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
[clearfix]
1. 소개
조선 후기, 대한제국의 정치가이자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조선 후기에는 개화파 정치가로서 갑오개혁과 을미개혁에 참여하였지만 아관파천 이후 일본으로 망명하고, 사면된 이후로는 국권피탈에 협력하며 친일 행적을 이어간 인물이다. 국권피탈 이후로 조선 귀작 남작 작위를 얻었고 3.1 운동 당시에도 무력 진압을 건의하는 등의 행적을 이어간 인물이다.
2. 생애
1848년 (헌종 14년) 12월 16일, 함경북도 경성군 주을온면 연촌리에서 태어나 고종 19년에 서울로 와서 관료 생활을 시작했다.
갑오개혁, 을미개혁에 참여하였고 친일 내각과 가까웠던 인물이다. 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 신문인 「한성순보」 발간에 실무적인 역할을 맡았다. 박문국에서 일했는데 갑신정변으로 박문국이 불타고 여러 관직을 맡다가 다시「한성순보」에 복간했다. 「한성순보」가 폐간된 후 여러 임무를 맡다가 갑오개혁에 적극 가담했다. 그 후 법무 대신을 맡고 있다가 을미사변에 가담했다.
하지만 아관파천이 일어나며 김홍집 내각의 대신들이 파면되며 체포령이 떨어진다. 김홍집 내각의 핵심인 김홍집과 정병하는 체포되던 중 분노한 군중에 맞아 죽었고 어윤중은 도주하던 중 죽었다. 이 틈을 타 그는 유길준, 조희연, 권영진, 우범선, 이두황 등과 일본으로 망명한다. 그리고 한동안 일본에서 숨어 지내며 '다카타니 요시' 라는 이름으로 생활한다.
이토 히로부미가 내한하자 고종은 장석주를 포함해 이진호, 이준용, 박영효, 이규완, 신응희, 유길준, 조희연, 정난교, 이두황, 권동진, 이범래, 조희문, 구연수 등을 해외로 추방시키거나 죽일 것을 요청했고 이에 이토 히로부미가 동의했으나 그대로 이행하지 않아서 생존했다.
13년간 망명 생활을 하다가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사면되어 복귀한다. 망명자들의 모임에 참여하고 대한 협회 초대 회장에 선출되었지만 12월 사임했다. 이후 여러 친일 단체에 참여하며 이토 히로부미 사후 이토 히로부미를 찬양하면서 동아 찬영회 총재를 지냈고 국권 피탈에 협력한다.
경술국치 때 남작 작위를 받았다. 여담으로 아관파천 때 함께 도주했던 유길준은 작위를 반납했고 우범선은 이미 사망했으며 조희연, 이두황 등도 작위를 받았다. 1910년 12월 김윤식, 조중응, 조희연 등과 일선사적, 구관습 연구회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11년 은사공채 5만원을 받았고[3] 중추원 고문이 되어 매년 1600원을 받았다. 당시 작위를 받았던 전직 관료들이 효용가치가 떨어져 활동을 멈추는 것과 달리 그는 이후에도 3.1 운동이 일어났을 때 3.1 운동 무력 진압을 건의하는 글을 발표하는 등의 친일 행적을 이어갔다.
사망하기 전까지 여러 친일 단체에서 활동하다 1921년 사망했다. 사후에 아들인 장인원이 작위를 물려받았고 광복 이후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다.
3. 여담
- 이토 히로부미를 존경했으며 이토 히로부미의 동상을 세우는 것을 추진했다.
- 일본 망명 생활 중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4. 둘러보기
[1] 아명으로 늦게 개명하였는데 조선왕조실록 등에는 장박으로 등장한다.[2] 일제는 후작은 15만원, 백작은 10만원, 자작은 5만원, 남작은 2만 500원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남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5만원을 일제에게 받았다고 한다.[3] 적은 돈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당시 돈의 단위와 현재 돈의 단위가 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