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대 대통령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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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012년 12월 19일, 대한민국의 제18대 대통령을 선출하기 위해 실시한 선거. 투표 결과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가 당선되었다.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의 여성 대통령을 배출한 선거였다.
2. 특이사항
2.1. 국외 부재자 및 재외 선거
제19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이어서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국외부재자와 재외선거인에 대하여 재외선거가 시행된다. 재외선거 유권자 등록일은 2012년 7월 22일부터 10월 20일까지이며, 재외선거 등록 선거인 투표일은 2012년 12월 5일부터 12월 10일까지이다. 재외선거 홈페이지.
8월 31일까지 집계 결과 재외국민 선거 유권자 등록률이 '''1.75%'''에 불과하여 심각하게 낮은 것으로 조사되었다. 2012년 10월 11일, 마감을 10일 앞두고서야 제19대 국회의원 총선거 당시의 재외선거 등록비율을 넘어섰다. 기사.
19대 총선 당시 재외공관에서 투표를 해야 한다는 조항이 수정되지 않고 남아있기 때문. 2012년 정기국회에서 공직선거법이 통과되어 접수 부문에서 가족 대리접수, 공관 순회접수, 재외선거인과 국외부재자 선거인 모두 이메일 접수가 가능해졌다. 하지만 재외공관 안에서 투표해야할 수 있다는 조항은 개정되지 않았다. 우편투표 이야기가 나오고 있지만 국내부재자와 달리 국외부재자와 재외선거인은 신원확인 관련 문제가 있어서 공관투표가 바뀔지는 미지수.
2.1.1. 최초의 선상투표 허용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는 2012년 2월 29일 통과된 공직선거법 규정에 따라 사상 최초로 '''선박을 타고 있는 사람들이 투표 가능하게''' 선상투표(부재자 투표의 일종)가 시행되었다.
대한민국 국적을 보유한 선장이 운항하는 외항선박에서 승무 중인 선원들만 투표가 가능하며, 11월 21일부터 25일까지 선상부재자 투표 신고를 한 후, 12월 11일부터 14일까지 선상투표 후 INMARSAT 팩시밀리 단말기로 전송하면 됐었다. 투표지 원본은 국내 도착 후 우편으로 발송하면 됐다.
3. 후보자 명단
- 기호 1번 새누리당 - 박근혜
- 기호 2번 민주통합당 - 문재인
- : 12월 16일 사퇴하였다.
- 기호 4번 무소속 - 박종선: 과거 14대 총선 당시 민중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낙선한 바 있다. 다만 재미있게도 공약에 '북한과의 교류 즉각 일체 중단'이 있었다.
- 기호 5번 무소속 - 김소연: 구로디지털단지 출신 금속노조계 인사.
- 기호 6번 무소속 - 강지원: 행시, 사시를 둘 다 패스해 사무관과 검사를 둘다 해봤다. 청소년보호위원회 초대 위원장 등 청소년 관련 활동을 많이 했다. 참고로 부인이 훗날 부정청탁 및 금품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 이른바 '김영란법'으로 유명한 전 대법관 김영란이다.
- 기호 7번 무소속 - 김순자: 청소노동자 출신으로 진보신당 비례 1번으로 19대 총선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또, 이 선거만의 특이점이 있다면 여성 후보들이 남성 후보보다 많았으며, 득표수를 총합해도 여성 후보들이 많은 선거였다는 것이다. 물론 박근혜가 대다수를 차지한 것이긴 하지만. 또한 역대 대통령 선거 중 과거의 대통령 선거 본선에 출마해 본 경험이 없는 후보들로만 구성된 유일한 대통령 선거이기도 하다.[1]
후보자에 등록되진 않았지만, 유력 대권 주자 중 박근혜, 문재인 후보와 함께 막판까지 3파전을 벌인 안철수 후보의 경우, 문재인 후보와 단일화가 사실상 실패하자 2012년 11월 23일 정권 교체를 위해 백의종군하겠다며 중도 사퇴하였다.
3.1. 정당별 후보 경선
- 제18대 대통령 선거/후보 경선 항목 참고.
3.2. 최종 미등록 예비 후보자
4. 여론 조사 상황
5. 출구조사
6. 선거 당일 투표 및 개표 풍경
선거 당일 기온이 낮아서 투표율이 낮을 것으로 예측되었으나, 오히려 그 반대였다. 오전부터 투표율의 증가세가 심상치 않았으며 한때는 15대 대선의 투표율 80%에 견줄 만한 투표율이 나올 것이라는 예상이 돌기도 했다. 결국 16시가 되기 전에 이미 17대 대선의 투표율을 넘어섰고, 17시에는 16대 대선의 투표율(70.8%)에 육박했다. 투표 분위기도 뜨거웠는데, 당초 예상보다 사람들이 몰려 유권자들이 줄을 서서 기다려 투표를 해야 하는 곳도 있었다. 결과적으로 최종 투표율은 17대 대선보다 무려 12.8% 상승한 75.8%로 집계되었다.
투표율에 따라 각 당의 반응도 엇갈렸는데, 당초 투표율이 높을수록 민주당에 유리하고 새누리당에 불리하다는 예측과 다르지 않게 민주통합당은 높은 투표율에 조금씩 화색이 돈 반면 새누리당은 당혹하는 모양새였다.[7] 김무성 새누리당 선대본부장은 당원들에게 비상사태라며 지지자들의 투표를 독려하기도 했다.
그러나 6시 정각 지상파 3사의 출구조사 결과 박근혜 후보가 오차범위 내에서 문재인 후보를 앞서는 것으로 나오자(박근혜 '''50.1%''' vs 문재인 '''48.9%''') 새누리당 캠프에서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다만 다른 방송사의 여론조사에서는 박빙이거나 문재인 후보가 앞선다는 결과도 나왔기 때문에 전체적으로는 두 당 모두 앞으로의 개표 상황을 봐야 선거 결과를 알 수 있을 것이라는 분위기였다. 출구조사에 관한 상세 내용은 문서 참조.
첫 개표는 저녁 6시 40분 경상북도 안동시에서 집계되었다. 초반부터 영남권에서 시작된 개표로 인해 박근혜 후보가 앞서 나가기 시작했고, 단 한 번도 역전을 허용하지 않은 채 박 후보가 꾸준히 표차를 벌려나갔다. 그 탓에 출구조사 결과로는 두 후보가 오차 범위 내에서 초박빙 접전을 벌이며 누가 당선될지 예측할 수 없는 치열한 진검승부가 벌어질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실제 개표 결과는 그에 못 미치게 다소 싱겁게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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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8시 50분쯤 양 후보의 표차가 50만 표를 넘어서자 방송사들이 박근혜 후보의 '''당선 유력'''을 예측하였다. 이때 전국의 개표율이 불과 '''27%''' 조금 넘은 상황이었다. 이때부터 출구조사 때 예측된 치열한 진검승부 예상은 빗나가버렸고, 그렇게 실제 결과도 끝나버렸다.[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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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12월 20일 오전 1시 25분이 조금 넘은 개표율 96.5%에서 카운트다운이 끝나[9] 예상보다 큰 1,087,328표차로 박근혜 후보의 '''당선이 확정'''되었다. 당선 확정을 알리는 매직 넘버가 '''0'''이었을 때 남은 표는 1,086,414표였는데, 남은 표를 모두 문재인 후보에게 줘도 914표 차로 박근혜 후보가 당선되기에 당선이 확정된 것이다.
다만 이 이후 문재인 후보의 강세 지역인 서울특별시의 개표가 늘어나면서 개표 마지막에는 문재인 후보와의 표차가 약간 줄어서 최종적으로 새벽 3시 40분경 득표수 1,084,096표차, 득표율 3.53%차가 난 상태에서 개표가 끝났다. 출구조사의 1.2%차 박근혜 승리 예측보다 꽤 차이가 벌어졌는데, 이는 대선 출구조사를 본격적으로 시행했던 15대 대선 이래 가장 많이 예측이 엇나간 결과였다.
7. 투표 결과
8. 선거 개표 결과
인천의 두 후보 득표율과 전국 두 후보 득표율이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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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적으로 보면 문재인 후보 지지가 더 우세한 지역은 전통적 민주당 지지 지역인 전라북도, 전라남도, 광주광역시와 서울특별시[19] 정도 뿐이었으며, 나머지 지역에선 박근혜 후보가 승기를 잡았다. 공교롭게도 지역별 승패는 20년 전인 1992년의 14대 대선 선거 결과와 정확히 일치했다.
시군구별로 보면 수도권에선 문재인이 6만여표 정도 약간 우세한 경합, 영남권, 충청권, 강원도에선 박근혜 우세, 호남권에선 문재인이 우세하였다. 다만 문재인은 노무현이 이긴 16대 대선보다 부산경남의 득표율은 약 10% 이상 늘어나는 성과를 보였다(62:38). 허나 대경권에서 8:2로 밀린 건 인구가 거의 비슷한 호남에서 9:1로 승리하면서 만회할 수 있었지만, 충청권에서 천안시 서북구 등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박근혜에게 10% 이상 차이로 참패한게 뼈아팠다(56:43). 인구는 적은 편이지만 강원도에서도 62:37.5라는 참패를 하면서 상당한 표차가 났다.
결국 경합지인 수도권, 제주도를 합친 득표에선 약간의 표차로 승리하긴 했지만, 이 표들은 중부권에서 난 표차를 메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나마 부산경남에서 40%에 육박하는 득표율을 얻어 표차를 상당히 줄인 덕분에 그래도 3% 차이로 진 것이다. 문재인이 부울경에서 40% 가까이를 얻은 것은 분명 지역감정 타파의 명분으로 PK 탈환을 지상목표로 했던 친노 세력의 입장에서는 나름 큰 성과로 여겨지긴 했지만 결국 승리하지는 못하였고, 문재인의 패인은 상기했듯 중부(충청, 강원)권에서의 참패에 있었다. 19대 총선과 마찬가지로 수도권과 PK에만 올인하는 전략은 중부권에 상대적으로 소홀하다는 인식을 주었고 이들 지역에서의 부진을 불러왔다. 어찌보면 복습을 제대로 못한 셈.
결국 PK에서 접전을 벌이거나 수도권에서 완승하지도 못하면서 중부권을 허무하게 내준 결과, 민주당은 19대 총선에 이어 충분히 이길 수도 있다고 봤던 선거에서 또다시 패배하고 만다.
박근혜 후보의 최종 득표율 51.6%는 많은 사람들에게 조금 섬뜩하게 다가왔다. 그 부친이 5.16 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잡았는데, 그 딸이 51.6%의 득표율로 정권을 잡았기 때문. 물론 우연이지만.
8.1. 지역별 및 세대별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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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측이 일반적인 지도형태고, 우측은 인구비례로 나타낸 지도이다.
- 출구조사 결과에서 경기도, 인천광역시, 대전광역시 지역의 경우 문재인 후보 우세가 점쳐졌으나, 실제 개표 결과에서는 박근혜 후보가 1위를 함으로써 출구조사가 빗나가버렸다.[20][21] 출구조사가 빗나가 버린 만큼 득표율 차가 커진 것. 출구조사가 빗나간 경기, 인천, 대전 이 세 지역의 투표인수를 합치면 무려 950만 명을 넘기 때문에 엄청난 차이가 발생한 것이다. 또한 문재인 후보가 크게 앞서 묻힌 감이 있지만 호남(광주광역시, 전라북도, 전라남도)에서 출구조사 결과와 실제 결과가 2~3% 정도 차이가 났던 것도 있다. 특히 전남은 출구조사와 실제 결과가 3% 이상 벌어져 전국에서 가장 크게 빗나갔다.
- 2012년 1월 14일 있었던 대만 총통(대통령) 선거와 비슷한 격차가 발생하였다. 대만 선거 역시 마잉주 중국 국민당 후보와 차이잉원 민주진보당 후보 간 출구조사 및 선거 전 여론조사(예측조사)보다 격차가 큰 실제 개표결과가 나타났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 최종 투표율은 75.8%로 지난 2007년 대선 때보다 무려 11%나 증가하면서 선거에 관심이 높아진 국민의식이 드러났다. 세대를 가리지 않고 투표율이 증가#2했으며, 특히 2-30대 투표율도 15~20% 가량 높아졌다. 5-60대 투표율도 5% 가량 늘었는데, 이들이 베이비붐 세대로 2-30대보다 인구가 많은걸 감안하면 5-60대 지지율이 상대적으로 높았던 보수진영 후보의 승리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22] 그리고 유권자수가 4천만 명이나 되는지라 당시 6공화국 대선 중 최고의 투표수가 나왔다. 3,000만 표를 넘었다.[23]
- 당선된 박근혜는 당시 역대 당선자 중 최다 득표였고, 낙선한 문재인도 역대 낙선자 중 최고 득표였다. 심지어 문재인이 역대 대선 당선자들보다도 득표수가 높고, 17대 당선자인 이명박 전 대통령보다 320만 표나 많으며, 문재인 자신이 당선된 19대 대선 때보다도 약 127만 표나 많다.[24]
- 가장 접전이었던 곳은 시군구 단위로 따질 경우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로 문재인 후보가 박근혜 후보를 59표 차이로 제쳤다. 읍면동 단위로 따질 경우 서울특별시 성동구 금호4가동이었는데, 얼마나 접전이었냐면 박근혜 당선인이 문재인 후보를 4384:4383, 단 1표 차이로 승리했다.
- 세대 대결 구도가 이전 대선들보다 심화된 선거였다. 10년 전 2002년 대선에 비해 20-30대의 노무현 후보와 문재인 후보에 대한 지지도는 각각 59.0%, 59.3%에서 65.8%, 66.5%로 상승했고, 50-60대 이상의 이회창 후보와 박근혜 후보의 지지도는 57.9%, 63.5%에서 62.5%, 72.3%로 상승해 각 세대의 진보, 보수 쏠림 현상이 심화되었다. 한편, 40대에서는 55.6% 대 44.1%로 문재인이 승리하긴 했지만 지지율 차가 적어 40대의 진보화가 진행되었음에도 아직까지는 캐스팅보트의 역할이 40대에 있음을 보여주었다. 가장 주목받은건 50대의 표심이었다. 이들이 40대였던 10년 전에는 48.1%(노무현) 대 47.9%(이회창)의 팽팽한 지지율을 보이던 세대였으나, 이 대선에서는 62.5% 대 37.4%로 박근혜에게 몰표를 줬으며 특히 투표율이 가장 높았다는 점에 있어서도 적극적으로 박근혜 지지에 나섰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박근혜정부의 실정에도 불구하고 이들 세대에서 문재인에 대한 호감이 이후에도 딱히 높아지지 않았다는 것은 19대 대선 결과에서도 어느정도 나타났다.[25]
- 결국 이번 선거에서도 동-서 간의 지역 갈등은 해소되지 않았다. 도리어 그동안 투표율이 낮은 축에 속했던 대구, 경북의 투표율이 80%를 육박하는 소소한 파란이 일어나기도 했는데, 18대 대선에서 80%를 돌파한 지역은 광주광역시 한 곳 뿐인 것을 상기하면 좀 웃픈 일. 이에 대한 원인으로는 동서 지역 갈등+특히 부울경이 아닌 대구경북에 기반을 둔 정치인인 박근혜가 대선에 나오자[26] 대구경북권의 기대가 이번 투표에서 표출되었다는 설이 있다. 과거 호남에서 김대중을 밀어줬고 국민의 정부 당시 호남에 적극 지원을 한만큼 TK에서는 박근혜한테 지역 경기를 회복시켜달라는 일종의 기대를 한 것.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지금도 호남이나 TK는 전국에서 지역 경기 안좋은 지역으론 손에 꼽힌다는 것이다.(...)
- 단, 전남 지역에서 유일하게 박근혜 후보가 문재인 후보를 이긴 투표구가 있는데, 다름아닌 전남 고흥군의 소록도만 관할하는 도양읍 제7투표소였다.# 과거 육영수가 한센병 환자를 신경쓴 버프를 어느정도 받았다는 평가다.[27][28]
- 경상도 지역에서는 대구경북과 부산울산경남이 확연한 차이를 보였다.
- 대구, 경북에서는 박근혜의 득표율이 대구 78%→80%, 경북 73%→81%으로 증가했다. 그래서 대구 경북에서 득표율이 80%을 넘은 첫 대통령이 되었다.
- 반면 부울경 지역에서는 지역주의가 약화되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향 및 낙동강 벨트를 내세우며 부산 사상구에 출마해 당선되는 등 부울경 공략에 힘을 쏟은 문재인 후보의 행보로 인해 부산, 울산, 경남(PK 혹은 부울경)에서의 문재인 지지율이 급상승[29] 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박근혜의 탄핵에 도움을 주었던 총선과 탄핵 두 달 뒤에 치러진 재보선에서 더 가속화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박근혜 탄핵으로 인해 치뤄진 첫 궐위 대선에서는 문재인 후보가 부울경 중에서 경남을 제외하곤[30] 보수정당 후보를 이겼고, 2018년 치뤄진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도 더불어민주당 후보들이 PK를 석권하게 된다, 하지만 21대 총선에서 보수층이 미래통합당으로 총결집 하면서 이전보다 득표율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 호남과 대구경북은 문재인, 박근혜 몰아주기가 나타남으로서 이 지역들의 지역주의는 여전히 견고하다고 평가받았다.
- 19대 총선 당시 민주당 계열이 우세했던 수도권에서 박근혜 후보가 생각보다 선전했는데, 서울에서는 패배했지만 득표율 차가 3.2%에 그쳐 16대 대선에서의 이회창 후보에 비해 많이 선전했으며, 2011년 재보선에 비해서 23개구는 득표율이 올라간 반면 강남구와 서초구는 문재인 후보의 득표율도 약간 올라갔다. 그리고 인천 부평권과 경기도 대도시권 위성도시에서도 선전했다. 16대 대선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과 권영길 전 민주노동당 대표와 표차를 합하면 당시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는 참패하지만 18대 대선에서는 수도권에서 득표율이 오르며 박근혜 후보가 접전으로 경합을 벌였다.
16대 대선에서 이회창 후보는 서울에서 강남구, 서초구만을 남기고, 인천에서는 도서권과 중구만을 남기고, 경기도에서는 일부 최외곽지역을 남기고 과반 득표에 실패하는데 서울에서는 보수강세지역인 송파구, 강동구, 용산구는 물론, 모든 구를 뺏겼고 인천에서는 당시 중구를 제외한 모든 구도심과 모든 지역도 과반 득표에 실패했다. 경기도에서는 위성도시에서 참패한 것은 물론, 보수 강세 지역과 근접지역에서도 참패, 양평, 가평과 용인 부촌지역(현 용인 수지구), 성남 분당 등을 빼고 외곽 지역과 최전방 지역에서도 과반 득표에 실패했다.
18대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는 서울 25개구에서 16대 대선의 이회창 후보보다 더 득표율이 높은 것은 물론, 인천 전역에서도 16대 대선의 이회창 후보보다 득표율이 높았으며 경기도 전역에서도 16대 대선의 이회창 후보보다 더 득표율이 높았다.[31] 결과적으로 문재인 후보가 서울에서 앞선 표가 박근혜 후보가 경기, 인천에서 앞선 표보다 많아서 문재인 후보의 6만여표차 신승이긴 했지만, 대선 결과를 놓고 보면 큰 의미는 없는 수치였다.
18대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는 서울 25개구에서 16대 대선의 이회창 후보보다 더 득표율이 높은 것은 물론, 인천 전역에서도 16대 대선의 이회창 후보보다 득표율이 높았으며 경기도 전역에서도 16대 대선의 이회창 후보보다 더 득표율이 높았다.[31] 결과적으로 문재인 후보가 서울에서 앞선 표가 박근혜 후보가 경기, 인천에서 앞선 표보다 많아서 문재인 후보의 6만여표차 신승이긴 했지만, 대선 결과를 놓고 보면 큰 의미는 없는 수치였다.
- 충청도에서는 새누리당에 흡수되었던 자유선진당(선진통일당)의 영향과 문재인 후보가 PK에 집중하면서 충청권에는 상대적으로 소홀했던 것의 영향으로 박근혜 후보가 문재인 후보를 충남과 충북에서는 56 : 43 정도의 상당히 큰 격차로 승리하였고, 대전과 세종시에서도 접전 끝에 신승했다. 한편 강원도의 경우 62 : 37.5라는 큰 득표율 차로 승리했는데 이는 충청권과 마찬가지로 문재인 후보의 PK 집중으로 인한 소외감 및 최전방 군인들이 많은 지역이라 안보 문제에 있어 보수정당에 더 메리트를 가진 것이 한 원인으로 분석되었다.[32]
- 동/서 간의 지역 갈등 뿐만 아니라 세대 갈등도 적나라하게 나타났다.[33] 7:3 3:7의 대립을 해소하는 것도 정권의 숙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
- 직선제 개헌 이후 계속 하락세를 보였던 대통령 선거 투표율이 오랜만에 반등한 선거이기도 하다. 보수 대 진보의 양강구도가 되고, 선거운동 기간 내내 박빙의 승부로 이어지면서 각각의 지지층이 크게 결집했던 것이 원인.
- 직선제 이후 역대 대선에서 인천광역시, 경기도, 충청북도, 제주특별자치도에서 득표율이 높았던 후보가 모두 당선되었는데, 이 속설은 네 곳 모두 박근혜 후보가 우세를 가져가면서 이 선거에서도 적중률을 이어갔다.
- 2012년 12월 4일 치러진 제18대 대통령 선거 후보 TV토론회에서 통합진보당 후보로 출마한 이정희 후보의[34] 행동이 눈길을 끌었는데, 박근혜에게 노골적으로 전두환에게 받은 6억 원은 어찌 되었냐며 묻는 한편 '유신의 공주', '다카키 마사오' 등을 거론하며 전형적인 네거티브 토론을 하였다. 그리고 이는 당시 진보층에선 상당한 호응을 불러일으켰으나, 결과론적으로 박근혜는 당선되었고, 이후 이정희의 발언이 되레 보수층을 결집시킨 자충수 아니었냐는 평이 나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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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표는 16대, 17대, 18대 대선 각각의 사회인구학적 투표 동향을 그림 자료로 정리한 것이다. 17대 대선에서 지표가 우향우했던 것과는 달리 18대 대선에서는 그래도 백중세를 이뤘다. 진보-보수 스펙트럼에서 의외로 남성이냐 여성이냐의 문제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가운데, 여전히 연령이 상당한 상관관계를 갖는 변수로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지역적으로는 영남권이 상대적으로 더 강한 보수 성향을 보이는 가운데 호남권에서 진보 후보에 대한 전폭적 지지로 인해 지극히 현저한 상관관계가 나타나고 있다.
8.2. 지역별 세부 결과
제18대 대통령 선거/지역별 결과 항목 참조.
9. 기타
9.1. 출마 후보 관련
- 사상 최초로 남성 후보(3명)보다 여성 후보(4명)가 더 많은 대선이었다.
- 단 2명의 후보에게 극단적으로 표가 쏠린 드문 대선이다.[35] 박근혜와 문재인 두 사람의 득표율을 합치면 무려 99.57%이다. 반대로 말하면 나머지 후보들의 총 득표율이 불과 0.43%밖에 되지 않았다.[36] 이렇게 된 이유는 군소후보 4명 중 강지원 외엔 기존에 잘 알려진 인물이 없었던 데다가 두 후보간의 양자 구도가 결선투표급으로 매우 막강하게 유지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 특이하게도 남성 후보들은 모두 짝수 기호를, 여성 후보들은 모두 홀수 기호를 받았다.
- 무소속 후보가 정당 소속 후보보다 더 많았다.(정당 소속 3명, 무소속 4명)[37]
- 엄격한 의미로 따지자면 헌정 이후 대선들 중 최초의(?) 여야대결이었다. 이외의 대선들은 대통령의 탈당/파면으로 법적으로는 모두가 야당인 상태에서 치러졌는데, 이 대선 때는 대통령 이명박이 탈당을 하지 않았기에 엄격한 의미로는 첫 여야대결이었던 것. 그런데 사실 그 이명박조차 탈당만 하지 않았을 뿐 당시 정권 심판론 속에 여당인 새누리당은 사실상 여당내 야당 컨셉을 유지하던 정치인 박근혜 체제로 뭉치고 MB는 거의 없는 대통령 취급을 했기 때문에 묘하긴 하다.
- 제6공화국 대선 중 원외정당 후보가 없는 첫 대선이었다.
9.2. 선거방송
- KBS와 MBC는 광화문 야외진행을 선보였다. KBS의 경우 광화문 KT 사옥에 미디어파사드[38] 를 설치했는데, 이 미디어파사드를 통해 다채로운 영상과 출구조사 결과도 표출하였고, 특설무대에서는 가수들의 공연도 있었다고 한다. MBC도 광화문에 특설 스튜디오를 설치했고 개그맨 박명수를 MC로 기용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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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상은 광화문 KT 사옥에 설치된 KBS 미디어 파사드로 여기서 나오는 것은 출구조사 결과가 표출되는 영상이다. 참고로 이 시스템을 위한 시설과 프로그램 전반은 국내 한 미디어파사드업체에서 제작하였으며 이후에 유명세를 타며 글로벌 측면에서도 꽤 잘나가게 되어 KBS측에서 다큐멘터리로 이 회사에 대해 소개한 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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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출구조사에서 방영된 1분 남짓한 카운트 다운 영상은 한국 현대사를 잘 압축했다는 호평을 받았다. 이 때까지의 대통령이 딱 10명이었던 것을 10초 카운트다운으로 표현한 것도 특징할 만하다. 사용된 배경 음악은 얼음과 불의 노래의 왕좌의 게임 시즌 1 오프닝이다. 여담으로 MBC에선 2018년이 되어서야 공식 영상을 올렸다. 박근혜 정부 시기엔 비공식 영상이 돌기도 했지만 저작권 신고를 받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영상에 나오는 사건들을 정리해보면 1945년 8월 15일 8.15 광복, 1950년 6월 25일 6.25 전쟁, 1960년 4월 19일 4.19 혁명, 1970년 새마을운동, 경부고속도로[39] , 1980년 5.18 민주화운동, 1987년 6월 민주항쟁, 1988년 9월 17일 1988년 서울 올림픽, 1994년 10월 21일 성수대교 붕괴사고, 1997년 12월 1997년 외환 위기, 2000년 6월 15일 남북정상회담, 2002년 2002년 한일월드컵, 2008년 2월 10일 숭례문 화재 사고, 2008년 2008년 촛불집회 및 광우병 촛불시위, 2009년 용산4구역 철거현장 화재 사건[40] , 2010년 2010 G20 서울 정상회의, 2011년 7월 6일 2018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 2012년 싸이의 강남스타일 열풍이다.
여담으로 사실 영상 마지막 싸이의 강남스타일은 당시 뜬금없이 왜 나왔느냐는 반응도 일부 있었다. 하지만, 이시기 싸이의 (일시적이건 뭐건) 강남스타일과 말춤으로 대표되는 전 세계적인 열풍은 현재진행형인 상황이었기에 이해 못할건 또 아니라는 의견도 있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당시 세계인들은 싸이는 알아도 박근혜, 문재인은 모르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영상에 나오는 사건들을 정리해보면 1945년 8월 15일 8.15 광복, 1950년 6월 25일 6.25 전쟁, 1960년 4월 19일 4.19 혁명, 1970년 새마을운동, 경부고속도로[39] , 1980년 5.18 민주화운동, 1987년 6월 민주항쟁, 1988년 9월 17일 1988년 서울 올림픽, 1994년 10월 21일 성수대교 붕괴사고, 1997년 12월 1997년 외환 위기, 2000년 6월 15일 남북정상회담, 2002년 2002년 한일월드컵, 2008년 2월 10일 숭례문 화재 사고, 2008년 2008년 촛불집회 및 광우병 촛불시위, 2009년 용산4구역 철거현장 화재 사건[40] , 2010년 2010 G20 서울 정상회의, 2011년 7월 6일 2018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 2012년 싸이의 강남스타일 열풍이다.
여담으로 사실 영상 마지막 싸이의 강남스타일은 당시 뜬금없이 왜 나왔느냐는 반응도 일부 있었다. 하지만, 이시기 싸이의 (일시적이건 뭐건) 강남스타일과 말춤으로 대표되는 전 세계적인 열풍은 현재진행형인 상황이었기에 이해 못할건 또 아니라는 의견도 있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당시 세계인들은 싸이는 알아도 박근혜, 문재인은 모르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9.3. 대선 격전 지역
1, 2위 후보 간 표 차이는 108만 표 정도 밖에 안 났지만 지역 구도가 뚜렷하게 나타난 탓에 시, 군, 구 단위에서 생각만큼 치열한 격전지는 거의 없었다. 시, 군, 구 단위에서 1, 2위 후보 간 표 차가 1,000표 차 미만의 격전지는 다음과 같다.
이상 4곳에 불과하며 사이좋게(?) 2곳씩 나눠 가졌다. 지역 구도가 뚜렷한 탓에 후보 각각이 강세를 보인 지역이 뚜렷해서 캐스팅 보트 역할을 할 지역이 적었던 탓에 이와 같은 결과가 나왔다.
9.4. 제3후보 안철수와 안철수 현상
비록 중도사퇴하는 바람에 최종적으로는 박근혜vs문재인 양자 대결 구도가 되었지만, 선거 과정 내내 두 후보와 함께 국민들의 주목을 받았던건 바로 무소속 안철수 후보였다. 이전에 안랩을 키워 벤처 기업가로 성공한 업적+대학 교수로 지내며 대기업 갑질 문제를 비판하는 등 사회적 목소리를 낸 점+방송 출연에서 나온 인간적 면모 등이 겹쳐져 안철수 후보는 2010년대 초 존경받는 사회인 혹은 기업가 순위에서 꾸준히 1위를 포함한 상위권에 랭크되는 등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는데, 대선 바로 전해인 2011년 토크콘서트 순회 도중 서울시장선거 출마 가능성이 점쳐지며 순식간에 정계의 핵으로 부상했고, 서울시장을 박원순 후보에게 양보한 직후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당시 오랫동안 대권 지지율 1위를 달리고 있던 박근혜를 누르는 결과가 나오면서 단숨에 대권 후보로 격상하여 '''안철수 현상'''이란 사회현상으로까지 불리는 신드롬을 일으키게 된다.[41]
덕분에 2012년 9월에 한 출마 선언 이전부터 그의 출마 여부가 대선 최대 변수로 끊임없이 언론의 관심을 모았으며, 출마를 선언한 이후 초기에는 문재인 후보를 누르고 여론조사 2위 수준의 지지율을 기록하기도 했으나 이후 문재인 후보에게 따라잡히면서 2~3위를 엎치락뒤치락 했다. 그리고 안철수 후보가 "새누리당이 재집권하는건 역사의 흐름에 어긋난다고 생각한다"는 소신을 밝힌 바 있었기에 당연히 야권 후보로 분류되어 문재인 후보와의 단일화 문제가 주요 변수로 떠오르게 된다. 다만 이 단일화 협상에서 양측이 서로 접점을 찾지 못하며 지지부진한 상황이 지속되었고, 결국 안철수 후보는 2012년 11월 23일 정권 교체를 위해 백의종군하겠다는 입장을 밝히며 중도 사퇴하였다. 즉, '새정치'를 내세우며 기존 정치를 불신하는 유권자들 사이에서 인기를 모으며 돌풍을 일으킨 안철수 후보는 비록 문재인 후보와의 단일화 협상 과정에서 중도사퇴하며 이 선거에서 최종 주인공이 되지는 못했지만 이 선거의 숨겨진 또 다른 주역이었다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42] 다른 한편으로는 2010년대 초반 및 18대 대선 시기 한국사회가 요구하던 시대정신을 보여주었다고 볼 수도 있다.
한편, 단일화 과정에 대해 좀 더 꼽씹어보자면, 단일화 자체는 양쪽 모두 공감했으나 여론조사에 어떤 문항을 넣느냐 등에서 좀처럼 합의를 이루지 못했다. 문재인 후보측은 누가 야권 후보로 좀 더 적합하다고 보느냐는 지지층 결집에 유리한 뉘앙스의 문항을 강조했다면, 안철수 후보는 누가 상대측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와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겠는가는 쪽의 문항을 좀 더 강조했다.[43] 왜냐하면 많은 여론조사에서 박근혜 후보와 양자대결시 문재인 후보보단 안철수 후보가 유리하게, 심지어 안철수로 단일화해야만 박근혜 후보에 이긴다는 조사도 제법 나왔기 때문. 이는 중도층이나 친이계가 문재인, 박근혜보단 안철수에 더 호감을 느꼈기 때문이란 식의 해석도 있다.
하여튼 때문에 지금도 '안철수로 단일화했으면 18대 대선 이겼다'라는 주장이 일각에서 나오기도 한다. 물론 역사에 만약은 없기 때문에 실제로 어떤 결과가 나왔을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겠지만 말이다. 실제 안철수 후보는 5년 뒤 19대 대선에서는 중도사퇴하지 않고 끝까지 완주했지만, 1위로 당선된 문재인 뿐만 아니라 2위 홍준표 후보에게도 약간 밀리며 21.4%의 득표율로 3위로 낙선하고 만다. 물론 5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는 사이에 정치적 환경도, 안철수라는 정치인의 이미지나 스탠스도 18대 대선 때와는 많이 달라졌다는 점은 감안해야할 것이다.
10. 여담
- 이 당시 박근혜 후보가 당선되면서 헌정사상 최초라는 타이틀을 몇가지 얻게 되었는데 다음과 같다. 최초의 여성 대통령, 최초로 87년 대통령 직선제 개헌 이후 과반을 득표한 대통령[44] , 역대 최다 득표수를 얻은 대통령[45] , 최초의 부녀 대통령, 최초의 미혼 대통령[46] , 대한민국 정부수립(1948년 8월 15일) 이후 태어난 첫 대통령[47] , 최초의 이공계 학과 출신 대통령[48][49] , 최초로 탄핵당한 대통령.
- 선거 당일, 2명이 안타깝게 숨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첫 번째는 강원도 원주에서 80대 할아버지가 투표 당일, 등재번호가 기재된 안내문을 두고 와 다시 집으로 가던 도중 기차에 치여 숨지는 사고가 일어났고, 두 번째로는 심장에 지병이 있던 70대 할머니가 투표를 마치고 심장질환으로 숨지는 일이 일어났다.
- 소재도 다양해서 선거, 투표율, 개표 등.
- 선거가 박빙 양상을 보이면서 양 진영이 결집해 보수와 진보, 노인 세대와 청년 세대 간 대립이 극단적으로 표출된 선거이기도 했다.[50] 다만 역설적으로 이 사이에 있던 중도보수층은 누굴 찍을까 고민한 묘한 선거이기도 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만 하더라도 보수 결집은 바라지만 독재자 딸이 당선되는 꼴은 못보겠다며 중립을 선언할 정도였다.[51] 어찌됐든 박근혜 후보가 신승하면서 2012년 당시엔 범 보수진영의 크기가 범 진보진영보다 좀 더 큰 것 아니냐는 말도 나왔지만 이후의 양상을 보면 이것도 설레발이 되었다.
- 선거 이후 진보 지지층 일각에선, 공직선거법에 대해 전자개표를 할 수 없게 되어있다는 논란성 주장을 하기도 했다. 헌데 이 과정에서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수검표를 부실하게 한 정황이 드러나면서 재검표 요구가 일었고, 진보진영 지지자들 사이에서 수개표를 요구하는 촛불집회가 벌어지기도 했다.# 이와 더불어 백악관 홈페이지에 재검표 청원을 요구하는 글을 올려 논란이 되기도 했다.#
- 일부 진보층에선 선거 이후 개표 결과가 조작되었다는 음모론을 주장하기도 했지만, 시사in조차 이런 음모론은 황당할 뿐이라는 반응을 보였고# 문재인 후보도 재개표는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라며 부정적 의사를 표했다.# 허나 이들은 한영수를 대표원고로 선거무효소송을 제출하였다. 그리고 전자개표기가 대선 당시 오류를 일으킨 사실은 확인되었지만, 이들의 개표 결과가 조작되었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어 책에 대해 배포금지가처분 신청이 승인되고 명예훼손으로 기소된다.
개표조작설에 대해 이들이 취한 행동은 쉽게 말해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 당시 한나라당이 취한 행동의 반대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자세한건 문서 참조.[52] 다만 이들도 마냥 음모론자로만 몰리긴 억울했는지, 근거가 빈약한 개표조작설이나 전자개표위법설만을 이유로 선거 무효를 주장하진 않고 국가정보원 여론조작 사건을 대선무효의 사유로 포함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후 박근혜 탄핵으로 소의 이익이 없다며 각하(2013수18)되었다. 허나 이들은 대통령이 쫓겨났다는 이유로 무효 확인의 이익이 없다는 것은 잘못되었다며 재심을 신청(2017재수88)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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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에서 당시 개표 막바지인 12월 20일 새벽에 위와 같은 다른 결과('문재인 당선 확정')를 대문에 내보냈던 사건이 있었다. 이미 박근혜 당선인의 당선이 '확실'을 넘어 '확정'으로 접어든 새벽 2시 전후 시점에 벌어진 상황이라서 당시 다음에 접속한 사람들은 어이가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당황한 다음 측은 부랴부랴 대문을 교체했지만 어쨌든 사실상 미리 결과를 단정지어 놓은 것이 드러난 셈이라[53] , 가뜩이나 다음 아고라 등에서 보여지는 다음의 노골적인 편향성에 운영 주체들까지 관련이 있지 않은가 하는 논란이 일기도 했다. 그런데 보통 이런건 경우의 수를 다 만들어둔다. 사실 가능성 있는 경우의 수라고 해봐야 박근혜 또는 문재인 후보가 당선되는 두 가지 밖에 없었고, 단순 해프닝으로 실수가 벌어진 것이라고 보는게 가장 타당할 것이다.
- 이 당시, 선거 이후 문재인 및 민주당 지지자들은 한동안 멘붕에 빠졌다고 한다.
11. 선거 관련 의혹 및 사건사고
11.1. 국가기관 선거개입 사건
선거 막판 국가정보원이 여론조작을 시도하며 대선에 개입했다는 의혹이 불거졌다. 12월 11일 제기된 의혹을 경찰은 서울지방경찰청장의 지시에 따라 마지막 토론이 끝난 12월 16일 일요일 오후 11시 증거가 발견되지 않았다고 발표하였다. 제18대 대통령 선거가 끝난 지 6개월 정도 이후 검찰이 실제 수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국정원의 행위가 사실이며, 실제로는 12월 중순 당시 증거를 발견하고도 허위 발표를 한 사실이 확인되었다.
2015년 2월 9일 서울 고등 법원이 유죄 판결을 내림으로써 국가기관에 의한 대선개입이 처음으로 인정되었다. 그러나 그 해 7월 16일 대법원이 당시 형사소송법에 의해 당사자가 부인한 전자증거를 증거로 채택하기 위해서 필요한 요건에 맞지 않는 상태에서 전자증거[54] 를 채택했다며 그 증거에 나오지 않는 범위내에서 발견된[55] 여론조작 정치개입 활동을 가지고 대선개입여부를 판단하라는 취지로 이례적으로 선거법 위반 여부에 한해 판단 없는 파기 환송 처리하였다.
어찌되었건 국정원이 당시 개입을 한 것이 인정된 만큼, '''선거 후보자도 아니었던 당시 당국이 선거에 조직적으로 개입했다는 것'''이 사실로 드러났다고 볼 수 있다.[56]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하는 국가정보원에서 선거에 개입한 순간, 이미 그 선거는 부정선거이다.''' 그러나 이게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자각조차도 못 한(혹은 그러하도록 여론조작을 벌인) 채[57] 로 4년을 날리고 말았다.
해당 사건으로 원세훈 전 국정원장은 선거법과 국정원법 위반으로 유죄판결을 받고 수감되었고, 연제욱, 옥도경 전 사이버사령관도 정치관여죄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이와는 별도로 보수 개신교 계통의 여론조작단(소위 십알단)이 박근혜 후보를 위해 온라인상에서 여론조작 활동을 펼쳤으며, 이와 관련된 오륜교회에 재직하던 윤정훈 목사는 유죄판결을 받았다. 기사.
2019년 기준 드러난 내용은 가히 충격적인데, 국정원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국군 사이버사령부와 기무사, 그리고 대한민국 경찰청까지 그야말로 국가 정보·방첩·수사기관이 총동원되어 여론조작을 가해 대선에 개입한 사실이 드러났다.
11.2. 선거무효소송
전자개표가 위법이라고 주장하는 한영수는 대선이 개표조작 부정선거라며 전자개표는 선거법에 어긋나고 개표조작 의혹이 있다며 선거무효소송에 동참할 사람을 모집한다. 국가정보원 여직원의 대선개입 의혹이 제기된 상황이라, 선거개입성 여론조작은 부정선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상당수가 선거무효소송인단으로 참여했다.
이들은 그 후 청구취지를 확장 및 변경하여 국가정보원 여론조작 사건을 대선무효사유로 포함시킨 것으로 알려졌다. 이로 인해 2017년 1월 현재까지 선거무효소송이 진행 중인 상황이다. 대법원이 2015년 1월 5일 '''여러 관련사건을 통일적이고 모순 없이 처리하기 위하여 심층 검토중'''이라는 입장을 밝히고 2년 가까이 소송이 아무것도 진행되지 않았는데 이 관련사건은 국가정보원 여론조작 사건 재판을 일컫는 것으로 보인다. 선거무효소송의 사건번호는 2013수18이다.
2017년 4월 5일 심리진행상황이 '''쟁점에 관한 재판부 논의 중'''으로 바뀌었으며, 4월 27일에는 이미 박근혜가 파면되어 소송의 법률상 이익이 없다는 이유로 각하 결정이 나왔다. 박근혜가 파면된 대통령으로 대부분의 혜택이 박탈되었을지라도 경호, 무궁화대훈장 등이 남아있는 상태라 반발이 일고 있다.뉴스 논란의 핵심은 공직선거법 상 선거무효소송은 대법원 단심으로, 소가 제기된 날로부터 180일 이내에 처리해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는데, 이번 사건은 소가 제기된 날로부터 4년이 지난 상황에서야 선고가 나왔다. 그나마 심리진행이 무기한 연기된 상태였던 2017년 3월 10일부로 헌법재판소에서 18대 대통령이었던 박근혜의 파면을 선고하였고, 이를 근거로 하여 대법원은 "해당 재판이 무효처분이 된다고 해도 그로 인하여 물러나야 하는 대통령 박근혜가 탄핵으로 궐위된 상황이기 때문에 심리속행의 실익이 없어졌기 때문에 기각한다"라는 내용이었으며, 같은 판결문에서 “선거법 처리기간 조항은 의무가 아닌 권고규정”이라고 말하였다.
이에 대해 선거무효 단체에서는 탄핵으로 궐위된 상황이라는 이유로 소의 이익이 없다고 각하하는 것은 부당하다며 재심 신청(2017재수88)하였다. 또한 2017년 8월 30일 18대 대선과정에 국정원장 원세훈과 그 예하의 심리전단, 기무사 등이 조직적으로 선거에 개입했다는 자료가 속속들이 나오고 있던 와중에 재판에서는 원세훈에게 4년의 실형을 선고하였고, 구속상태가 아니었던 국정원장 원세훈은 법정구속에 이르게 되었다. 이 재판의 결과로 국가가 불법적으로 대선에 개입했다는 것을 재판부가 인정하였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현행 '공직선거법'상으로 국가가 불법적으로 개입한 선거는 불법으로 규정하고 있는 바, 이를 근거로 해서 재심을 심의할 경우에는 무효처리가 될지도 모르는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하지만 애당초 법원 입장에서 '''재심'''을 굉장히 까다롭게 받아주는지라, 재심사유가 아니라는 이유로 각하되었다. #
한편, 이를 주도한 사람들은 친박으로 분류되는 민경욱 전 의원과 손을 잡고 21대 총선 무효를 주장하고 있다. #관련기사
11.3.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측의 여론조작, 문재인 선거팀의 SNS기동대
18대 대통령 선거는 박근혜와 문재인 양측이 모두 유난히 댓글부대와 여론 조작 파문으로 시끄러웠던 선거였다.
11.3.1. 국가정보원·국방부 여론조작 사건
기업이나 정당 등의 단체가 알바를 고용하여 여론선동이나 특정 내용의 이슈화를 저지르는, 일명 고나리질이 행해지는 것은 이미 공공연히 알려진 사실이었으나[58] 이번 사건은 대통령 직속 국가기관인 국정원과 대한민국 국군의 국군사이버사령부와 국군기무사령부 그리고 대한민국 경찰청이 저지른 일이라서 차원이 다른 것이다.
해당 사항에 대해 특정 단체만의 댓글 조작 사건 문제로만 치부하는 것은 오히려 사건을 호도하는 것이다. 해당 사건은 특정 단체의 댓글 조작, 개입 문제도 문제지만 '''국가 정보·방첩·수사기관이 총동원 된 사상 최악의 공안 정치/ 정치개입'''이다. 그래서 대학생 시국 선언, 대학 교수 시국 선언, 언론 단체 시국 선언 등이 이뤄진 것이다.
사건 경과는 국가정보원·국방부 여론조작 사건/경과, 사건 전체에 대한 내용은 국가정보원·국방부 여론조작 사건 관련 사건은 국정원 변호사 자살 사건, 검찰 수사에 대한 국정원의 은폐/축소/허위 진술 논란은 변창훈 항목 참조.
11.3.2. 문각기동대와 댓글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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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대 대통령 선거를 2달 앞둔 2012년 11월 8일, 민주통합당 보좌진 27명이 모여 전략기획팀, 메시지팀, 실무지원팀 등 3개 팀으로 구성된 일명 '''SNS 기동대'''를 결성했다. 차모 비서관을 기동대장으로 하여, 전략기획팀은 트위터와 페이스북에 전파할 내용을 기획, 메시지팀은 전략기획팀에서 기획한 글을 전파, 실무지원팀은 연락과 진행사항을 점검하고 전파된 글의 반응을 모니터링했다. 오프라인-온라인 회의 체계를 갖추고, 활동 시간대를 정하는 등 매우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움직였다.[59] 'SNS 기동대'는 12월 2일까지 트위터와 페이스북 등 SNS에서 문재인 후보의 당선을 위한 댓글부대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다.
2012년 11월 26일 민주통합당은 여의도에 위치한 신동해빌딩 6층을 임차하고, 이를 중앙당사로 추가하는 절차를 마쳤다. 좀 더 체계적으로 SNS 선거 활동을 하기 위해 SNS 기동대를 지원한 것이다. 사무실이 마련되자 2012년 11월 27일부터 12월 12일까지 총 91대의 컴퓨터가 설치되었고, 이와 함께 프린터 24대와 유전전화기 47대, 의자 105개, 테이블 72개, 파티션 104개, 텔레비전 5대, 냉장고 3대도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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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2월 3일, 'SNS 기동대'가 'SNS 지원단'으로 확대·개편되면서 조직의 규모는 총 10개 팀, 76명으로 늘어났다. 이 '''SNS 지원단'''의 책임자가 바로 조한기다. SNS 기동대의 책임자였던 차 비서관은 SNS 지원단에서 대응1팀장을 맡았고, SNS 기동대 중 일부와 다른 민주통합당 보좌진 등 총 16명이 SNS 지원단으로 합류하면서 대응1팀으로 편입돼 기존의 SNS 활동을 이어나갔다. 특히 SNS 기동대를 이끌었던 차 비서관은 하루에 100건이 넘는 트위터를 작성하기도 했으며, 글 중에는 상대 후보에 대한 원색적인 비판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SNS 지원단의 핵심조직은 '대응1·2·3팀'으로 추정된다. '''대응1팀'''은 트위터와 페이스북, '''대응2팀'''은 인터넷 포털사이트와 블로그, '''대응3팀'''은 인터넷 커뮤니티와 인터넷 뉴스 댓글란을 각각 맡아 업무를 세분화했다. 이 세 개 팀을 통해 문재인 후보의 정책, 유리한 글, 불리한 내용에 대응하는 글, 박근혜 후보에게 불리한 글 등을 전파하며 전방위적인 인터넷 선거운동을 벌였다. 이외의 팀에도 아래 표에 나와있는 것처럼 아주 세세한 업무가 부여됐다.
구성과 업무는 다음과 같다.
- SNS기획팀: 선거운동기간별 후보자 홍보 계획 수립, 팀별 업무 보정, 회의 준비
- SNS메시지팀: 문재인 후보와 아내 김정숙의 트위터, 페이스북, 블로그에 홍보물을 작성
- SNS분석대응팀: SNS 여론을 모니터링하여 SNS선거운동 전략 수립
- SNS플랫폼팀: 홈페이지, 카카오톡, 모바일앱을 운영
- SNS콘텐츠팀: SNS에 유통시킬 동영상 등 콘텐츠를 생산
- 뉴스매거진팀: 홍보를 위한 인터넷 뉴스레터를 매일 작성해 당원과 일반인들에게 발송
- SNS네트워크팀: 인터넷을 통해 배포되는 콘텐츠 정리
1심 재판부는 "선거캠프 내 내부적 사무분담 변경에 불과한 것으로 보인다"라며 SNS 기동대의 설립 자체는 무죄로 판단했다. 다만, SNS 지원단을 운영하기 위해 사무실을 차리고 설비를 갖춘 것은 유죄로 판단해 조한기와 차모 비서관에게 각각 벌금 20만 원의 선고를 유예했다.
그러나 이 판결은 항소심에서 뒤집혔다. 2심 재판부는 "위반 행위를 물적 시설의 설치와 인적 조직의 구성으로 나눠 유·무죄를 논할 것은 아니다"라며 원심의 오류를 지적하고, "국회의원 보좌관 27명이 전략기획팀, 실무지원팀 등으로 구성돼 각 팀별 업무를 담당한 사실 등을 고려하면 사조직 설립 금지 위반 혐의를 유죄로 인정할 수 있다"라고 설명하면서, '조직을 설립한 사실'과 '사무실에 설비를 갖춘 사실'을 모두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판단해 두 사람 모두에게 벌금 90만원을 선고'''했다. (#, #)
이후 유죄로 선고받은 조한기를 그대로 19대 대선에 선거팀 내에 넣으면서 다시 논란이 생겼다. 이후 한동안 온라인상에서 문재인 지지자를 문각기동대라 칭하는 일이 생기기도 했다.
12. 관련 문서
- 제19대 국회의원 총선거
- 제18대 대통령 선거/후보 경선
- 제18대 대통령 선거/여론조사
- 제18대 대통령 선거/주요 이슈
- 제18대 대통령 선거/출구조사
- 제18대 대통령 선거/지역별 결과
- 제18대 대통령 선거/후보
- 국가정보원·국방부 여론조작 사건
- 그래서 대통령 되려고 하는 거 아니에요?
- 대선생활백서
- 로지스틱 방정식[60]
- 제19대 대통령 선거[61]
[1] 그나마 박근혜의 경우, 17대 대선 당시 본선에는 출마하지 못했지만 한나라당 경선에서 이명박 후보와 접전 양상을 보이며 경쟁하다 석패한 적이 있었다.[2] 11월 23일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문재인 후보를 지지하며 사퇴하였다.[3] 11월 22일 박근혜 후보를 지지하며 사퇴하였다.[4] 11월 26일 문재인 후보를 지지하며 사퇴하였다.[5] 무소속 강지원 후보와 정책연대를 했다.[6] 정식 대선 후보 등록을 하지 않았다.[7] 실제로 선거 전에도 투표율 70%를 기점으로 문재인의 승리가 갈릴 것이라는 분석기사가 있었다. #1, #2.[8] 지금까지 대선 방송에서 어떤 후보의 당선 유력이 선언된 이후로 그것이 역전된 적은 단 1번도 없었다.[9] 1위 후보와 2위 후보 사이의 표차가 남은 표수보다 많아지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1위 후보와 2위 후보간 표차가 2만 표 정도 났는데 남은 표수가 18,000표 정도라면 2위 후보한테 남은 18,000표를 모두 줘도 순위가 뒤집히지 않는다. 따라서 이 상황에서 1위 후보는 당선이 확정되게 된다.[10] 재외선거인 43,201명 포함. 재외선거인을 제외한 국내유권자 + 국외부재자는 40,464,641명.[11] 재외국민 투표 및 부재자 투표 포함.[12] 부재자 투표수 합산 시작. 부재자 투표수는 누적 투표수에 포함됨.[13] 부재자 포함한 숫자다. 재외국민 투표 중 국외부재자는 각 시도 본수에 포함되어있으나 재외국민 투표만의 투표율은 별도로 표기한다.[14] 소수점 셋째자리에서 반올림하여 둘째자리까지 표시[15] 투표 하지 않은 사람. 선거인수 - 투표수[16] 국외부재자는 이미 상술한 시도 본수에 포함되어 있으나 투표율 계산을 위해 별도 표기했다.[17] 군인 투표가 들어가 있기 때문에 20대 후반에 비해 20대 전반의 투표율이 월등하게 높다. 그런데 다음 19대 대선에서는 20대 전반에서도 여성들이 투표율이 더 높았다.[18] 표본 오차는 95% 신뢰 수준 +-0.8%다.[19] 서울은 호남 수준은 아니지만 과거부터 전통적인 민주당계 텃밭으로 평가받아왔다. 오히려 역사로만 보면 제1공화국 시절부터 그 흐름이 이어져 호남보다 더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대도시의 개혁 성향 유권자들 지지세에 이후 호남 원적 서울 이주민까지 가세한 결과라고 흔히 분석된다. 강남 3구가 거의 유일한 예외 지역이라고 할 수 있는데, 사실 여기도 1990년 3당 합당 이전엔 민주당(특히 YS계)세가 강한 지역이었다. 비슷한 곳으론 부산이 있는데, 여기도 3당합당 이후 보수세가 강해졌다 21세기 들어 점점 캐스팅보트화되고 있다.[20] 다만 이 지역들은 오차범위 내 경합 지역으로 분류된 곳들이라 완전히 엉뚱하게 빗나간 것은 아니다. [21] 다만 인천광역시는 예상보다 꽤 빗나갔는데 출구조사에서는 50.6 : 49.0으로 문재인 후보의 1.6% 승리로 나왔으나 실제 결과에서는 51.6 : 48.0으로 박근혜 후보가 3.6% 앞서는 것으로 나오며 출구조사 결과를 많이 벗어났다.[22] 실제 출구조사 결과 50대의 박근혜 지지율은 약 62.5%로 37.4%의 문재인을 상당히 큰 폭으로 앞섰다.[23] 다만 다음 대선에서 무려 3,200만여표로 더 많은 투표수가 나와 기록은 깨진다. 인구는 늘어났는데 투표율도 더 높았으니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24] 이는 87년 체제 이후 치러진 대선에서 사실상의 양자 구도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18대 대선도 막판까지 무소속 안철수 후보가 돌풍을 일으켰지만, 문재인 후보와의 단일화에 실패하며 사퇴함에 따라 사실상 박근혜 vs 문재인 양자구도가 발생하였다. 때문에 박근혜는 20대 대선 이전 기준으로도 최다 득표(1570만여표) 대선 당선인으로 남아 있다. 사실 2017년 치러진 19대 대선 투표율이 사전 투표+5월 대선+탄핵 정국 버프를 받고도 18대 대선에 비해 투표율이 겨우 1.4% 정도 오른 걸 감안하면, 결선투표제가 도입되지 않는 한 이 기록 깨기가 생각보다 쉽진 않을 것으로 보인다. 여담으로 당시 여론조사에선 안철수 후보가 박근혜 후보와의 양자대결시 앞서는 여론조사도 제법 많았기 때문에, 안철수 후보로 단일화되었을 경우 당선자 최다 득표수가 더 늘어났을 가능성도 있었다.[25] 19대 대선 당시 50대 전체의 결과는 문재인이 우세했지만, 이제 50대 후반이 된 이들의 결과는 경합~경합열세 정도였고, 60대의 경우 문재인 후보는 홍준표 득표율의 절반 조금 넘는 수준에 그쳤다. 대신 중도를 표방한 안철수 후보가 전체 세대 중 이들 세대에서 가장 높은 득표를 기록했다.[26] 다만 대구가 고향임에도 어릴 때부터 서울에서 살아서 사투리는 못 쓴다고 한다. 새누리당에서도 TK 국회의원 중 사투리를 못 쓰는 국회의원은 박근혜가 유일하다는 말이 나왔다.[27] 이후 제19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호남 지역에서는 유일하게 홍준표 후보가 35.8%의 득표율로 1위를 한 투표구가 되었다.[28] 사실 박근혜, 박근령, 박지만 남매간의 육영재단 분쟁 당시에도 한센병자 들이 동원되었던걸 보면 묘하긴 하다.[29] 부산 30%→40%, 울산 35%→40%, 경남 27%→36%.[30] 그 경남도 겨우 0.5% 차이, 표차로는 10760표차이였다.[31] 다만 기간이 기간인만큼 그때 유권자들과 동일 비교하긴 좀 어렵긴 하다.[32] 다만 바로 직전 지방선거에선 민주당 최문순 후보가 당선되는 등 강원도가 안보 문제에 과연 생각만큼 민감한가에 대해선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린다. 오히려 남북평화무드로 인해 금강산 관광 등이 재개되면 가장 먼저 경제+안보 혜택을 볼 수 있는 지역도 강원도기 때문.[33] 출구조사에서 2,30대는 문재인 후보가 약 65%:35% 정도로 앞섰고, 40대에서도 약 55%:45% 정도로 앞섰다. 박 당선인은 50대에서 약 65%:35%, 60대 이상에서 75%:25%로 앞섰다.[34] 물론 이땐 당내 계파 갈등이 불거져 심상정, 노회찬 의원 등과는 이미 등을 진 상태였다.[35] 안철수 무소속 후보와 이정희 통합진보당 후보는 중도 사퇴하였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정당 후보는 양강이었던 박근혜와 문재인 둘뿐이었다.[36] 극단적인 양당제 국가로 알려진 미국에서도 이 정도로 유력후보 2명에게 표가 몰리는 경우는 흔치 않다. (미국은 선거인단 제도 때문에 사표방지심리가 한국보다 더 강하게 작용한다) 2000년 이후 미국 대선에서 양당 후보가 얻은 득표율은 2000년 96.25%, 2004년 99.10%, 2008년 98.58%, 2012년 98.26%, 2016년 94.27%로 모두 한국의 18대 대선보다 낮다.[37] 다만 무소속으로 나온 김소연 후보와 김순자 후보의 경우 당시 문재인 중심의 야권 단일화에 반발한 일부 재야세력이 진보신당 내 현장파를 중심으로 '변혁모임'을 만들어서 김소연을 후보로 냈는데 진보신당도 공식적으로 김소연을 지지하였다. 이때 진보신당 내 일부 사회당계는 이에 반발하여 19대 총선 진보신당 비례대표 후보였던 김순자를 지지하였다. 물론 상기했듯 이들의 절대 득표율은 낮아서 도토리 키재기이긴 하지만, 그래도 김순자가 김소연보다 표를 훨씬 더 받은 건 함정.[38] 건물이나 조형물 외벽을 스크린 삼아 LED 등으로 다양한 영상물을 표출해 내는 것을 말한다.[39] 깨알같이 고가도로 위로 불도저가 지나간다.[40] 굉장히 빠른 속도로 지나가기 때문에 유심히 보지 않으면 놓치기 쉽다.[41] 이전에도 기존 정치권을 불신해 제3지대 후보를 찾는 유권자층은 으레 있었고, 이들의 염원을 받은 후보들 또한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박찬종, 문국현 등이 대표적. 허나 안철수 현상이란 사회용어까지 만들어내며 큰 영향력을 발휘한 후보는 안철수가 거의 처음이었다.[42] 참고로 안철수 본인도 2016년 20대 총선에서 국민의당을 창당해 비례대표 2위를 했던 시기나 2017년 19대 대선 초반에 문안 양자구도를 만들었던 시기보다도 이 시기를 자신의 리즈시절로 생각하는지 2018년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서울시장 선거에 출마했을 당시 2011년~2012년 쯤의 본인을 언급하며 선거 유세에 활용하기도 했다.[43] 재미있는건 이게 예전 이명박, 박근혜 후보가 한나라당 대선 경선 당시 여론조사 문항 가지고 서로 싸우던 상황과 비슷했다는 점. 당시 이명박 측은 좀 더 중도층 확보에 유리한 문항을 강조했고, 박근혜 측은 지지층 결집에 유리한 문항을 강조했다.[44] 양자대결이었기에 가능한 수치였는데, 당시 문재인 후보는 48%를 득표했다. 다만 안철수 후보가 중도 사퇴하지 않았다면 이런 수치가 나오긴 어려웠을 것이다.[45] 이전 기록은 2002년 대선에 노무현 대통령이 얻은 12,014,277표였다. 370만 표 이상 차이가 나서 기록이 깨졌다. 이후 깨질 가능성은 있지만, 상술되어있듯 여러 구도상 결선투표제가 도입되어야 가능성이 올라갈듯.[46] 여성 대통령의 남편을 주로 부군(夫君)이라 칭하는데, 박근혜 전 대통령의 경우 결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18대 대통령 임기 동안 부군은 공석이었다. [47] 참고로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 태어난 첫 대통령은 노무현 전 대통령(1946년 9월 1일생)이다.[48] 이승만 전 대통령은 철학 학사, 영문학 석사, 국제정치학 박사였으며, 윤보선 전 대통령은 고고학 학사와 석사, 박정희 전 대통령은 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 학사, 최규하 전 대통령은 영어영문학 학사, 전두환 전 대통령과 노태우 전 대통령은 육군사관학교 학사, 김영삼 전 대통령은 철학과 학사, 김대중 전 대통령은 목포공립상업학교 졸업으로 고졸, 노무현 전 대통령은 부산상업고등학교(현 개성고등학교) 졸업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고졸, 이명박 전 대통령은 경영학 학사. 박근혜는 전자공학과 학사 출신이다. 여기에 후임인 문재인 현 대통령은 법학과 학사로 박근혜는 아직까진 유일한 이공계 학과 출신 대통령의 타이틀도 가지고 있다.[49] 다만 출신과 별개로, 박근혜가 이공계에 해박한 전문성 있는 발언을 한 적은 별로 없었다.(...) 그리고 이산화탄소를 이산화가스라고 말하거나 센서 달린 신발을 인공지능의 사례로 혼동할 정도로 과학기술에 무지한 발언들을 보면 이공계로서 제대로 배운 것 같지는 않다.[50] 말이 나와서 말인데, 사실 2010년대 모든 선거에서 보수정당은 2040 세대에서 한번도 이기지 못한다.[51] 친이계도 심정적으론 YS랑 큰 차이는 없었던 것으로 보이나, MB정부 하에서 노 전 대통령이 사망하는 비극이 발생했기 때문에 문재인 후보가 당선된다면 정치보복 우려를 안할 수가 없는 상황이라, 울며겨자먹기로 대선 무효 사단까지 벌어진 그 말 많고 탈 많던 국정원과 국방부를 동원한 댓글부대까지 돌려가며 박근혜 후보를 밀어줄 수 밖에 없었다.[52] 사실 이런 식의 투표 조작 논란은 어느 나라건 선거가 끝나면 선거에서 진 지지층들 사이에서 으레 일어나는 일이긴 하다. 물론 대부분은 음모론 수준에서 그치지만, 전부 다 음모론으로 보긴 찝찝한 점도 있다는게 웃픈 현실.[53] 다음 관계자들이 오후까지 투표율만 보고 문재인 당선이라는 확신에 차서 예정 시각에 맞춰 이런 결과가 나오도록 한 것이 이런 결과를 초래한 것 아니냔 설도 하나의 가능성으로 꼽힌다. 혹은 투표 결과에 멘붕한 관계자들이 벌인 일종의 정신승리라는 견해도 있다. 물론 진실은 저 너머에...[54] 트위터 계정 목록이 포함된 파일이었다. 국정원 직원이 조직의 외압을 받았는지 자기가 파일을 작성했다는 입장을 번복하면서 문제가 생긴 것. 현재는 김진태가 주도한 형사소송법 개정에 따라 본인이 부인해도 감정결과 본인이 쓴 것으로 밝혀지면 컴퓨터의 문서 파일은 증거로 쓸 수 있게 개정되었으나, 이미 공소된 사건에 대해서는 적용되지 않는다.[55] 이것도 굉장히 많은 수이다. 물론 당사자가 파기환송심에서 다시 자기가 썼다고 시인하거나 검찰이 기타 특히 신용할 만한 정황에 의하여 작성된 문서라는 점을 보강하면 파기환송심에서 해당 파일의 증거채택이 가능하다.[56] 증거능력에 논란이 있는 해당 파일을 제외하고 확인되는 인터넷 계정만 가지고 국정원의 시기별 사이버 활동 및 그 내용의 변화 과정을 비교해 보더라도 2012년 8월 20일(박근혜 대선후보 선출일) 이후 정치글 중 선거글이 차지하는 비중이 현저하게 증가함이 명확하고 군소후보인 이정희 후보를 노골적으로 비방하는 글을 여러 직원들이 올린것도 명확하기에 국정원 조직원들이 고의적으로 선거에 개입한 것이 분명하다.[57] 2013년 당시 검찰 특별수사팀에 가해진 외압과 방해는 상상을 초월한다. 당시 황교안 법무부 장관이 법무부 차원에서 수사 외압을 가했고, 심지어 국정원에서는 파견 검사들을 이용해 증거와 압수수색 장소까지 조작해버리고 이것도 모자라 특별수사팀에 대한 뒷조사까지 하여 수사팀을 해체하려고 한 정황까지 드러났다. 여기까지만 해도 기가 막히는 것인데, 당시 사건을 수사 중이던 경찰에게도 외압을 가하고 증거를 은폐하려 했다.[58] 한나라당 매크로 여론조작 의혹 사건에서 한나라당, 이후 민주당에서 특정 단체를 조작하고 동원했다는 것이 알려졌다. 새누리당의 매크로 조작을 폭로하면서 제보자는 다른 군소정당들도 많이 사용했다고 언급했다. [59] 09:00 - 오프라인 회의, 10:00 ~ 11:00 - 집중 유포, 13:00 - 온라인 회의, 13:30 ~ 15:00 - 집중 유포, 15:00 - 모니터링.[60] 한국에서 이 식이 대중적으로 유명해진 것은, 18대 대통령 선거의 시간대별 개표결과가 이 식의 그래프 및 함숫값과 유사했기 때문이다.[61] 재수생 문재인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