퀘벡 독립운동

 


1. 개요
2. 역사
2.1. 자유 퀘벡 만세!
2.2. 10월 위기
2.3. 두 번의 국민투표
2.4. 연방정부의 대응
3. 퀘벡이 실제 독립하게 된다면?
3.1. 퀘벡 주 내의 분리?
3.2. 퀘벡이나 인접 동부 캐나다 주들의 역분리 또는 분리 가능성

'''Souverainisme au Québec''' / '''indépendantisme au Québec'''

1. 개요


캐나다 퀘벡 주가 독립하여 독자적인 국가를 세우자는 운동이다. 퀘벡 주는 영국의 식민지였던 캐나다와 달리 프랑스의 식민지였고 프랑스계가 많아 영국계 위주인 다른 캐나다 주들과 갈등이 많았다.

2.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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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7년의 애국자" 퀘벡 화가 앙리 쥘리앵, 1887년 작품. 이 그림은 훗날 퀘벡 주권 운동의 상징으로 쓰이게 된다.
캐나다 백과사전 - 캐나다의 분리주의, 퀘벡 독립 지지 -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프랑스어)
위 그림은 19세기 민주주의 정당 애국당(Parti Patriote) 투사를 그린 그림이다. 1837년 캐나다 반란은 프랑스 혁명, 미국 독립에 고무된 캐나다 사상 최대 규모의 정치적 정변이었다. 식민지 시대 각각 상캐나다(Upper Canada/Haut-Canada)로 불리던 온타리오와 하캐나다(Lower Canada/Bas-Canada)라 불리던 퀘벡은 연대했다. 영국 식민 정부에서 분리된 민주 공화국 건설을 추구했던 이 운동은 퀘벡 측에선 루이-조세프 파피노, 온타리오 측에선 스코틀랜드 이민자 출신 윌리엄 라이언 맥켄지가 주도해 성공적으로 불붙었으나, 곧 진압돼 지도자들이 대부분 망명간다. 그리고 약 10년 쯤 후 식민 정부가 이들의 주장을 상당 부분 수용하고 사면하면서, 이 때 귀국한 지도자들이 19세기 중후반 이후 캐나다 헌정 질서를 주도하는 세력이 됐다.
그런데 퀘벡 분리주의자들의 추앙을 받는 이 사건은 알고보면, 역설적이게도 분리가 아니라 다른 민족성의 두 주가 '''통합'''된 사건이었다. 애국당 혁명파의 지역 기반이 프랑스계 주민 다수였던 퀘벡이었을 뿐 당시 이 지역에 독립적인 정체성이나 분리 의식이 심하진 않았고, 혁명 지도 세력도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등이 다수였다. 심지어 당시 프랑스계 주민들은 가톨릭 사제들의 영향이 강해[1] 보수색이 강하고 오히려 독립에 미온적이었다.

2.1. 자유 퀘벡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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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몬트리올 국제박람회. 시청 광장 앞에 모인 군중에게 당시 프랑스 대통령 샤를 드 골은 발코니에 나서서 연설을 시작한다. 그리고 세인트로렌스 강을 내려오면서 맞이한 수많은 환호 군중을 보면서 그는 독일에게서 해방된 파리에 당당히 재입성했을 때를 상기했다며 짧은 연설을 이런 말로 마무리했다. 위의 영상 5분 55초부터 보면 된다.

몽레알 만세!(Vive Montréal !) 퀘벡 만세!(Vive le Québec !) (환호)

자유... 퀘벡 만세!(Vive le Québec... libre !) (길고 열광적인 환호)

프랑스계 캐나다 만세! 그리고 프랑스 만세!(Vive le Canada français ! Et vive la France !) (환호)

허나 열광한 군중들과 대비되게, 퀘벡의 문제를 전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된 이 사건으로 인해, 이후 프랑스와 캐나다의 외교관계는 한동안 최악으로 급냉각되었다. 그리고 이후 '''자유 퀘벡 만세'''는 퀘벡 독립운동의 대표적인 구호 중 하나가 되었다.

2.2. 10월 위기


드 골의 이 발언이 있은 후 1970년 캐나다의 퀘벡 해방전선(FLQ)은 몬트리올에서 퀘벡 지방 내각 관료인 피에르 라포르테와 영국 외교관 제임스 크로스를 납치하는 엄청난 짓을 벌이게 된다. 10월 5일 크로스를 먼저 납치한 FLQ는 8일 방송 인터뷰를 신청하였으며, 이어 10일 라포르테까지 납치한 뒤 11일 대대적으로 자신들의 납치 사실을 알렸다. 사실 FLQ는 드 골의 이 발언이 있기 전인 1963년부터 활동을 해 온 조직이었다.
이에 12일 몬트리올에 있는 캐나다 연방정부의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군대가 파견되었으며, 14일에는 인질들과 정치범들을 바꾸는 협상이 시작되었지만 결국 협상은 15일 결렬되고 만다. 이에 퀘벡 주 정부는 사태 해결을 위해 군대의 개입을 요청하게 되며 반대로 퀘벡 분리주의자들은 몬트리올 대학에 모여 FLQ를 지지한다고 주장하며 과격한 발언을 하기 시작하였다.
앞서 13일 어지러운 상황 속에서 사태가 어떻게 흘러갈 것 같냐는 기자의 질문에 'Just watch me'라고 대답하여 흔들림없는 사태 해결을 공헌한 피에르 트뤼도 총리는 결국 16일 새벽 4시를 기점으로 전시조치법을 발동하고 계엄령을 내린다. 이 'Just watch me'는 전 캐나다인이 기억하는 유명한 말이 된다.
이에 17일 FLQ는 라포르테를 살해하였으며 남은 사람인 크로스의 목숨을 대가로 FLQ 헌장의 선언, 23명의 정치범 석방, 자신들의 쿠바 및 알제리로의 망명 허용 등을 협상하기 시작했다. 라포르테의 시체는 세인트 허버트 공항 근처 덤불 속에서 발견되었으며, 이로 인해 FLQ에 대한 퀘벡 일반 시민들의 지지는 떨어지기 시작했다.
전시조치법에 대한 일부 비판이 일긴 했지만 정부는 결국 11월 6일 FLQ의 중요조직인 셰니어 셀을 발견하고 이를 급습해 3명은 놓쳤지만 1명을 검거하는 데 성공한다. 이후 길어지는 협상과 좁혀오는 수사망에 지친 납치범들은 12월 4일 쿠바로의 망명만을 대가로 크로스를 석방했으며, 납치범 중 5명이 쿠바로의 망명에 성공했다.
12월 23일 트뤼도는 1월 5일까지 군대가 퀘벡에 머물 것을 선포했으며, 12월 28일 도망친 셰니어 셀의 3명의 멤버를 체포함으로서 사건을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FLQ는 해체되었으며 급진적이고 폭력적인 퀘벡 분리 운동은 주류에서 멀어져 서서히 막을 내리게 되고, 투표를 통해 합법적으로 독립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선회하게 된다. FLQ의 폭력적이고 테러리즘적인 분리 운동이 오히려 퀘벡 주민들의 반작용을 일으켜 전시조치법에 대한 지지가 되어버렸고, 압박을 받은 FLQ는 결국 자신들이 뜻한 바를 이루지 못했다.
이 때 발동된 전시조치법은 캐나다 역사상 처음이자 아직까진 마지막인 평시 전시조치법 발동이었다고 한다.

2.3. 두 번의 국민투표


20세기 들어서도 퀘벡의 독립 열기가 꺼지지 않자 결국 두 차례, 퀘벡 주민을 대상으로 하는 퀘벡 독립 여부에 대한 총투표가 실시되었다.
1980년 5월 20일, 퀘벡의 캐나다 연방 탈퇴 및 입법권, 징세권, 외교권 등 국가로서의 주권 획득을 골자로 하는 분리 독립에 대한 투표가 실시되었고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 연방 탈퇴 반대: 2187991 (59.56%)
  • 연방 탈퇴 찬성: 1485851 (40.44%)
같은 날 저녁, 퀘벡당의 창시자이자 당시 퀘벡 주총리였던 르네 레베크(René Lévesque)는 이런 유명한 말을 남긴다.

Si je vous ai bien compris, vous êtes en train de nous dire à la prochaine fois!

'제가 여러분 말씀을 제대로 이해한 거라면, 여러분은 지금 저희에게 '다음에 또 봅시다!'라고 말하고 계시는 것이군요.

그리고 이 예언(?)은 실현되어, 1995년 다시 한번 투표가 실행되었다. 프랑스영국은 이 일에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겠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또한 당시 캐나다의 총리이던 자유당 소속 장 크레티앵은 퀘벡 주 몬트리올 지역구 출신이기 때문에, 퀘벡이 독립하게 되더라도 크레티앵이 캐나다의 총리로 남게 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논의도 오갔다. 약 67%가 독립을 반대하리라는 초기 설문 결과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약 '''1%''' 근소한 차이로 무산되었다.
  • 연방 탈퇴 반대: 2362648 (50.58%)
  • 연방 탈퇴 찬성: 2308360 (49.42%)
두 번째 투표에서 더 높은 찬성률이 나왔다는 것이 특기할 만하다. 첫번째 투표에서는 분리를 지지하는 퀘벡인들도 분리 독립에 대한 불안감을 갖고 있었다는 분석이 많았다. 그리고 1982년의 새로운 헌법 제정 당시 퀘벡의 목소리가 전혀 반영이 안 되었다는 분노감, 이후 개헌을 위한 미치 호수 협정(1987)이나 샬럿타운 협정(1992)이 둘 다 무산되었다는 점도 한 몫을 했을 것이다. 1982년 당시 자유당에 대한 퀘벡인들의 분노는 대단해서 1980년 연방선거 당시 '''75석 중 1석'''만을 차지하고 있던 보수당이 1984년 선거에서는 무려 58석, 1988년 선거에서는 '''63석'''을 차지하게 되었다. 퀘벡에서 보수당이 압도적으로 승리한 것은 보수당의 1917년 강제징용 사건 이후 처음. 물론 보수당도 개헌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자 1993년 선거 땐 다시 1석으로 대패(...)하게 되고, 퀘벡당이 54석을 차지하게 되어 일개 한 주의 정당이, 캐나다 연방 전체 내 제1야당으로 등극하게 된 분위기 아래서 두번째 분리 독립 투표가 행해졌던 것이다.
지금도 대표적인 주권파 일간지인 르 드부아르(Le Devoir)는 퀘벡 주경일마다 독립이나 세 번째 독립 투표에 대한 떡밥을 던지고 있다. 그러나 21세기 들어 선진국 사회의 민족주의 열기는 많이 수그러들었고, 캐나다 자체에 다른 지역 이주민들이 늘고 퀘벡인이 받는 차별도 과거에 비해선 꽤 줄어들었음을 고려하면, 세번째 투표가 실시될 확률은 현재로선 적다고 볼 수 있다. 현재 2030 청년세대 퀘벡인들은 20세기의 아버지, 조부 세대처럼 영어주들과 연방으로부터 노골적인 차별을 받던 시대를 겪지 않았기 때문에 영어권 캐나다에 대한 적대감이 옅어졌다. 두번의 독립투표를 거치면서 연방으로부터 복지 및 공공일자리 재정 지원금과 자치권한 전반이 확대된 지금 시점에서 볼땐 연방정부의 주(Province)로써 잔류해도 퀘벡인으로써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불어문명 퀘벡의 언어적 자주성을 법적으로 지킬 수 있는데 왜 굳이 경제적 파멸을 각오하고 독립까지 할 필요가 있냐는 현실주의적 냉소가 강하다. 2014년 퀘벡 주의회 선거에서 독립주의 성격이 강한 당인 퀘벡당(Parti Quebecois)이 독립 떡밥을 던졌지만 결국 의석을 24석이나 더 잃고, 반독립주의적인 퀘벡 자유당이 압승하였다.
독립은 무산되었지만, 지금도 대부분의 퀘벡인들은 '캐나다인'이라는 정체성을 영어권 캐나다인들만큼 가지고 있진 않으며, 경제/정치 등의 실리적인 이유로 다른 영어권 주와 연방 내에 동거를 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다. 다른 캐나다인들도 퀘벡 주를 같은 지붕 아래 살고 있지만 거의 '다른 사회' 쯤으로 취급하고 있다.

2.4. 연방정부의 대응


연방정부는 퀘벡의 분리독립 열기를 사그러트려 분리독립을 막기 위해 인구 수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은 국회 의석, 문화/언어적 인정, 국영 가톨릭학교 제도 등 여러가지 정치적 편의를 제공하였다.
1969년 7월 7일에는 연방정부 차원에서 공용어에 대한 법이 도입되어 프랑스어가 모든 연방정부의 영역에서 영어와 동등한 위치를 획득하였다. 캐나다 총리는 영어와 프랑스어 두 언어를 할 줄 알아야 하고, 실제로 기자가 영어로 질문하면 영어로, 프랑스어로 질문하면 프랑스어로 답하는 영문영답 불문불답의 진풍경을 볼 수가 있다. 공식 대담을 할 때는 영어와 프랑스어를 번갈아가면서 진행하기도 한다. 방송사들의 동시 통역은 덤이다.

3. 퀘벡이 실제 독립하게 된다면?


캐나다의 입장에서 퀘벡 독립이 야기하는 문제는 퀘벡 독립과 함께 캐나다의 일부 영토가 월경지가 된다는 점이다. 즉, 퀘벡과 인접한 대서양 연안의 캐나다 동부의 영어권 주(뉴브런즈윅,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 노바스코샤, 뉴펀들랜드 래브라도 주)들이 캐나다 중서부 지역과 멀리 떨어진 고립 영토가 된다는 것이다. 마치 미국의 알래스카 주처럼 말이다. 그나마 알래스카는 미국 본토와 멀리 떨어져 있긴 해도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태평양 연안의 미국 본토 지역과 거리가 비교적 가까워 수운이나 항로를 통해서 미국 정부의 통제가 가능하지만 퀘벡은 분리 독립할 시 퀘벡과 인접한 대서양 연안의 캐나다 동부 주들이 아제르바이잔나흐츠반처럼 지형적으로 고립되어 있는 형국이기에 독립 국가 퀘벡에 가로막힌 월경지가 될 경우 분쟁지역이 될 가능성이 높으며 미국의 알래스카처럼 캐나다 정부가 통제하기 굉장히 어려워질 가능성이 높다. 사실 퀘벡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대서양 연안의 캐나다 동부 영어권 주들도 퀘벡과는 별도로 소수지만 연방에서의 분리 독립을 주장하는 세력이 있었다.[2]
때문에 지금 퀘벡의 영토가 캐나다에서 떨어져나가 캐나다 중서부 지역과 대서양 연안의 캐나다 동부 주들이 독립된 퀘벡의 영토에 가로막혀 고립된 월경지가 된다면 연방 내에 잔류할 확률은 매우 낮다.
아래 내용을 볼 때, 일단 래브라도로 가는 육로형 국토는 생길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뉴브런즈윅으로 가는 육로형 국토를 만들기 어렵다는 것이 문제이다. 세인트로렌스 강 이남 지역도 미국 국경 바로 인근을 제외하면 프랑스어 화자가 대다수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미국 국경 지자체에서도 프랑스어 화자가 우세해진 상태이다.
게다가 퀘벡과 캐나다 동부 지역의 영어권 주들만큼은 아니지만 앨버타나 서스캐처원, 브리티시 컬럼비아, 메니토바, 유콘, 노스웨스트, 누나부트 등 캐나다 서북부 지역의 영어권 주와 준주들에서도(특히 앨버타) 두 차례씩이나 분리 독립 여부를 묻는 주민투표를 실시하여 분리독립, 연방 이탈을 시도했던 퀘벡처럼 분리 독립 여부를 묻는 주민투표를 실시하여 분리 독립을 하거나, 또는 다른 신생 연방 국가로 따로 분리독립해 결성하거나 미국의 연방 주로 가입, 합병하자는 분리주의 의견이 소수이지만 존재하고 있다. 사실 캐나다는 미국이나 멕시코, 브라질, 아르헨티나, 칠레, 페루 등 다른 아메리카 대륙의 영토 대국들보다 느슨한 국가적 정체성을 지닌 나라인 것이다. 만약에 그리된다면 캐나다는 과거 중남미에 존재했던 대콜롬비아 공화국[3]이나 중앙아메리카 연방공화국[4], 페루-볼리비아 연합[5]처럼 '''여러개의 북미 소국들로 분열되거나 아예 캐나다 국가 자체가 해체되어 사라질 수도 있다.'''

3.1. 퀘벡 주 내의 분리?


실제 퀘벡이 독립할 경우, 또다른 차원의 분리운동이 일어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퀘벡 북부에 살고 있는 수만 명 규모의 원주민들은 독립된 퀘벡에 자신들은 참여하지 않겠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퀘벡의 지도를 보면 알 수 있듯이 퀘벡 대부분의 영토가 북부의 소수 원주민들만이 살고 있는 땅인데, 때문에 만약 독립 시 원주민들의 분가를 인정한다면 퀘벡의 실제 영토는 급격히 줄어들게 된다는 주장도 있다. 퀘벡의 인구에서 원주민 비중은 공기에 가깝지만 원주민 비중이 70% 정도인 노르 뒤 퀘벡(Nord-du-Québec) 지역[6]만 빼도 퀘벡의 영토는 '''절반 이하'''로 줄어들어 버린다.
또한 몬트리올과 퀘벡-온타리오 주경지대에는 어느 정도의 영어권 인구도 살고 있다 보니, 이들은 '퀘벡이 캐나다와 투표를 통해 분리가 가능하다면, '''퀘벡 그 자체도 투표를 통해 분리가 가능'''하다'는 주장도 한다. 이들에 따르면 영어권이 많은 일부 몬트리올 지역이나 퀘벡의 마을은 원한다면 캐나다에 남을 수 있다는 것이다. 영어권 주민들은 "노르 뒤 퀘벡(Nord-du-Québec)과 코트노르(Côte-Nord) 북서부 지역은 1898년부터 1912년 사이에 순차적으로 퀘벡에 편입된 지역들로 오리지널 퀘벡 지역이 아니기 때문에, 독립된 퀘벡이 갖고 가는 것은 국제법적으로 부당하다"고 주장한다. 특히 뉴펀들랜드 래브라도로 가는 짧은 경로를 만들기 위해 이러한 주장들을 하는 사람이 많다. 지금은 이들 지역이 인구가 희박해서 캐나다에 잔류해야 한다고 주장되는 북부 지역만을 거쳐서 나머지 캐나다에서 뉴펀들랜드 래브라도로 가기 매우 힘들지만, 남부 퀘벡만 독립하면 캐나다 정부에서 정책적으로 나머지 캐나다에서 뉴펀들랜드 래브라도로 가는 고속도로를 만들 가능성이 매우 높다.
퀘벡은 분리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국제법을 근거로 반박한다.

3.2. 퀘벡이나 인접 동부 캐나다 주들의 역분리 또는 분리 가능성


퀘벡이 독립할 때 퀘벡과 근접한 여타 대서양 연안 캐나다의 주들이 독립국이 된 퀘벡에 병합해 퀘벡 영토가 되어 캐나다 연방에서 나가거나 또는 퀘벡과 이들 캐나다 동부 대서양 연안의 나머지 주들이 한 나라로 통합하여 캐나다와는 다른 독자적인 신생 연방국가로 독립해나가는 방안도 고려해볼 수는 있다.
퀘벡 분리론자들은 퀘벡의 일부 지역이 퀘벡에서 분리되면 뉴브런즈윅까지 갈 수 있는 일종의 육로형 국토를 만들어 줘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그렇게 되면 퀘벡에서 미국을 바로 갈 수 없어 퀘벡인들의 많은 반발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가능성이 높지 않다. 퀘벡인들 입장에서는 원래 퀘벡 땅이 아니었고 독립 반대여론이 우세한 북부 지역을 원주민이 많다는 이유로 캐나다에 놔두고 나가라는 것도, 앞으로 북극항로를 통해 아시아와 교역하기 힘들어지는 등의 이유로 반발할 텐데, 프랑스어권 주민들이 많은 남동부까지 놔두고 가라고 하면 반발할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되면 뉴브런즈윅,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 노바스코샤가 캐나다의 월경지가 될 것이다. '캐나다 땅만 밟아서 여행하겠다' 이런 생각을 한다면 래브라도까지 페리를 타고 다시 캐나다 정부에서 건설할 고속도로를 거쳐서 삥 돌아서 가야 한다. 결국 이들 지역은 미국 북동부와 더 밀접해질 가능성이 높고, 미국 합병 운동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 혹은 이들 3개 주가 미국과 캐나다에서 독립된 연방국으로 분리독립할 가능성도 있다. 미국으로 합병할 경우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 주는 인구가 과소하여, 인구가 14만밖에 안되는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 지역에 상원의석 2석과 하원의석 1석을 주기 싫어할 미합중국에서는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뉴브런즈윅이나 노바스코샤 중 하나에 통합할 것을 연방 가입 조건으로 요구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분리독립안도 유력한 방안중의 하나이다
하지만 문제는 뉴브런즈윅,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 노바스코샤, 뉴펀들랜드래브라도 등 여타 대서양 연안의 캐나다 주들의 역사적, 문화적 배경이 퀘벡과는 상이하게 다르다는 것이다. 프랑스어를 쓰는 퀘벡과 달리 이들 주들은 언어도 영어를 사용하는 등 사용 언어도 다른데다 독립국가가 된 퀘벡에 합병되어 설사 독립국이 된 퀘벡이 이웃국가인 미국이나 캐나다와 비슷하게 지방내 자치권을 보장하는 연방제를 실시하여 이들 지역에게 자치권이나 영어 사용권을 보장한다고 쳐도 신생국가 내부에서 퀘벡 본토보다 상대적으로 낮은 대우를 받을 확률이 아주 높다. 그나마 뉴브런즈윅 주는 퀘벡과 마찬가지로 프랑스의 식민 지배를 받은 이력이 있었고 퀘벡보다는 못해도 프랑스어 사용자들이 꽤 되는 등 퀘벡이 분리 독립할 시 퀘벡과 병합해 퀘벡 영토가 되거나 신생국 퀘벡으로의 병합을 조건으로 퀘벡과의 합병 후 수준높은 자치권을 부여받을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어 보이지만, 프랑스어 구사자가 적고 영어 사용자가 더 많은 노바스코샤나 뉴펀들랜드 래브라도, 프린스에드워드 아일랜드 같은 다른 나머지 동부 지역의 3개 주들은 캐나다 연방에서 이탈해 퀘벡에 병합되는 것을 선택할지도 의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들을 떠나서 이들 대서양 연안의 캐나다 동부 주들이 퀘벡에 병합해 연방에서 이탈하게 될 경우 캐나다는 대서양으로 나갈 수 있는 대서양 연안의 영토와 영해들을 전부 잃게 되니 캐나다 입장에서도 마냥 좋게 받아들일 수가 없다. 하지만 퀘벡 시 등이 속해있는 퀘벡 남부 지역만 독립국으로 독립하고 퀘벡 북부의 노르딕 퀘벡 지역이 캐나다 영토에 남게 된다면, 대서양과 맞닿아 있는 뉴펀들랜드래브라도주와 영토가 연결되어 캐나다가 대서양 영토를 상실하지 않고 절반 정도는 유지할 수 있고, 뉴브런즈윅이나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 노바스코샤 등 관리하기 힘든 월경지가 될 가능성이 높은 퀘벡과 인접한 나머지 캐나다 동부 주 영토들은 캐나다가 뉴브런즈윅,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 노바스코샤에 대한 지배권을 신생국 퀘벡에게 이양하고 영유권을 포기하거나 연방 이탈 밑 분리독립을 허용할 가능성도 있다.

[1] 이 당시 퀘벡의 가톨릭 사제들 중 고령층은 적지 않은 수가 간접적으로 영향 받은 정도가 아니라, 아예 젊은 시절 프랑스 혁명 정부의 박해를 피해 영국으로 망명 갔다 캐나다 까지 오게 된 프랑스 출신 반혁명 망명객들 출신이었다.[2] 뉴펀들랜드 래브라도 주의 경우 캐나다 독립 초기 본래 캐나다령이었던 뉴브런즈윅, 노바스코샤,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 주와 달리 캐나다와 분리되어 있던 영국의 해외 식민지였다가 1949년에 가서야 캐나다 연방에 가입하는 등 현재 캐나다 영토가 된 시기가 70년도 채 되지 않는다.[3] 시몬 볼리바르 실권 후 베네수엘라, 콜롬비아, 에콰도르로 분열.[4] 과테말라, 엘살바도르, 온두라스, 니카라과, 코스타리카로 분열되어 해체.[5] 볼리비아페루가 1836년부터 통합 연방 국가를 구성하려 했으나 주변국인 아르헨티나칠레의 견제와 방해, 볼리비아와의 통합에 반대하던 페루내 보수주의 세력들의 반발과 저항을 받아 1839년에 해체되었다.[6] 인구 42,579명에 면적 '''747,161km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