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룡

 

'''역임한 직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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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회의원 (서울 서초구 을)'''
''선거구 신설''
김형래[A]
이중재[A]

'''제13~17대
김덕룡'''

제18대
고승덕

'''제1 · 6대 정무 제1장관'''
'''대한민국 13~17대 국회의원
김덕룡
金德龍 | Kim Deog-ryong
'''
'''출생'''
1941년 4월 6일 (82세)
전라북도 익산시
'''학력'''
경복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사회학 / 중퇴)
'''병역'''
면제(장기복역)
'''가족'''
아내 김열자, 슬하 1남 1녀
'''본관'''
김녕 김씨
'''종교'''
개신교
'''소속 정당'''

'''지역구'''
서울 서초구 을
'''의원 선수'''
'''5'''
'''의원 대수'''
13, 14, 15, 16, 17
1. 개요
2. 정치 입문 전
3. 정치 활동
4. 여담
5. 소속 정당
6. 선거이력
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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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전 정치인, 관료이다.
보통 이니셜을 줄여서 DR이라고도 한다.

2. 정치 입문 전


1941년 전라북도 익산군 오산면 신지리에서 태어나 경복고등학교(35회)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사회학과에 합격한다. 하지만 졸업반이던 1964년에 문리대 학생회장으로 6.3 항쟁을 기획 및 주도했고, 이 사건으로 인해 구속되면서 서울대에서 제적된다.
이후 김영삼의 비서로 정계에 입문한 그는 상도동계의 일원으로 활동하면서 박정희 정권과 전두환 정권 때 여러 차례의 투옥, 정치규제 등을 겪었다.

3. 정치 활동


1980년, 김영삼 총재의 후광으로 신민당 이리시·익산군·군산시·옥구군 지구당 위원장에 임명되었으나, 5.17 내란으로 인해 정치규제 대상이 되면서 수포로 돌아간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통일민주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서초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3당 합당에 동참하여 민주자유당, 신한국당, 한나라당 소속으로 제17대 국회의원 임기 종료인 2008년까지 해당 지역구에서 내리 5선을 하였다.[1] 자신의 비서를 지냈거나 자신의 밑에 있었던 인물로 안희정, 김영춘, 이성헌 등이 있다.[2] 1993년 김영삼 정권이 출범하자 정무 제1장관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김영삼 정권 때 김영삼의 차남 김현철의 발호를 막아야 한다고 건의하다가 김영삼의 눈 밖에 났다. 정무 제1장관에서 물러난 이후 1994년 민자당 서울시지부장 그리고 1995년 민자당 사무총장에 발탁되어 난산 끝에 여야합의로 지방자치제의 완전한 정착에 큰 역할을 하였으나[3] 민자당이 지방선거에서 대패하면서 사무총장에서 물러났다. 이후 96년 총선에서 당선된 직후 그해 말까지 정무1장관에 다시 기용되었다.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신한국당에서 대권후보 9룡[4] 중 한 명으로 불렸으나 경선에서 민주계의 단합된 지원을 받지 못하고 4위에 그쳤다. 이후 신한국당과 민주당이 합당해 만든 한나라당이 대선에서 패배한 이후 조순이회창 총재체제에서 당 부총재를 역임하였다.
1997년부터 9년간 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4대 회장을 맡으며 2000년 총선을 앞두고 당시 이회창 총재가 개혁이란 명분으로 단행한 공천학살에서 계파보스로는 유일하게 살아남았다. 그러나 계파보스를 탈락시키고 계파원들이 대부분 생존했던 다른 계파와는 달리 소위 DR계는 거꾸로 계파원들이 대부분 공천에서 탈락했다. 16대 총선 직후 실시된 한나라당 전당대회에 총재 후보로 나섰으나 이회창의 벽을 넘지 못하고 2위에 그쳤고 이회창 총재가 지명직 부총재를 제안했으나 거절, 평당원으로 돌아갔다. 이후 2002년 대선에서 이회창 후보가 패배한 이후 실시된 임시전당대회에 대표 후보로 나섰으나 4위에 그쳤다. 한편, 2002년부터 2017년까지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 이사장을 역임했다.
2004년 총선에서 탄핵 역풍을 뚫고 5선에 성공, 17대 국회 제1야당 첫 원내대표에 선출되었다. 그가 역임했던 당직 중에서 임명직이 아닌 선출직은 원내대표가 처음이자 마지막. 그러나 신행정수도 특별법 위헌판결에 따라 열린우리당이 후속입법으로 추진한 행정도시 특별법이 통과됨에 따라 이에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이후 한·중 의원협의회장을 역임하였다.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한나라당의 대통령 후보 선출 전당대회에서 이명박을 지지하였다. 이명박 후보 선거캠프의 지휘부였던 6인회[5]의 일원으로 대선 승리에 기여하였다. 그러나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똑같이 이명박의 BBK의혹을 변호하고 이명박 당선에 상당히 기여했던 고승덕한테 서울 서초 을 공천에서 밀려서 탈락하였다.[6] 이후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약칭 민화협) 상임의장을 역임하였다.
2012년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강삼재, 문정수, 김정수, 박희부, 심완구, 이신범, 노병구, 최기선 등 같은 옛 김영삼계 정치인 중 일부와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를 지지하였다. 그러나 2015년 새정치민주연합이 주최하려던 민주당 창당 60주년 행사에 대해서는 김대중계 정치인이 아닌 친 노무현계가 주도하는 행사이므로 불참하겠다고 하였다.
2017년 초, 김영삼민주센터 신임 이사장에 선임되었고, 제19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문재인, 안철수 후보의 러브콜에 고심하다가 결국 4월 16일 김영삼의 차남인 김현철 국민대학교 특임교수와 함께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 지지를 선택하였다.## 그리고 6월 26일 민주평통 수석부의장으로 내정되었고, 8월 29일에 부의장직 임명장을 받아 2019년 8월까지 수석부의장직을 수행한다.
2018 남북정상회담 평양에서 각계각층의 인사들로 구성된 특별수행단에 포함되면서 오랜만에 언론에 모습을 비췄다.#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의장과 악수하며 특유의 호탕한 웃음을 보인 것은 덤이다.
민주평통 수석부의장직에서 용퇴한 뒤인 2019년 12월, 월간중앙과 단독 인터뷰를 했다. 문재인 정부의 실정과 86세대의 장기집권에 대해 가감없이 비판하면서도 "다시 2012년으로 돌아가도 문재인 후보를 지지했을 것이다"라면서 문재인 정부에 대한 비판적 지지 입장을 거두지 않으며 문재인 대통령의 각성을 촉구했다.

4. 여담


  • 사실 젊은 시절에는 염색을 하지 않은 백발 미남으로 유명했다. 그러다가 17대 총선을 앞두고 이미지 쇄신 차원에서 검은색으로 염색을 시작해 지금에 이르렀다.
  • 드라마 제5공화국에도 나온다. 김영삼의 최측근 포지션으로 김영삼의 등장이 꽤나 많은 관계로 이 인물의 등장도 상당히 많다. 드라마 내의 포지션은 전두환 옆의 장세동, 노태우 옆의 박철언과 비슷하다.
  • 2007년 경에 서초동 반포대로에 있던 사무실[7]에 도둑이 들었던 적이 있다. 사무실 내에 있던 컴퓨터 본체들을 모조리 도둑 맞았다고 한다.


5.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1970 - 1980
정계 입문

1980 - 1987
정당 해산

1987
입당
정계 복귀

1987
당내 노선 차이로 인한 탈당

1987 - 1990
창당

1990 - 1995
합당[8]

1995 - 1997
당명 변경

1997 - 2012
합당[9]

2012
당명 변경

2012
탈당

2012 - 2013
입당[10]

2013 - 2014
당명 변경

2014 - 2015
합당[11]

2015 - 2019
당명 변경

2019 -
탈당
정계 은퇴

6. 선거이력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88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서초구 을

'''31,377 (34.57%)'''
'''당선 (1위)'''
'''초선'''[12]
1992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31,051 (31.90%)'''
'''재선'''
1996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40,530 (44.68%)'''
'''3선'''
2000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45,484 (52.94%)'''
'''4선'''
2004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53,537 (54.23%)'''
'''5선'''

7. 둘러보기






[1] 그 뒤를 이은 제18대 서초 을 지역구 국회의원이 바로 고승덕이다.[2] 그러나 셋 다 자신의 곁을 떠났다. 안희정은 3당 합당에 반발해 노무현 의원실로 옮겨 그의 가신이 됐고, 김영춘은 2003년 한나라당을 탈당해 열린우리당 창당을 주도했다가 2012년에 재회했으며, 이성헌은 2004년 친박계로 전향했다.[3] 당시 기초단체장 및 기초의원 정당공천을 놓고 여야가 팽팽히 맞섰는데 민자당은 정당공천 배제를 민주당은 정당공천을 주장하고 있었는데 이 과정에서 황낙주 국회의장이 한남동 의장 공관에 연금되고 김기배 국회 내무위원장이 민주당 의원들에 이끌려 속초로 강제동행되는 사태가 빚어졌다. 결국 여야의 합의로 기초단체장만 정당공천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4] 나머지 8명은 이회창, 이수성, 이홍구, 박찬종, 최형우, 이인제, 이한동, 김윤환.[5] 이명박, 이상득, 최시중, 이재오, 박희태, 김덕룡.[6] 비록 한나라당 공천에서 밀려나기는 했지만, 고승덕 또한 이명박 前 대통령의 당선에 기여했던 인물이며 만만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감안했을 때도 그렇고, 타 기관의 상임의장에 임명된 것을 봤을 때 이후 김덕룡의 태도에서도 딱히 불만은 없었던 듯 하다.[7] 공교롭게도 해당 사무실은 13년 뒤 그의 지역구였던 서초구 을에 출마한 박경미 후보가 사용하였다. 낙선하고 재빠르게 방을 빼서 현재는 공실이다.[8] 민주정의당, 신민주공화당과 신설 합당, 이른바 3당 합당[9] 통합민주당과 신설 합당[10] 문재인 대통령 후보 지지 선언#[11] 새정치민주연합에 흡수 합당[12] 1990 민주자유당 (3당합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