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엘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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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버 브롱코스 No.7'''[1]
존 앨버트 엘웨이 주니어
(John Albert Elway, Jr.)
'''생년월일'''
1960년 6월 28일
'''국적'''
미국
'''출신지'''
워싱턴 주 포트 엔젤레스
'''학력'''
스탠포드 대학교
'''체격'''
191cm, 98kg
'''포지션'''
쿼터백
'''프로입단'''
1983년 드래프트 1라운드 전체 1순위
볼티모어 콜츠 지명
'''소속팀'''
'''덴버 브롱코스 (1983~1998)'''
'''프런트'''
콜로라도 크러시[2] 공동 구단주 겸 회장 (1998~2003)
덴버 브롱코스 부사장 (2011~2020)
덴버 브롱코스 단장 (2014~2020)
덴버 브롱코스 회장 (2021~)
'''수상'''
Super Bowl MVP (XXXIII)
NFL MVP (1987)
First-team All-Pro (1987)
2× Second-team All-Pro (1993, 1996)
9× Pro Bowl (1986, 1987, 1989, 1991, 1993, 1994, 1996-1998)
NFL 1990s All-Decade Team
NFL passing yards leader(1993)

'''1987년 NFL 정규시즌 MVP'''
로렌스 테일러
(뉴욕 자이언츠)

'''존 엘웨이
(덴버 브롱코스)'''

부머 어사이어슨
(신시내티 벵골스)
'''제33회 슈퍼볼(1999) MVP'''
터렐 데이비스
(덴버 브롱코스)

'''존 엘웨이
(덴버 브롱코스)'''

커트 워너
(세인트루이스 램스)
1. 소개
2. 프로 시절
2.1. 커리어 초중반: 콩라인
2.2. 커리어 말기: 꿈은 이루어진다
3. 선수 은퇴후
3.1. 덴버 브롱코스의 단장


1. 소개


미식축구 선수. 포지션은 쿼터백. 소속팀은 → '''덴버 브롱코스'''.[3]
NFC 우승팀 샌프란시스코댈러스그린베이가 13년 동안 슈퍼볼을 독식하던 NFC의 전성시대를 끝장낸 AFC 우승팀 덴버 브롱코스의 주전 쿼터백. 야구 선수 겸업 논쟁, 드래프트 징징 사건 등으로도 유명하다.

2. 프로 시절



2.1. 커리어 초중반: 콩라인


원래 1983년 드래프트에서 전체 1순위로 볼티모어 콜츠의 지명을 받았으나, 자기는 가족이 가까이 있는 서부 지역 으로 가고 싶다면서, '''"서부 지역 팀으로 트레이드시켜주지 않으면 풋볼 때려치고 차라리 처음 지명을 받았던 뉴욕 양키스에서 야구 할꺼다!!"''' 라고 선언해 버렸다. 이에 뉴욕 양키스는 언제부터 서부지역 팀이었느냐고 태클을 걸 수도 있겠으나, 당시 볼티모어에서 인디애나폴리스로 야반도주 한 막장 분위기에다가 별다른 노력도 없이 엘웨이 지명으로 어떻게 해볼까 요행을 바라던 볼티모어 콜츠와는 달리 뉴욕 양키스는 명문 팀이라서 그 정도 희생을 감수할 수 있다는 식의 태도였다. 이 때문에 어른스럽지 못하다고 였으나, 결국 자기 소원대로 서부지역 팀인 덴버 브롱코스로 트레이드되었다. ...
그러나 90년대 중반까지 엘웨이는 댄 마리노와 비슷하게 재능은 출중하나 결정적인 순간에 움츠러드는 새가슴이라는 평을 피할 수 없었다. 80년대에 브롱코스를 슈퍼볼로 3번이나 이끌었지만, 세 번 모두 철저하게 대패했기 때문.[5] 첫 슈퍼볼이었던 XXI에서는 뉴욕 자이언츠에 20-39로 패배했고, 엘웨이 본인도 상대 쿼터백인 필 심스와의 대결에서 패배했다.[6] '''그러나 이게 엘웨이의 슈퍼볼 패배 중 제일 점수차가 적은 슈퍼볼이 될 거라고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음 해의 슈퍼볼 XXII에도 브롱코스를 이끌었고, 전반에 10-0으로 앞서고 있을 때 상대팀인 워싱턴 레드스킨스의 쿼터백 덕 윌리엄스가 부상으로 나가면서 작년의 악몽을 떨치는 듯 했으나, 만화영화마냥 윌리엄스가 필드로 돌아온 후 '''42점'''을 스트레이트로 뽑아내면서 10-42 역전패로 경기 종료. 윌리엄스는 슈퍼볼에서 승리한 첫 흑인 쿼터백이 되는 영예를 얻었고, 엘웨이는 마치 스포츠 영화에서 나오는 잘생긴 엄친아 악역 캐릭터가 된 느낌으로 다시 분루를 삼켜야했다.[7]
2년 후, 슈퍼볼 XXIV에 진출했으나......문제는 상대가 조 몬태나가 이끄는 무지막지한 샌프란시스코였다. 걸출한 쿼터백 대결을 예상했지만, 샌프란시스코의 수비가 엘웨이와 덴버 공격진을 압살하는 반면 몬태나는 덴버 수비를 비참하게 유린하며 브롱코스는 10-55로 무자비한 점수차로 패배했다[8]. 엘리트 쿼터백 간의 대결 치고는 너무나도 압도적인 패배.
즉슨, 걸출한 쿼터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3번의 슈퍼볼에서 상대 쿼터백에게 너무나도 압도적으로 밀렸기 때문에 "우승을 못하는 쿼터백"이라는 꼬리표가 붙은 선수였다. 그리고 약 6년간 덴버는 그만큼의 포스를 풍기지 못하면서 엘웨이도 이제 별 수 없군이라는 의견이 커지기 시작했다.

2.2. 커리어 말기: 꿈은 이루어진다


그러나 95년에 헤드코치가 마이크 섀너핸[9]으로 바뀌고, 95년에 지명된 무명 신인 러닝백 터렐 데이비스가 각성하면서 엘웨이의 커리어 막판에 기회가 찾아왔다. 97-98 시즌에 덴버는 압도적인 성적은 아니었지만 포스트시즌에 와일드카드 팀으로 진출하는 데 성공했고, 슈퍼볼에서 작년 우승팀인 그린베이를 데이비스의 활약에 힘입어 치열한 접전 끝에 꺾었다. 우승이 확정되자, 덴버 구단주 겸 운영단장이었던 팻 볼렌은 슈퍼볼 트로피를 든 채 "이건 존을 위해서다!"(This one's for John!)이라고 외치면서 감동적인 장면을 연출했다.[10][11]
그리고 다음 해, 덴버는 다시 슈퍼볼에 진출했고 애틀랜타를 꺾고 2연패를 달성, 엘웨이는 자신의 프로 인생 마지막 경기를 우승과 슈퍼볼 MVP로 장식하며 자신의 드라마틱한 커리어를 마무리지었고, 1999년 5월 2일에 은퇴를 공식 선언했다.
금발벽안에 가까운 '''전형적인''' 백인에다가 스탠퍼드대 경제학과 졸업[12], 대학시절에는 야구-풋볼 양다리를 걸치면서 양쪽 스포츠에서 다 지명을 받을 정도의 준수한 활약에 깔끔한 외모, 현역시절까지만 해도 모범적인 사생활에 선수생활하면서 자동차 딜러 부업을 해서[13] 1억달러에 가까운 재산을 모으고, 선수로서도 초반에는 콩라인 루트를 타면서 고전했지만[14] 결국에는 슈퍼볼 2회 연속 우승 (수퍼볼32(1998), 33(1999)), MVP, 명예의 전당 입성 등 NFL에 도전하는 모든 선수들의 꿈은 다 이룬 미국적인 엄친아의 상징으로서 백인팬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3. 선수 은퇴후


은퇴 이후로는 잠시 풋볼계를 떠나 이것저것 사업에 손을 댔고 LA 지역 중고차 딜러로 큰 돈을 벌었었다. 그후 중고차 딜러 말고 다른 사업을 하다 재산을 좀 날리고[15] 이혼당하는 개인적인 비극은 있었지만 여전히 콜로라도 지역에서의 인기는 절대적. 커리어만 보면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이 사람과 비견될 엄친아. 아니 그 사람에게는 없는 우승반지까지 있으니 더 엄친아일지도.

3.1. 덴버 브롱코스의 단장


2011년 초, 과거의 영광은 완전히 안드로메다행을 태우고 막장의 절정으로 달리던 덴버 브롱코스의 단장으로 취임한다. 하기만 하면 성공가도를 달리던 이 사람이 브롱코스를 어떻게 부활시킬지 팬덤의 관심이 높다. 다만, 덴버 막장화의 큰 원인중 하나가 쿼터백의 불안정이고, 이는 자기 팀 주전 쿼터백을 항상 엘웨이와 비교하면서 스트레스를 주던 덴버 브롱코스 팬덤의 빗나간 엘웨이 사랑[16]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던지라, 이것을 수습하는 사람이 엘웨이라는 것은 상당히 아이러니한 노릇이다.
결국 2011년 팀이 1라운드에 지명했던 플로리다 대학교 출신 팀 티보우가 극적인 6연승으로 팀을 플레이오프로 이끌었음에도, 그가 쿼터백으로써 수준미달이라고 판정하고 뉴욕 제츠로 트레이드 해버린 뒤 인디애나폴리스 콜츠를 퇴단한 현역 최고의 쿼터백이었던 페이튼 매닝을 영입해 그에게 쿼터백 자리를 맡겼다.
2012년 페이튼 매닝을 사령탑으로 시작한 덴버 브롱코스는 바이위크까지 3승 3패의 출발을 보였으나 이후 10연승 쾌속 질주하며 13승 3패로 AFC 전체 1위의 성적을 기록하며 존 엘웨이의 선택이 옳았음을 증명했다. 그리고 본인이 GM으로 부임한 4년동안 4년연속 지구우승, 슈퍼볼 2회진출에 1회 우승 등으로 프런트로서도 성공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다. 특히 2013년의 슈퍼볼 실패이후로 실패의 원인을 냉정히 분석하고 페이튼 매닝을 중심으로 하는 공격 위주의 팀을 불과 2년만에 최고의 수비진을 구성해서 슈퍼볼 우승을 탈환하는 등 선수단을 구성하는 능력과 팀에 도움이 될 선수들을 선발하는 정확한 안목, 그리고 과감한 결단이 빛을 발하고 있으면서 명선수 출신으로서 지도자 경력 없이 프런트로서 성공하는 비범한 커리어를 지속하고 있다.
그러나 페이튼 매닝의 은퇴 후, 초반의 성공을 이어가지 못하고 있는 모습이 보이고 있다. 매닝이 워낙 걸출한 쿼터백이었기 때문에 그를 완벽하게 대체하긴 불가능했겠지만, 문제는 그가 매닝의 후계자로 점찍었던 브록 오스와일러는 기대 이하의 모습을 보여줬다가 결국 FA로 떠나고[17] 2016년 신인지명 1라운드에서 지명한 팩스튼 린치는 눈썩 수준의 쿼터백 플레이를 보여주며 2018년에 결국 방출되었다. 2018년에 FA로 전 시즌 미네소타에서 훌륭한 활약을 한 케이스 키넘을 데려왔으나, 이제는 쿼터백 뿐만이 아니라 팀 전체가 부진한 모습을 보이며 구단 운영에서 실책하고 있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물론 덴버의 레전드이고 경영진으로도 슈퍼볼 우승을 안겨준 이력이 있기 때문에 함부로 경질이 되진 않겠지만, 슬슬 덴버의 부진에 대해 말이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결국 2019시즌, 2020시즌 둘다 성적이 바닥으로 추락하자 2021년 1월 5일 결국 단장직에서 물러나 회장직으로 이동해 구단 운영에 손을 떼기로 했다. 후임 단장은 미네소타 바이킹스에서 13년 간 근무했던 조지 패튼.

[1] 영구 결번[2] AFL[3] 볼티모어 콜츠에 입단한 뒤 바로 트레이드되었다.[4] 팀의 4번째 패배 때는 부상으로 백업 프랑크 라이크가 선발출장하였다.[5] 3패는 프랜 타킨턴, 짐 켈리[4], 톰 브래디와 함께 선발 쿼터백 최다패. 6승이나 거둔 톰 브래디는 그렇다 치고, 엘웨이도 말년에 2우승을 추가하며 유종의 미를 거둔 데 비해 타킨턴과 켈리는 그저 안습...[6] 심스는 25개의 패스 중 22개를 성공시키면서 무지막지하게 효율적인 경기를 펼쳤고, 결국 MVP를 수상했다.[7] 물론 이건 엘웨이의 잘못은 아니다. 단지 윌리엄스의 부상복귀와 첫 흑인 우승 쿼터백이란 점이 너무 드라마틱했을 뿐.[8] 이 45점의 점수차는 슈퍼볼에서 나온 최대 점수차 기록이다.[9] 현 샌프란시스코 감독 카일 섀너핸의 부친.[10] 그리고 18년 후, 덴버가 슈퍼볼 50에서 우승하자 엘웨이는 트로피를 들고 "이건 팻을 위해서다!"(This one's for Pat!)이라고 외치면서 훈훈한 장면을 연출했다. 볼렌은 2014년에 알즈하이머병 증세로 인해 운영단장 직책에서 내려간 상태였다.[11] For John, for Pat [12] 중간에 드래프트에 나온 게 아니다. 졸업장 받고 NFL에 들어왔다. 보통 웬만큼 실력이 되면 3학년 마치고 들어오는 게 NFL인데, 3학년 때 드래프트에 올라올 수 있는 실력임에도 불구하고 본인 의지로 4학년 졸업까지 마쳤다. 참고로 아무리 운동을 잘해도 3학년 정도까지 다니는 것과 졸업장을 받고 나오는 것은 얘기가 달라진다. 심지어는 시니어까지 마치고 프로에 들어와도 졸업장은 못 받고 학교를 나올 수 있다.[13] 지금도 LA와 덴버 지역에는 이 아저씨 이름을 내건 현대자동차 딜러십이 있다. 다만 딜러십 자체는 다른 사업한다고 팔아서 지분은 가지고 있지 않은 모양.[14] 24회 슈퍼볼(1990)에서 'West Coast Offense'의 샌프란시스코 포티나이너스 쿼터백 조 몬태나에게 그야말로 관광 당했다(...) 경기결과는 49ers의 55-10 승리로 나이너스의 55점과 45점이라는 점수차는 수퍼볼 역대 최고 기록이다. 55실점이나 한 건 수비진의 탓이므로 엘웨이만의 문제는 아니지 않느냐는 의문을 제기할 수는 있겠으나 엘웨이 본인도 인터셉트를 연발하면서 샌프란시스코가 55점을 따는데 공헌(...)했으니 할 말은 없다.[15] 위와 같은 커리어 때문에 자신의 능력을 조금 과신하는 경향이 있다. 이 사업 저 사업에 도전하는 것도 그런 성향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16] 특히 팀을 플레이오프 진출 시키고도 까였던 쿼터백 브라이언 그리시제이크 플러머, 제이 커틀러같은 선수가 넌 엘웨이 만큼도 못하냐고 갈굼당하고 팀내에서 왕따가 되는 등 이 여파는 매우 컸다.[17] 오죽하면 엘웨이가 이에 대해 제일 잘 한 건 오스와일러가 FA로 떠나게 놔뒀다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