소를 하던 도중 엉뚱한 호기심으로 벌인 불장난이 원인이었음이 밝혀졌다. 참고로 노래방 아르바이트생 중 한 명은 이미 화재 현장에서 불에 타 숨졌고, 나머지 한 명은 체포되었다. #[4]34개 학교, 희생자 중 일부는 중학생들도 포함되었다.[5] 바로 위층인 3층 당구장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이런식으로 대피했지만 사망자는 한명도 없었다.[6] 여기서 말하는 사장은 후술된 CCM가수가 된 실제 사장이 아니라 호프를 운영하는 바지사장이다. 즉 별개의 인물.[7] 화재가 시작된 지하의 노래방도 이 사람이 소유하고 있었다.[8] 언론에 따르면 비밀 수첩에 1998년 말부터 1999년 1월 중순까지 인천 중부경찰서, 파출소 등에 얼마씩을 지출했다는 내용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9] 대한서림 건물 바로 뒤 사거리에서 중구보건소 방향으로 가다보면 건립취지문, 추모조각상+추모시가 있다. 원래 인천학생교육문화회관 터는 축현초등학교가 있던 자리로, 해당 학교는 2001년 연수구 옥련동으로 이전했다.[10] 당시 희생자 중에 인천 구도심권 학교 출신뿐만 아니라 부평, 계산 지역 학교 학생들도 있을 정도.[11] 그런 까닭인지 현재는 이제 인천의 원도심은 관교ㆍ구월동으로 여기고 있으며, 다른 원도심과 다르게 도심 공동화가 매우 심하게 발생하고 있고 이제 인천시민들마저 이 지역은 구도심이라고 부르고 있다. 인천 지하철 1호선의 개통과 이 사건이 맞물리면서 인현동은 상권은 빠르게 몰락해간다.[12] 유튜브에 살아있는 유일한 뮤직비디오. 정식뮤비는 아니지만 심의 문제인지는 모르겠으나 유족들의 방영 금지요청이라는 말이 나돌기도 했다. 내용은 미성년자 음주에 화재로 사망한 실제 이야기에 여주인공이 마지막 자살이라는 충격적인 것.[13] 사망자 6명은 북성동 여인숙 화재, 5명은 강화도 캠핑장 화재 사건이다. 인천 시내 최악의 사고 1등은 1999년에 있었던 인현동 호프집 화재.[14] 네이버 거리뷰 참조. 1층 입구에 노래방 간판이 있는 건물에서 2층(창문에 노래방 간판 흔적이 있는 자리)이 당시 호프집 자리다. 1층은 고깃집, 돈가스집, 연어요리집을 거쳐 치킨집이 들어섰고 2층은 공실(空室)이다. 사고 당시 손님들이 주먹으로 유리창을 깨고 탈출했던 3층 NBA당구장은 사고 이후에도 같은 이름으로 계속 영업을 하다가 폐업했으나 2019년 5월 기준 교회가 들어서 있다.[15] 공교롭게도 그 해에 버닝썬 게이트가 터졌고, 유착 관계 등 여러모로 비슷한 부분이 있어 지역 언론에서는 '세기말 버닝썬'이라고 했을 정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