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승민
1. 소개
전 야구 선수. 한화 이글스, 삼성 라이온즈, 두산 베어스에서 활약했다.
2. 선수 생활
북일고등학교와 한양대학교를 졸업하고 2001년 한화 이글스에 입단했지만 그리 눈에 띄는 활약을 하지 못하다가 2003년 2:2 트레이드(지승민+고지행 ↔ 김승권+임재철)로 삼성 라이온즈에 이적했다. 기량이 발전한 2004년에는 원 포인트 릴리프로 등판해 소화 이닝은 적었지만, 17홀드를 올리며 삼성 필승 중간계투진의 한 축으로 활약했다.
그러나 2004년 말 병풍에 연루되어 구속되었다.[1] 2005년 시즌 중 출소하여 잠시 1군에 복귀했으나, 곧 공익근무요원으로 입대하며 잊혀졌다.
2007년 11월 소집 해제를 앞두고 교통사고를 당한 그는 왼쪽 어깨 인대 5개가 끊어지는 큰 부상을 당하며 방출되었다가, 2008년 6월에 신고선수로 계약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2009년에 드디어 1군에 복귀했으나 김상수와 함께 2009년 6월 A형 간염 판정을 받아 1군 엔트리에서 제외되었고, 2009년 7월 16일 포수 채상병을 상대로 두산 베어스에 트레이드되었다. 당시 삼성에는 진갑용, 현재윤, 심광호가 잇따라 부상을 당해 갑작스러운 포수난이 찾아오면서 조금이라도 경험이 있는 포수가 필요했고, 이정식은 상무에서 복무 중이어서 당장 가용할 수 없었다. 반면 두산에는 좌완 투수가 필요했기 때문.
두산 이적 후에는 김선우 다음가는 투수진의 최고참이 되며 '''"할배"'''란 별명이 붙었다. 그 해 1세이브 8홀드 평균자책점 2.88을 기록하고 PS에도 출전했다. 특히 SK와의 플레이오프 3차전 5회초 1사 2-3루에서 등판해 이재원을 3루 땅볼, 박정권을 헛스윙 삼진으로 잡아내며 무실점을 기록했다.[2]
하지만 2010 시즌에는 2009년의 모습을 보여 주지 못하고 거의 2군에 머물렀는데, 2군에서 팀 분위기를 해친다는 이야기[3] 가 나왔다. 그가 2군을 전전하게 되는 바람에, 선발로 부진하였던 이현승이 좌완 불펜으로 나설 정도였다. 결국 2010 시즌 후 두산에서 방출당해 은퇴했다. 은퇴에 후회하지 않는다고 인터뷰했다.
2009년 채상병을 상대로 트레이드될 당시 삼성 팬들이 "우리가 손해 아닌가?"라는 반응을 보였지만, 2010년 시즌을 마치고 지승민이 망했어요로 전락하면서 최종 승자는 삼성이 되었다.[4]
3. 연도별 성적
4. 관련 문서
[1] 지승민은 본인 부분 외에도 윤성환에게 브로커를 소개한 혐의까지 포함하여 구속기소되어 1심에서 징역 10월을 선고받았는데, 항소심에서 윤성환이 병역기피를 시도하지 못한 부분이 무죄가 되면서 8월로 감형받았다. 즉 항소심은 팀 선배 지승민으로부터 브로커를 소개받은 윤성환이 병역기피를 시도하려 한 것은 사실로 보았으나, 진단서를 첨부해 지방병무청장에게 병역처분변경원을 제출하지 않은 이상 준비행위에 불과하지(형벌법규에서 예비죄는 살인, 강도 등 특별한 규정이 있는 중범죄만 처벌할 수 있으므로 준비행위를 처벌하려면 별도의 규정이 있어야 한다) 병역법상의 병역기피행위를 아직 개시했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한 것. 윤성환이 병원에서 진단서를 떼기 직전에 사건이 터졌다는 절묘한 타이밍이 운명을 갈랐다. 결국 윤성환은 2004 시즌을 마치고 공익근무요원으로 입대했다.[2] 다만 경기는 두산이 패배했고 시리즈도 탈락하고 말았다.[3] 후배 선수들에게 담배셔틀을 시켰다고.[4] 채상병은 비록 삼성에서 눈에 띄는 기록을 남기지 못했지만, 2011년에 이정식과 현재윤 등이 부상으로 1군에 거의 출전하지 못하자 팀 내 유일한 백업 포수로 활약하며 2011년 삼성의 우승에 기여했다. 그리고 채상병 본인도 처음으로 우승 반지를 끼게 됐다. 진갑용이 노령으로 전 경기 소화가 힘들다는 점과 당시에는 이지영이 상무에서 군 복무 중, 나머지 유망주들은 2군에서도 수준 이하의 성적을 보여 줬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어떤 의미에서는 채상병의 영입이 신의 한 수였다. 채상병이 없었다면 백업 포수의 부재로 진갑용이 퍼지거나 혹은 진갑용의 비출장 경기에서 크게 털렸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즉, 빛과 소금같은 역할을 한 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