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랜드 청소년수련원 화재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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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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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6월 30일 0시 30분경에 경기도 화성군(현 화성시)[3] 서신면 백미리의 '씨랜드 청소년수련의 집'이라는 청소년 수련원에서 일어난 대형 화재사고.
야외 수영장 좌측에 있는 터가 화재가 일어났던 장소였다.
당시 KBS 뉴스 9 방송분
당시 MBC 뉴스데스크 자료
화재사건 당시 씨랜드에는 서울 송파구 문정동 소망유치원[4] 원생 42명, 안양 예그린유치원[5] 원생 65명, 서울 공릉미술학원 원생 132명, 부천 열린유치원[6] 원생 99명 및 이월드영어학원 원생 74명, 화성 마도초등학교 학생 42명 등 497명의 어린이와 인솔교사 47명[7] 등 모두 544명이 있었으며 유치원생 19명[8] 을 포함하여 사망자 수 23명[9] 이 희생당하는 대형 참사를 낳았다.
2. 건물 구조
해당 수련원은 1998년 초부터 영업을 시작해 1999년 3월 수련원 인가를 받았으며, 총 부지면적은 11,606m² / 건축면적은 2,576m²로써 A, B, C동으로 분리되었다. 당시 A동은 658m²로 강의실 및 식당, B동은 156m²로 생활관/관리사무실/양호실/휴게실로 각각 이루어졌으며, 특히 화재가 난 C동 건물은 1,762m² 규모로 1층 콘크리트 건물에 2~3층에 컨테이너 52개를 쌓아 외벽은 흰색 목재, 지붕은 샌드위치 패널로 마감된 건물로서 생활관 겸 지도자 숙소로 사용되어 총 59개 객실에 630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
문제는 컨테이너부터 저가 제품을 썼다는 것인데, 해당 컨테이너는 두께 1.6mm 철판으로 열전도성이 강했으며, 그 이음새에 용접도 아닌 실리콘을 바르고 목재나 샌드위치패널 등 인화성 물질로 감싸져 있었고, 화재 경보기는 작동을 멈췄고 소화기도 텅텅 비어 있어 초동진압을 못하게 만들었다.
당시 수련원 대표는 토지 실소유주 김 모, 수련원장은 토지 임대자 박 모 씨가, 영업은 황 모 씨가 각각 맡았다. 게다가 수영장 자리는 원래 양어장 자리였는데, 1987년에 시설주가 양어장을 수영장으로 불법 변경해 벌금을 문 바 있었으며, 1997년에도 무허가 소규모 놀이동산을 차려 장사하다 적발된 바 있었다.
3. 원인
사고 하루 뒤 국립과학수사연구소는 원인 규명에 2~3개월 걸릴 거라고 했지만, 7월 2일에 갑자기 화재의 원인이 모기향 불이었다고 발표했으며 그게 잘못 엎어지면서 가연성 소재로 된 건물 내로 불길이 번지고 매캐한 독가스를 뿜어지면서 피해가 커졌다고는 했다. 이후 법원 판결에서도 모기향이 화재의 원인으로 판단되었다.[10]
하지만 유가족들은 국과수가 사고 3일 만에 철저한 검증 없이 화재원인을 발표한 데에 대한 의구심을 품었고, 7월 6일 한국화재보험협회 실험에서 모기향을 피운 채 이불과 신문지를 놓고 2시간 동안 바람을 불어넣었지만, 불이 붙지 않았다. 7월 9일 MBC <PD수첩>에서도 비슷한 조건으로 실험했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전부터 전기가 들어왔다, 안 들어왔다 했다는 목격 증언으로 보아 전기 누전을 원인으로 보는게 사실에 가까울 거라고 대다수가 입을 모았다. 모기향 화재인 것과 전기누전 화재인 것은 사고 책임소재에서 큰 차이가 있으며, 전자는 모기향을 피운 소망유치원장에게 책임이 전가되고, 후자의 경우라면 관련된 '''공무원'''들 여럿 '''모가지'''다.
한편 유가족들은 사건 발표 다음 날에 분노한 채 국과수까지 갔으나 전의경에 의해 가로막혔고, 수사상황을 알기 위해 화성경찰서까지 갔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7월 23일엔 김종필 국무총리 면담을 요구하며 정부서울청사까지 갔으나 버스째로 견인당했다.
4. 화재 진압
특히 많은 희생자가 난 이유 중 가장 큰 원인은 사고지역이 무선통신 난청지역[11] 이라 '''신고가 늦었다는 점.''' 오산소방서에 신고가 접수된 건 '''사고 1시간 후였고''' 게다가 소방서에서 씨랜드까지의 거리는 '''70㎞'''나 돼서[12] 고속도로에서 질주를 해도 40분은 잡고 가야 하는[13] 긴 시간이 걸렸다. 또한 고속도로처럼 선형 좋은 도로도 40분인데, 사고가 난 곳은 농어촌지역 산길에다가 선형도 안 좋았으니 제 아무리 소방차가 신호 다 무시하고 달리고. 새벽이라 교통량도 적었다 한들 가는 데 당연히 시간이 엄청 걸리는 건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고, 게다가 당시 일부 도로에 수련원 측이 사유지라 주장하며 쳐놓은 철조망 및 쇠말뚝 등이 있어 출동에도 애를 먹었다.
화재 발생과 동시에 소방차가 출동했다고 쳐도 결국 화재 발생 후 40분 이상 지나고 나서야 도착하게 되었다.[14] 관련기사 결국 동원된 소방 인력만 553명[15] 에 소방차 등의 차량도 67대가 넘게 동원됐지만 유독가스와 화염, 건물 붕괴 위험 등으로 화재진압과 인명구조에 큰 어려움을 겪었고, 끝내 어린이 19명을 포함한 23명은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5. 피해가 급증한 이유
이렇게 된 이유는 그 18명의 소망유치원생들은 씨랜드 3층의 한 개 방에 다 같이 자고 있었는데, 불길이 급격히 번진 데다 인솔교사들이 무책임하게 대응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는 게, 해당 유치원의 인솔교사들은 그 유치원생들이 자는 반대편 방에서 투숙 중이었다는 것이며 최초 발화지점도 거기였고 심지어 '''비치된 소화기는 쓰지도 못했고 객실 내 화재경보기마저 고장나 있었던 터라''' 어린이들은 불길을 빠져나오지 못하고 그대로 목숨을 잃었다.
아이들이 몰려 자고 있었던 방에 인솔 교사가 하나라도 있었다면 아이들을 대부분 살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교사가 같이 자고 있던 방 아이들은 무사히 나올 수 있었겠지만 인솔 교사의 대부분은 밖에서 '''불을 피워두고 삼겹살과 소주를 먹고있었던 터라''' 불이 났어도 술에 취해 대부분의 교사들이 제대로 대응을 할 수 없었던 건 당연지사다. 이 때 술을 마시지 않았던 초등학교 교사 한 명과 레크리에이션 강사 세 명이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불길 속으로 몸을 던졌다가 변을 당한 비극도 있었다. 그리고 3층에서 투숙했던 소망유치원 외에도 2층에서 투숙했던 부천 이월드영어학원에서도 유치원생 1명이 희생되었다.
게다가, 수련원 측은 운영 과정에서 시공 및 감리회사 관계자들에게 뇌물을 먹였으며 화성군 공무원들은 이를 묵인, 비호하였고, 충격적이게도 '''김일수 화성군수가 불법 운영에 개입하기까지 했다.'''
그렇게 뇌물을 먹였으니 씨랜드의 건물은 불법적인 구조로 운영을 할 수 있었고, 안전검사 또한 무시할 수 있었다. 콘크리트 건물 1층 위에 컨테이너 52개로 가건물을 조합해서 운영하고 있었다. 게다가 건설비와 운영비 절감을 위해 '''가연성 소재'''로 인테리어를 했다. 이러니 불이 나면 쉽게 번지고 이 과정에서 유독가스까지 추가로 발생한 것이다. 그리고 그런 불법 구조 탓에 소방차가 밖에서 물을 뿌리더라도 건물 안으로 제대로 들어가지 않게 되었다. 덧붙여서 컨테이너로 만든 건물이었던데다, 화재로 컨테이너 자체가 많이 약해져 있어서 물이 있어도 물을 뿌리기도 힘들게 되었다.[16] 그리고 위에서 기술했었지만, 소화기나 화재경보기 등의 방화(防火)시설 점검도 뇌물을 받았으니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심지어 당시 정부 역시 책임 대상으로 거론됐는데, 1998년 김대중 정부 출범 후 범정부적 차원에서 '규제 완화'를 실시하면서 건축물 관련 법령이 느슨해졌고,[17] 이것이 위법행위를 키운 요인 중 하나이다.
게다가 청소년 수련활동이란 건 초중고생 대상이라 유치원생은 제외하는 게 원칙인데[18] ,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소망유치원은 참사 전날 서울강동교육청이 개최한 '여름방학 생활지도를 위한 원장회의'에서 유아 숙박수련활동 금지를 시달받았는데도 합숙을 강행했다.
6. 수습 과정
피해자들의 상당수가 체격이 작고 골격이 아직 굳지 않은 유아들이라서 거센 불길로 인해 시신의 상태가 안 좋아 국과수 측이 신원확인에 두 달이나 걸릴 거라 예상했지만, 치아 대조 및 유전자 감식, 병원 진료기록 확인 등으로 닷새 만에 완료되었다.
반면에 소망유치원생이 묵었던 301호의 맞은편에서 자고 있던 마도초등학교 학생들이 대피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묵고 있던 두개의 방에 각각 한명씩 인솔교사가 같이 묵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도초등학교 측 인솔교사는 불이 나자 침착하게 학생들을 대피시킨 뒤 다시 들어가 다른 어린이를 구조한 덕분에 몇 명의 어린이가 더 목숨을 건졌다. 후에 두 인솔교사는 탈진해 쓰러졌고, 소방관들이 한명을 구조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김영재 교사(당시 38세)는 이미 숨을 거두었다. 이 외에 레크리에이션 강사 서태용(당시 21세), 채덕윤(당시 26세), 박지현(당시 23세)도 아이들을 구하러 갔다가 모두 목숨을 잃었다. 이들은 영결식 때 정부로부터 의사자로 인정받았다.
이 두 교사와 세 젊은 강사들의 희생이 아니었으면 씨랜드 참사는 23명 이상의 피해로 번질 수 있었다.[19] 그러니 소망유치원 교사들은 이와 비교돼서 가루가 되도록 까여도 마땅하다.관련기사
당시 화재가 다 진압되고 소방관들이 유치원 아이들이 갇혔던 방에 도끼로 문을 깨고 강제로 들어갔을때, '''문에는 손톱으로 긁은 자국이 수없이 있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소방관은 유치원생인 어린이들이 느꼈을 공포를 자신도 느꼈다고 했다.
7. 사고 이후
사고 발생 후 유치원/초중고 학생, 부모, 교사들 사이에서 여름캠프 기피현상이 만연해졌다. 당시 전국 유치원 대다수는 7월부터 예정됐던 1박 2일 여름캠프를 취소/보류하고 이듬해부터 당일 캠프 등으로 바꾸게 되었다. 언론 역시 선진국 수련시설 안전사례 및 불량 사설수련원 실태 등을 보도하여 정부와 관계기관의 각성을 촉구하였다. 이에 따라 행정당국은 청소년보호정책을 강화해 건축법 및 소방법을 개정하여 수련원 건축자재를 난연재로 하는 등 후속조치를 마련하였다. PC통신과 인터넷 등지에도 추모 분위기가 형성되어 '씨랜드참사 희생자 유족회'란 홈페이지가 개설되기도 했다.(다른 페이지)
경찰은 조사 과정에서 씨랜드-화성군청 간 온갖 비리 사실이 있었음을 밝혀냈고 이에 전국적으로 여론이 폭발했다. 사고 어린이들의 부모들은 2001년 3월 23일 화성시에서[20] 씨랜드청소년수련의집 화재사고 사상자 보상금 지급 조례가 통과되면서 보상금을 받게 되었지만 어린이들의 생명은 그 어떤 것으로도 갈음할 수 없었다. 여자하키 종목으로 1988 서울 올림픽에서 은메달, 2번의 아시안 게임에서 2개의 금메달까지 땄었던 김순덕 전 여자 하키 국가대표 선수는 이 사고로 아들 도현이를 하늘나라로 떠나 보낸 후 4개월 만에 인천에서 화재 사고가 또 나자, 정부의 무책임한 수습에 환멸을 느껴 그동안 받았던 훈장을 모두 정부에 반납한 뒤, 대한민국 국적을 포기하고 뉴질랜드로 영구이민을 갔다. (그 해 8월에 가졌던 인터뷰)
그 외에도 사고 희생자들의 부모가 생업을 포기하는 경우가 속출했다고 한다. 2009년 보도에 따르면 희생자 18명 가족들 중 13명의 가족들은 희생된 자식들의 동생을 낳았고, 2016년 SBS 비디오머그에 따르면 생존자 중 PTSD로 고생하는 이들도 있다.
희생자들 유해는 국립과학수사연구소로 이송되었고, 분향소는 서신면사무소 3층 회의실 및 서울강동교육청에 차렸다가 8월 7일에 올림픽공원에서 합동 영결식을 엄수한 후[21] 다음날 아침에 사고 현장 반대 방향인 동해에 유골이 뿌려졌다.[22] # 2001년에 서울 마천동 어린이안전공원 내에 추모비가 세워졌다.
해당 시설 건축주 겸 수련원장 박씨를 비롯해 공무원, 화성군수까지 구속 영장이 신청되었고[23] , 사건 당일 술을 마셨던 인솔 교사들도 모두 구속되었다. 부지 소유주 김씨는 불구속 입건되었다.
최고 책임자 김일수 전 화성군수는 이 사건으로 인해 군수직에서 사임하였으나, 무혐의로 풀려난 뒤 지금도 지역유지로 잘 산다. (2005년 인터뷰). 그리고 한 때 경찰에서 몇번이나 검찰에 기소요청을 했지만 모두 기각당했으며, 더욱 무서운 것은 화성군수가 조사받던 중 쓰러져서 병원에 입원하자 화성군수님을 보호하겠다는 화성농촌문제 연구회와 지역 4H 소속원들이 주축이 된 지지자 300명이 몰려가서 병실을 지키면서 기자들을 내쳤다. 또한 "씨랜드 사건이 비극이기는 하지만 군수님에게 모든 비난을 돌리는 것은 옳지 않다" 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반면 씨랜드 원장 박씨는 1심에서 징역 2년 6개월 및 금고 5년, 전 소망유치원장은 금고 5년이 각각 선고됐다. 이후 이들은 각각 징역 1년과 금고 4년으로 감형됐다가 2001년에 출소했다.
화성 동부(병점, 동탄, 봉담 등)에 비해 상대적으로 개발이 늦고 소외되어 있는 서부 지역에서 일어난 이 사건은 주목이 덜 되는 편이다. 게다가 한달 후 신창원 사건 및 임창열 경기도지사 뇌물사건 등으로 관심이 금방 줄었고, 일부 언론과 국민들 사이에서 '보상금 더 받으려고 질질 끈다'며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경우도 있었다. 이 사건에 관련해 인허가를 담당했던 공무원 이모씨도 고초를 겪었다. 당초 해당 인허가 신청을 접수한 담당 공무원 이모씨는 실사결과 컨테이너를 얹은 부실하고 취약한 형태의 건물이라 허가를 내주지 않았는데 이후 씨랜드쪽의 갖은 회유와 협박에 시달린 것. 이모씨의 상급자들도 빨리 허가를 내주라고 압력을 가했고 나중에는 조폭까지 동원해 협박했다고... 또 씨랜드 회장인 박모씨는 "니까짓게 군수도 아닌데 시키는대로 하지 말이 많냐"라든가, "안 되면 안 되는 법을 찾아오라" 등의 폭언을 행사하는 바람에 결국 이모씨는 다른 민원부서로 옮겨야 했고 허가는 속전속결로 진행되었다.
해당 공무원은 이러한 전말을 비망록에 남겨 양심선언했으며, 나중에 씨랜드 사건이 터지고 수사를 받으면서 이 비망록이 관계자 처벌에 결정적 기여를 했지만 결국 상급 공무원들이 그 건으로 줄줄이 사법처리를 받게 되자 조직내에서 내부고발자라는 냉대를 받으면서 그 다음해에 쓸쓸하게 명예퇴직을 하게 되었다.(관련기사) 말이 명예퇴직이지 거의 해임된 거나 마찬가지. 퇴직 이후 그녀는 인터뷰에서 '참 공무원'이 아니라 스스로를 '어린 생명을 잃게 만든 죄인'이라 생각하며 평범한 엄마로 살고 싶다고 말했다. 결국 제대로 된 원인 및 진상규명 없이 1999년 8월 10일, 유가족들은 배상책임 대상에 대한 배상/보험청구권을 경기도 및 화성군청에 위임하는 등으로 합의하고 말았다.
사고 이후에도 샌드위치 패널을 쓰고 소방시설이 미비한 일부 불량 청소년수련원이 법망을 피해 아직도 존재했으며, 창고 등 타 건물도 샌드위치패널 등 내장재 관련 법안에 손을 대지 않았고, 결국 이로 인해서 4년 후 대구 지하철 참사와 천안초등학교 축구부 합숙소 화재참사, 청도 버섯공장 화재, 2008년 이천 냉동창고 화재 사고 등이 발생하자마자 그제서야 건물 및 차량의 내장재가 불연재 또는 난연재로 바뀌게 되었고,[24] 2005년부터 제정된 '청소년활동진흥법 시행령'에 따라 청소년수련원에도 샌드위치패널을 건축자재로 쓰지 못하게 하고 있다.[25] 만약에 정부가 내장재 관련 법안에 손을 대는 행위로 외양간이라도 고쳤다면 더 많은 생명을 잃는 사건은 발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한편 이 참사로 인해 7살 쌍둥이 딸[26] 을 한꺼번에 잃은 유가족 대책회장 고석 씨는 2006년 <안전교육이 유아의 안전능력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주제로 서울시립대에서 석사학위를 받았고, 2000년 한국어린이안전재단을 설립해서 대표로 활동하고 있으며, 그 뒤 안전문화 유공자로 인정받아 2015년 국민포장을 받았다.
참사 이후 2004년경까지 1층만 남다가 이후 철거되어 빈 터만 남았고, 2011년 8월 17일 씨랜드 부지 옆에 불법 휴양시설이 운영 중이라는 기사가 나왔는데 '''소유주가 화재사건 당시 씨랜드 부지 임대자이자 시설 운영자와 동일인'''으로 드러나 논란이 되었다.[27] 당시 임대자 박씨는 2014년 경향신문 인터뷰에서 "땅을 팔려다가 팔지 못해 장모 등이 도와 차려준 것"이라고 밝혔다. 어찌 됐건 이후 해당 시설들은 철거되었으며, 철거 직전에 KBS2 <1박 2일> 시즌3 풍도편을 촬영하기 위해 찾아간 바 있었는데, 담당 연출자 유호진 PD는 5월 8일 인터뷰에서 "해당 시설은 1시간 동안 멤버들이 집결해 체류했으며, 사전조사가 부족했다"고 해명했다.
2017년 6월 30일 18주기 추모식 때 채인석 화성시장이 참사현장 터에 추모공원을 만들 계획을 설명했다. 하지만 2019년 6월 26일 언론보도에 따르면 잡초가 무성하다고 한다.
8. 유사 사례
아래는 샌드위치 패널 등 가건물에서 일어난 화재사고들을 서술했다.
- 2001년 대구 성서공단 화재사고
- 2002년 서천 금매복지원 화재사고
- 2003년 충남 천안초등학교 축구부 합숙소 화재사고
- 2003년 청도 대흥농산 버섯공장 화재사고
9. 영향
H.O.T.의 4집 타이틀곡 'I Yah!'가 이 사건으로 희생된 아이들을 추모하기 위해서 만들어졌다. 이 노래는 이후 2014년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 때 재조명되었다. 1999년 콘서트 때는 오케스트라와 밴드와 합동공연으로 마지막 곡으로 부르게 되었으며 초반 인트로에 이 사건 관련 뉴스 클립들이 쓰였다.
2001년 4월 11일에 발매된 자전거 탄 풍경의 1집 앨범 중 10번 트랙 '담쟁이 넝쿨별'도 이 사건으로 희생된 아이들을 추모하기 위한 곡이다. 부제부터가 '씨랜드에 잠든 어린이들을 위해' 이다.
한국119소년단에서 개최하는 소방동요제의 출품작인 <하늘나라 천사에게> 역시 이 참사로 희생된 아이들을 추모하기 위한 곡이다. 노래듣기
소설가 하성란 작가도 창작과비평 2001년 봄호에 '별 모양의 얼룩'이란 단편을 발표하면서 해당 사건에 대해 다루었다. 담담한 어투로 써내려간 수작이니, 읽어보면 도움이 될지도. 이후 소설집 '푸른 수염의 첫번째 아내'에 수록되었다.
2009년 MBC 수목드라마 혼에서 극 초반 이 사건을 모티브로 한 스토리가 전개되었으며 극 중에서는 여주인공 윤하나(임주은)가 어린 시절 화재가 발생한 수련원에서 또래 아이들을 모두 잃고 혼자 살아남은 후 불에 트라우마를 가진 여고생으로 나온다.[28]
10. 관련 문헌
- 씨랜드 청소년수련의 집 화재사고 백서(1999, 경기도): 해당 백서에 화재원인이 '모기향으로 인한 화재'로 되어 있어 유족들이 크게 반발해 2000년 4월에 자체 백서를 냈다.
- 이제는 해가 솟는 넓은 세상에서 살거라: 엄마와 아빠들 저. 넷서스. 2000. 해당 참사로 자식을 잃은 부모들이 쓴 문집이다.
- 다음 스토리펀딩 <재난참사 없는 대한민국을 꿈꿉니다> 5화(이후 책 '재난을 묻다'로 출판)
11. 둘러보기
[1] 국과수와 대법원의 결론.[2] 인솔교사 1명, 레크레이션 강사 3명 포함.[3] 시 승격은 2001년에 했다.[4] 서울특별시교육청에 의해 당일 폐원 조치되었으며 현재는 일반 상가로 존재하고 있다. 이 건물에는 소망유치원의 간판 자국이 남아있다.[5] 동안구 호계동(경수대로 653) 위치. 현재 예그랑유치원으로 개칭.[6] 송내뉴서울아파트(경인로 53번길 46)에 위치, 현재도 운영 중이다.[7] 당연히 상기 유치원들을 다 합쳐서 47명이다.[8] 희생된 유치원생 중 18명은 소망유치원생이었으며 나머지 1명은 2층에서 투숙했던 다른 유치원 원생이다.[9] 나머지는 인솔교사 1명과 레크레이션 강사 3명.[10] 출처: 2000도1858. 실제 사고 뒤에 충남 천안 농가에서도 모기향 때문에 불이 나 인명피해가 났다.[11] 이때는 아직 핸드폰 보급 초창기라 통화가 안 터지는 음영지역이 많았다.[12] 어째서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었냐면 당시 오산소방서에서 화성군까지 다 맡았기 때문. 원래 오산은 화성군의 중심지였고, 당시 화성군청도 오산시에 있었으나 오산은 화성의 동편에 치우쳐 있었다. 사고 장소는 화성에서도 서쪽 끝인데다 직선거리로도 30㎞ 이상. 가장 가까운 파견소(현재의 119지역대)는 9km 거리에 있었으나 정규 소방관이 1명밖에 없었다. 지금도 인력부족에 고통받는 소방인데 1999년에는 오죽했을까.[13] 사고지점과 현재 화성소방서 본부가 위치한 향남읍 기준으로도 30분정도가 걸린다.[14] 게다가 소방서 소속 차량이 노후 차량이었던 관계로 출력이 낮아 제 속도를 낼 수 없었다.[15] 소방관 249명에 공무원 200명 등등... 경찰도 50명 이상이 동원되었다.[16] 소화기의 강력한 수압에 건물이 붕괴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결국 불타는 도중에 2층 컨테이너가 일부 주저앉았다.[17] IMF 외환위기 직후여서 국내 경제가 매우 안좋았기에 경제를 조금이라도 살려보자는 생각에서 했던 거다. 그러나 당장의 경제회복에 주안점을 두다보니 꼭 필요한 규제들까지 경제살리기의 대의명분하에 완화되어 버렸다.[18] 사실 초등학교도 저학년은 수련활동을 잘 안 한다.[19] 후에 김영재 교사의 출신고교인 목포고등학교와 마도초등학교를 주축으로 장학활동 등 김영재 교사를 잊지 않기 위한 활동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으나 현재는 확인되는 것이 없다. 현재 목포고등학교에서는 추모비를 건립하고 매년 추모행사를 통해 고인을 기린다고 한다. 다만 그 학교에 다녔던 사람의 말로는 그 선생의 추모비는 없다고 한다.[20] 당년도부터 시로 승격되었다.[21] 반면 김영재 교사 영결식은 마도초 교정에서 거행됐다.[22] 예외적으로 김영재 교사와 채덕윤 강사는 용인공원묘지와 수원공설묘역에 각각 안장되었다. 이후에도 매년 추모식이 끝나면 유족들이 아이들의 넋을 달래기 위해 아이들의 유골이 뿌려진 동해로 갔다. 10주기 당시 동해에 찾아갔던 기사 다만 15주기인 2014년의 경우는 세월호 참사 등을 고려해 생략했다고 한다. #[23] 다만 이 관련 혐의로 잡혀갔지만 그 부분은 무혐의가 되었고 다른 비리 혐의로 구속영장이 신청되었다.[24] 그러나 똑같이 불연재라 해도 해외에서 주거용으로 사용 불가능한 유기단열재(스티로폼)가 한국에서는 주거용 시장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다. 해외에서는 일반적으로 주거용 건물은 내화성능이 다소 낫고 연소 후에도 잔재가 남아 붕괴 위험성을 줄이는 유리섬유를 사용한다.[25] 그러나 해당 법률은 2005년 이후 건물에만 적용된다.[26] 사건 당일이 쌍둥이의 생일을 '''불과 사흘 앞둔 날'''이었다.[27] 해당 부지 실소유주는 당시 씨랜드 대표와 이웃인 김모씨이다.[28] 그 뒤 동생인 윤두나(지연)도 작중 초반 학교 일진들이 일부러 불을 질러 화재가 난 건물 안에 갇혀 생을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