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린 파월

 





[image]
'''이름'''
콜린 파월 (Colin Powell)
'''본명'''
콜린 루터 파월 (Colin Luther Powell)
'''국적'''
미국 [image]
'''출생'''
1937년 4월 5일, (87세) 뉴욕 주 뉴욕
'''정당'''

'''종교'''
개신교 (성공회)
'''학력'''
모리스 고등학교 (졸업) (-1954년)
시티 칼리지 오브 뉴욕 (B.S.) (1954-1958년)
조지 워싱턴 대학교 (M.B.A.) (-1971년)
[image] '''미군 복무'''
'''임관'''
ROTC
'''복무'''
1960년 - 1993년
'''소속'''
미 육군
'''최종계급'''
대장
'''경력'''
국가 안보 보좌관 (1987~1989)
합동참모의장 (1989~1993)
국무장관 (2001~2005)
'''서명'''
[image]
1. 소개
2. 생애
3. 그 후의 생활
4. 어록
4.1. 파월 독트린
5. 가족 관계


1. 소개


미국군인 출신 정치인.[1]

2. 생애


1937년 미국 뉴욕맨해튼할렘에서 태어났다. 자메이카에서 이민 온 아버지 루서 시오필리어스 파월(Luther Theophilus Powell)와 어머니 모드 애리얼 매코이(Maud Arial McKoy) 사이에서 태어났다.
파월은 시티 칼리지 오브 뉴욕에서 지질학을 전공하였으며, ROTC 과정에 입교하여 현역으로 소집[2]되었다.
서독에 주둔해있던 3기갑사단에서 소대장으로 군생활을 시작한 파월은 미 본토에 주둔해있던 5보병사단으로 자리를 옮겼고, 아내 앨마 비비안 존슨(Alma Vivian Johnson)과 결혼했다.
결혼식을 올린 뒤 파월은 베트남으로 파병가게 된다. 남베트남군 1사단에서 군사 고문으로 근무하던 파월은 행군 중 베트콩의 덫에 걸려 발에 부상을 입게 된다.
베트남 파병에서 돌아온 파월은 포트 베닝의 보병학교에서 보병 장교 상급 코스를 우수한 성적으로 수료한 뒤, 보병학교의 교관으로 근무했다. 그리고 보병학교 교관으로 근무하던 도중 지휘참모대학에 입교해 우수한 성적으로 수료하게 된다.
지휘참모대학의 교육 과정을 수료한 파월은 베트남으로 재파병되어 23보병사단에서 근무하게 된다. 예하 대대에서 부대대장으로 근무하던 도중 기존에 내정했던 작전참모를 데리고 오지 못하게 된 사단장이 지휘참모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수료한 파월을 주목해 작전참모로 데려오게 된다. 여담으로 당시 주월미군사령관이었던 '''크레이튼 에이브람스''' 대장에게 브리핑을 할 일이 생겼는데, 브리핑을 들은 에이브람스 대장의 반응이 "저 젊은 소령은 누구인가?"였다고 한다.
파월은 사단 작전참모로 일할 당시 사단장과 함께 헬기를 타고 순시를 하던 도중, 헬기 추락 사고로 인해 발목에 부상을 입게 되었다. 이후 사단장이 기존에 내정했던 작전참모가 새로 발령받자, 파월은 작전참모에서 물러나 작전참모 보좌관을 맡았다.
베트남에서 돌아온 후 조지 워싱턴 대학교 행정경영대학원에서 MBA를 취득한 파월은 육군참모차장 보좌관인 윌리엄 드푸이 중장[3]의 사무실에 배속받게 된다. 육군참모차장 보좌관실에서 일하던 당시 백악관 특별 연구원 프로그램에 선발된 파월은 백악관 행정관리예산국에서 일하게 되었다. 이 당시 행정관리예산국장은 '''캐스퍼 와인버거'''였고, 부국장은 '''프랭크 칼루치'''였는데 파월이 행정관리예산국에서 일하게 된 직후 이 둘은 보건교육복지부로 떠났지만 파월의 군생활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군으로 복귀한 파월은 주한미군에 배속되어 2보병사단 예하 대대에서 대대장을 맡았다. 주한미군 근무를 마치고 국립군사대학을 수료한 파월은 101공수사단 2여단장이 되었는데, 당시 사단장이 존 위컴 소장[4]이었다.
여단장을 지내던 도중 국가안보보좌관 즈비그뉴 브레진스키에게서 국가안보회의의 방위프로그램 참모진에 합류할 것을 제안받았지만, 이를 거절하고 국방장관과 부장관의 특별 보좌관을 맡고 있던 존 케스터의 군사 보좌관을 맡게 되면서 파월의 펜타곤 생활이 시작하게 된다.
존 케스터의 군사 보좌관을 맡던 중, 파월은 국방부 부장관 찰스 덩컨의 군사 보좌관이 되었다. 덩컨은 파월을 중용해 에너지부 장관으로 자리를 옮길 때도 파월을 인수팀으로 데려갔다. 에너지부에서 복귀한 파월은 펜타곤을 떠나길 원했지만, 덩컨의 후임인 그레이엄 클레이터 2세 역시 파월을 자신의 군사 보좌관으로 기용했고, 파월은 클레이터의 후임으로 프랭크 칼루치가 부임한 뒤에도 국방부 부장관 군사 보좌관을 지내게 된다.
칼루치에게 야전으로 복귀하고 싶다고 청원한 파월은 4보병사단 작전부사단장을 맡아 다시 야전으로 복귀했지만, 사단장이었던 존 허다첵 소장과 갈등을 빚어 진급이 좌절되는 듯 했다. 하지만 파월을 주목해오던 상부에게 구제받아 육군전투병기합동개발활동 부사령관으로 이동하게 된다.
그러나 파월의 야전 생활도 끝나게 된다. 육군참모총장 부임을 앞두고 있던 존 위컴 대장이 파월을 국방장관 캐스퍼 와인버거의 선임 군사보좌관으로 추천한 것이다. 결국 파월은 국방장관 선임 군사 보좌관으로 펜타곤에 돌아오게 된다.
펜타곤에서 지내던 중 기존의 임기를 끝마치게 되면서 파월은 8보병사단장으로 이동하게 되었고 8보병사단을 방문해 브리핑까지 받았는데, 와인버거가 파월을 붙잡게 되면서 사단장 부임이 좌절되었고, 대신 연장 근무의 대가로 군단장 영전을 약속받게 된다.
국방장관 선임 군사보좌관으로 연장 근무를 끝마친 파월은 약속대로 5군단장으로 부임하게 된다. 다시 야전으로 복귀하게 된 파월이었으나 이란-콘트라 사건이 폭로되면서 공중분해된 국가안보회의를 맡게 된 옛 상관 프랭크 칼루치가 파월을 워싱턴으로 불러들여 국가안보 부보좌관으로 기용하게 된다. 여담으로 파월은 5군단장으로 남는 걸 원했지만,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직접 전화로 부보좌관을 맡을 것을 요청하면서 결심을 굽혔다고 한다. 그리고 칼루치가 와인버거의 후임 국방장관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파월이 공석이 된 국가안보보좌관을 맡게 된다.
정권이 바뀌고 국가안보보좌관 직을 브렌트 스코우크로프트에게 이임한 파월은 흑인으로서는 세 번째로 대장으로 진급[5]해 육군전력사령관에 부임하게 된다.
그러나 육군전력사령관으로 부임한지 반 년도 안 된 상황에서 파월은 조지 H. W. 부시 대통령과 딕 체니 국방장관의 선택을 받아 합동참모의장에 임명된다.
합동참모의장에 임명된 파월은 흑인 최초의 합동참모의장이었으며, 최초의 ROTC 출신 합동참모의장이었다. 또한 합동참모의장이 보통 대장으로서 2, 3차 보직임을 감안하면 1차 보직인 육군전력사령관을 반 년도 지내지 않은 파월의 합동참모의장 임명은 더욱 주목받는 일이었다.[6]
합동참모의장으로 부임한 직후 파월은 남부사령관 맥스웰 서먼 대장과 합을 맞춰 파나마 침공[7]을 지휘했으며, 이는 성공적이었다. 이후 냉전이 끝나면서 적수가 사라졌던 미군의 재편을 주도하던 파월은 걸프 전쟁이 일어나자 중부사령관 노먼 슈워츠코프 대장과 합을 맞춰 이라크군을 상대하게 된다.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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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프 전쟁 후에 뉴욕에서 퍼레이드를 하던 파월 장군.

걸프전쟁의 승리 이후 약 8개월 후인 1991년 11월 한국을 방문한 모습. 오른쪽은 대한민국 국군 합참의장이던 대한민국 육군대장 정호근 장군[9]이다.
걸프전 직후 파월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미국 여론공화당에서는 그를 원수로 진급시키려고 했다. 만약에 성사됐으면 오마 브래들리 장군에 이어 11번째 원수로 진급했을 텐데, 빌 클린턴 정권인수위에서는 이를 거부했다.

3. 그 후의 생활


1993년 8월에 퇴역했다. 전쟁 영웅으로 1996년엔 공화당에서 빌 클린턴을 견제할 대항마로 떠오르기도 했으나 밥 돌이 나갔고 졌다. 파월 본인은 35년간 군인으로 봉직한 뒤에 인생을 여러 모로 돌이키는 단계라 출마가 어렵다고 밝혔다.

괜한 박수가 아니었다. 한 여론 조사는 다음해에 있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민주당의 클린턴과 공화당의 보브 돌이 대통령 후보로 나와 맞서는 선거판에 파월이 무소속으로 끼여들어 3파전을 펼칠 경우, 유권자의 3분의 1이 파월을 찍겠다고 했다는 놀라운 결과를 내놓았다. 또 파월이 만약 공화당 대통령 후보가 될 경우 클린턴을 근소한 차로 물리친다고도 했다. 공화당 내에서도 파월은 22%의 지지율을 보였다. 보브 돌의 43%에는 못 미쳤지만 워싱턴 정치판의 고참들인 팻 뷰캐넌이나 필 그램이 얻은 지지율 6%에 비하면 놀라운 수치였다. 출처

그 후 21세기 들어서 조지 워커 부시의 행정부에서 흑인 최초의 국무장관을 맡았으나 이라크 전쟁 등에서 딕 체니도널드 럼즈펠드 등과 의견 차이를 보였다. 파월이 상대적으로 온건했던 탓이다.[10] 조지 부시 2기 행정부에서 사임하였다. 그의 뒤를 이어 국무장관을 지낸 이는 콘돌리자 라이스이며, 역시 흑인이다. 이러한 국무장관들로 인해 부시정권은 최초 흑인 남녀 국무장관이 임명되고 있었던 최초 정권으로 기록되나 인권정책에서는 워낙 엉망인 부시 정권이 워낙 크고 아름다운 삽질을 해놨던지라 그는 공화당 지지자임에도 2008년 대선에서 버락 후세인 오바마를 지지했다.
그 외에도 파월은 딕 체니를 매우 경계하고 싫어했다. 사실상 명예직에 가까운 부통령이 실세로 군림하며 모든 상위 각료들에게 간섭해댔으니 싫어할 수 밖에. 부시 정부 측근이었던 사람치고 체니 부통령을 좋아했던 사람은 사실 몇 없다.
201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힐러리 클린턴의 선거인단 3명이 콜린 파월을 찍었다.
2020년 6월 7일에는 조 바이든을 지지하겠다고 밝혔다.#
2020년 1월 10일 2021년 미국 국회의사당 점거 폭동 이후 있던 인터뷰에서 더이상 자신을 공화당 당원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발언을 했다.#

4. 어록


  • Get mad, then get over it.
화를 내되 뒤끝은 남기지 마라.
  • Never let your ego get so close to your position that when your position goes, your ego goes with it.
당신의 지위에 당신의 자아가 휘둘리지 않도록 하라.
  • Giving back involves a certain amount of giving up.
보복은 어느 만큼의 포기를 포함하고 있다.
  • Command is lonely.
지휘란 외로운 것이다.
  • I have seen what war can do.
전쟁이 무엇을 해낼 수 있는지 보아 왔지.
  • Pottery Barn Rule. Once you break it, you are going to own it.
포터리 반[11]의 법칙. "당신이 부순 것은 당신이 사들여야 한다." [12]
  • The commander in the field is always right and the rear echelon is wrong, unless proved otherwise.
반증되지 않는 이상, 현장의 지휘관이 항상 옳고 후방(의 상급 지휘관)은 그르다.

4.1. 파월 독트린


군사력을 동원해야 하느냐의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 파월이 제시한 8대 기준. 다만 파월 장군의 독창적인 생각은 아니고, 레이건 행정부의 국방장관이었던 캐스퍼 와인버거가 제시한 '와인버거 독트린'(이건 6개 내용으로 구성되었다)을 바탕으로 보완, 발전시킨 내용이다.
  • 핵심적 국익이 위협받고 있는가?(Is a vital national security interest threatened?)
  • 비군사적 조치들은 충분히 시도된 후인가?(Have all other non-violent policy means been fully exhausted?)
  • (군사력을 통해) 달성하려는 목표는 구체화되어 있는가? (Do we have a clear attainable objective?)
  • (군사력 사용에 따른) 결과는 확실히 고려된 상태인가?(Have the consequences of our action been fully considered?
  • (군사력 동원에 따르는) 비용과 위험은 정확히 분석되었는가? (Have the risks and costs been fully and frankly analyzed?)
  • 군사적 개입의 무분별한 연장을 막기 위한 출구 대안이 세워져 있는가?(Is there a plausible exit strategy to avoid endless entanglement?)
  • 국민의 지지를 받고 있는가?(Is the action supported by the American people?)
  • 광범위한 국제적 지지를 받고 있는가?(Do we have genuine broad international support?)
위의 내용들을 기준으로 맞춰봐도 걸프전(1991년)은 왜 성공했고, 반대로 이라크전(2003년)은 왜 실패했는지를 확연히 알 수 있을 것이다.

5. 가족 관계


  • 루터 테오필러스 파월 (父)
  • 마우드 아리얼 맥코이 파월 (母)
  • 알마 존슨 파월 (부인)
    • 마이클 케빈 파월 (장남)[13]
      • 제프리 파월 (장손)
      • 브라이언 파월 (차손)
    • 린다 파월 (장녀)
    • 엔-마리 파월 (차녀)

[1] 사진은 국무장관에서 사임한 후 얼마 뒤인 2005년 3월의 사진이다.[2] 이름에만 예비역이 들어가는 한국의 ROTC와 달리, 미군 ROTC는 전군 장교들이 원칙적으로 졸업, 임관, 전역을 동시에 하는 진짜 예비역 장교 과정이다. 전역하지 않고 바로 현역으로 소집되어 복무하는 것도 소수가 선발된 인원만이 한다. 베트남 전쟁 시기엔 장교 공급이 모자라 거의 100% 현역 소집되었다.[3] 대장 진급 후 초대 육군훈련교리사령관을 지내면서 현재 미 육군의 교리를 확립하게 된다.[4] 12.12 군사반란 당시 주한미군사령관이었으며, 주한미군사령관 이임 후 육군참모차장과 육군참모총장을 지내게 된다.[5] 볼로 작전 당시 포드 편대를 지휘했고, NORAD 사령관을 지낸 대니얼 제임스 2세 공군대장이 최초의 흑인 4성 장군이고, NATO 군사위원회 미군 대표를 지낸 로스코 로빈슨 2세 육군대장이 두 번째 흑인 4성 장군이다.[6] 2020년 현재 합동참모의장인 마크 밀리 육군대장도 육군전력사령관과 육군참모총장을 거쳐 합동참모의장이 되었고, 전임인 조지프 던퍼드 해병대장은 해병대부사령관, ISAF 사령관, 해병대사령관을 거쳐 합동참모의장이 되었다.[7] 마누엘 노리에가를 쫓아낸 사건이다. 이 일로 파나마군은 해체되었고 공공부대만을 운용한다.[8] 슈워츠코프는 직책상 상관인 파월보다 2년 먼저 임관했었지만, 걸프전 당시 파월과 훌륭한 팀웍을 발휘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하지만 슈워츠코프는 파월의 정치 행보를 못마땅하게 여겨, 자서전에서 '파월은 정치군인이 되었다'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걸프전 승리로 전쟁 영웅으로 떠올랐던 파월과 슈워츠코프 모두 정치권의 러브콜을 계속 받았지만 슈워츠코프는 "난 출마 안한다"라고 딱 잘라서 거절한데 반해 파월은 "내가 지금은 안 나가지만, 나중엔 글쎄..."라는 여지를 남겨두는 화법으로 비껴나가는 자세를 취했고, 슈워츠코프를 비롯한 군 장성들 일부가 이런 태도를 상당히 못마땅하게 여긴게 사실이다. 애초에 파월은 야전 지휘관보다는 펜타곤에서 군사 정책을 주로 다뤄오면서 워싱턴 정치권과 연결된 정치군인으로 유명했고, 반면에 슈워츠코프는 야전에서 군생활의 대부분을 보내왔기 때문에 차이가 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9] 정 장군은 1년 전 개정된 국군조직법 개정으로 육-해-공 3군의 야전부대에 대한 작전지휘권을 총괄적으로 행사하게 된 최초의 합참의장이었다.[10] 이는 파월이 전쟁을 몸소 체험했던 인물이기에 전쟁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파월 외에도 2차대전 후 미국의 역대 국무장관 중에는 고위 장성 출신이 더러 있었다. 유럽 재건구상인 '마셜 플랜'으로 유명한 조지 C. 마셜 장군은 2차대전 당시 미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한 원수였고, 레이건 행정부의 첫 국무장관인 알렉산더 헤이그 장군도 나토 사령관을 역임했던 육군대장 출신이다. 그의 이런 모습은 딕 체니의 일생을 전반적으로 다룬 블랙 코미디 영화 바이스에서도 잘 드러난다. 부시와 딕 체니가 이라크를 침공을 논의할 때, 도널드 럼즈펠트는 이라크 침공을 어떻게든 해야한다는 모습을 보이는 반면, 콜린 파월은 이라크 침공에 대해 엄청난 회의감을 드러낸다. 이라크가 주권국가인 것을 감안하는 것은 물론 이라크 침공 이후 벌어질 사태에 대한 탈출방안에 대해서도 물어보는데, 극중에선 이런 입장차에 의해 도널드 럼즈펠트와 말다툼을 하는 것으로 나온다.[11] 미국의 생활용품 체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처음에는 도자기 체인점에서 출발하였고 디스플레이 된 상품을 파손한 경우 손님이 이를 사가야 한다는 법칙을 만들어냈다.[12] 이 말은 그가 조지 부시 대통령과 독대한 자리에서 이라크 전쟁에 대해 평가한 말이다. 그는 후세인을 죽이는 것은 쉽지만 그 이후의 이라크의 정세에 대해서는 미국이 철저히 책임져야 하는 상황에 부딪힐 것을 염려했고 그것은 이후 사실이 되었다.[13] 아버지의 뒤를 이어 육군 장교로 임관했으나, 독일에서 근무중 교통사고를 당해 중상을 입어 조기전역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