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연각호텔 화재
[clearfix]
1. 개요
1971년 12월 25일에 서울특별시 중구 충무로동의 '대연각(大然閣) 호텔'[3] 에서 발생한 '''대한민국 최악의 화재 사고.''' 세계 최대의 화재 사고들 중 하나이며, 호텔 화재 중에서는 단연 최대 사고. '''총 사망자 166명[4][5] (추락사 38명)''', 부상자 68명, 실종 25명이 나왔다.
사건 당일은 크리스마스였기 때문에 호텔에 수많은 인파가 몰려있었던 상태라 엄청난 사망자가 발생했다. 사건에 휘말린 인물들 중에는 주한 대만 대사관 위셴룽(余先榮) 공사[6] 같은 귀빈도 있었다. #1, #2 11층에 묵고 있던 공사는 10시간 만에 구조되었고 그를 구조한 소방 대원들은 전원 1계급 특진했지만, 안타깝게도 공사는 화재 당시 호흡기에 중화상을 입어 투병 끝에 1972년 1월 4일 사망하였다.
2. 사건 경위
오전 9시 50분경 1층 커피 숍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원인은 프로판 가스 폭발이었다. 카운터에는 프로판 가스 화덕이 있었는데 사고 당일에 예비용으로 20kg 짜리 프로판 가스통이 하나 더 있었다. 이 예비 용기의 가스를 잘못 방출시켰거나, 혹은 가스가 샌 상태에서 화덕으로부터 그 가스에 불이 옮겨 붙은 것으로 추측된다.
불길은 시작되자 마자 계단을 막아버려서 사람들이 아래로 내려오질 못했다. 엘리베이터는 말할 것도 없고, 한 시간 반만에 21층 건물 전체가 불길에 휩싸였다.
불이 이렇게 빨리 번진 이유는 하나인데 '''빌딩의 내장재가 온통 가연성 물질로 가득했기 때문이다.'''[7] 벽을 한지로 발랐고, 인테리어는 목재를 많이 사용했다. 객실 문도 목재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옥외 비상구를 커녕 안전 대책은 전무해 많은 사망자를 냈다. 사실상 '''안전 눈감은 압축 성장이 부른 참사'''로 기록된다.[8]
당시 호텔 주변에는 5층 내외의 낮은 건물이 바짝 붙어있었기 때문에 그나마 낮은 층에 있던 사람들은 위험을 감수하고 옆 건물 옥상으로 뛰어내리거나, 커튼, 침대 시트 같은 걸 뜯어서 줄을 만들어 타고 내려오기도 했다.
문제는 대연각 호텔이 당시 한국에서 드문 고층 건물이었다.[9] 또한 21층이면 2010년대 기준의 평범한 아파트(평균 15층)보다도 더 높다.
탈출하지 못하는 고층 사람들은 창가에서 구조를 기다리기도 했다. 생존자보다 사망자가 더 많았던 화재사고였지만 그 와중에 생존자들도 꽤 있었다. 당시 호텔 안에 약 300여 명이 있었는데, 이들 중 110여명은 목숨을 건졌다. 대표적으로 7층에 있던 한 종업원은 복도에서 연기 냄새를 맡고, 객실의 사람들을 전부 깨운 다음 옆 건물 옥상으로 피신시켜 손님과 종업원 50명을 모두 무사히 탈출시키는 영웅적인 행보를 보였다. 그리고 8층에서 침대 시트를 뒤집어쓰고 뛰어내려 다행히 발목 부상만 입고 기적적으로 살아난 여성도 있었다.[10] 그러나 사고의 결과가 워낙 비극적이었기에 소수의 영웅적인 모습이나 행운 등을 크게 거론할 분위기가 되지 못했다.
[image]
9.11 테러 당시 세계무역센터에서 탈출하려던 사람들처럼 건물 바깥으로 무작정 뛰어내린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화재로 사람들이 고립된 위치는 최하 6층부터였다. 즉, 맨몸으로 뛰어내려 살아남을 수 있는 높이가 아니었다. 그래서 화재 당시 건물 주변에는 추락사한 사람들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고 한다. 사실 대부분 사망자들의 사인은 추락사 아니면 연기에 의한 질식사였다고 한다. 침대 매트리스를 안고 뛰어내린 사람들도 있었는데, 이들 중에서 생존자가 있기는 했지만 사망한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대피가 어려웠던 이유는 빌딩 내부의 계단이 방화문이 없는 개방형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 계단이 유사시 비상구 역할을 하지 못하고 오히려 불이 번지는 통로 역할을 했다. 엘리베이터 역시 불이 나자 그대로 멈춰버렸다. 비상계단도 별도로 없었고 '''스프링클러 같은 소화장비도 없었다.'''[11]
또한 대연각 빌딩은 불이 난 호텔뿐만 아니라 옆쪽에 오피스 빌딩도 같이 붙어있는 구조였는데, 이쪽으로 통하는 '''비상구가 대부분 잠겨 있었다.'''[12] 옥상으로 통하는 문도 잠겨 있었다. 실제 진화 후에 20여 구의 시체가 이 옥상 출입구에서 발견되었다. 그야말로 대피할 통로가 다 막혀버린 상황.
3. 화재 진압
가장 가까운 소방서와 대연각 호텔의 거리가 700m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13] 소방서의 초기 출동은 매우 빨랐다. 소방관 528명, 의용소방대원 113명, 경찰 750명, 구청 직원 400명, 군인 115명, 의료반원 30명의 엄청난 숫자의 인원이 화재진압에 동원되었고, 주한미군까지 가세해서 미 8군 소방대도 출동했다.
그러나 당시 국내에 몇 대 없던 고가 사다리 차량은 최대 7층 높이밖에 안 되었고(현장에 출동한 것은 32m 1대와 15m 4대가 전부였다.), 따라서 8층 이상에 있던 사람들은 꼼짝없이 죽음만을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었다. 궁여지책으로 사직동 소재 국궁 양성소인 황학정의 궁사들을 불러서 화살에 로프를 묶어 쏘게 했지만, 화살이 로프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여 무용지물. 게다가 화재 규모가 여간 엄청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완전 진압에는 7시간이나 소요되었다. 화재 자체는 이미 5시경에 다 진압되었지만 남아있는 열기 때문에 7층 이상의 접근이 불가능했기 때문. 시체 발굴 및 수습에도 18시간이 소요되었다.
4. 기타
- 당시 여당인 민주공화당은 언론과 여론이 모두 대연각에 쏠려 있던 12월 27일 새벽 3시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국보법)을 날치기 통과시켰다. 재난을 이용하여 독재체제를 강화했다는 점은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과 같다.
- 대연각빌딩 터는 이미 화재를 두 번 겪은 전력이 있었는데, 1947년 서울만물전(구 히라다백화점), 1959년 고미파 캬바레가 그 예였다.
- MBC 뉴스데스크가 방영을 시작한 지 1년 남짓 된 시기였다. MBC 보도국에서 ENG와 중계차를 화재 현장에 급파해[14] 전국에 생중계하며 주목을 받았다.[15] 생중계 방송이 처음 시작된 사건이라고 한다. MBC 뉴스데스크가 잡아낸 최초의 특종일지도. KBS, TBC 등 기타 방송국들도 이 화재를 집중 보도했다.
- 이 사건은 뜬금없이 한국 천주교 역사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사고 10시간 전 자정에 명동성당에서 KBS 생방송[16] 으로 열린 성탄절 자정미사에서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이 박정희의 장기 집권을 경고하는 강론을 하는걸 박정희가 직접 시청하는 바람에[17] 자칫하면 정치적으로 문제가 커질뻔 했다. 그러나 다음날 이 사건에 묻혀서 흐지부지되었다.
- 대연각은 한자로 썼을 때 '大然閣'인데, 이게 '大燃(크게 불사르다)' 아니면 '大煙(큰 연기)'와 같은 음이라[18] 음차를 이용한 풍자가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 시사만화 《고바우 영감》에 나왔었다. "대연(燃)각이 탄다", "대연(煙)각이 연기 속에", "대연(軟)각이 앙상해졌네"(…)라는 식.[19][20] 이후 '화재를 부르는 이름으로 지은 게 화근이었다!' 라는 식의 블랙 유머도 성행했다.
- 이 사고 이후로 모든 대형 건물에 스프링클러 화재 진압 시스템 의무 설치, 고층 건물 옥상 헬리패드 확보가 법률로 의무화되어 시행되었다. 당시 대연각엔 헬리패드[21] 가 없었다. 공군은 물론이고 육군 항공대, 미8군의 헬기에 대통령 전용 헬기까지 동원되었는데 헬기들 자체는 화재 신고 후 1시간도 안 되어 도착했지만 그것을 이용한 구조가 어려웠고, 구조 중에 2명이 추락사 하기도 했다.[22] 참고로 화재시에는 상승기류가 매우 강해지기에 헬기의 안전한 비행이 어렵다. 아래 사진의 CH-53은 조종사와 승무원들이 정말 목숨을 걸고 한 구조라 할 수 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사다리차 등 소방 장비의 물적, 양적 발전이 이루어진다.
- 이 화재 사건 때 살아남았던 한 20대 여성이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얼마 뒤 대왕코너 화재사고 에 휘말려서 생존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 외에도 할리우드 재난 영화 《타워링》이 이 사건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고 알려졌지만, 증명된 직접적인 관계는 없다. 다만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있다. 자세한 것은 타워링 문서 참고.[23] 참고로 사진 속 헬리콥터는 주한미군 소속의 구조헬기인 S-61R Jolly Giant다.
- GS칼텍스 측도 가장 비극적인 사건으로 꼽는데, 호남정유 시절 해당 건물에 본사를 둔 터라 같이 피해를 봤다. 이 사고로 심상웅 총무이사[25] 등 임직원 4명이 숨지고 보관 중이던 각종 계약서와 주요 서류 대다수가 전소되는 등 인적/물적 피해를 입었다. (당시 임직원들의 증언)[26]
- 사고 4년 후인 1975년에 이강학이 이끄는 해외산업이 (주)빅토리아호텔을 인수하면서 호텔로 영업했던 11층 이상의 구역도 전부 사무실용으로 바꾸는 등 전면적인 리모델링을 거친 후, 빌딩 이름도 고려대연각타워로 변경하여 재개장했다. 현재도 빌딩으로 쓰이고 있다. 덧붙여 1969년에 완공되었으므로 50년이 넘은 건물이다. 아울러 운영법인도 '대연각관광(1976)', '대연각물산(1978)'을 거쳐 1982년부터 '고려통상'으로 명칭을 바꾸어 존속중이다.
- 외벽 쪽으로 비상계단이 있는데, 특이한 점은 창문 없이 철창이 달려있다. 건물 한쪽 벽에 구멍이 뻥 뚫린 셈인데, 화재에 대한 트라우마 때문으로 보인다. 또한 트라우마 때문인지 오래된 건물이라 그런 건지 알 수 없지만, 계단으로 통하는 문은 손잡이와 잠금장치가 없고 그냥 밀어서 연다.[27]
- 2010년 2월 27일에 여기서 또 화재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옥상 냉각탑 교체 도중 발생했다. 다행히 이 화재는 20분 만에 진압되었다.
- 전세훈의 괴작 관상 찬양 만화 《신의 가면》 6권에서는, 이 사건이 방화범이 저지른 짓이라는 설정을 진실인 양 써대고 있으며, 이 방화범의 아들이 커서 맨 손으로 사람의 얼굴을 녹여버리는 초능력자가 된 것으로 그리고 있다.
- 여담으로 《돌아와요 부산항에》의 원곡인 《돌아와요 충무항에》의 작사자인 김성술이 이 화재로 사망했다. 나중에 그의 어머니가 표절사실을 알아내서 소송을 제기했으며, 결국 합의금을 받았다.
- 2017년 8월 6일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는 1977년 제1회 MBC 대학가요제에 등장했던 《젊은 연인들》이라는 노래의 사연에 대해 다루었다. 훜스라는 듀엣그룹을 결성하여 활동하던 방희준이 작사, 민병무가 작곡한 곡으로 노래가 히트를 치기도 전에 두 사람이 대연각 화재사건으로 사망했으나, 사고 6년 후 작곡자의 동생(민병호)과 친구 두 명(정연택, 민경식)이 서울대트리오로 대학가요제에서 이 노래를 불러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 13년 뒤인 1984년 1월 14일에는 부산 대아관광호텔에서 화재가 발생했고, 46년 뒤에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원인으로 화재가 발생했다.
5. 유사 사례
- 와인코프 호텔 화재사고 (1946. 12. 07)
- 키쿠후지 호텔 화재사고 (1966. 03. 11)
- 반코호텔 화재 사고 (1969. 02. 05)
- 애리조나 파이어니어 호텔 화재사고 (1970. 12. 20)
- 뉴 남산호텔 화재사건 (1974. 10. 17)
- 대왕코너 화재사고 (1974. 11. 03)
- 뉴타운관광호텔 화재 사고(1차) (1979. 01. 08)
- 뉴서울호텔 화재 사고 (1979. 02. 07)
- 서울 라이온스호텔 화재 사고 (1979. 04. 22)
- 뉴타운관광호텔 화재 사고(2차) (1979. 10. 05)
- 서울 쉐라톤워커힐호텔 더글라스별관 화재 사고 (1982. 03. 30)
- 호텔 뉴재팬 화재 사고 (1982. 02 .08)
- 대구 금호호텔 화재 사고 (1982. 12. 29)
- 부산 대아관광호텔 화재 사고 (1984. 01. 14)
- 우신골든스위트 화재 (2010. 10. 01)
- 런던 그렌펠 타워 화재사고 (2017. 06. 14)
- 제천 스포츠센터 화재 사고 (2017. 12. 21)
- 교토 애니메이션 제1스튜디오 방화 사건 (2019. 07.18)
6. 둘러보기
[1] 실종자 사망 처리.[2] 주로 시신이 없으며 사망이 인정되지 않은 경우이다. 이는 대규모 화재, 추락 등의 상황 속에서 시신이 완전히 유실되어 사망도 확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현재는 52년이 지났으므로 사망으로 처리되었다.[3] 운영법인은 극동그룹 계열 (주)대연각호텔(현 고려통상)이었으며, 당시 해당 건물은 호텔 겸 오피스텔이기에 선경그룹, 호남정유, 극동건설 등도 입주했다.[4] 외국인은 16명으로 일본 10명, 중국 3명, 미국/인도/터키 각각 한 명[5] 실종된 사람까지 집계하면 총 191명이 나온다.[6] 1971년 당시는 한중수교 이전이었고 중국이 '중공'으로 불렸고 대만이 '자유중국'으로 불렸기에 '중국공사' 직함으로 불렸다.[7] 32년 뒤인 2003년에 일어난 대구 지하철 참사, 2019년에 일어난 교토 애니메이션 제1스튜디오 방화 사건에서도 가연성 내장재 때문에 일이 커졌다.[8] 후술하겠지만 원인의 원초적인 제공으로 비판받는 당시 여당인 민주공화당은 이러한 비판 속에서도 언론과 시민들의 관심과 걱정이 대연각으로 몰린 틈을 타 독재를 연장하는 국보법을 날치기 통과했다.[9] 1967년 10월 20일 기공, 1969년 8월 25일 개관. 시공업체는 극동건설이다.[10] 하지만 사람의 경우 머리의 무게가 워낙 무겁기 때문에 떨어지게 되면 머리쪽부터 떨어지게 되어있다. 저런식으로 침대 시트를 들고 뛴 사람들중에 상당수는 그게 아무 소용도 없었고 시트를 놓치면서 머리부터 떨어져 즉사했다.[11] 이 때문에 미국의 와인코프 호텔 화재사고과 많이 비교된다. 빌딩 계단 구조가 개방형이기 때문에 불이 번지는 통로가 되었고 그 계단 이외에는 탈출구가 없었던 점이 여러모로 비슷하기 때문이다.[12] 정작 비상구 위쪽 천장 부분은 뚫려있어서 불이 이쪽을 통해 오피스 빌딩까지 번졌다.[13] 3호 터널 쪽으로 가다 보이는 소방서가 이곳이다. 현재 이름은 회현 119 안전센터.[14] 당시 MBC는 중구 정동에 사옥을 두고 있었다. 현재 경향신문이 사용하고 있는 그 건물이다. 사고 현장과는 고작 2km 거리밖에 안되었을 정도로 매우 가까웠다. 그렇다고 그 당시 다른 방송국은 현장과 먼 것은 아닌데 KBS는 남산, TBC는 운니동(계동 현대사옥 맞은편 현 래미안갤러리)에 있었다. 위치상으로는 다 거기서 거기다. [15] 지금처럼 SNG 장비가 빵빵하던 시절이 아니다.[16] 같은시각 MBC는 장충동에 있는 한국기독교장로회 경동교회의 성탄전야예배를 중계방송 하고 있었다.[17] 당시 박정희 정부는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장기집권을 향한 주축돌을 차근차근 놓고 있었다.[18] 당초에는 然 자체가 ‘불사르다’는 뜻이었다. 고기와 개(?)를 불에 올려놓은 모양새. 然이 이후에 '그러하다'는 뜻으로 많이 쓰이게 되자 불사른다는 뜻으로 燃을 따로 만들게 된 것.[19] ① 큰 불이 나서 ② 큰 연기가 나서 ③ 건물이 심하게 너덜너덜해졌다는(...) 의미가 차례로 표현됐다. 마지막 연(軟, 연할 연)자는 부드러워진다, 연해진다는 뜻을 갖고 있다.[20] 100명 이상이 죽은 참사에 이런 식의 말장난은 비판 받았겠지만, 당시 해당 만평이 화제가 된 것은 아니었고 당대에도 비판은 받았었다고. 더구나 고바우 영감에서 사망자들을 희화화한 것이 아닌 건물을 가연성 소재로 지은 대연각호텔(현 고려통상) 측은 비판한 것이라고 보기도 했다.[21] 빌딩 옥상 등에 있는 소규모 헬리콥터 이착륙장.[22] 헬기에서 내려준 줄을 몸에 단단히 감지 않고 손으로만 잡은 것이 화근[23] 고층빌딩 화재 진압의 어려움은 영화 《타워링》에서 소방대장 마이클 오핼러한 역을 맡은 스티브 맥퀸의 투덜거림을 통해서도 언급된다. 높이 때문에 고가사다리차도 소용없다는 등의 얘기도 나오는데, 영화를 통해 강조된 이런 문제들은 대연각 화재 이후 한국 전역에 널리 알려졌기에 한국에 《타워링》이 수입, 방영되었을 때, 한국관객들에게 대연각 화재를 떠올리게 했을 것이다. 게다가 대연각 화재 때는 주한미군도 대거 소방지원에 나섰다. 이 때문에 《타워링》 영화에 대연각 화재가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있다.[24] 이후 국민들의 관심이 대연각 화재사건에 쏠려있는 틈을 타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날치기 통과시켰다.[25] 대한아마튜어복싱연맹 부회장 및 초대 호남정유 여자배구단 단장도 역임했다.[26] 해당 영상은 2017년 GS칼텍스 50주년 기념 아카이브 특별전에서 공개됐다.[27] 서부영화에 나오는 주점의 문과 유사한 구조이다.[28] 참고로 사건 발생 시점은 이 사고가 나기 몇개월 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