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 게프하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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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카를 프란츠 게프하르트
(Karl Franz Gebhardt)
'''연도'''
1897년 11월 23일 ~ 1948년 6월 2일
'''국적'''
나치 독일
1. 소개
2. 생애
2.1. 출생과 성장
2.2. 악마적 행각
2.3. 체포
2.4. 전범 재판과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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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나치 독일의 의학자.
하인리히 힘러(Heinrich Himmler)의 개인 주치의이자 라벤스브뤼크(Ravensbrück)와 아우슈비츠(Auschwitz) 강제 수용소에서 수감자들에게 인체 실험을 자행하여 전후 교수형으로 처형되었다.

2. 생애



2.1. 출생과 성장


바이에른 왕국의 하그 인 오버바이에른에서 의사였던 부친, 프란츠 게프하르트의 아들로 태어난 카를 게프하르트는 란츠프트의 고교를 통학했는데, 이 학교는 하인리히 힘러의 아버지인 게프하르트 힘러가 교장이어서 하인리히 힘러도 이 학교에 다녔고 1916년 졸업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에 졸업 후 1916년 3월 1일에 바이에른 왕국 육군 제 4 보병연대에 입대한 게프하르트는 1918년부터 1919년 3월까지 영국군의 포로가 되기도 했다. 전후 1920년까지 자유군단에 참가한 그는 루르 지방에서 공산주의자와 싸웠다. 1919년부터 뮌헨 대학 의학부에서 의학을 배워 1922년에 의사 시험에 합격해 1923년에 의사면허를 취득했다.
1924년에 뮌헨 대학에서 의학박사를 수여받은 게프하르트는 1926년에 호엔아샤우에서 의사양성소를 설립한 후 독일체육의학협회 스포츠 의사로도 활동했다. 나치당 정권이 탄생한 후인 1933년 5월 1일에 나치당에 입당한 게프하르트는 동시에 아돌프 히틀러가 지휘하던 친위대에 입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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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리히 힘러와 게프하르트.
1933년부터 1934년까지 호엔아샤우의 제국의사시설 장관으로 일하며, 1935년부터 베를린의 샬롯텐부르크의 체육의학연구소 장관이 된 게프하르트는 1936년의 베를린 올림픽에서 의사협회장으로 일했다. 1937년에는 베를린 대학의 교수가 되었으며 레벤스보른의 일원이 된다. 그는 힘러가 관리한 의사들 중 한 명으로 선발되어 1938년 4월 20일에 친위대 전국지도자 주치의가 되어 힘러의 주치의가 되었다.
게프하르트는 친위대의 의사들 중에서 가장 지위가 높았는데, 국제적으로도 지명도가 높은 의학자이기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후인 1939년 10월 26일부터 친위대의 병원이 된 호엔류헨 병원의 부장의사로 취임하여 부상당한 무장친위대 대원을 진료한 게프하르트는 1940년부터 제국체육연구소 의료부문 부장으로 일했다.
1940년 5월 15일에 무장친위대 의사 총 책임장[1]으로 등극한 게프하르트는 독일의 패전시까지 이 지위를 유지했다. 1942년 5월 하순에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프라하에서 게릴라에게 습격당해 혼수상태에 빠졌다는 보고를 받은 힘러는 바로 게프하르트를 데리고 프라하로 이동해 하이드리히의 치료에 매달렸다. 그러나 게프하르트의 수술은 하이드리히를 살리지 못했다.
하이드리히의 죽음에는 게프하르트가 손상된 비장의 적출을 하지 않았다는 소문이 흘렀는데, 더욱이 내무상의 자리를 둘러싸고 라이벌이던 하이드리히를 위험시한 힘러가 게프하르트를 시켜 고의로 하이드리히를 죽게 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히틀러의 주치의였던 테오도어 모렐 박사가 "내가 처방한 설파제[2]를 투여했다면 하이드리히를 살릴 수 있었다"라고 술회하여 암묵적으로 게프하르트를 비판했기에, 히틀러는 게프하르트를 신용하지 않아 그와의 면담을 거부하기도 했다.[3]
게다가 하이드리히가 죽고 난 후 알베르트 슈페어가 피로를 느끼고 무릎이 붓는 증상이 나타나자 카를 게프하르트는 알베르트 슈페어를 치료했는데, 이상하게도 치료를 하면 할수록 알베르트 슈페어의 건강 상태는 나빠지기 시작했다. 결국 도저히 안되겠다고 판단한 알베르트 슈페어는 카를 게프하르트 대신에 프리드리히 코흐로 치료의사를 교체했는데, 그 당시 알베르트 슈페어는 거의 반죽음 상태에 이를 정도였다고 한다. 이에 대해 하인리히 힘러가 자신의 경쟁자 알베르트 슈페어를 제거하기 위해 게프하르트를 이용했다는 주장도 있다.

2.2. 악마적 행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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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자를 생체실험 중인 게프하르트.
'''나치 독일의 생체실험'''
'''혐오사진 주의'''.
하이드리히의 죽음 이후 게프하르트가 제국 내에서 영향력을 잃자 하인리히 힘러는 "술폰아미드로 상처를 치료할 수 없다"는 것을 입증해보는 것이 좋겠다고 조언했다.[4] 이를 받아들인 게프하르트는 술폰아미드로 상처를 치료할 수 없다는 실험 성과를 얻기 위해 강제수용소에 수용된 수용인들의 신체를 이용한 외상 인체실험을 실시했다.[5] 게프하르트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생체실험을 실시하기도 했지만 호엔류헨 병원에 가까운 장소에 있던 라펜스브뤼크 강제수용소의 수용인들을 주요 실험 재료로 사용했다.*
게프하르트는 자신의 조수였던 프리츠 에른스트 피셔(Fritz Ernst Fischer)와 함께 주로 소녀들을 해부하면서 근육과 신경, 뼈를 추출한 후 뼈와 근육의 신경을 재생시키거나 뼈를 이식시키는 실험을 진행했다. 이 실험은 외과 시술을 위해 특히 육군의 부상병들을 위하여 실험되었다. 한편 게프하르트는 다른 실험자들의 근육이나 뼈를 살아있는 채로 뜯어내는가 하면, 팔이나 다리와 같은 부위들을 잘라냈다. 그리고 이렇게 잘라낸 부위들을 다른 피해자들에게 강제로 이어 붙이는 미친 실험을 자행했다.
물론 이 실험이 성공할 리는 없었고[6], 실험자들은 영원히 장애가 되거나 몸의 일부가 절단돼서 평생동안 엄청난 고통을 겪게 되었지만 오히려 이게 천만다행 수준이었다. 이 실험에서 심한 경우, 아니 거의 대부분의 경우에는 신체가 게프하르트에게 마취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잘라져서 온 몸이 갈가리 찢기게 되거나 혈액형이나 이식 거부반응 문제로 강제로 접합한 부위에서 상처가 썩어들어가거나 곪아버렸고, 세균 감염으로 인해서 사망하거나 잘라낸 부위에서 피가 너무 많이 나와서 과다출혈로 사망해갔다. 끔찍한 사실은 게프하르트는 이렇게 잘라낸 신체부위를 모아서 전시하는 미친 짓을 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때로는 이렇게 절개한 상처 부위의 곪아가는 상태를 보고 세균 배양액을 주입하기도 했는데, 이 상처를 치료한다는 목적으로 술폰아미드를 투요하는 술폰아미드 실험을 실시했다. 이 실험은 특별한 화학 물질인 술폰아미드의 효과를 실험시키기 위해 실시되었는데, 외부적으로는 술폰아미드가 육군에게 어떤 도움을 줄지를 목적으로 실시하였지만 실제로는 술폰아미드에 다른 화학물질을 첨가해 상처를 치료할 수 없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한 실험이였다. 게프하르트는 피해자에게 술폰아미드를 투여하기 전 다양한 박테리아와연쇄상구균, 가스 괴저, 파상풍균을 실험대상자들에게 주입하였다. 또한 실험의 현실성을 높이기 위해 유리조각, 철 조각, 나무 조각으로 실험 대상자들에게 상처를 낸 후, 또는 상처가 난 이후에도 이러한 물질들을 비비다가 상처가 난 곳에다가 술폰아미드를 투입한 후 그 효과를 측정했다. 당시 사진. 나중에는 아예 사람의 발이나 신체를 절단시킨 다음 근육이나 장기를 빼내고 그곳에다가 술폰아미드를 투여하는 극악무도한 실험을 자행하기까지 했다.[7]
게프하르트는 그 외에도 다른 다양한 약물들도 사용했는데, 대표적으로 페릿 가스를 이용한 실험을 진행하기도 했다. 페릿 가스란 제1차 세계 대전 때 사용되던 독가스의 일종으로 전장에서 이 독가스가 사용되었을 때 어떻게 방어해야 할지를 위한 연구였다. 이 실험에서도 술폰아미드 실험과 마찬가지로 현실성을 높이기 위해서 실험 대상자들의 몸에 못, 톱밥, 철 조각 등의 다양한 물질들로 몸을 비벼 일부러 상처를 낸 후에 독가스를 상처에 투입하는 방식으로 실시되었는데, 이 실험을 그의 조수였던 헤르타 오버호이저[8]에게 명령하여 생체실험을 하게 했다. 그리고 이렇게 상처들에 독가스를 투입한 결과 피해자들은 상처 부위가 썩어들어가며 처참하게 사망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1942년 8월에 라펜스뷔크 강제수용소의 폴란드인 처녀 75명[9]을 이용한 인체실험에서 어떤 종류의 약이 총탄으로 인한 감염에 효과적인가를 입증하는 데 성공하여, 1943년 5월에 군사의학회 총회에서 이 실험 결과를 발표해 히틀러가 그를 재평가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 공적으로 게프하르트는 히틀러가 직접 수여하는 전공 십자훈장을 받았다. 게다가 그의 조수 헤르타 오버호이저는 아이들에게 이페린이나 기름을 강제로 투입시키거나 심지어 아이를 산채로 끓는 기름에 넣어 죽게 만드는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질렀다.
독일의 패전 직전에 자살한 독일 적십자사 부총재인 에른스트 그라우비츠를 대신하여 단기간 이 자리를 맡았던 게프하르트는 패전이 다가오자 책임 추궁을 우려해 자신의 인체실험 대상수용인을 모두 처형하라고 명령해 증거인멸을 꾀했고, 자신이 정리해 놓았던 여러 자료들을 뒤져서 파기해 버림으로써 증거인멸을 꾀했다.
게프하르트의 이런 실험은 하이드리히 죽음 때문에 자신의 치료방식이 틀리지 않았던 것을 입증하기 위해 시작된 것으로 어떻게 보면 요제프 멩겔레이시이 시로의 실험보다도 더 쓸모없는 실험이었다. 물론 쓸모 있는 실험이라 하더라도 위의 일이 용서되는 것은 아니다. 한편 게프하르트는 생체실험을 하던 친위대의 의사들 중에서도 가장 높은 자리에 있던 의사 중 하나였기 때문에 이 외에도 나치의 여러가지 다양한 생체실험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을 수 있고, 게프하르트가 현재까지 저질렀다고 드러난 여러 생체실험들이 일부에 지나지 않느냐는 주장도 있다.

2.3. 체포


1945년 4월에는 소련 군대가 베를린으로 밀고 들어오자 파울 요제프 괴벨스가 자신의 아이들을 죽이고 자신도 자살하려고 했다. 그러자 카를 게프하르트는 괴벨스에게 접근해서 자신의 약물로 아이들을 편안하게 사망하게 해주겠다며 그에게 접근했고 실제로 실행하려고 했지만, 괴벨스가 반대해서 실패했다.
나치가 패망하고 1945년 5월에 하인리히 힘러와 함께 도망친 나치당원 중 하나였던 게프하르트는 하인리히 힘러와 함께 적발되어 영국군에게 검거되었고 결국 힘러와 함께 영국군의 포로가 되었다. 이때까지는 영국군들이 게프하르트가 어떤 인간인지 몰랐다고 한다.

2.4. 전범 재판과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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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범 재판장 에서의 게프하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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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형되는 게프하르트
전후 미군이 개최한 뉘른베르크 연속재판에서 의사재판의 피고인으로 출두한 게프하르트는 1947년 8월 20일 생체 실험을 실행하고 계획했던 것으로 기소되었고, 전쟁범죄와 인도주의에 반한 죄로 사형 판결을 받았지만 끝까지 자신의 죄를 후회하지 않았다. 판결 이후 게프하르트는 카를 브란트나 발데마어 호펜, 루돌프 브란트, 빅터 브라크 등등의 매드 사이언티스트와 사이좋게 란츠베르크 형무소로 끌려갔다. 재판 이후 몇달이 지난 1948년 6월 2일에 란츠베르크 형무소에서 교수형으로 처형되었다.

[1] 요즘으로 치자면 국군의무사령관에 해당하는 직책이다. 최종계급은 친위대 중장.[2] =sulfa劑=술폰아미드[3] 테오도어 모렐이 돌팔이로 악명높긴 했지만 처방 자체는 합리적이었다.[4]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치료를 위해 술폰아미드를 투여해야 한다는 테오도어 모렐의 권고를 게프하르트가 거부했고, 이로 인해 하이드리히는 패혈증으로 사망했다. 이렇게 된 이상 게프하르트 입장에서는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에게 술폰아미드를 투여했어도 술폰아미드로는 상처를 치료할 수 없기 때문에 어차피 하이드리히는 죽었을 것이며, 술폰아미드를 사용하지 않은 나(게프하르트 본인)는 잘못된 수술과 치료를 한 것이 아니며 라인하르트를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 했다."를 입증해서 자신의 명예를 회복해야 했다. 게프하르트가 어떤 이유로 하이드리히의 수술 및 치료에서 술폰아미드 사용을 거부한 것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5] 나치의 다른 생체실험들은 명목상으로는 병이나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서였지만 술폰아미드 생체실험은 병을 치료할 수 없다는 것을 전제로 진행한 실험이였다. [6] 실패이유는 생체실험을 당하는 사람들의 DNA(유전자)가 다르고 혈액형도 다르기 때문 그리고 이식 거부반응(이식받은 조직이나 기관을 몸에서 거부하는반응)을 무시하고 생체실험을 했고 이식 받은 사람은 이식부위가 썩어들어가니 당연히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거의 대부분 마취를 안하고 한점에서도 엄청난 고통이 발생하니 실험 당하는 사람들은 죽을 수 밖에 없는거고 사람들이 죽으니 실험도 실패하는 것.[7] 당시 이 실험에 동원되었던 사람이 뉘른베르크 의사 재판에 나와서 증언했는데 그녀는 엄청난 고통을 겪으면서 실험을 당했고, 다음날 자신이 정신을 차렸을 때 자신의 신체를 꿰멘 곳에서 이상한 약물이 줄줄 흘러나왔다고 증언했다. #[8] Herta Oberheuser, 1912~1978. 이런 생체실험 연관으로 유일하게 법정에 선 여성이다. 10년형을 살다가 나왔지만 적어도 조수로서 하라는 대로 했다는 점으로 정상참작을 받았고, 석방 이후 의사로 살다가 제 명을 누리고 숨을 거뒀다.[9] 일설에는 500명이 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