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샬리카시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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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어: John Malchase David Shalikashvili
  • 조지아어: ჯონ მალხაზ დავით შალიკაშვილი
1936년 ~ 2011년
미국군인. 13대 합참의장을 지냈다. 미국 내에 10만명에 불과한 조지아계 미국인으로 합참의장까지 올랐으며 사병 출신 장성이기도 하다.
1936년 7월 27일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의 집안 내력이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시대의 소용돌이에 휘말려서 매우 드라마틱하다. 조지아귀족 집안으로 아버지 드미트리 샬리카시빌리(Dimitri Shalikashvili, 1896-1978)는 공작이었다. 존의 증조할아버지는 제정 러시아의 장군이었던 드미트리 스타로셀스키(Dmitry Staroselsky)였다. 러시아 혁명 당시에 조지아민주공화국[1]이 수립됐고 드미트리 샬리카시빌리는 공화국군 중령으로 근무했다. 1921년에 소련이 조지아를 합병했을 때 드미트리는 업무상 터키에 나가 있던 참이었다. 드미트리는 폴란드로 피난 간 조지아인들에 합류했다. 드미트리는 폴란드에서 폴란드와 독일의 혈통을 지닌 백작 출신 마리아(Maria Rüdiger-Belyaeva)를 만나 결혼했고 폴란드군에 입대했다. 그 과정에 세 아들을 낳았다. 첫째 오서 샬리카시빌리[2], 둘째가 존이었다. 셋째는 게일.
1939년에 나치가 폴란드를 침범하고 폴란드군은 붕괴되었다. 드미트리는 1941년에 나치의 괴뢰군인 조지아군단에 끌려갔다가 SS 소속 조지아인 부대로 갔고 1944년에 노르망디로 갔다. 드미트리는 영국군에 항복해 포로가 되었고 폴란드에 있던 마리와와 세 아들은 소련군을 따라 독일 파펜하임으로 갔다. 여기서 가족은 재결합했고 존은 처음으로 미군을 목격했다고. 가족은 파펜하임에서 8년간 살았고 존이 16세가 된 1952년에 미국 일리노이로 이주했다.
아버지는 전기회사 아메런에서 근무했고 어머니는 은행에서 근무했다. 존은 이주 당시에 영어가 서툴렀으나 브래들리대학교에서 기계공학을 공부하고 1958년에 졸업했다. 그리고 1958년 5월에 처음으로 국적을 취득해 미국인이 되었다. 그전까지 그는 무국적자였다.[3]
1958년에 미 국적을 취득하자 미 육군에 입대하여 일병으로 근무하던 중에 간부사관(OCS)을 지원하여 1959년에 임관했다. 형인 오서는 1955년에 OCS로 임관했다. 존의 병과는 포병이었다. 존은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다. 걸프 전쟁 당시에는 성공적인 민사작전을 수행했는데 터키 정부의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만나고 이라크군의 주요 요인들과도 대면 접촉했다.
1993년에 빌 클린턴은 그를 콜린 파월에 이어 합참의장으로 지명했다. 4년의 합참의장 임기 동안 테일후크 스캔들제러미 마이클 보더 해군참모총장의 자살 같은 내부 문제와 '''북한 핵시설 공습'''[4]을 진지하게 검토하는등 피곤한 임기를 마치고 1997년에 군문을 나섰다. 2004년에는 존 케리 민주당 후보의 대선 당시 자문을 맡았다. 그 해에 뇌졸중을 겪었고 결국 2011년에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1] 당시는 그루지야였다. 그루지야가 스스로를 조지아라 불러달라 한 건 21세기에 들어서이다.[2] 1933-, 미 육군 대령을 지냈다.[3] 폴란드에서 태어났지만 조지아 망명자의 자식이라 폴란드 국적을 주지 않았다.[4] 이게 1990년대 미국의 이슈들 중에서도 가장 골때리는 이슈였는데, 이 1994년이 중국이 아직 덜 큰 상태에 러시아도 맛이 간 시절이라 타이밍만 따지면 미국이 북한을 정리하기엔 의외로 나쁘지는 않을 때였다. 하지만 남한 측과의 불협화음, 그리고 남한에 있던 미국인 최소 10만명(...)의 일괄 소개, 그리고 남한에 있는 기타 우방국들의 추가 소개(...), 그리고 당시 김영삼 한국 대통령의 극렬한 반대에 부딪혀 전쟁 '''일보 직전'''에서 지미 카터의 방북 이 성사되며 조용히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