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안카를로 피지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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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탈리아의 전 포뮬러 1 드라이버. 대부분의 다른 동시대 F1 드라이버들처럼 어렸을 때부터 카트 경주를 시작하여 상위 클래스로 올라가다, 1992년 이탈리아 포뮬러 3 챔피언십에 참가, 1993년에는 준우승을 했고, 모나코와 마카오 경주에서 승리한 후 1994년에 우승을 차지했다. 1995년과 1996년에는 잠시 F1을 떠나 국제 투어링카 챔피언십(DTM)에서 알파 로메오 소속으로 주행했다.
그의 별명, 애칭으로는 지아노, 피지코, 또는 피지 등으로 대신 부른다.
2. 선수 경력
2.1. 포뮬러 1
2.1.1. 미나르디 F1 팀
1996년 미나르디 팀에서 데뷔했다. 하지만 당시 미나르디는 팀의 자금문제를 원만히 공급 해줄 수 있는 드라이버를 필요로 했기 때문에 당시 풀시즌으로 마치지 못했고 피지켈라를 지오반니 라바기로 교체했다.
2.1.2. 조던 그랑프리 1기
이후 97년에는 94, 95시즌 챔피언인 미하엘 슈마허의 동생, 랄프 슈마허와 팀메이트로 활동하게 되면서 포뮬러 니폰 챔피언이었던 에디 조던의 조던 팀으로 이적했다. 캐나다 그랑프리 대회에서는 3위로 피니쉬하여 첫 번째로 포디엄에 올라가게 되었고, 랄프보다 높은 순위로 끝마쳤다. 이후 독일 GP가 열린 호켄하임링에서는 피지켈라가 우승할수도 있는 것처럼 보였으나, 타이어에 펑쳐가 나버렸고 게르하르트 베르거가 우승하였다. 그 다음 벨기에 그랑프리에서는 웻 컨디션에서 미하엘 슈마허에 이어 2위를 차지하며 그의 재능을 다시 한번 보여줄 수 있었다. 시즌이 끝나고, 베네통은 1998년에 그와 계약했다.
2.1.3. 베네통 포뮬러
베네통은 당시 르노가 윌리엄스에 우선적으로 엔진 공급에 대한 이점을 주고 있어 올해 쓰이는 리브랜딩 개발 버전을 사용하는 대신, 97시즌의 르노엔진으로 시즌을 겨루게 되었다. 비록 엔진이 새로운게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피지켈라는 몬트리올과 모나코 GP에서 작년과 마찬가지로 2위를 차지했고,캐나다 GP에서도 기어박스 문제로 리타이어 하기 전까지 우승을 할수있는 포지션에서 다투었다. 오스트리아에서는 처음으로 폴 포지션을 득점했지만, 경기 중에 장 알레시와 충돌로 좋은 결과를 가져올 기회를 잃었다. 이후로는 베네통이 챔피언쉽 경쟁에서 밀리면서 후반기에는 2점밖에 얻어낼 수 없었다. 99년에도 시즌이 개막한 이후 지난 시즌과 마찬가지로 여러번 포인트 피니쉬를 해냈고 캐나다 GP에서는 2위를, 그리고 뉘르부르크링에서 열린 유러피언 그랑프리에서는 거의 우승에 근접했지만 리타이어하였다.
피지켈라는 2000년이 시작된 후에는 올해 초 브라질 GP에서 2등으로 들어와 트로피를 얻어냈지만, 베네통의 시즌 후반기 부진으로 인해 더 이상 득점은 해내지 못했다. 베네통에서의 첫 해 이후, 피지는 오스트리아의 팀메이트인 알렉산더 부르츠를 압도적으로 앞섰고, 이후 2001년, 부르츠는 신인이었던 젠슨 버튼에게 자리를 내주기 위해 팀을 떠났다. 이듬해 르노가 2000 시즌이 시작된 후 베네통 팀을 인수했지만, 급진적인 엔진 설계와 베네통의 경쟁력 없는 낮은 성능의 차량은 2001년도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결과적으로 피지켈라는 미나르디, 프로스트와 같은 최하위권 팀들과 시즌의 대부분을 싸우고 있었지만, 기술 감독인 마이크 가스코인과 팀원들의 노력으로 독일 그랑프리에서 4등, 5등으로, 벨기에 GP에서는 피지켈라가 3위로 포디엄에 들게 되었다. 하지만 당시 팀이 예상했던 것보다는 최고의 결과를 얻게 되었고 피지가 계속해서 버튼보다 앞섰지만, 팀이 피지켈라를 드라이버자리에서 교체하였기 때문에 2002년에는 다시 조던으로 가서 합류했다.
2.1.4. 조던 그랑프리 2기
피지켈라는 조던으로 옮긴 후 이적 첫 해에 총 7점을 득점했고, 그 해의 조던-혼다는 그렇게 경쟁적이지는 않았지만 새로운 팀 메이트인 사토 타쿠마를 상대로 여유 있게 앞질렀다. 혼다가 엔진 공급을 중단한 이후, 조던은 2003년 시즌을 위해 포드 엔진으로 교체했지만, 팀은 여전히 상위권의 페라리, 맥라렌-메르세데스, 윌리엄스-BMW와 경쟁할 정도의 파워는 많이 없었다. 이러한 경쟁력 부족에도 불구하고, 피지켈라는 2003 브라질 GP에서 본의 아니게 첫 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강우가 내리는 트랙에서 수많은 충돌이 일어나 적색기가 발령되었던 상황에서 경기가 종료되기 직전 맥라렌의 키미 라이코넨과 54랩에서 배틀을 벌이며 선두에 나섰다. 하지만 경기 규정상 적색기가 두 바퀴 전에 발표되었기 때문에 그 당시 순위로 결과를 인정했었는데, 그 때 라이코넨이 레이스 리더로 판정되어 피지켈라는 2위로 강등되었다. 그러고 나서 며칠 후, FIA는 피지켈라가 적색기 발령 전, 56번째 랩을 이미 돌고있었다고 번복하면서 결과를 수정했다. 이는 곧 라이코넨이 아닌, 이른 경기 종료를 두 바퀴 앞두고 선두를 달리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과적으로 피지첼라는 포디엄 1등 자리에 서지 않고 경주를 우승한 유일한 F1 드라이버가 되었으며, 생애 처음으로 F1에서의 첫번째 승리를 해내며 팀에 우승컵을 안겨주었다. 이후 2003년 피지켈라가 획득한 다른 포인트는 인디애나폴리스에서 개최된 미국 GP에서 7위로 피니쉬한 것뿐이 없었다. 시즌이 끝나고 전체 성적은 12점을 기록한다.
2.1.5. 자우버 F1 팀
피지켈라는 2004년에 자우버로 자리를 옮겨 조던에서의 낮은 성적에 대한 불만을 해소하고자 더 큰 결과를 기대했다. 자우버에서는 페트로나스로 리뱃지된 이전시즌 챔피언 팀인 페라리의 엔진으로 스페인 GP부터 포인트 피니쉬를 안정적으로 해내는 등, 전반적으로 이전보다 더 나은 결과를 해냈고, 팀메이트인 펠리페 마싸보다도 더욱 높은 점수로 앞질렀다. 전체 성적은 지난 시즌 조던에 있을때보다 더 높은 22점을 획득한다. 이는 97시즌때의 조던(20점)보다 2점이 더 높다.
2.2. 르노 F1 팀
2005년, 자우버에서 피지켈라의 강했던 활약은 베네통에도 있었던 르노의 팀 감독인 플라비오 브리아토레로 하여금 이 시즌을 르노와 계약하게끔 하였다. 팀메이트로는 르노의 퍼스트 스페인 드라이버인 페르난도 알론소와 같이 경쟁하게 되었다. 시즌의 개막전이었던 호주 GP, 멜버른에서부터 우승을 해내며 차후 챔피언쉽을 리드할 것이라 예측되었지만, 이후로는 그 반대로 챔피언쉽 순위에서 알론소에게 뒤쳐졌고, 때때로 퀄리파잉에서마저 같은 차량이로 눈에 띄게 다른 타임을 작성하는 순간도 있었기 때문에 알론소를 따라잡을 페이스가 많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피지와 알론소간의 속도의 차이는 눈에 띄었고, 알론소의 안정적인 경기 운영이 2005시즌 챔피언쉽에서 우승하는데 도움을 주었지만, 피지켈라는 알론소와 달리 불운이나 실수로 인해 좋지 않은 인상을 남기기도 했다. 일례로, 피지켈라는 일본 GP에서 그의 레이스 엔지니어는 그에게 “절대 맥라렌의 라이코넨을 추월하지 못하도록 방어하라”는 오더를 내려 재촉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랩의 첫번째 코너에서 라이코넨에게 추월당해 선두를 빼앗겼고 이로 인해 언론으로부터 심한 비난을 받았다. 그래도 2005 시즌은 이전 시즌 자우버에 있었을 때보다 2배나 더 많은 58점으로 전체 5위를 달성하기에 이른다. 이로 인해 시즌 중 잠깐 제 실력이 나오지 못한 적이 있었더라도 시즌 내내 그의 활약은 르노가 맥라렌과 페라리보다 앞서 세계 건설자 챔피언십에서 우승할 수 있게 해주었음에 논란의 여지가 없다.
2006년에는 개막전 바레인 GP에서는 리타이어 하였지만, 2번째 경기인 말레이시아 GP에서는 자신의 3번째이자 마지막인 경기를 우승했다. 말레이시아에서 우승하면서 강한 기량을 보였던 그는 다가오는 호주 GP에서도 연승하는데는 실패했고, 스페인 GP에서야 겨우 3등으로 포디엄에 올라갈수 있었다. 모나코 그랑프리에서는 데이빗 쿨싸드의 랩을 방해한 이유로 페널티를 받아 점수가 벌여졌으며 이는 곧 알론소와 챔피언쉽에서 경쟁할 수 없었다. 시즌 중,후반기에는 미국 GP에서 알론소를 앞선 3등으로 피니쉬하기도 하였고, 중국, 일본 GP에서는 3위를 하였다. 이때 피지켈라는 경기 전날 목요일에 심장마비로 사망한 가장 친한 친구인 토니노 비스시아니에게 그 결과를 바쳤다. 이후 그는 브라질에서 6위를 차지하여 르노가 컨스트럭터 타이틀을 얻을 수 있게 하였으며, 드라이버 챔피언십에서는 72점을 얻어 자신의 F1 커리어 최고 순위인 4위로 올라갔다.
2007년, 피지켈라는 알론소가 맥라렌으로 떠나자 르노의 퍼스트 드라이버로 남았고, 그의 새로운 팀메이트는 르노의 전 테스트 드라이버였던 신예 핀란드인 헤이키 코발라이넨이었다. 그러나 이번 시즌의 르노는 이전 시즌과 같은 강한 페이스를 보여주지 못했다. 타이어 공급업체가 미쉐린에서 브리지스톤으로 바뀌었기 때문인지, 알론소의 주행 능력이 워낙 출중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맥라렌이나 페라리, 자우버 BMW등이 그동안 비수기 기간이었기 때문에 르노가 여기서 앞섰기 때문인지는 불분명했다. 혹은 르노의 감독이었던 팻 시몬즈에 따르면, 풍동 터널이 2006년 말에 부정확한 자료를 내어 2007 시즌 차의 개발에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지만. 시즌이 개막한 직후 초반에는 바레인 GP까지 팀메이트 코발라이넨보다 더 좋은 결과를 얻었지만, 스페인 GP에서는 일련의 연료 조작 문제로 두 차 모두 성능면에서의 향상을 활용할수 없었다. 캐나다와 미국 GP에서는 헤이키가 더 높은 점수를 얻었는데, 피지켈라는 캐나다 GP 본선에서 페라리의 펠리페 마싸와 함께 박탈당했다. 사유는 피트 레인을 빠져나오던 중 교통 신호가 빨간불일때 피트 아웃을 했기 때문인데, 이것은 세이프티 카의 앞쪽에서 레이스 카들이 경주에 합류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피지켈라는 이때 그가 피트 레인에서 다른 차들을 피하느라 바빠서 신호등을 확인하지 못했을 뿐이라고 설명했다. 이후 헝가리 GP에서 슈퍼 아구리의 앤서니 데이빗슨과 충돌해 리어 서스펜션이 부러져 은퇴할 수 밖에 없었다. 2007시즌은 작년보다 훨씬 저조한 성적인 21점으로 8등을 기록했다.
2.2.1. 포스 인디아
2.2.1.1. 2008 시즌
알론소가 맥라렌에서 해밀턴을 비롯한 크루들과 내분을 겪어 다시 르노로 돌아오고, 코발라이넨이 맥라렌으로, 넬슨 피케 주니어를 승격시키면서, 르노에서 포스 인디아로 떠난다. 2004년의 자우버 시절 이후로 다시 페라리 엔진을 공급받는 팀으로 가게 되었다. 이 팀에서는 아드리안 수틸과 함께 2008시즌을 경쟁하게 되며 팀의 퍼스트 드라이버로 계약을 맺었다. 그리고 여담으로 모나코 그랑프리에서 200개 이상의 그랑프리에 참가한 9번째 드라이버가 되었다. 하지만 신생팀이나 다름없는 포스 인디아였기에 전경기 노포인트 피니쉬와 잦은 리타이어 등으로 무의미하게 시즌을 마쳤지만 스페인 GP에서는 10등으로 마쳤고, 폐막전 브라질 GP에서 3위로 잠깐 올라갔던 순간들도 있었지만 포인트 획득에는 실패한 채 0포인트, 전체 순위 19등으로 이적 시즌을 마친다.
2.2.1.2. 2009 시즌
2009년부터는 차량의 엔진이 페라리에서 메르세데스로 바뀌었으며, 인도 국기색의 새로운 리버리로 바뀐 VJM02로 경쟁하게 되었다. 시즌 초중반부에는 이전 시즌 처럼 별 볼일 없는 저조한 성적을 기록했으나, 시즌 중반부가 되자 포스 인디아에서 몇몇의 매우 효과적인 기술적인 업그레이드를 이뤄내면서, 8월 말 벨기에 GP 예선전에서 팀의 사상 처음으로 첫 번째 폴 포지션을 기록하였다. 이후 본선에서는 아쉽게도 페라리의 라이코넨 다음으로 오랜만에 2위를 차지하며 경쟁력없는 포스 인디아로 다시 한번 최고 성적을 따냈다.
당시 벨기에 전 주말 기간 동안에 들렸던 루머로는, 마싸의 사고로 대체된 같은 국적의 이탈리아인 루카 바도어를 대신해서 페라리 드라이버가 될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이는 이전에 항상 피지켈라가 항상 원하는 것이었다고 밝혔다. 이 루머가 사실이었는지 2009년 9월 3일에는 공식 언론 성명서에서 피지켈라는 포스 인디아에서 페라리 소속으로 옮겨지며, 바로 다음 그랑프리인 이탈리아 몬자 GP부터 주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때를 마지막으로 현재까지 피지켈라는 마지막 이탈리아인 페라리 드라이버이다.
2.2.2. 스쿠데리아 페라리
남은 2009 시즌의 메인 드라이버와 2010 시즌의 리저브 드라이버로 계약을 맺었지만 피지켈라는 2010년에도 다른 팀에서 다른 자리를 찾을 수 있는 좋은 옵션이 있다면 좋을 것이라며 다른 팀들 소속으로 이적하는 것을 배제하지 않았다. 2009년 이탈리아 그랑프리를 시작으로, 아부다비 GP까지 끝마쳤지만, 페라리의 퍼포먼스 저하 및 포텐셜이 발휘되지 않아 저조한 성적으로 시즌을 마감했다. 이듬해 2010년에는 마싸가 돌아오고 키미 대신 알론소가 페라리로 이적해서 리저브 드라이버로 남아있었지만 다른 팀에서 계속 레이스를 하고 싶어했다. 그중에서도 자우버가 몇 안되는 선택지였고 팀도 페라리와 강하게 연결되어 있었지만 자우버는 2010년에 페드로 드 라 로사를 코바야시 카무이에 이어 팀의 두 번째 드라이버로 확정하면서 희망은 사라지게 되었다. 혹은 포스 인디아로 복귀할 가능성도 있었지만, 전 팀 메이트였던 아드리안 수틸과 레드불 주니어 출신의 같은 국적의 비탄토니오 리우치를 기용하면서 이 역시 기회가 사라졌다. 결국 루카 바도어, 마크 제네, 쥘 비앙키, 모토 GP 출신의 발렌티노 로시와 함께 2010년 페라리의 테스트 드라이버들 중 하나로 남게 되었다. 2011 시즌을 앞둔 2010년 말에는 쥘 비앙키만 테스트 드라이버로 남게 되었으며 2011년 1월 미디어 행사에 참석하기만 하고 이후 F1 커리어는 별 다른 소식없이 마감했다.
2.3. 내구 레이스에서
F1에서 나오게 된후 페라리 소속으로 458 GT2,GTC, 488 GTE 등으로 2010년부터 한해도 빠지지 않고 매년 WEC 르망 24시 GTE 프로 클래스에 참가해왔다. 2015년까지는 AF 코르세 소속으로 주행했으며 그중 2012년과 2014년에는 458 GT2로 클래스 우승을 차지하기도 하였으며 2013년 WEC에서는 LMGTE 프로 클래스에서 2등을 달성했다. 르망 24시는 최근 2020년까지도 참가했고 2016년부터는 Risi competizione, Spirit of Race 등의 다른 팀에서 달리다 다시 AF 코르세 소속으로 복귀하였다. 쁘띠 르망에서도 2011년과 2016년에 AF 코르세 소속 458 GTC와 488 GTE로 각각 GT/GTE-프로, GTLM 클래스에서 우승하였다.
3. 여담
- 2018 시즌 이후 알론소가 1차 은퇴할 때 영상 메시지를 보내 "드디어 너도 F1을 떠나는구나"라며 기뻐한 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