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도르 지프코프

 

'''토도르 흐리스토프 지프코프'''
Тодор Христов Живков

[image]
<colbgcolor=#009B75> '''출생'''
1911년 9월 7일
[image] 불가리아 왕국 Pravets Municipality 프라베츠
'''사망'''
1998년 8월 5일
[image] 불가리아 소피아 주 소피아
'''국적'''
[image] 불가리아 왕국 (1911년 9월 7일-1946년 9월 15일)
[image] 불가리아 인민 공화국 (1946년 9월 15일-1990년 11월 15일)
[image] 불가리아 (1990년 11월 15일-1998년 8월 5일)
'''가족'''
배우자: 마라 말레바지프코바 (Mara Maleeva-Žhivkova) (1936년-1971년)
슬하: 딸 루드밀라 토도로바 지프코바 (Lyudmila Todorova Žhivkova) (1942년 7월 26일-1981년 7월 21일), 아들 블라디미르 토도로프 지프코프 (Vladimir Todorov Živkov) (1952년 6월 5일-현재)
동독 동베를린에서 열린 독일 사회주의통일당 전당 대회에 참가한 지프코프. 1963년 1월 15일
1. 개요
2. 생애
3. 몰락
4. 사망


1. 개요


불가리아 인민 공화국의 서기장이자 국무회의 주석이자 총리. 1954년부터 1989년까지 무려 '''35년간''' 장기 집권한 인물이며 공산 불가리아의 역사는 사실상 그와 같은 길을 걸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정권 붕괴 후 총살당한 윗 나라 루마니아의 전 독재자인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와는 달리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축출된 이후에도 부정 부패 혐의로 인한 재판 참석과 가택 연금 이외에는 커다란 처벌을 받지는 않았으며 실권 이후인 1998년 5월 노환으로 자연사했다.

2. 생애


1911년 소피아 근교의 한 마을인 프라베츠(Правец, Pravets)에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가난한 집안 사정으로 인해 대학교도 진학하지 못한 채 고등학교 졸업 학력[1]으로 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하다가 1928년 공산주의 청년 동맹에 가입해 공산주의자가 된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나치 독일에 대항한 친 소련 레지스탕스 활동에 가담하였으며 그 공로로 종전 직후 이오시프 스탈린의 지원을 받은 게오르기 디미트로프(Георги Димитров)에 의해 불가리아가 공산화되자 공산당 당 중앙위원회 위원이 되어 농업 집단화를 이끌게 된다.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하고 스탈린 격하 운동이 벌어지자, 강경한 스탈린주의자였던 발코 체르벤코프(Вълко Червенков)가 소련의 압력으로 공산당 서기장에서 사임하고 온건주의자였던 지프코프가 1954년 3월 4일 공산당 서기장 자리에 오르게 된다. 니키타 흐루쇼프를 적극 지지하며 불가리아 내에서 탈 스탈린 움직임을 주도하던 지프코프는 동시에 권력을 서서히 강화하며 1962년에 이르면 1인 지배 체제를 사실상 굳히게 된다. 1인 지배 체제를 확립하고 난 지프코프는 1964년 흐루쇼프의 축출 이후에도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체코슬로바키아에서 프라하의 봄이 일어나자 바르샤바 조약기구 회원국으로서 진압군을 보내는 등 적극적인 친소 노선을 통해 권력을 유지한다.
경제 면에서 그는 농업 집중 육성과 산업화를 추진하는 동시에 시장 경제 요소를 어느 정도 도입하여 코카 콜라의 불가리아 진출도 허용하는 등 개방적인 면모를 취했다. 그러나 동시에 불가리아 인구의 약 10퍼센트 가량을 차지하던 터키인에 대해 가혹한 탄압을 가하고 민족의 다수를 차지하는 불가리아인들을 우대하는 불가리아 민족 중심의 민족주의적 정책을 펼쳤고, 정치 민주화를 억압하는 등 독재자로서의 면모도 드러내기도 했었다. 이 때의 탄압으로 불가리아를 떠난 터키인 중에는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역도 선수 나임 술레이마놀루(Naim Süleymanoğlu, 불가리아식 Наим Сюлейманов)가 있었다. 그는 1986년 터키로 망명하여 불가리아식 성인 술레이마노프를 터키식인 술레이마놀루로 바꾼다. 실제로 과거 공산권이었던 국가들의 공산주의 독재자들 중 의외로 민족주의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다. 베트남의 국부인 호찌민의 경우 말 할 것도 없고, 불가리아와 인접한 유고슬라비아요시프 브로즈 티토 역시 공산권의 맹주였던 소련의 간섭을 거부하고 제3세계의 지도국을 자처하여 독자적인 사회주의, 민족주의 체제를 구축하며 유고슬라비아를 통치했었고, 북한의 김일성 역시 정치적 지지를 위해 주체사상이라는 명분 하에 민족주의를 이용한 전례도 있었다.

3. 몰락


그러나 이 같은 개방 정책은 폴란드, 헝가리와 마찬가지로 1970년대 말에 이르면 오일 쇼크에 따른 스태그플레이션이 동구권을 덮치면서 한계에 다다르고 불가리아는 '''빚더미'''에 올라앉는다. 1985년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소련의 권력을 장악하면서 시행한 개혁 개방 정책의 영향으로 불가리아도 난국을 타개하려고 했지만 지프코프는 고르바초프식 전면 개방 및 정치 개혁에는 매우 부정적이었기에 특히 정치 개혁은 극도로 거부하는 모습을 보였다.
결국 1989년에 들어서서 민주화 바람이 전 동유럽 공산권 국가들을 강타하자 지프코프의 힘도 급속도로 줄어들게 된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다음날 불가리아 공산당이 지프코프를 공산당 서기장과 총리직에서 해임시키고 후임으로 페터르 믈라데노프를 임명함으로서 지프코프는 35년 간의 독재자 생활을 끝내게 되었다. 1990년 1월에 이르면 지프코프는 당에서도 제명당하고 사기와 부패 혐의로 체포된다. 1992년 법원은 그에게 징역 7년 형을 선고했으나 건강 악화를 이유로 집행되지는 않았고 지프코프는 대신 가택 연금 상태에 놓이게 되었고 가택 연금이 된 상태에서 자서전 집필에 열을 올렸다.

4.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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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프코프의 장례식, 소피아, 1998년 8월 9일
토도르 지프코프는 폐렴에 걸려 1998년 8월 5일 수도 소피아에서 86세를 일기로 사망한다. 당시 불가리아의 경제 상황이 좋지 않은 가운데 노년층, 중장년층을 중심으로 지프코프 시절을 그리워하는 여론이 꽤 높았으며 그로 인해 그의 장례식에는 상당한 수의 인파가 몰려들게 되었다. 하지만 공산 독재로 인해 그를 증오하는 여론 또한 아주 많았기에 불가리아 정부는 국장을 거부했고 가족장으로 치러지게 되었다.

[1] 하지만 당시 불가리아의 상황에서 고등학교 학력이 낮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1925년 불가리아 문해율이 60.3%, 1935년 문해율이 68.6%였다. 고등학교 졸업만 해도 지식청년 취급받던 독립 직후의 한국을 생각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