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트니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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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체트니크는 세르비아인들이 조직한 민족주의, 왕당파 무장 조직이다. 체트니치라고도 한다.'''국왕과 조국을 위하여
자유 아니면 죽음을!'''[1]
2. 기원과 형성
체트니크의 전신은 세르비아 혁명 조직(Српска четничка организација)으로 세르비아 왕국 시절에 창설되었다. 그 기원은 세르비아 독립 이전부터 오스만 제국에 항거한 저항 운동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발칸 전쟁과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세르비아측 의용군으로 정규군과 함께 참전했다. 1차 대전에서 세르비아가 동맹국에 함락되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불가리아 왕국의 점령군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벌이기도 했다. 체트니크는 2차 대전 시기 유고슬라비아가 추축국에 함락된 이후 다시 결성되어 활발하게 활동했다.
3. 2차 세계대전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유고슬라비아 왕국은 추축국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삼국 동맹 조약에 가입하고, 추축국에도 가담하는듯 하였다. 하지만 반독성향의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가입한지 3일만에 탈퇴하고 말았다. 이에 아돌프 히틀러는 격분하였고 나치 독일, 이탈리아 왕국, 헝가리 왕국, 불가리아 왕국 4개국은 유고슬라비아를 침공하여 점령하였다. 유고슬라비아 왕국 정부는 영국으로 탈출하여 망명 정부를 세웠다. 점령 이후 유고슬라비아는 분할되어 지금의 세르비아 지역에는 독일의 군정인 세르비아 군정청이 들어섰다.
유고슬라비아 전역이 추축국에 점령당하자 유고군의 장교인 드라자 미하일로비치(1893-1946)[4] 를 중심으로 체트니크가 결성되어 나치 독일군에게 저항 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또 나치 독일에 빌붙은 크로아티아 독립국과 그 실권자인 우스타샤를 상대로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그래서 많은 세르비아인과 유고군 잔존병력이 이 조직에 자발적으로 가담하기도 하였다. 체트니크는 유고슬라비아 왕국 망명 정부에게 지원을 받았으며, 연합국에게 지원을 받기도 했다. 당시 유고슬라비아의 국왕인 페타르 2세도 망명 치하에서 체트니크의 지도자인 미하일로비치와 연락을 주고받기도 했다. 그리고 전쟁 초반기에는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과 함께 추축군을 적극 공격하였다.
1941년 6월에는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였다. 독소전이 발발하자 유고의 공산당 지도자인 요시프 브로즈 티토의 빨치산이 이에 호응하여 독일 점령군에 대항하는 봉기를 일으켰다. 동년 9월, 10월에 미하일로비치와 티토는 회담을 가지며 대추축국 공동전선에 대해 논의했다. 성사되었다면 유고슬라비아판 국공합작이 이루어졌겠지만 양측은 이견차를 좁히지 못해 협력 논의는 흐지부지되었다.
협력이 결렬된 원인은 왕정 복고를 지향하는 체트니크와 사회주의 연방 국가 건설을 목표로 하는 티토의 공산당은 '''양립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5] 당장은 우스타샤나 추축군이라는 공동의 적을 두고 있었지만, 2차 대전 종전 후에는 유고슬라비아의 역내 주도권을 두고 대결하게 될 차기 적성세력이나 다름 없었다. 여기에 지도층과는 상관 없이 양측 중간 간부들이 상호간에 매우 적대적이어서 '우발적인' 무력충돌이 잦았기 때문에 양측간의 갈등은 심화되었다.
체트니크는 이후 공산주의 반군인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이 득세하자 이를 견제하기 시작했다. 나치에 대항하는 창설 초기의 이념은 온데 간데 사라지고 요시프 브로즈 티토가 이끄는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과 권력 투쟁을 벌이는데 더 힘을 쏟았고[10] 우스타샤가 세르비아인들을 학살한 것처럼 크로아티아인들을 학살하기도 했다. 정말 웃기게도 그 와중에 체트니크는 파르티잔을 막는답시고 '''철천지 원수인 나치 독일과 크로아티아 독립국을 비롯한 추축국 세력과 손잡기도 했다! '''실제로 1942년 크닌 전투를 비롯해 몇몇 전투들은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 vs 나치, 우스타샤, 체트니크의 구도를 띄었다. 체트니크의 위키피디아 항목에 들어가보면 동맹세력과 적대세력에 추축국인 나치 독일, 이탈리아, 크로아티아 독립국이 양쪽 모두에 기재되어 있다.(...)
3.1. 체트니크의 입장과 행보
상술한 바와 같이 얼핏보면 체트니크의 행보는 매우 모순적으로 보인다. 이같은 행보는 체트니크라는 조직의 성격과 특성에서 기인한다. 체트니크 자체는 기본적으로 지역 공동체[11] 를 기반으로하는 '''자경대''' 또는 조선시대나 구한말의 의병과 비슷한 성격의 조직이었다.[12] 다시 말해 우스타샤나 공산주의 파르티잔들이 사상과 이념에 기반한 정당의 지도를 받아 이상을 실현할 신국가 건설을 목표로 활동하는 반면, 체트니크는 농촌 주민들이 외부 위협(우스타샤, 나치, 이탈리아 또는 파르티잔 등)에 대항해 자기 마을을 지키기 위해 무장하고 들고 일어난 조직으로 '''당연히 체계적이고 통일된 행동 따위는 불가능했다.''' 임진왜란 당시의 의병과 비교해 보자면, 의병장끼리 협조하여 연계 활동을 하거나 또는 조정의 조서를 받아 움직이기도 했지만, 근본적으로 '''의병 각 조직 전체를 총괄 지휘 하는 지휘조직은 없었다.'''
2차 대전 당시 체트니크의 경우는 대외적으로 미하일로비치가 유고왕국 망명 정부와 영국 등으로부터 체트니크의 대표로 인정받고 있긴 했지만, 각 지역 체트니크의 지휘관들은 미하일로비치가 임명한 것도 아니고(자생적 의용군이기도 했고), 하다못해 미하일로비치가 이들에게 물자지원 같은 거라도 해줄 여건이 안됐다. 달리 말하자면 미하일로비치가 내린 지시를 체트니크 조직들이 쌩깐다 해도 이를 제지할 방법이 현실적으로 딱히 없었던 것이다.(...)[13][14]
파르티잔 같은 경우는, 특정 지역의 토벌이 심각해진다면 기존의 거점지를 버리고 산으로 숨어들거나 새로운 거점지역으로 탈출, 이동하여 항전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런데 각 마을과 지역의 체트니크들의 결성 사유와 목적은 자기 가족, 농지, 마을과 고향을 지키는 것이었다. 그걸 버리고 파르티잔처럼 다른 곳으로 이동하여 항전을 이어가는 선택지는 체트니크가 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에 반해 티토의 파르티잔은 독소전 개전당시 이에 호응하여 일으킨 초기 봉기가 실패하자 파르티잔 주력인 프롤레타리아 제1여단을 이끌고 세르비아 남부의 거점에서 보스니아의 산악지대로 탈출하여 반추축국 투쟁을 이어갔다. 우스타샤 같은 경우 전쟁 말기 소련군과 티토의 파르티잔이 발칸 반도 전체를 장악하자, 독일과 오스트리아 영내로 병력을 이끌고 퇴각하여 종전 시점까지 항전을 계속했다.[15] 각 지역의 체트니크의 경우는 상황이 악화되면 고향을 버리고 떠나 항전할 바에는 차라리 추축진영 주둔군과 타협을 택한 경우가 많았고, 상술했듯이 미하일로비치는 이를 제지할 방법이 없었다.
한편, 미하일로비치 본인의 현실인식도 체트니크의 행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 상술했듯이 당시 유고슬라비아는 추축국에 갈가리 분할되거나 괴뢰정권이 세워진 상태였다. 전쟁 초기에는 유고 망명 정부가 위치한 영국조차 런던이 불타오르고 알렉산드리아가 함락 되네 마네하던 시기라 유고슬라비아의 저항세력을 지원할 여건이 전혀 아니었다. 유고 국내로 보면, 추축국이 합병한 지역에서는 세르비아인들이 추방당하고 우스타샤가 세르비아계 주민 수십만을 학살함에 따라 미하일로비치를 비롯한 체트니크 수뇌부는 세르비아 민족 '''절멸의 위기'''를 느끼고 있었다.[16]
티토의 파르티잔이 '''독일'''의 후방을 어지럽혀 '''서방연합군과 소련의 승리'''를 앞당기기 위해 적극적으로 활발히 활동했다면, 미하일로비치는 민족 절멸을 막기 위해, '''생존 그 자체'''와 연합군이 승기를 잡아 개입할 때까지 '''역량의 보존'''을 중시했다. 이는 체트니크가 막강한 화력의 추축군(특히 독일군)보다 상대적으로 무장이 빈약한 우스타샤나 파르티잔과의 투쟁에 집중한 이유가 되었다.
미하일로비치와 체트니크는 독소전 초반 이후부터는 독일과의 교전을 회피하였다.[17] 동부전선 때문에 가뜩이나 인력이 부족한 독일은 유고 전역에서 저항세력이 봉기하자 본보기식으로 '''철저한 징벌과 보복'''을 통한 공포정책으로 대응했다. 카이텔 장군은 독일군 사상자 하나에 100명, 부상자 한명에 50명을 처형하겠다고 공표했다. 1941년 10월 중순 크랄례보에서 체트니크와 빨치산의 공동작전으로 독일군 10명이 죽고 14명이 부상을 입었다. 그러자 독일군은 자기들이 공표한대로 그 즉시 근방의 민간인 '''1,700명을 학살했다.''' 비슷한 시기 크라구예바츠에서 독일군 사상자 수십명이 발생하자 또 2,800명 가량을 학살했다.
이러한 일련의 학살사건들은 유고슬라비아 전역의 중요한 분기점으로 작용했다. 독일군의 잔혹한 보복정책은 체트니크의 반독활동을 억제하는데 큰 성과를 보였다. 체트니크의 입장에서는 가족과 친척, 고향마을을 지키는 것을 최우선 목표[19] 로 무장을 했는데 독일군에 대항했다가는 그 가족과 마을이 몰살당할 판이었다. 이에 독일군과의 교전을 회피하거나 아예 추축군에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사례가 늘기 시작했다. 심지어 개중에는 아예 나치독일의 괴뢰정권인 세르비아 구국정부측으로 전향하는 체트니크 조직도 있었다.
미하일로비치 역시 연합국의 지원도 전무한 상태에서 독일군과 당장 정면으로 승부하면 박살나니 교전을 회피하며 '내부의 적'인 우스타샤와 파르티잔을 우선적으로 때려잡아 유고슬라비아 내 주도 세력으로 거듭나고 차후 연합국이 본격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하면 추축국을 몰아내겠다는 계획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기조는 당연히 미하일로비치 직속 이외의 각 마을과 지역 체트니크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어차피 제지하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했지만, 미하일로비치 스스로부터가 분명히 연합군의 일원임을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역 체트니크들이 고향마을의 파괴와 몰살을 면하려고 추축군과 협력을 하는 것에 대해 '''민족의 생존'''을 목적으로 하는 미하일로비치가 강경하게 압박할 입장이 못 되었다.
3.2. 나치독일의 입장과 접근 / 악마가 손을 내밀다
한편 유고슬라비아에 주둔한 추축군의 경우, 특히 독일은 부차적이고 2차대전 승리에 하등 도움이 안되는 유고 지역에 사단이 두자릿수 이상 투입되자 환장할 지경이었고[20] 우스타샤의 폭주 로 저항세력이 끊이질 않아 발을 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21] 추축국 입장에서는 영미와 소련을 상대하는 것이 중요하지 유고의 저항세력은 차후에 정리하든 어쩌든 전혀 상관이 없는 상태였다. 달리 말하자면 체트니크가 적극적인 대독항쟁을 하지 않는다면 독일 점령군 입장에서도 (당장 다른 전선의 상황이 급박하기 때문에) 구태여 체트니크를 적극적으로 토벌할 이유가 없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당장에 서로 싸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 점에서 추축국과 체트니크는 서로 의견 일치를 보게 되었다. 독일 또한 유고슬라비아에서 (일시적이나마) 적을 하나라도 줄이고 싶어했는데, 티토의 파르티잔은 이념적으로 명백히 적인 데다가 서방 연합군의 전쟁수행과 독소전 승리 기여를 목적으로 활동 중이니 타협을 볼 여지가 없었다.[22] 이에 따라 현지 추축군과 체트니크 간에 도시지역은 추축군이, 교외 시골지역은 체트니크가 점령하는 식으로 암묵적인 휴전이 맺어지기 시작했다. 시간이 좀더 흐르자 아예 빨치산에 공동 대응하는 사실상의 협력관계로 나아가는 사례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돌프 히틀러의 편지에서 체트니크를 두려운 적이라 표현하는 등 일단 공공의 적인 파르티잔이 강하니 추축국 세력 편에 붙은 것일 뿐, 완전히 손잡았다고 하기에는 어려웠다. 실제로 이후 전황을 보면 양자가 손잡고 파르티잔에게 대항한 경우가 많았지만 주도권을 두고 자기들끼리 싸운 경우도 아예 없지는 않았다. 위에 말한 대로 당시 체트니크는 명목상 미하일로비치가 지도자였지만 실질적으로는 중앙집권적인 조직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지부별로 정책과 동맹 대상이 좀 달랐다. 대부분의 체트니크는 파르티잔 때문에 이탈리아, 독일, 우스타샤 등 추축국 세력과 임시 동맹을 맺었으나 미하일로비치 본인과 그 직속 부대는 우스타샤만큼은 끝까지 적대, 증오했다. 그리고 독일 등 여타 추축국들 역시 다른 체트니크는 그렇다 쳐도 지도자였던 미하일로비치만큼은 적대했다. 특히 크로아티아 독립국은 세르비아계가 다수인 보스니아를 포함하고 있었고 전체 세르비아계 인구는 약 190만으로 전체 인구의 '''1/3'''을 차지하고 있었다. 우스타샤는 크로아티아 독립국 내 세르비아계의 1/3은 추방 1/3은 개종 1/3은 '''학살'''하겠다고 공공연히 떠들었고 실제로 수십만에 달하는 세르비아계를 학살하고 나치를 모방한 세르비아계 절멸수용소를 운영했다. 체트니크는 보복으로 크로아티아계와 무슬림 수십만을 학살하며 이에 맞불을 놓았다. 이런 상황에서 크로아티아 민족주의 조직인 우스타샤와 세르비아 민족주의 조직인 체트니크는 상황에 따른 일시적 제휴나 협력이라면 몰라도 궁극적으로는 서로 앙숙관계일 수밖에 없었다.
3.3. 전쟁 중후반 그리고 최후
한편 북아프리카 전역을 승리로 마무리지은 연합군은 유럽대륙에 본격적인 제2전선 개전을 준비했다. 연합국이 유럽대륙에 개입할 조짐을 보이기 시작하자 미하일로비치와 체트니크는 연합국이 유고슬라비아에 개입하기 전에 한시라도 빨리 파르티잔을 때려잡고 향후 정국에서 우위를 점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혔다. 이에 따라 점차 독일과의 투쟁 대신 파르티잔과의 투쟁에 더욱 열을 올렸다. 하지만 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 '''치명적인 몰락의 자충수'''가 되었다.
1943년이 되며 2차 대전이 중반에 접어들고 전황이 점차 연합군에 유리하게 흐르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영국은 어느 정도 여유를 되찾았고 유고로 시선을 돌릴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정작 영국이 보기에 나치 독일을 상대로 가장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것은 티토의 파르티잔이었다. 반면 체트니크는 영미의 전쟁수행에 별 도움이 안되는 파르티잔이나 우스타샤와의 싸움에 열을 올리고 있고, 심지어 추축국이랑 협력하기도 하는 미묘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미하일로비치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던 간에 연합군의 입장에서 봤을 때 체트니크의 행태는 '''기회주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영국 내에서는 체트니크 대신 차라리 대독전선에 실질적인 기여를 하고 있는 파르티잔에 힘을 실어주자는 의견이 설득력을 얻기 시작하였다. 영국이 관심있던 것은 '누가 더 독일군을 잘 죽이는 것인가'였지[23][24] 유고 내부의 복잡한 사정같은 건 알바가 아니었다.
여기에 유고 내부적으로는 우스타샤와 체트니크가 상호간에 벌이는 인종청소가 체트니크에게 뼈아픈 부메랑으로 되돌아 왔다. 유고슬라비아의 국민들은 피에 피를 부르는 잔혹한 보복전에 질려버렸고, 대안으로 공산당에 대거 가담하여 파르티잔의 세가 급격히 불기 시작했다. 공산당과 파르티잔은 유고 내 특정 민족의 배제가 아니라 파시즘으로부터 인민의 해방, 그리고 궁극적으로 (적어도 이론상으론) 각 민족의 권리를 보장하여 자결주의에 입각한 6개 공화국으로 구성된 유고연방 건설을 목적으로 했다. 이에 따라 우스타샤나 체트니크와는 달리 특정 민족을 목표로 한 인종청소나 보복 행위에 관여하지 않았다.
1944년 무렵에는 영국은 파르티잔을 연합군의 일원으로 인정하며 독일군을 상대로 승리하고 있던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 쪽으로 기울게 되었다. 동년 8월에는 영국의 압박을 받은 망명정부가 추축국 부역 혐의로 체트니크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파르티잔에 적대하는 집단은 모두 반역자라고 선언하였다. 물론 아쉬울게 없던 티토는 왕실의 선언에 아무런 입장 표명도 하지 않았다. 얼마지나지 않아 미하일로비치는 총사령관직을 박탈당하고 체트니크는 연합국의 후원을 완전히 상실한다. 이렇게 대세가 기울자 체트니크 조직원들까지 대규모로 이탈하여 파르티잔으로 투항, 전향하기 시작했고 체트니크의 입지는 크게 위축되었다.
결국 전후에는 파르티잔들이 공산주의 정권인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을 설립하면서 체트니크는 완전히 몰락했다. 1946년 7월, 미하일로비치를 비롯한 체트니크의 지도부들은 모두 체포되어 사형되었다. 하지만 일부는 공산정권 치하의 유고슬라비아를 탈출하여 서방국가들로 달아나 그곳에서 병이나 노환으로 자연사한 무리들도 있었는데 도브로슬라브 예브제비치(Dobroslav Jevđević)와 몸칠로 두지치(Momčilo Đujić), 카알 노박(Karl Novak) 등 일부 체트니크 인사들은 이탈리아와 그리스, 미국 등으로 망명하여 망명지에서 사망했다.
3.4. 전쟁 범죄
4. 유고슬라비아 전쟁
2차 대전 이후 체트니크는 한동안 잊혀졌으나 1980년대 티토 사후에 세르비아 민족주의가 분출되기 시작하면서 재조명이 시작되었고, 때 마침 슬로보단 밀로셰비치도 대세르비아를 내세우며 세르비아인들의 지지를 얻어가며 타 공화국과 충돌했던 시기였던지라 더욱 주목받았다. 그리하여 내전이 발발한 뒤로는 세르비아계 민병대들은 자랑스럽게 체트니크 깃발을 들고 활동했다. 물론 크로아티아계 민병대 역시 자랑스럽게 우스타샤 깃발을 들고 활동했다. 유고 내 극우 민족주의 세력과 모두 대립했던, 티토를 비롯해 사회주의 유고 연방을 세운 사람들이 보면 아주 기가 막히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지금도 그 잔재는 남아 세르비아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내의 스르프스카 공화국 교과서에서는 체트니크의 전쟁 범죄와 나중에는 추축국에 협력했다는 사실은 숨긴 채 그 미화된 내용을 교과서에 싣고 있다. 아예 파르티잔과 함께 반 파시스트 운동을 벌였다는 식의 내용이 가득하다. 세르비아에서는 심지어 2015년에 미하일로비치를 복권시키기도 했다.[25]
5. 기타
- 만화작가 굽시니스트가 본격 제2차 세계대전 만화에서 18화 부록으로 관련 내용을 다루었다. #
6. 같이보기
[1] 상단 이미지의 백골기에 삽입된 문장, 체트니크의 실질적인 표어였다. [2]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보스니아를 공식적으로 합병하자 세르비아 측이 이에 반발하며 양측간에 긴장사태가 발생했다.[3] 해골기를 들고 있다.[4] 개전 당시 대령계급으로 제 2군단 참모장을 맡고 있었다. 유고슬라비아 함락 이후 독일군에게 항복을 거부한 채 자신을 따르는 부하들을 이끌고 부대를 이탈해 체트니크를 조직하고 점령군에 대항해 봉기했다. 얼마지나지 않아 망명 정부와 영국은 그를 국방부 장관 겸 유고군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5] 체트니크와 파르티잔의 협력 무산된 데에는 티토의 초기 노선도 영향을 주었다. 티토는 항쟁초기에 반파쇼 투쟁과 더불어 강경한 계급투쟁 또한 병행하였다. 하지만 계급투쟁이 중산층과 농민층에게 별로 호응을 얻지 못하자 유연하게 노선을 수정하여 반파쇼, 반독 투쟁에 집중했다. 달리 말하자면 봉기 초기의 파르티잔은 강경노선을 고수했기 때문에 이는 체트니크와의 협상결렬에 영향을 끼친 것이다.[6] 사진에서 보듯이 미하일로비치는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인상이었는데 이는 전형적인 세르비아 농촌 가부장의 이미지이다. 이는 체트니크의 주요 구성원인 세르비아 농촌 주민들에게 친근한 접근을 염두해둔 것으로 체트니크의 지향점을 대변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7] 1937년 당시 미하일로비치, 어깨에 대령견장을 달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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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반면 중요한 동맹인 영국에서는 후줄근한 산적 두목 같다는 평을 들었다.(...) 라이벌인 티토의 경우에는 해당 문서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지만 외국어에도 능숙한데다가 깔끔하게 면도하고 말끔한 옷을 빼입고 다녀 대외적 이미지가 좋았다.[9] 1942년 5월 25일자 아직 추축국 부역 혐의가 있기 전. [10] 미하일로비치는 옵저버로 유고에 파견 나온 한 영국 장교에게 자신들의 공격 대상은 파르티잔, 우스타샤, 크로아티아인, 무슬림, 독일 순이라고 털어놓은 적도 있다. [11] 주로 시골의 농촌[12] 두 사례는 지역공동체의 수호와 근왕주의를 표방했다는 점에서 매우 유사하다. 다만 임란기 의병은 어찌됐든 조정이 보존되어 조선 국내에서 전쟁을 지도함으로서 초기 봉기이후 얼마간 시간이 지나자말자 의병 조직의 체계가 관과 연계되어 통제됐다. 하지만 2차 대전기의 유고슬라비아는 전국토가 순식간에 추축군에게 함락되면서 그럴 여건이 마련되지 못했다. [13] 자신이 임명한 것도 아닌 자생적인 의용군 조직들이니 지휘관을 해임하거나 교체하는 방법도 없고, 물주인 것도 아니니 그걸 빌미로 통제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안습. 애당초 각 조직간에 연락을 취하는 것 조차 쉽지 않아서 미하일로비치가 지역 체트니크 조직에 현지시찰하러 방문했더니 그곳 주둔 추축군과 협력 중이더라 이런 일도 많았다.[14] 물론 그렇다고 지역 체트니크들이 미하일로비치를 적극적으로 무시하거나 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기본적으로 미하일로비치는 체트니크가 충성하고 있는 유고 왕국 망명정부와 영국에 공인받은 인물이고 체트니크의 주요 구성원인 농민들로부터 자신들의 수호자로써 '드라자 아저씨'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지지를 많이 받았다. 따라서 지역 체트니크들도 미하일로비치의 권위를 존중해야했지만, 상술한 바와 같이 미하일로비치 역시 각 지역 체트니크들의 입장을 아예 고려하지 않는 지시를 강조할만한 처지가 아니었다.[15] 전쟁범죄 경력으로 인해 공산진영 측에 투항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였다. 오스트리아로 후퇴한 우스타샤 잔당은 영국에 투항하려 했으나, 영국은 이들을 죄다 유고슬라비아로 송환시켜 버렸다.[16] 2차 대전 당시 세르비아계에 대한 학살이 있었지만, 이것이 실제적으로 절멸의 위험을 내포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존재한다. 하지만 적어도 당시 미하일로비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17] 독일과의 '''협력'''한다는 의미와는 엄연히 차이가 있다는 점에 주의해야한다.[18] 독일군 장교가 아직 숨이 붙어있는 희생자를 손으로 가르키고 있다.[19] 우스타샤나 빨치산처럼 이상국가 건설이 아니라[20] 물론 유고슬라비아 지역에 배치된 독일군은 정상적인 3각 편제도 아닌 2각 편제의 감축 제대인데다가 2선급도 아니고 3선급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인적자원으로도 열악하여 독일측에 전향한 코사크등 동부전선에 투입하기에 껄끄러운 소련 포로출신 병력들이나 국방군에 편입된 크로아티아인들이 다수 배치되었다. 실질 전투 능력은 7개 사단 수준에 지나지 않다고 평가받기도 하지만, 독일이 수세에 몰린 마당에 유고에 이만한 병력을 배치하는 것 마저도 엄청난 손해였다.[21] 심지어는 독일이나 이탈리아군이 도움 안되는 말썽만 부리는 꼴을 보다 못해 일부 지역에서 우스타샤 세력을 무장해제시키는 사태도 벌어졌다.[22] 파르티잔이 본격적으로 활동한 것은 독소전 개전 이후의 일로 이전까지 티토는 활동을 자제했었다.[23] "simply to find out who was killing the most Germans and suggest means by which we could help them to kill more."[24] 윈스턴 처칠이 유고 파견 영국군 사절단장 맥클린(Fritzroy McLean)준장에게 지시하며 했던 말. # [25] 다만 미하일로비치 본인이 추축국과 적극 협력했다는 증거는 없다. 문제는 체트니크 하부 조직들은 분명히 추축국 세력들과 동맹을 맺었다는 것과 이들은 미하일로비치를 지도자로 취급했다는 점, 미하일로비치도 이들 하부 조직들과 어느 정도 교류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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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반면 중요한 동맹인 영국에서는 후줄근한 산적 두목 같다는 평을 들었다.(...) 라이벌인 티토의 경우에는 해당 문서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지만 외국어에도 능숙한데다가 깔끔하게 면도하고 말끔한 옷을 빼입고 다녀 대외적 이미지가 좋았다.[9] 1942년 5월 25일자 아직 추축국 부역 혐의가 있기 전. [10] 미하일로비치는 옵저버로 유고에 파견 나온 한 영국 장교에게 자신들의 공격 대상은 파르티잔, 우스타샤, 크로아티아인, 무슬림, 독일 순이라고 털어놓은 적도 있다. [11] 주로 시골의 농촌[12] 두 사례는 지역공동체의 수호와 근왕주의를 표방했다는 점에서 매우 유사하다. 다만 임란기 의병은 어찌됐든 조정이 보존되어 조선 국내에서 전쟁을 지도함으로서 초기 봉기이후 얼마간 시간이 지나자말자 의병 조직의 체계가 관과 연계되어 통제됐다. 하지만 2차 대전기의 유고슬라비아는 전국토가 순식간에 추축군에게 함락되면서 그럴 여건이 마련되지 못했다. [13] 자신이 임명한 것도 아닌 자생적인 의용군 조직들이니 지휘관을 해임하거나 교체하는 방법도 없고, 물주인 것도 아니니 그걸 빌미로 통제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안습. 애당초 각 조직간에 연락을 취하는 것 조차 쉽지 않아서 미하일로비치가 지역 체트니크 조직에 현지시찰하러 방문했더니 그곳 주둔 추축군과 협력 중이더라 이런 일도 많았다.[14] 물론 그렇다고 지역 체트니크들이 미하일로비치를 적극적으로 무시하거나 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기본적으로 미하일로비치는 체트니크가 충성하고 있는 유고 왕국 망명정부와 영국에 공인받은 인물이고 체트니크의 주요 구성원인 농민들로부터 자신들의 수호자로써 '드라자 아저씨'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지지를 많이 받았다. 따라서 지역 체트니크들도 미하일로비치의 권위를 존중해야했지만, 상술한 바와 같이 미하일로비치 역시 각 지역 체트니크들의 입장을 아예 고려하지 않는 지시를 강조할만한 처지가 아니었다.[15] 전쟁범죄 경력으로 인해 공산진영 측에 투항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였다. 오스트리아로 후퇴한 우스타샤 잔당은 영국에 투항하려 했으나, 영국은 이들을 죄다 유고슬라비아로 송환시켜 버렸다.[16] 2차 대전 당시 세르비아계에 대한 학살이 있었지만, 이것이 실제적으로 절멸의 위험을 내포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존재한다. 하지만 적어도 당시 미하일로비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17] 독일과의 '''협력'''한다는 의미와는 엄연히 차이가 있다는 점에 주의해야한다.[18] 독일군 장교가 아직 숨이 붙어있는 희생자를 손으로 가르키고 있다.[19] 우스타샤나 빨치산처럼 이상국가 건설이 아니라[20] 물론 유고슬라비아 지역에 배치된 독일군은 정상적인 3각 편제도 아닌 2각 편제의 감축 제대인데다가 2선급도 아니고 3선급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인적자원으로도 열악하여 독일측에 전향한 코사크등 동부전선에 투입하기에 껄끄러운 소련 포로출신 병력들이나 국방군에 편입된 크로아티아인들이 다수 배치되었다. 실질 전투 능력은 7개 사단 수준에 지나지 않다고 평가받기도 하지만, 독일이 수세에 몰린 마당에 유고에 이만한 병력을 배치하는 것 마저도 엄청난 손해였다.[21] 심지어는 독일이나 이탈리아군이 도움 안되는 말썽만 부리는 꼴을 보다 못해 일부 지역에서 우스타샤 세력을 무장해제시키는 사태도 벌어졌다.[22] 파르티잔이 본격적으로 활동한 것은 독소전 개전 이후의 일로 이전까지 티토는 활동을 자제했었다.[23] "simply to find out who was killing the most Germans and suggest means by which we could help them to kill more."[24] 윈스턴 처칠이 유고 파견 영국군 사절단장 맥클린(Fritzroy McLean)준장에게 지시하며 했던 말. # [25] 다만 미하일로비치 본인이 추축국과 적극 협력했다는 증거는 없다. 문제는 체트니크 하부 조직들은 분명히 추축국 세력들과 동맹을 맺었다는 것과 이들은 미하일로비치를 지도자로 취급했다는 점, 미하일로비치도 이들 하부 조직들과 어느 정도 교류했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