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라이나-세르비아 공화국
1. 개요
유고슬라비아 내전 당시인 1991년부터 1995년까지 크로아티아 영토 내에 존재한 사실상 세르비아의 괴뢰국이었다. 1991년 6월 25일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가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자 여기에 불만을 품던 크로아티아 내의 세르비아계가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의 접경 지역이던 크닌스카크라이나(Kninska Krajina)를 중심으로 독립을 선언했고 크로아티아와 다른 독자적 노선을 걸을 것을 천명하게 된다. 말이 독자적 노선이지, 실상은 세르비아의 지원을 받아 '''크로아티아와 지속적으로 전쟁을 해서 크로아티아를 다시 세르비아가 정복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크라이나-세르비아 공화국은 국제 사회의 인정을 받지 못했고[1]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의 군사적 지원에도 불구하고 독립 선언 4년 만인 1995년 여름 '플래시-스톰'으로 불리는 크로아티아군의 총공세 작전으로 인해 사실상 괴멸 상태에 놓이게 되었으며 이후 1998년 공식적으로 크로아티아에 귀속된다.
2. 배경
16세기 크라이나 지방을 포함한 크로아티아 지역이 오스트리아를 지배하던 합스부르크 가문에 귀속된 이후 이곳은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는 유럽의 최전선 중 하나였다. 크로아티아인이 우세한 곳이던 이 지역에 오스만 제국의 종교적 박해를 피해 세르비아인들이 이 일대로 이주해오기 시작했고 수세기 만에 세르비아인들도 이 곳에서 상당한 세력을 차지하게 된다. 이러한 두 민족의 세력 균형 현상은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을 거쳐 유고슬라비아 왕국,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의 지배를 거쳐가는 와중에도 계속 이어졌는데 이는 두 민족이 갈등 없이 살아가고 있을 때는 민족 화합의 상징으로서 기능하였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이러한 세력 균형은 두 민족간의 갈등이 증폭될 경우 특정한 우위 세력이 없을 시에는 이러한 갈등이 곧 매우 폭력적인 양상으로 악화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는 1991년부터 발생한 유고슬라비아 내전 당시 상당한 민족적 동질성을 가지고 있었던 슬로베니아가 큰 충돌 없이 유고 연방으로부터 독립한 반면에 세르비아인이 일정한 세력을 차지하고 있던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인,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모두 상당한 세력을 차지하고 있던 보스니아는 엄청난 유혈 충돌 끝에야 겨우 독립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서 여실히 증명되었다. 이미 유고 내전 이전에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크로아티아계 우스타샤와 세르비아계 체트니크가 서로 벌인 인종 학살은 크로아티아인과 세르비아인 사이에 깊은 골을 남기고 한동안 수면 아래에 잠겨있었다. 이것이 요시프 브로즈 티토 사망 이후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떠올랐고 동유럽 혁명 이후 2년이 지난 1991년 이는 마침내 재앙으로 이어졌다.
3. 국가
공식 국가 "정의의 신". 가사가 들어간 보컬 버전은 구글에서 혐오 조장이라며 삭제한다.
크라이나-세르비아 공화국이 존재하고 있던 시절 국가처럼 가장 많이 불리던 노래.
4. 전개
크로아티아의 경우 이 같은 양상이 가장 잘 드러난 곳이 크라이나 지방이었다. 1991년 크로아티아가 독립을 선언하자 크닌스카크라이나[2] 지방에서 다수를 점하고 있던 세르비아인들은 크로아티아의 독립을 보이콧하고 크라이나 지방의 크로아티아로부터의 분리를 추구했다. 1991년 12월 19일 밀로셰비치의 암묵적 지원 아래 크라이나-세르비아 공화국 성립이 선포되었다. 세르비아 측의 지원 아래 크라이나 민병대 (Srpska Vojska Krajine, Српска Војска Крајине), 일명 SVK는 화력, 장비 면에서 크로아티아 군을 압도해 순식간에 크라이나 지역의 상당수를 장악한다. 크로아티아군은 반격을 시도했지만 매우 열세였고 이듬해 임시 휴전 협정을 맺고 다음을 기약하게 된다. 보스니아 전쟁이 아니었다면 슬로보단 밀로셰비치가 대대적인 지원을 했던 크라이나 측이 크로아티아를 역관광 보낼 수 있을 정도로 크로아티아군이 심하게 털렸다. 한때는 크라이나 측이 크로아티아 수도 자그레브 인근까지 위협했을 정도였다.
5. 정치
크라이나 세르비아 공화국(RSK)은 나름 정치체제를 갖추기 위해서 크닌에다가 임시로 대통령궁과 국회를 짓기도 했다. 이원집정부제를 채택하고 대통령은 밀란 바비치를 세웠다가 바비치는 수상으로 내려가고 밀란 마르티치가 나라 멸망 시까지 대통령을 했다. 그러나 밀로셰비치는 철저하게 크라이나 지방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았다. 밀로셰비치는 스릅스카 공화국이 세워지자 라도반 카라지치의 명령을 따르라고 크라이나 측에 지시하여 사실상 카라지치의 부하에 불과했다.
쉽게 말하면 '''세르비아의 괴뢰국이 세운 이중 괴뢰국이 RSK였던 셈'''이다. 실제로 RSK는 크로아티아와의 전선 쟁탈전을 마무리하자 모든 국가 역량을 보스니아 전쟁에 총동원했다.
RSK가 동부전선에만 신경을 쓴 결과[3] 서부 방어가 허술해지며 1995년 단 일주일만에 크로아티아군한테 허무하게 멸망당하는 원인이 되었다.
6. 붕괴
1994년~1995년 부분을 보면 된다.
1994년부터 나토가 보스니아 내전에 본격적으로 개입하면서 이웃한 크라이나의 사태도 전환점을 맞게 된다. 3년간 미국 민간군사기업의 자문과 지원을 받은 크로아티아군[4] 은 3년 전에 비해 전력 면에서 많은 향상을 하게 되었고 1995년 5월 1일부터 시행한 플래시 작전(Operacija Bljesak)으로 SVK는 상당한 피해를 입는다. 그리고 마침내 석달 뒤인 8월 4일부터 나흘간 벌어진 일명 폭풍 작전(Operacija Oluja)는 크라이나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히고 이로써 크라이나-세르비아 공화국은 사실상 궤멸 상태에 놓이게 된다. 놀랍게도 8월 5일 전선 붕괴 시작 '''1주일만에''' 크라이나 세르비아 공화국이 멸망당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무려 4년 동안이나 유지하고 있던 크로아티아-세르비아 전선이 단 1주일만에 붕괴한 것이다.
보스니아 내전에도 새로운 전환점을 안겨주었으며 크로아티아 정부군이 이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고 크라이나에 거주 중이던 20만 명 가량의 세르비아인들이 보스니아 영내의 스릅스카 공화국과 세르비아 본토로 축출되면서[5] 크라이나 사태는 사실상 종식된다. 이후 이 지역을 UN 측에서 일정 부분 관리하다가 1998년 크로아티아가 이 지역에 대한 완전한 통제권을 획득하게 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세르비아인에 대한 크로아티아의 인종 청소역시 자행됨으로서 수많은 민간인 피해가 나서, 당시 작전을 주도한 크로아티아의 군 인사 몇몇이 전범 재판에 넘겨지기도 했으며[6] , 크로아티아 국내에서는 큰 반발을 부르기도 하였다.
이 작전의 결과 오랜 기간동안 세르비아인들의 거주지역이었던 크라이나는 크로아티아인이 다수를 차지하는 지역이 되었다.[7] 광신적인 세르비아 민족주의가 추구했던 대세르비아라는 야욕은 아이러니하게도 세르비아인 거주지역의 축소를 불러온 것이다. 비록 크로아티아군의 인종청소 역시 비열한 행위였지만, 타협없이 잔인한 전쟁을 계속하던 크라이나-세르비아 공화국의 지도층 역시 한때 동구권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 중 하나이자 풍족하고 평화롭던 유고슬라비아를 인간도살장으로 만든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7. 여담
국내에서는 Krajina 중간의 'j'를 영어식 발음인 [dʒ]로 읽어 크라이나를 '크라지나'로 표기한 적이 많았지만 세르보-크로아트어 계통에서는 'j'를 독일어와 마찬가지로 [j], 즉 영어의 y 발음으로 발음하므로 이는 틀린 표기이다.
[1] 슬로보단 밀로셰비치는 크로아티아에 크라이나, 보스니아에 스릅스카 공화국이라는 괴뢰국을 세워놓고는 국가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유는 세르비아 입장에서 이들은 단순히 '미수복지구'이지 국가가 아니기 때문.[2] 슬라브어권에서 '크라이'는 변경지역이라는 의미가 있어 크라이나라는 지명은 남유럽과 동유럽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그래서 이곳을 특정해 이르려면 중심도시인 크닌에서 따와 크닌스카크라이나라 한다.[3] 보스니아의 비하치가 RSK 바로 옆에 있었기 때문이다.[4] 민간 군사기업의 자문과 지원이라고는 하나, 미국 국무부가 알선해준 전직 미군 고위장성 중심의 민간군사업체라는 측면에서 실질적으로 미국과 NATO가 크로아티아군을 교육하고 훈련시켜준 것과 마찬가지였다.[5] 그렇다고 이 사람들이 크라이나 지역이 크로아티아에게 함락당한 이후에 세르비아로 피난와서도 세르비아 본토의 세르비아 국민들로부터 좋은 대접을 받았냐면 더더욱 아니었다. 그러기는 커녕 세르비아의 세르비아인들도 전쟁을 피해 쫓겨나온 동포들로 환대해주기는 커녕 외려 외국인, 불법체류자 취급을 하며 엄청난 홀대와 차별을 가했으며 이 때문인지 크로아티아 출신의 세르비아인들도 세르비아 본토의 세르비아인들과 사이가 그리 좋지 않다.[6] 대표적으로 전범 재판 재판정에서 판결에 불복하며 즉시 독약을 먹고 자살한 슬로보단 프랄략이 있다.[7] 물론 유고슬라비아 전쟁이 끝나고 세르비아로 피난을 간 일부 크로아티아 출신 세르비아인 주민들이 돌아오기도 했다. 현재 크로아티아의 세르비아인 숫자 역시 4.35%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