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버트 빅터 크리스티안 에드워드

 

'''Prince Albert Victor, Duke of Clarence'''
'''이름'''
앨버트 빅터 크리스티안 에드워드
(Albert Victor Christian Edward)
'''출생'''
1864년 1월 8일
버크셔 윈저 프로그모어 하우스
'''사망'''
1892년 1월 14일 (28세)
노퍽 샌드링엄 하우스
'''장례식'''
1892년 1월 20일
윈저 성 세인트 조지 예배당
'''아버지'''
에드워드 7세
'''어머니'''
덴마크의 알렉산드라
'''형제'''
조지 5세, 루이즈, 빅토리아, 모드, 알렉산더 존
1. 개요
2. 어린 시절
3. 논란의 대상
4. 사랑 이야기
5. 의문이 넘치던 죽음
6. 평가
7. 가족관계


1. 개요


영국의 국왕 에드워드 7세덴마크알렉산드라 공주장남으로 빅토리아 여왕의 장손. 본명은 앨버트 빅터 크리스천 에드워드. 보통은 클래런스 공작으로 불린다.
앨버트 빅터 왕자는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할머니 빅토리아 여왕이 자신과 남편의 이름을 딴 '앨버트 빅터'라고 아이의 이름을 결정해놨는데, 장남 부부 에드워드 7세덴마크의 알렉산드라 공주의 의견을 듣지도 않고 여왕이 멋대로 정해버렸다고 한다.[1] 결국 여왕의 뜻대로 '앨버트 빅터'라는 이름을 받았으며 가족들에게는 '에디'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2. 어린 시절


[image]
당시 웨일즈 공이었던 아버지 에드워드 7세는 빅토리아 여왕의 궁전과 멀리 떨어진 말버러 하우스에서 친구들과 자유분방한 삶을 살았다. 그 과정에서 불륜같은 소위 불건전한행동을 자주 벌였다. 일례로 앨버트 빅터 공자가 6살 무렵 아버지 웨일즈 공은 그의 수많은 정부들 중 1명의 이혼 소송에 증인으로 참석해야 했고(…) 이것은 앨버트의 아버지가 바람둥이라는 인식을 대중에게 각인시키는 일 중 하나였다.
할머니 빅토리아 여왕은 이런 에드워드의 영향 아래 성장하는 손자들을 걱정했고, 직접 손자들의 교육에 참여하기로 결정했다. 1871년부터 앨버트는 할머니 빅토리아 여왕이 직접 고용한 가정 교사인 존 달튼 목사에게 남동생 조지 왕자와 함께 교육받았다. 존 달튼은 야망은 있는 인물이었지만 훌륭한 교사는 아니었는데, 매우 엄격한 교육 스케쥴을 고안했고 그것을 강요했다. 앨버트 빅터 왕자와 조지 왕자는 그를 거부했으며, 심지어는 기초 교육조차 받으려 들지 않았다.
하지만 달튼은 자신의 실패를 무마하기 위해서 앨버트 빅터 왕자의 지적능력과 인성 모두에 문제가 있다고 불평했다. 뿐만 아니라 2개월 일찍 태어난 것[2] 때문에 학습능력 면에서 문제가 있다고 여겨졌고[3], 빅토리아 여왕의 개인비서인 헨리 폰슨비는 어머니의 난청을 물려받았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대영제국으로 불릴 만큼 위대했던 영국의 보통 왕자도 아니고, 차차기 왕의 자리의 오를 왕자였기 때문에 영국군에도 신경써야 하는데, 정작 본인은 군대에 관심이 없고 남동생 조지 5세가 해군에 열광하여 밀덕이 되어버린다. 안습.

3. 논란의 대상


앨버트 빅터 왕자는 10대 시절부터 평생 방탕하게 인생을 보냈고, 이것 때문에 2가지의 스캔들의 의혹을 받았다. 그 2가지가 바로 클리블랜드 스트릿 스캔들과 잭 더 리퍼 사건. 클리블랜트 스트릿 스캔들은 그가 동성애 매춘(...)을 했다는 의혹이고, 또 하나는 바로 매춘부들을 살해한 잭 더 리퍼가 앨버트 왕자라고 의심을 받았던 것.[4][5]

4. 사랑 이야기


청년으로 성장한 앨버트 빅터 왕자는 2번의 사랑을 하면서 할머니[6]와 부모님[7]이 출연한 막장 드라마에 본인도 출연신청을 했다.
첫사랑은 사촌인 헤센의 대공녀 알릭스였다.[8] 하지만 '''아직 어린 알릭스 대공녀가 좀 더 자라 청혼할 수 있는 나이가 되길 기다리는 동안'''(…) 그의 평생에 오점이 되어버린 클리블랜드 스트릿 스캔들이 터졌다. 그해 앨버트 빅터 왕자는 인도 제국으로 보내졌고 다시 돌아왔을 때 이미 알릭스는 앨버트 빅터의 이종사촌이자 남동생의 도플갱어로 유명했던 니콜라이 2세와 뜨겁게 연애 중이었기 때문에 앨버트 빅터의 청혼을 거절했다.[9]
점점 나이가 들수록 스캔들의 대상이 되기 쉬워졌기에 서둘러 아내를 맞이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 앨버트 빅터 왕자는 여러 공주들을 생각했는데, 하필 가장 부적격인 여성과 사랑에 빠졌다. 루이 필리프 1세의 손자였던, 프랑스 왕위 계승요구자인 파리 백작 오를레앙의 필리프의 딸인 오를레앙의 엘렌이었다.
엘렌은 프랑스 국왕의 직계 후손이었던 만큼 통치 가문의 남자와 혼인할 수 있는 고결한 신분이었다.[10] 그러나 그녀는 '''프랑스인'''인데다가 '''가톨릭''' 신자였고 영국의 왕위계승자는 가톨릭 신자와 결혼해서는 안되었다.[11] 프랑스 공주가 영국의 왕비가 된 예는 찰스 1세의 왕비였던 헨리에타 마리아가 있었지만 그 때 영국은 청교도 혁명이 일어났었다.
빅토리아 여왕은 다른 결혼 후보로 프로이센의 마르가레테 공주를 추천했지만, 둘이 워낙 열렬하게 사랑하고 있었기에 여왕에게 간청을 했고 결국 여왕은 그들의 결혼을 지원해주기로 결심한다. 앨버트 빅터는 왕위 계승권을 포기할 것을 제안했고 엘렌은 교황 레오 13세에게 중재를 요청했지만, 교황은 가톨릭 외의 다른 기독교도와 결혼하는 것을 반대하였고 그녀의 아버지도 반대해서 결국 둘은 결혼하지 못하게 되었다. 후에 오를레앙의 엘렌은 아오스타 공작[12] 부인[13]이 되었다.
오를레앙의 엘렌과 헤어진 후 레이디 시빌 얼스킨과 사랑에 빠졌지만 그녀는 신분이 낮았다. 에드워드 7세는 자신의 스캔들로도 머리가 아팠기에(…) 앨버트 빅터 왕자가 결혼하지 않는다면 멀리 보내버리겠다고 위협했다. 하지만 신혼시절부터 남편의 외도로 골머리를 앓아 자녀들에 대한 독점욕이 어마어마했던 어머니 알렉산드라 공주는 아들을 다시 멀리 떼어놓는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때문에 앨버트와 결혼할 적당한 여성을 찾기 시작했다.
할머니 빅토리아 여왕은 예의바르며 온순하고 강한 책임감을 가진 테크의 메리[14]를 매우 이상적인 신부감으로 생각하여 적극 추천하였고, 앨버트 빅터는 여왕의 결정에 순응했다. 다만 평상시 친하게 지내던 바텐베르크의 루드비히 공자에게 보낸 편지에다가 "사랑해서 하는 결혼은 아니다"라고 쓰기도 했다.

5. 의문이 넘치던 죽음


1891년에 약혼했으나 1892년 1월 당시 유행하던 독감에 걸렸고, 결국 그는 28세 생일을 1주일 넘긴 1892년 1월 14일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많은 이야기를 남겼다. 독감이 아니라 매독이나 또는 독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었으며, 심지어는 위의 잭 더 리퍼 연루설과 연관되어 그가 죽은 것이 아니라 랜돌프 처칠 경이 음모를 꾸며서 왕위계승자를 바꾼 것으로, 앨버트 빅터 공자는 죽지 않았고 웨이트 섬의 정신병원이나 그래미스 성에 갇혀 있다는 이야기가 1930년대까지 퍼졌다.

6. 평가


왕위는 남동생인 조지 5세가 계승하고 '''그의 약혼녀인 테크의 메리 역시 조지 5세와 결혼했다'''. 그리고 앨버트 빅터의 존재는 곧 잊혀져갔다. 특히나 불안정한 정세 속에서 왕가를 지키려고 발버둥쳤던 조지 5세메리 왕비의 노력은 앨버트 빅터를 사람들에게서 더더욱 잊혀지게 만들었다. 남동생 조지 5세도 아버지 에드워드 7세의 사생활에 치를 떨며 왕가의 건전한 모습만을 보이려고 했기에 클리블랜드 스트릿의 오명을 가진 형을 부담스러운 존재로 인식했다고.
하지만 만약 앨버트 빅터 왕자가 왕이 되었다면 조지 5세가 만든 인간성이 너무 적고 차가운[15] 영국 왕실의 모습과는 달리 대중들에게 좀 더 자연스럽게 다가갔을 수도 있다는 평이 있긴 하다.

7. 가족관계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클래런스와 애번데일 공작
앨버트 빅터 왕자
(Prince Albert Victor,
Duke of Clarence and Avondale)

에드워드 7세
(Edward VII)
작센코부르크고타의 공자 앨버트
(Prince Albert
of Saxe-Coburg and Gotha)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에른스트 1세
(Ernest I, Duke of Saxe-Coburg and Gotha)
작센고타알텐부르크의 공녀 루이즈
(Princess Louise of Saxe-Gotha-Altenburg)
빅토리아 여왕
(Victoria)
켄트와 스트래선 공작 에드워드 왕자
(Prince Edward, Duke of Kent and Strathearn)[16]
작센코부르크잘펠트의 공녀 빅토리아
(Princess Victoria of Saxe-Coburg and Saalfeld)
덴마크의 알렉산드라 공주
(Princess Alexandra
of Denmark)

크리스티안 9세
(Christian IX)
슐레스비히-홀슈타인-존더부르크-글뤽스부르크 공작
프리드리히 빌헬름
(Friedrich Wilhelm,
Duke of Schleswig-Holstein-Sonderburg-Glücksburg)

헤센-카셀의 루이세 카롤리네
(Princess Louise Caroline of Hesse-Kassel)[17]
헤센-카셀의 루이세
(Princess Louise
of Hesse-Kassel)

헤센-카셀의 빌럼
(Prince William of Hesse-Kassel)
덴마크의 샤를로트 공주
(Princess Charlotte of Denmark)[18]

[1] 빅토리아 여왕의 앨버트 이름 사랑은 이때뿐만이 아니였다. 에드워드 7세가 태어났을 때도 퍼스트 네임을 앨버트라고 지었고, 둘째 증손자 조지 6세가 태어났을 때도 남편의 기일에 태어났다며 눈길 한번 안주다가, 손자 부부가 아기의 이름을 할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앨버트로 짓기로 했다고 하자 반색을 하며 매우 기뻐했다고(...) 한다.[2] 에드워드 7세덴마크의 알렉산드라 부부의 아이들은 '''전부 조산으로 태어났는데'''(앨버트 빅터의 경우 2개월 조산으로 태어났다.), 알렉산드라 공주가 시어머니 빅토리아 여왕출산에 참석하는 것을 원치 않아서 일부러 임신 날짜를 잘못 계산했다는 얘기가 있다.[3] 실제로 공부에 별 흥미가 없었다.[4] 이는 <프롬 헬>의 모티브가 되었다.[5] 크리스토퍼 플러머가 홈즈 역을, 제임스 메이슨이 왓슨 역을 맡은 1979년 영화 '살인 지령(Murder by decree )'에서도 이 루머를 기반했는데 범행의 배후가 왕세손 앨버트 왕자임을 알게 된 셜록 홈즈가 영국 총리와 정치적 타협을 하여 왕자의 정신병원 평생 감금, 총리가 사임하는 조건으로 이 일을 비밀에 붙이기로 한것으로 나온다. 영화소개 1986년 KBS 명화극장을 통해 국내 방영된 적이 있다.[6] 빅토리아 여왕. 이쪽은 보수적이고 전형적인 시어머니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7] 에드워드 7세와 왕비 알렉산드라 부부. 성격 차이가 심해서 항상 서로 싸워서 사이가 좋지 못했다. 에드워드 7세가 자신의 정부인 앨리스 케펠과 노는 모습을 알렉산드라가 욕한 것으로 보아 이쪽도 조용하지만 만만치 않게 성깔있는 며느리의 모습이다(…).[8] 앨버트 빅터의 고모 앨리스 모드 메리의 4녀다.[9] 훗날 알릭스 대공녀의 최후를 생각해보면 정말 아이러니.[10] 실제로 오를레앙의 엘렌은 프란츠 페르디난트, 니콜라이 2세와도 혼담이 오간 적이 있다.[11] 영국 왕족은 꼭 가톨릭 뿐만 아니라 성공회 신자 외에 다른 종교의 사람과 결혼해도 계승권을 박탈당하는 법이 무려 '''2015년''' 3월 26일 전까지도 유효했다. 2015년 3월 26일부터는 반 살리카 법도 폐지되어 남녀 구분없이 절대적 맏이 계승으로 바뀌었으며, 다른 종교를 지닌 사람과 결혼해도 계승권을 박탈당하는 것도 사라졌다. 이 바뀐 법의 첫 수혜자는 '''케임브리지의 샬럿'''이다.[12] 이탈리아 사보이 왕조 방계 가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차남 아마데오 왕자(한때 스페인아마데오 1세로 있었던 그 사람 맞다.)가 초대 당주로 지금도 현존하고 있다.[13] 2대 당주인 에마누엘레 필리베트로(1869~1931)와 결혼하여 두 아들을 낳았다.[14] 테크의 메리의 아버지는 부계로는 뷔르템베르크 왕가의 직계 핏줄이나 모계로는 왕족이 아닌 귀천상혼이었기 때문에 테크 공작가로 분가한 가문의 수장이었다. 그녀의 어머니가 영국 공주임에도 어쨌든 부계 혈통은 귀천상혼으로 탄생한 가문이었기 때문에 유럽 대륙의 다른 왕가들은 동일하게 격이 떨어지는 귀천상혼으로 취급했지만, 영국에서는 자신들의 공주의 자녀였기 때문에 부계 혈통은 대륙에 비해 크게 쓰지 신경쓰지 않았고 덕분에 약혼이 가능했다. 무엇보다 다른 사람도 아닌 그 빅토리아 여왕이 테크의 메리를 가장 지지했던지라 아무도 여왕의 결정에 토를 달 수도 없었던 것도 있었다.[15] 왕실을 지키고자 매우 노력한 조지 5세메리 왕비의 공로는 인정하지만, 훗날 지나치게 차갑고 경직되어 있다는 악평도 같이 듣고 있다. 다행스럽게도 최근 다이애나 왕세자비를 거친 윌리엄 왕세손 가족 덕분에 점차 친근한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긴 하다.[16] 조지 3세의 4남이다.[17] 프레데리크 5세의 손녀이다.[18] 프레데리크 5세의 손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