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티안 9세
1. 개요
크리스티안 9세는 덴마크의 글뤽스부르크 왕조 최초의 국왕이다.
2. 놀라운 가족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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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중앙에 크리스티안 9세와 루이제 왕후가 있고, 왼쪽에 장녀 알렉산드라와 그 남편 에드워드 7세, 앨버트 왕자, 오른쪽에 차녀 다그마르와 그 남편 알렉산드르 3세, 미하일 대공이 있다.
사돈인 영국 빅토리아 여왕처럼 자녀들이 유럽 주요국의 왕(2명) 또는 왕비(2명) 가 되었기 때문에 '유럽의 할아버지'라고 불린다. 유럽의 중소 왕국의 왕인데도 당대 유럽 최고의 강대국인 대영제국의 왕세자와 러시아 제국의 황태자를 사위로 맞아들이게 되었고, 생전에 두 사위가 모두 왕과 황제가 되는 것을 지켜보기까지 한 인물이기도 하다. 이 항목이 생긴 이유도 근본적으로 이것 때문.
3. 생애
3.1. 즉위 배경
1818년 독일 슐레스비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글뤽스부르크 공은 별 볼일 없는 왕족이었으나 덴마크 왕 크리스티안 3세의 8대손이었다. 그리고 어머니 헤센카셀의 루이제 카롤리네 역시 별 볼일 없는 왕족이었으나 프레데리크 5세의 외손녀였다. 또한 이모였던 헤센카셀의 마리는 덴마크 국왕 프레데리크 6세의 아내였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후견인으로 지명된 프레데리크 6세는 그를 아들처럼 돌봐주었고 사관학교에 입학시켰다. 이후 덴마크 왕실 기마 근위대의 장교로 근무했다. 1842년 친척이자 역시 덴마크 왕실의 후손인 헤센카셀의 루이제와 결혼했다. 프레데리크 7세는 자녀가 없었고 추정상속인 페르디난트 왕자 역시 자녀가 없었다. 1848년 프레데리크 7세는 덴마크와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공작령(덴마크 국왕이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을 통치하고있었다)을 덴마크 왕실의 여계후손이 계승해 통치할 수 있는 법안을 발표했다. 이는 홀슈타인의 반발을 불렀다. 홀슈타인은 독일연방의 구성원으로 독일인들이 많이 거주하였고 19세기를 강타한 민족주의의 영향으로 독일로 편입되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덴마크와 홀슈타인 사이의 내전이 벌어졌다. 전쟁은 덴마크의 승리로 끝났으며 이 전쟁에서 홀슈타인편에선 아우구스텐부르크 공작가와 글뤽스부르크 공작은 계승순위에서 제외되었다. 이에 크리스티안이 유력한 왕위계승자로 떠올랐다. 그는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전쟁에서 홀슈타인의 편에서 서지 않았고 덴마크에서 교육받았으며 장모와 외할머니도 덴마크의 공주였기 때문이었다. 아내 루이세는 남편이 적합한 왕위계승자로 선택될 수 있도록 유럽 왕족 친척들에게 끊임없이 편지를 쓰면서 지지를 구했다. 이러한 바탕을 등에 업고 크리스티안은 자녀가 없던 덴마크 왕 프레데리크 7세의 추정상속인 및 후계자가 되었고, 1863년 프레데리크 7세가 죽자 즉위하였다.
3.2. 즉위 기간
선왕 프레데리크 7세가 덴마크의 입헌군주제를 허락한다고 선언했으나 실효기간이 이루어지기 전에 사망하였으므로, 의회 통치의 시작은 단연 크리스티안 9세 시대에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크리스티안 9세는 노골적으로 우익 정당을 지지했고, 그로 인해 의회가 흔들렸다. 거기에 설상가상으로 슐레스비히 전쟁으로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에게 개패듯이 털리는 등 우여곡절이 많았다. 1906년 1월 29일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