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오스트리아 전쟁

 


'''나폴레옹 전쟁'''
독일·폴란드 원정

'''제2차 오스트리아 전쟁'''

러시아 원정
이베리아 반도 전쟁
1. 개요
2. 전개
3. 결과


1. 개요


나폴레옹 전쟁의 일곱번째 국면. 제5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이라고도 한다. 오스트리아 제국과 전쟁을 벌였기 때문에 오스트리아 전쟁이라 불리지만 1805년의 전쟁과 구분하기 위해 제2차 오스트리아 전쟁이라 일컫는다.

2. 전개


1805년 오스트리아는 절치부심하면서 나폴레옹에게 복수하기 위해 칼을 갈았다. 그리고 10년 이상을 대프랑스 전쟁에 투입되어 무수한 전공을 쌓았던 전략의 귀재이자 프란츠 2세의 동생 카를 루트비히 대공이 직접 총사령관에 임명되었으며, 적극적인 군제개편을 통해 적을 이기기 위해 적에게 배운다는 신념으로 프랑스군의 사단제를 도입하고 기존의 용병에 더해 독일계 주민들로 구성된 국방군(Landwehr)을 창설했다.
1809년, 오스트리아 재무대신은 프란츠 황제에게 이대로 군대를 유지하다간 올해 안에 국가 재정이 영 좋지 못해질 거라고 보고한다. 그러자 '이왕 만든 군대인데 칼을 뽑아서 무라도 베어 봐야 하지 않겠냐'란 분위기가 오스트리아 내에서 형성되었고, 아직 준비가 부족하다고 생각하던 카를 대공도 본인이 그토록 뺑이쳐가며 만든 군대가 프랑스 놈들한테 한 방 먹이지도 못하고 고자가 되는 것만은 원치 않았다. 이러던 차에 이베리아 반도에서 프랑스군이 지지부진하게 되자 오스트리아는 쿨타임이 되었다고 판단해 1809년 4월 9일, 카를 대공이 지휘하는 오스트리아군 20만이 프랑스의 동맹국인 바이에른 공국을 침공했다. 이와 동시에 페르디난트 대공이 이끄는 병력은 바르샤바 공국으로, 요한 대공은 이탈리아로 진격했다.
하지만 프랑스는 이미 오스트리아의 군사적 움직임을 감지하고 있었고 총참모장인 베르티에는 오스트리아군을 막기 위해 라인 동맹에 주둔하고 있던 다부, 르페브르, 마세나 등의 부대를 총동원했다. 오스트리아의 도발 소식을 들은 나폴레옹도 즉시 파리에서 출발해 4월 18일에 잉골슈타트(바이에른 남부의 도나우 강변의 도시)에 도착했다. 게다가 다시 한 번 대불 동맹을 결성하려던 오스트리아의 희망도 뚜껑을 열어보니 현실은 시궁창. 러시아는 오스만 제국과 스웨덴을 털어먹는 데 재미들려 정신이 없었고, 프로이센은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가 참전할지 말지 끝까지 고민만 하다 전쟁이 끝났다.이미 나폴레옹에게 털릴 대로 털린 직후라 속국 상태였기 때문. 병력동원해도 제대로 된 전력은 왕과 함께 도망친 2만 남짓의 병력 밖엔 없었다. 결국 오스트리아는 대괴수 나폴레옹을 상대로 혼자 맞서야 하는 안습한 처지가 되었다.
프랑스군의 병력은 18만이었지만, 주력 부대는 스페인에 있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를 상대할 부대는 상대적으로 주력과는 거리가 있긴 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전장에 오자마자 상황을 파악해보니 오스트리아군은 여유롭게도 분산되어 있었고 이를 본 나폴레옹은 빠른 기동으로 각개격파할 수 있겠다 생각해 공세로 즉각 전환했다.
4월 20일, 나폴레옹이 이끄는 주력 9만의 병력이 아벤스베르크로 진격해 오스트리아군의 전위부대를 돌파하고 다부에게 오스트리아군의 우익을 공격하도록 명했다. 그리고 자신은 오스트리아군의 좌익을 추격해 남하했다. 21일에 란츠 푸트에 이른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군의 좌익을 돌파해 다시 북상하여 22일에 연합군 측 전투의 귀재라 불리는 카를 대공이 지휘하는 오스트리아군 우익과 접전하여 격파했다(에크뮐 전투). 이에 카를 대공은 도나우 강 북쪽으로 퇴각했다.
한편 포니아토스키가 지휘하는 바르샤바 대공국군도 4월 19일, 라싱에서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했다(라싱 전투). 나폴레옹은 도나우 강을 따라 진격하여 5월 13일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 유유히 입성했다. 카를 대공은 도나우 강 건너편에 병력을 집결시키고 결전을 준비했다.
나폴레옹은 도나우 강을 건너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하기 위해 도나우 강의 로바우 섬을 점령하고 그곳을 기반으로 가교를 설치해 병력을 이동시키려 했다. 하지만 상대인 카를 대공은 만만한 적수가 아니었다. 오스트리아군이 가교를 설치할 때마다 나타나서 파괴하는 바람에 충분한 병력을 이동시키는데 곤란을 겪었다. 이 때문에 5월 21~22일, 아스페른-에슬링에서 오스트리아군에게 패배를 당하고 말았다(아스페른-에슬링 전투). 숫적으로도 엄청 열세인데다가 강 건너 적을 공격해야 하는 불리한 조건을 감수한 채 무리하게 공세에 나섰다가 그동안 승점자판기로 여겨왔던 오스트리아에게 한 방 먹은 것.[1] 이 전투에서 나폴레옹은 자신이 가장 신뢰하던 장 란을 잃었다.
나폴레옹은 물러나서 이탈리아의 외젠 드 보아르네의 군단과 합류를 기다리며 다시 결전을 준비했다. 7월 4일, 폭풍우가 몰아치자 나폴레옹은 이때를 기회로 보고 전위부대에게 도나우 강 도하를 명령했다. 전위부대가 도하에 성공한 후 7월 5일까지 약 14만의 병력이 도하했다. 그리고 바그람에서 치열한 혈전을 벌인 끝에 프랑스도 오스트리아와 비슷한 규모의 사상자를 내는 큰 손실을 기록하며 오스트리아를 격파하는데 성공했다(바그람 전투). 이 패배로 인해 오스트리아의 지휘관인 명장 카를 대공은 책임을 지고 나폴레옹 전쟁에서 완전히 물러난다.
영국은 오스트리아를 돕는 차원에서 네덜란드스페인에 병력을 보내 양쪽에서 나폴레옹을 흔들려 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군이 또 다시 나폴레옹에게 처절하게 캐발리는 바람에 영국도 네덜란드에선 별 실익을 얻지 못한 채 철군했고 스페인에선 공세에 나섰다가 되려 프랑스에게 발려서 역시 12월에 퇴각하고 말았다.
1809년 10월 14일, 오스트리아의 수도 쇤브룬 궁전에서 오스트리아는 굴욕적인 강화 조약을 체결해야 했다(쇤브룬 조약). 오스트리아는 티롤과 잘츠부르크를 바이에른 왕국에, 아드리아해 연안과 크로아티아를 프랑스에, 서 갈리치아를 바르샤바 공국, 타르노폴을 러시아 제국에게 할양하는 등 많은 영토를 상실했으나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 본토와 보헤미아, 헝가리 등 오스트리아 제국의 주요 영토는 대부분 그대로 나두었다. 훗날 나폴레옹의 몰락 때 오스트리아가 나폴레옹 뒤통수를 친 것을 보면 차라리 이 때 나폴레옹이 오스트리아 제국을 산산조각내서 보헤미아를 바이에른 왕국이나 작센 왕국에 할양하고, 헝가리를 독립시켜서 오스트리아 왕국으로만 남겨두는 편이 훨씬 나았을 것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이듬해에는 조제핀 드 보아르네를 내친 나폴레옹이 후처로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2세의 딸 마리 루이즈를 황후로 맞아들였다. 그리고...

3. 결과


[image]
틸지트 조약과 쇤브룬 조약 이후 사면으로 포위된 오스트리아
'''결과적으로 오스트리아는 고자되기 싫어 싸웠다가 팔다리가 아작난 막장인 상황에 처한다.'''
'''이때 나폴레옹의 프랑스 제국 세력은 그야말로 최전성기'''여서 라인강-피레네-알프스 산맥 내 프랑스 본토에 네덜란드, 함부르크, 로마를 병합한 프랑스 제국에 이탈리아 왕국, 형이 왕으로 있는 스페인, 동생이 왕으로 있는 베스트팔렌 왕국, 조아킴 뮈라가 왕으로 있는 나폴리 왕국, 동맹국 스위스 연방, 라인 동맹, 바르샤바 공국까지 거의 유럽의 대부분이 나폴레옹의 지배하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산꼭대기에 올라가면 내려갈 일만 남았는데...'''
[1] 나폴레옹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싸운 전투 중 최초의 패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