첼시(런던)

 


'''켄징턴-첼시 왕립구'''
'''Royal Borough of Kensington-Chelsea'''
[image]
켄징턴-첼시 왕립구(밝은 적색과 노란색 구획 부분)
'''국가'''
영국
'''행정 구역'''
켄징턴-첼시 왕립구
'''면적'''
12.13㎢
'''인구'''
156,129명(2019년)
'''인구 밀도'''
33,000명/㎢
'''시간대'''
UTC+0 (서머타임 준수)
'''홈페이지'''
공식 홈페이지
1. 개요
2. 예술가들의 자치구
3. 역사
3.1. 유래
3.2. 역사적인 소재 시설
3.2.1. 로열 종합병원
3.2.2. 첼시 가마터
3.2.3. 첼시 피직 가든
3.2.4. 래닐러 가든
4. 기타


1. 개요


영국 런던 도심의 서남부로 켄징턴-첼시 왕립구[1]에 속해있으며 템즈강의 강북이다. 첼시 브릿지에서 첼시 둑방길을 따라 구 롯츠 화력발전소부터 첼시 항구까지 지역을 말한다. 동쪽으로는 웨스트본 강과 면해 있으며 슬로언 스퀘어 역(Sloane Square tube station, 1868년 건립)이 중심가다.
킹즈로드 쇼핑센터와 피터 존스 백화점 그리고 카도건 홀, 로열 코트 씨어터(Royal Court Theatre) 등 문화 예술 시설이 몰려 있어 예술가들이 많이 거주한다. 주로 킹즈로드[2] [3] 주변에 거주했던 1960년대 예술가들이 '스윙잉 런던'[4] 이라는 패션/서브컬쳐 트렌드를 주도했다.
현재는 런던의 주요 부촌 지역 중 한 곳으로 옆동네 풀럼과 함께 비싼 집세를 자랑한다. 집값이 급등하기 시작한 건 1970년 초부터로 당시에도 사회적 이슈였다. 이 때 첼시에 급격히 늘기 시작한 영앤리치들을 두고 'Sloane Rangers'라고 불렀다. 비싼 집값이 문제되지 않는 외국인 부자들도 많이 거주하며 특히 미국인들이 많다. 지역 인구의 6.5%정도가 본적(本籍)이 미국이라고.
켄징턴을 제외한 첼시 자체 면적으로는 약 6㎢이며, 순수 첼시 인구는 약 40,440명이다.
[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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첼시를 포함한 런던 도심부 행정 구역 지도
런던 지역의 양극화를 풍자한 그림(적색 부분이 첼시)

2. 예술가들의 자치구


첼시가 처음 명성을 얻은 건 런던의 전위적 예술가들의 해방구로서였다. 각종 극단주의자들과 새로운 사조를 모색하는 화가, 문인들이 모여들었다. 첼시 예술 디자인 대학(Chelsea College of Art and Design) 졸업생들을 중심으로 한 이들은 빅토리아 시대 때부터의 전통이 있다. 이들은 셰인 워크와, 셰인 로우, 그리고 소위 라파엘 전파(前派,Pre-Raphaelite Brotherhood)로 알려진 19세기 중반의 전위적 예술 그룹들로 시작됐다. 이들의 개혁 성향은 매너리즘에 빠진 영국 연예계를 뒤흔들었다.
조지 메리디스, 알저넌 찰스 스윈번, 레이 헌트, 특히 베스트셀러 동화작가 조너선 스위프트와 악필,위트로 유명한 토머스 카일라일이 처치 스트릿 근처에 모여살며 첼시를 빛냈다. 리처드 스틸과 토비아스 스몰렛, 버지니아 울프도 첼시에서 작품 활동을 했다.
아서 랜섬(Arthur Ransome)이 지은 보헤미아 인 런던은 1907년 간행된 픽션이긴 하지만 전위적 예술가들의 전당 첼시에 대한 동경과 찬사로 가득하다. 미국 등지에서도 새로운 예술적 경향을 찾아 방황하던 예술가들이 첼시로 모여들었다. 이들은 첼시 중심가의 첼시 공립 도서관에 모여 예술을 논했다.
1960년 대 첼시는 다시 한 번 문화적으로 퀀텀 점프를 하는데 이들이 바로 스윙잉 첼시(Swinging Chelsea)라 불리던 집단으로 1970년 대 초까지 번성했다. 이들은 킹즈로드를 중심으로 전위적인 예술 활동은 물론 자유분방한 샵과 펍 등을 열어 트렌드를 주도했다. 가장 유명한 인물이 섹스 피스톨즈를 매니징하고 제작한 종합 공연 제작자 말콤 매클라런과 디자이너 비비안 웨스트우드였다. 이들은 1960년 대 'Sex'란 이름의 편집샵을 열고 당대 한다하는 연예인들과 다양한 문화 이벤트를 만들었다. 성공의 성공을 거듭해 특히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영국 왕실로부터 2등 기사 훈위까지 받는 거물로 큰다.
이런 분위기를 타고 브라이언 존스, 믹 재거, 키스 리처즈 등 한다하는 연예인들은 물론, 리버풀에서 출범한 비틀즈조차 킹즈로드에 살았다. 킹즈로드는 까르띠에, 티퍼니 앤 코, 돌체 앤 가바나 등 명품들이 모이는 곳이 됐다. 영국 신문의 연예, 사회면은 첼시에서 다 만들어진다고 할 정도였다. 그러다보니 1974년 IRA(아일랜드 해방군)의 테러리스트가 벌인 폭탄 테러에 20명이 부상을 입기도 했다.
성공한 연예인만이 살 수 있는 곳이 되면서 첼시는 현재 영국의 하이 컬쳐를 대변하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3. 역사



3.1. 유래


첼시란 말은 앵글로색슨어로 'Chelchehithe: 석회암이 들어오는 항구'란 뜻. 역사 기록에 처음 등장하는 건 787년 앵글로 색슨 칠왕국 시절의 머시아 왕이 설치한 장원(농업)으로서이다. 머시아 왕은 첼시에 지방 법원을 설치하고 리치필드 교구를 두어 매년 365냥의 금화를 로마 교황에게 보내도록 했다. 그것이 당시 영국이 로마 교황에게 내는 세금이었다고. 웨스트민스터 주교 공관도 첼시에 있었다.
노르만 왕조 이후 솔즈베리 백작 겸 켄징턴 백작 오브리 드 베어(Aubrey de Vere)가 봉토를 받은 1086년에 다시 문서에 첼시가 등장한다.
유명한 헨리 8세는 1536년 산디스 경에게서 첼시를 뺏어 직할로 두고 별궁을 지어 아내들을 차례로 살게 했다. 그의 딸인 엘리자베스 1세가 첼시 별궁에서 태어났다. 철학자 토마스 모어도 첼시를 거쳐갔고, 제임스 1세는 첼시에 신학대학을 짓고 King James' College at Chelsea'라고 이름했다. 현재 그자리는 1682년 찰스 2세에 의해 헐려 왕립 첼시 병원이 됐다.
1694년부터도 첼시는 런던의 부촌이었으며 많은 별궁들이 세워져 호화로움을 뽐냈다. 그러나 아직 런던이 지금처럼 확장되지 않았던 시절이라 당시 런던의 교외 지역이었다. 왕족, 귀족들의 별장이 즐비했던 한편, 텃밭, 과수원들이 가꿔지기도 한 총 인구 3천 정도의 전원이었다. 본격적으로 인구 붐이 일어나고 번화가가 되기 시작한 건 세기가 바뀐 1700년대 부터였다. 현재 리틀 첼시라 불리는 지역에 신시가지가 들어서고 풀럼까지 가도가 연결되면서 항구가 생긴 때였다.
찰스 2세는 현재 킹즈로드라 불리는 거리를 닦았고 성 제임스 궁이 있는 풀럼까지 왕도를 놓았다. 먼 훗날 조지 4세 때까지도 왕만이 다닐 수 있는 도로였다. 첼시 구청도 번듯하게 들어섰고 공립 도서관도 설치돼, 문화적으로도 융성할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다. 당시를 기록한 브리태니커 사전의 구절에는 '(첼시의) 동쪽에 더 좋은 거주 조건이 구비돼 있으며 서쪽으로는 슬로언 거리부터 템즈 강을 따라 풀럼 가도까지 연결되는 곳 주변은 상대적으로 가난한 지역이다'라고 기록됐었다고.

3.2. 역사적인 소재 시설



3.2.1. 로열 종합병원


첼시하면 떠오르는 주민층은 우선 로열 종합병원 근처의 레드코트 출신 은퇴 군인들이다. 로열 종합병원은 프랑스의 군인 복지 시설 '오뗄-드장빌리드-드-파리(the Hotel des Invalides de Paris)'를 모델로 1682년 찰스 2세에 의해 설립됐다. 크리스토퍼 렌 경(Sir Christopher Wren)의 설계로 1689년부터 가동을 시작한 로열병원은 476명의 은퇴 군인들을 받아들였다. 2차 대전 때 피해를 입지만 빌딩 본관은 그대로 남아 찰스 2세의 동상과 함께 현존한다. 현재도 영국 은퇴 군인들이 줄줄이 대기 중이며 입원 경쟁이 치열하다고.

3.2.2. 첼시 가마터


첼시 도자기 공작소(Chelsea Porcelain Works)는 1745년 경 건립됐다. 니콜라스 스프리몬트(Nicholas Sprimont)가 운영했던 가마 공장은 영국 도자기 산업의 최전성기를 선도했다. 그전에도 첼시에는 가내 수공업 형태로 요지(窯址)가 이미 존재했던 첼시는 런던의 큰 도자기 수요를 모두 감당함은 물론 영국 자기의 수출에도 큰 기여를 했다. 원래 로렌스 스트리트(Lawrence Street)에 있던 가마터는 더비(Derby) 카운티로 1784년 이전해 현재까지 내려온다.

3.2.3. 첼시 피직 가든


현재도 많은 약용 성분이 연구되고 있는 연구용 식물원 단지인 피직 가든은 1676년 제약 회사 애포스캐리 컴퍼니(the Apothecaries Company, 영국 약제원)에 의해 건립됐다. 쉐인 경(Sir Cheyne)의 땅을 빌려 지었으며, 1722년 한스 슬로언 경(Sir Hans Sloane)이 애포스캐리 컴퍼니에 아예 기증했다. 이곳에서 채취된 목화씨가 1732년 신대륙으로 보내져 현 미국 조지아 주의 목화 산업을 일으켰다.

3.2.4. 래닐러 가든


Ranelagh Gardens은 1689년 래닐러 백작(The 1st Earl of Ranelagh)의 소유지에 세워진 예술 정원으로, 그는 앵글로 아이리쉬 출신[5] 귀족이었다. 실제 건립자 겸 설계자는 이탈리아 출신 유대계 상인 솔로몬 리에티(Solomon Rieti)로, 그의 누이가 훗날 영국 수상 디즈레일리의 할머니 레베카 리에티다. 원래 로코코 양식의 귀족적 풍취의 정원으로 사유지였으나 1742년 일반에 공개된다. 당시 입장료는 2실링 6펜스로 결코 싸지 않은 가격이었다고. 강 반대편 케닝턴의 복스홀 가든과 라이벌 관계에 있는 우아한 정원이었다. 정원 중앙의 로코코 로툰다 홀이 유명하다.

4. 기타


  • 연고지 축구단이 없다. 엄밀히 말하면 첼시 FC의 연고지는 풀럼이다. 첼시 FC가 위치한 해머스미스-풀럼구 역시 바로 옆동네고 둘다 런던 최부촌이다보니 첼시 FC의 이름에 대해 위화감을 느끼는 사람은 없다. 우리나라로 예를 들면 강남 FC라는 팀이 강남구가 아닌 서초구를 연고로 한 셈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보니 첼시의 지역 연고팬들이 프리미어리그 팬들 중 가장 연수입이 높다고. 현재 구단주도 러시아 석유 재벌 로만 아브라모비치이다.
  • 이 지역의 젊은 중산층/상류층 주거민이 출연한 리얼리티 쇼 '메이드 인 첼시'가 채널 4에서 방영하여 2014년 현재까지 인기를 끌고 있다.
  • 철학자 토마스 모어헨리 8세의 대법관 겸 법무장관이자, 가톨릭 순교자이며 1520년 Beaufort House라는 대저택을 짓고 첼시로 거처를 옮겨 왔다. 과수원이 딸린 대저택에서 업무를 쉴 때마다 와서 쉬던 그는, 1535년 런던탑으로 끌려가 목이 잘리게 되면서 그의 집 역시 몰수된다. 그의 집은 여러 소유자를 거쳐 1740년에 헐린다. 단, 1766년부터 거리 이름으로만 남아 현재에 전한다. 그게 풀럼 가도와 연결된 현재의 보퍼트 스트리트이며, 호주 퍼스에도 같은 이름의 거리가 있다.
  • 토마스 모어는 1528년 자비로 사택 근처에 작은 가톨릭 예배당을 지었는데 헨리 8세가 가톨릭을 박해하는 와중에 그도 목숨을 잃지만 예배당은 부수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토마스 모어의 무덤을 겸한 예배당은 1940년 나치 공습에 불타 무너진다.
  • 셰인 거리에 살던 작가 존 새뮤얼 펜(John S. Phene)은 자택과 정원 곳곳에 오브제를 설치하고 스스로 '생강빵의 성'이라 불렀다. 1912년 타계한 후에도 오브제는 거리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1924년 철거됐다.
  • 첼시 예술 대학은 빅토리아 시대의 건축 양식을 잘 보존하고 있는 곳으로 원래 왕립 육군 부설 의대였다.


[1] 켄징턴-첼시 왕립구: Royal Borough of Kensington-Chelsea[2] 섹스 피스톨즈 가 결성된 것으로 유명한 비비안 웨스트우드맬컴 매클러런의 'SEX' 숍이 이 거리 430번지에 있었다. 현재는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컨셉숍이다.[3] 현재는 이런 모습이다. [image][4] 메리 퀀트의 미니스커트가 대표적인 이미지이다.[5] 앵글로 아이리쉬: 혼혈같은 이름의 이 용어는 순수 아일랜드인인데 영국에 항복하고 귀화한 아일랜드인을 말한다. 구한말 친일파들이 일본 황실로부터 화족 작위를 받았듯,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즈 등의 항복한 귀족들에게 영국 귀족 작위를 수여했다. 래닐러는 원래 아일랜드 귀족이란 얘기. 영국식 이름은 리처드 존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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