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비안 웨스트우드

 


'''Dame Vivienne Isabel Westwood'''
'''DBE'''
[image]
'''비비안 웨스트우드'''
Vivienne Westwood
'''본명'''
비비안 이사벨 웨스트우드 (Vivienne Isabel Westwood)
'''출생'''
1941년 4월 8일 (83세)
영국, 체셔주 틴술
'''국적'''
영국 [image]
'''학력'''
웨스트민스터 대학교
미들섹스 대학교
'''브랜드'''
비비안 웨스트우드
1. 개요
2. 상세
3. 생애
3.1. 말콤 맥라렌과의 만남과 패션계로의 입문
3.2. 1970년대 킹스로드 시절
3.3. ‘해적' 컬렉션, 미래를 위한 노스탤지어의 시작
3.4. 창조적 전환점, ‘미니 크리니’
3.5. 영국적인 것에 대한 애정과 패러디, ‘해리스 트위드’
3.6.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현재
4. 디자인 특징
5. 수상
6. 경력
7. 기타


1. 개요


'''최근 디자인 (2019년)'''

'''일부러 혁명을 일으키고자 했던 것은 아니다. 왜 한가지 방식으로만 해야 되고, 다른 방식으로 하면 안 되는지 알고 싶었을 뿐이다.'''

- 비비안 웨스트우드

영국 출신의 패션 디자이너이자 디자이너 레이블의 이름.

2. 상세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펑크의 여왕이자 영국 패션의 대모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녀는 1970년대 런던 펑크 문화의 탄생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고, 1980년대 이후에는 패션 디자이너로서 경력을 개척하는 가운데 역사와 전통, 문화, 섹슈얼리티와 관련된 탐구 과정을 작품 세계에 표현해왔다. 웨스트우드에게 있어 패션의 의미는 고객을 만족시키는 작업이 아닌 사회적 통념을 깨고 미래에 대해 제안하는 패션의 잠재력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그녀의 패션에 대한 열망과 탐구는 현재까지 그녀의 독특한 작품 세계를 지속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3. 생애



3.1. 말콤 맥라렌과의 만남과 패션계로의 입문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1941년 4월 8일 잉글랜드 더비셔(Derbyshire) 틴슬(Tintwistle)의 작은 마을 글로솝(Glossop)에서 평범한 가정의 장녀로 태어났다. 본명은 비비안 I. 스와이어(Swire)로, 16살 무렵 가족과 런던 북부로 이사한 후 해로 아트 스쿨(Harrow School of Art)에서 잠시 등록했으나, 보다 안정된 직업을 갖기 위해 한 학기 만에 그만 두고 사범 학교로 진학해 초등학교 교원이 되었다.
1962년 진공 청소기 회사의 견습생 데릭 웨스트우드(Derek Westwood)와 결혼하면서 그녀도 웨스트우드라는 성을 갖게 되었다. 자기 결혼식에 손수만든 드레스를 입을 정도로 손재주가 있었다. 65년 남편과 이혼하지만 어감이 마음에 들었던지 웨스트우드를 계속 쓴다.[1]
'''말콤 맥라렌과 비비안 웨스트우드'''
1965년 말콤 맥라렌(Malcolm McLaren)과의 만남은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삶과 경력에 전환점을 가져왔다. 중산층 출신으로 예술 학교에 다녔던 맥라렌은 기성 세대의 문화를 비웃으며 마약, 로큰롤에 탐닉하고 아방가르드 미학에 심취했던 당대의 전형적인 반항아였고, 무엇보다 패션을 사랑한 남성이였다. 맥라렌과의 만남을 통해 웨스트우드는 주류 문화에 대한 반권위주의적 태도를 갖게 되고 이를 표출하는 패션의 힘을 배우게 된다. 커플이 된 이들은 1971년 런던 킹스로드에 그들의 첫 번째 샵, ‘Let it Rock’을 열고 젊은 아웃사이더들을 위한 도피처를 만들기 시작하였고 이를 계기로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영원히 패션의 세계에 정박하게 된다.

3.2. 1970년대 킹스로드 시절


'''1971년에 오픈한 ‘Let it Rock’'''
'''1974년 'Let it Rock'에서 'SEX'로'''[2]
참고로 위 두 사진에 있는 남자는 말콤 맥라렌이다.
말콤 맥라렌과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1971년 첼시(런던) 킹스로드 430번지에 ‘Let it Rock’을 개점하고 로큰롤과 1950년대 테디 보이 스타일을 추종하는 테드들을 위한 의상을 판매하며 패션 경력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1972년 제임스 딘에 영감을 받아 ‘Too Fast to Live, Too Young to Die’로 이름을 변경하고 가죽 바이커 재킷 등을 판매했고, 1974년에는 ‘SEX’로 새롭게 변신하며 주류 문화의 모럴리티에 도전하는 컬트 패션을 제공하였다. ‘SEX’는 섹스와 포르노그래피를 연상시키는 고무와 가죽 의상을 팔았고, 기성 세대의 금기였던 나치 문양을(...) 티셔츠에 사용하였다. 1976년 ‘Seditionaries’로 이름을 변경한 샵은 가죽 끈과 지퍼 등을 사용해 성적 페티시즘을 자극하는 본디지 의상(Bondage wear)을 제공하였다. 이즈음 말콤 맥라렌은 펑크 록 그룹 섹스 피스톨즈(Sex Pistols)의 매니저였고, 맥라렌과 웨스트우드는 이들의 스타일링을 담당하며 펑크의 기호들을 만들어내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도발적인 펑크 스타일은 대량 패션 시스템의 질서에서 벗어나 스스로 원하는 것을 직접 만들어내는 DIY 전략을 기반으로 탄생하였다. 번들거리는 싸구려 가죽과 고무, 과격한 장식, 포르노그래피 티셔츠는 구세대의 가치와 금기에 반항하고 도전하는 펑크의 무정부주의적 미학을 여과 없이 과시했다. 펑크 시절의 경험은 웨스트우드가 획일적인 주류 패션의 미적 질서에 저항해 자신만의 독특한 비전을 창조하려는 태도를 유지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3.3. ‘해적' 컬렉션, 미래를 위한 노스탤지어의 시작


1979년 킹스로드 430번지는 ‘World’s End’로 새롭게 거듭나며 펑크와 결별하였다. 패션 디자이너로서의 자의식을 보다 확실히 갖게 된 웨스트우드는 새로운 영감과 비전이 필요했고, 옛 의상과 이국 문화의 의상 패턴들을 연구하며 아이디어와 테크닉을 연습했다.
1981년 World’s End의 첫 번째 패션 쇼, '해적(Pirate)' 컬렉션이 열렸다. 18세기 해적 영웅들의 시대에 주목한 웨스트우드는 옛 남성복 재단법에서 영감을 받은 헐렁하고 비구조적인 셔츠와 바지, 노랑, 주황, 골드의 화려한 컬러, 혁명기 프랑스 역사에 등장했던 멋쟁이들의 과시적인 이각모를 등장시켜 이국적이고 낭만적인 컬렉션을 선보였다. 해적 컬렉션은 맥라렌이 매니저를 담당하고 있던 팝 그룹 Bow Wow Wow의 스타일링에 사용되며 뉴 로맨틱 스타일의 유행을 시켰고, 그녀의 독창적인 재단법에 주목한 빅토리아 앤드 알버트 미술관은 1983년 해적 컬렉션의 의상들을 구입하였다.
이후 웨스트우드는 과거의 역사와 문화를 되돌아봄으로써 현재 문화에 부족한 것을 모색하는 쪽으로 작업 방식을 더욱 발전시켜 나아가게 된다. 두 번째 발표된 ‘새비지(Savage)’ 컬렉션에서 그녀는 북미 원주민들의 문화에 영감을 받아 기하학적 패턴의 이국적인 의상들을 선보였고, ‘버팔로(Buffalo)’ 컬렉션에서는 페루 원주민 여성에게서 영감을 받은 부푼 페티코트 스커트, 갈색 새틴 브라를 티셔츠 위해 덧입힌 파격적인 스타일링으로 큰 주목을 받았다. 이는 서구 복식 문화에서 오랫동안 규범으로 확립되어 온 겉옷속옷의 개념과 형식을 무시하고 해체시킨 것으로, 패션 비평가들에 의해 20세기 후반 부상한 포스트모던 패션의 중요 사례로 기록되고 있다.

3.4. 창조적 전환점, ‘미니 크리니’


비비안 웨스트우드와 맥라렌은 1983년 겨울 컬렉션을 끝으로 결별하였고 웨스트우드는 비즈니스 파트너 카를로 다마리오(Carlo d’Amario)를 만나 1984년 이탈리아로 기반을 옮겼다. 이 시기를 전후해 그녀의 컬렉션에는 영화 블레이드 러너, 뉴욕 그래피티 예술가 키스 해링의 작품과 힙합 스타일링, 도쿄네온 사인과 새로운 스포츠웨어 소재 등 동시대의 문화와 패션 요소들이 다양하게 반영되었다. 그러나 그녀의 개성을 뚜렷이 각인시키며 새로운 창조적 전환점을 만든 것은 1984년 10월 파리에서 발표한 ‘미니 크리니’ 컬렉션이었다.
'''미니 크리니(Mini-Crini)'''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발레 <페트루시카(Petrushka)>에서 영감을 받아 엄숙한 빅토리아 시대의 상징인 크리놀린을 축소시킨 ‘미니 크리니’를 소개해 혁명을 일으켰다. 플라스틱 뼈대로 만든 가벼운 미니 크리놀린은 미니 마우스를 연상시키는 커다란 폴카 도트 스커트, 플랫폼 슈즈와 결합되어 미성숙함과 섹시함이 공존하는 여성의 미묘한 에로티시즘을 불러일으켰다. 이는 1980년대 여피(yuppie)들이 주도했던 어깨를 강조한 남성적인 파워 수트 스타일로부터 여성스러움을 강조하는 새로운 룩을 제안하는 것이었고, 웨스트우드는 시대를 앞서가는 디자이너로서 독창성을 주목받기 시작하였다.

3.5. 영국적인 것에 대한 애정과 패러디, ‘해리스 트위드’


'''1987년 해리스 트위드(Harris Tweed)'''
1987년 ‘해리스 트위드’는 비비안 웨스트우드가 런던으로 다시 돌아와 발표한 첫 컬렉션이었다. 그녀는 영국 문화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드러내며 트위드, 개버딘, 니트 등 영국을 대표하는 직물과 테일러링 기술, 여왕의 관, 대관식 케이프영국 왕실을 상징하는 요소들을 대거 등장시켰다. 그러나 웨스트우드는 왕실의 근엄한 상징을 가볍고 섹시한 패션의 재료로 바꾸어버리면서 영국 복식의 전통에 대한 애정과 현대 영국 문화의 보수성에 대한 조롱을 함께 나타냈다. 여왕의 어린 시절 사진 속 프린세스 코트에서 영감을 받아 디자인한 붉은 트위드 재킷은 미성숙한 에로티시즘을 유발하는 미니 크리니와 결합되었고, 부스러기 트위드 천 조각으로만든 여왕의 관, 가짜 모피 케이프가 등장해 눈길을 끌었다.
후에 빅토리아 앤드 알버트 미술관의 큐레이터, 에이미 드 라 헤이(Amy de laHey)는 '웨스트우드야말로 전통적인 테크닉과 재료를 모더니티와 위트로 결합하여, 영국적인 것을 어느 누구보다 잘 약탈해낸 디자이너'라고 평가했다. 그녀의 작업은 정통과 현대성, 전통과 혁신의 결합이라는 트렌드의 부상에 큰영향을 끼쳤다.

3.6.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현재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문화적 영향력의 측면에서 명실공히 영국 패션계 여왕으로서의 지위를 갖고 있다. 웨스트우드가 참여했던 펑크 문화는 영국을 대표하는 혁신적인 하위문화 스타일로 정착되었고, 그녀가 열정적으로 탐구했던 트위드, 타탄 체크, 니트 트윈 세트, 클래식 테일러링 등은 여전히 가장 영국적인 패션 요소들로 조명되고 있기 때문이다. 웨스트우드는 영국 패션의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90년1991년 연속으로 '올해의 영국 디자이너(British Designer of the Year)'로 선정되었고, 영국 여왕으로부터 1992년 OBE(대영 제국 훈장)에 이어 2006년 DBE 작위(2등급의 작위급 훈장)의 훈장을 수여 받았다.
2003년 빅토리아 앤드 알버트 미술관에서는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방대한 작품 세계를 정리하는 대대적 회고전이 진행되었다. 전시회를 이끈 클레어 윌콕스(Clair Wilcox)는 웨스트우드의 삶을 이끌어온 것은 위대한 지적 호기심이었다고 언급하면서, "내가 진정으로 믿는 것은 문화뿐이다."라는 웨스트우드의 말을 인용하였다.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개성과 혁신을 추구하는 아방가르드 디자이너의 감수성과 여성으로서의 자의식, 문화적 전통에 대한 향수를 혼합해 그녀만의 스타일을 창조해내었고, 옛 문화와 전통이 창조적 혁신의 재료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녀의 의상은 오늘날 패션의 문화적 의미와 가치를 보존하고 확장시키는 기관인 복식 박물관들에서 꼭 소장해야 할 주요 품목 중 하나가 되었다. 이러한 과거를 뒤로 하고, 웨스트우드는여전히 자신의 직관과 믿음에 따라 주류 문화의 독선을 거절하고 새로운 미래를 찾고자 하는 행보를 이어가는 중이다.

4. 디자인 특징


'''2008년 섹스 앤 더 시티, 사라 제시카 파커가 입은 드레스'''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입체 드레이핑(Draping) 방식을 즐겨 사용한다. 이는 패턴을 바닥에 그리고 이에 따라 소재를 재단하고 봉제해 옷을 만드는 일반적인 테일러링 방식이 아니라 마네킹에 천을 대고 직접 주름을 잡고 다트를 넣는 방식으로 완성되기 때문에 그녀 특유의 풍성한 옷을 만드는 핵심 봉제 기술이다. 특히 이런 특성이 잘 드러나는 것은 화려한 드레스다. 2008년 섹스 앤 더 시티에서 사라 제시카 파커가 결혼식 날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화려한 드레스를 입었다. 금빛이 도는 아이보리 컬러의 코르셋과 광택 있는 재질의 풍성한 스커트, 날렵한 목 라인이 특징이었다. 여성스러운 동시에 반항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그녀의 드레스는 비비안 웨스트우드 브랜드의 대표 상품이 되었다.
'''비비안 웨스트우드 플랫폼 슈즈를 신고 넘어진 나오미 캠벨'''
또한 밑창 전체를 높게 한 비비안 웨스트 우드의 플랫폼 슈즈 또한 펑크를 기반으로 만들어졌으며 그녀의 정체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아이템 중 하나다. 특히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플랫폼 슈즈는 1990년대 중후반 일본에서 크게 유행해 이를 신고 운전하던 여성이 교통사고를 내거나 높은 굽 때문에 계단에서 굴러떨어지는 등의 해프닝도 있었다. 무엇보다 1993년 나오미 캠벨이 40cm가 넘는 높이의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플랫폼을 신고 무대에서 워킹 중 넘어진 사건은 20세기 패션계에서 두고두고 회자되는 사건 중 하나다. 이에 그녀는 "나는 자연스럽게 보이는 것을 싫어한다. 때로는 아픔이나 불편함도 참아야 한다. 멋진 하이힐을 신으려면 발이 아파도 참아야 한다. 그래야 특별해질 수 있다. 자연스럽게 보이는 것은 재미없고 지루하다. 그런 점에서 내 옷은 멋지다."라는 발언을 했다. 덕분에 비비안 웨스트두의 플랫폼 슈즈는 그녀의 디자인 철학이 가장 잘 담긴 상품이라고 할 수 있다.

5. 수상


  • 2003년 UK Fashion Export Award for Design
  • 2001년 Moet & Chandon Fashion Tribute
  • 1992년 올해의 베스트 브리티시 디자이너

6. 경력



7. 기타


  • 최근에는 10대와 20대들에게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액세서리류가 인기를 끌고 있다.
  • 슬리츠 멤버였던 비브 알버틴이 밝히길 여성 펑크 록 뮤지션들에게는 패티 스미스와 함께 우상과도 같은 존재였다고 한다. 노동 계급 여성이 성공하는 모습에서 감명받았다고.

[1] 92년 안드레아스 크론탈러와 재혼하지만 여전히 웨스트우드를 썼다.[2] 이 사진의 여성이 입고 있는 상의는 나치 문양을 이용해 디자인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