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리아 왕국

 

[image] '''불가리아 왕국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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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리아 차르국'''
'''Царство България'''
'''Tsarstvo Bǎlgariya'''
'''Kingdom of Bulgaria'''
'''Tsardom of Bulgaria'''

[image]
[image]
'''국기'''
'''국장'''
'''Съединението прави силата
단결은 힘'''
'''국가'''
Шуми Марица
(마리차는 전진한다)(국가)
Химн на Негово Величество Царя
(차르 폐하의 노래)(왕실가)
[image]
'''1914년 당시 불가리아 왕국'''
'''지도'''
'''1908년 ~ 1946년'''
'''지리'''
'''위치'''
발칸 반도 동남부
'''면적'''
9,475㎢(1910년)
14,442㎢(1912년)
'''인구'''
423,000명(1914년)
'''수도'''
소피아
'''인문환경'''
'''언어'''
불가리아어
'''종교'''
불가리아 정교회
'''민족'''
불가리아인
'''정치'''
'''정치체제'''
군주제
'''국가원수'''
차르
'''주요 국왕'''
페르디난트 1세(1908~1918)
보리스 3세(1918~1943)
'''경제'''
'''통화'''
불가리아 레프
'''성립 이전'''
불가리아 공국
'''멸망 이후'''
불가리아 인민 공화국
1. 개요
2. 역사
2.1. 페르디난트 1세 치세
2.2. 보리스 3세 치세
2.3. 시메온 2세 치세
3. 역대 차르
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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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발칸 반도 남부에 있던 왕국으로 수도는 소피아. '''불가리아 차르국'''이라고도 한다.[1] 짧은 시간동안 가장 스펙타클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걸로 유명하다.

2. 역사



2.1. 페르디난트 1세 치세


전신인 불가리아 공국이 1908년 불가리아 왕국으로 승격되면서 통치자이던 페르디난트 공이 차르로 승격하였다.
팽창주의적이고 투쟁적인 국가였기에 오스만 제국에서는 불가리아 민족주의자들은 그리스 민족주의자들만큼 골칫거리였다. 그리고 언어적으로 유대가 있는 마케도니아 지역을 차지하기 위해 두 차례의 발칸 전쟁을 일으키기도 했다. 왕국 선포 10년 만에 3번이나 전쟁이 이어져(1차 발칸전쟁 - 2차 발칸전쟁 - 1차대전) 발칸 반도의 프로이센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딱 4개국에 불과한 동맹국의 일원 중 하나였다. 기본적인 국력의 명백한 차이 때문에 후대에 별로 주목은 못 받았지만 그래도 2차 발칸 전쟁 때의 설움을 갚아주려고 독이 단단히 올랐었는지 참전하자마자 발칸 전선에서 세르비아, 그리스, 마케도니아, 루마니아, 심지어 원정 온 영국군, 프랑스군 할거 없이 미친듯이 쳐바르고 다녔다. 지지부진하던 세르비아-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전선이 1915년 불가리아가 뛰어들자마자 갑자기 전세가 확 뒤집혔을 정도. 그러나 이런 분투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패ㅋ전ㅋ. 그 바람에 협상국과 뇌이 조약을 맺고 불가리아 왕국의 영토는 더 쪼그라들었으며, 1918년, 페르디난트 1세는 왕세자 보리스(보리스 3세)에게 양위하고 고향 독일로 은거해야 했다.

2.2. 보리스 3세 치세


1923년 쿠데타가 일어났고, 좌익 정권은 무너지고 알렉산다르 스탐볼리스키 총리는 암살당하였다. 보리스 3세는 장교와 경찰의 도움을 얻어서 전제 독재 정치를 피게 된다. 1927년에는 불가리아 왕국군 장교들이 조직한 극우 정치 조직인 즈베노(Звено)가 결성되었으며, 1934년에는 즈베노가 쿠데타를 일으키고 키몬 게오르기에프가 총리가 되었고 즈베노가 정권을 장악하였다. 그 이후 즈베노는 모든 정당을 해산시켰고, 불가리아는 군사독재 정권이 되어버린다. 그러나 보리스 3세는 1935년 1월 22일 즈베노가 왕정을 폐지하려고 한다는 근거 없는 소문을 퍼뜨려 자신과 친밀한 불가리아군 장교들을 이용해 즈베노를 몰아낸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벌어지자 나치 독일의 강압에 의해 추축국에 들어가서 독일의 그리스 침공유고슬라비아 침공을 돕기도 했다. 물론 나치의 위협에 의해 추축국에 들어가긴 했지만 마케도니아와 그리스 땅이던 서부 트라키아를 점령하고 제2차 발칸전쟁 당시 루마니아에게 빼앗긴 남부 도브루자를 루마니아로부터 되돌려받는 등 어느 정도 이득을 챙기기도 했다.[2] 그러나 독일의 간청 에도 불구하고 국내의 유대인과 집시족들을 독일에게 넘기지 않는 등 나치의 인종 말살 정책인 홀로코스트에 동참하지 않았고, 같은 슬라브계 국가인 소련을 치는 독소전쟁에는 참전을 거부했다.[3] 소련은 처음에 독일에 대패하자 불가리아를 중재로(당시까지 불가리아와 소련은 우호적) 독일과 강화를 하려고 했다. 이 때 주모스크바 불가리아 대사가 이오시프 스탈린에게 " 우랄산맥까지 밀려난다고 해도 결국은 당신들이 (전쟁에서)이길 것"라고 말한 바 있다고. 그런데 소련군은 전세가 역전되어 루마니아의 항복과 전향을 받아내자 가만히 있던 불가리아에 선전포고하고 침공했다.[4] 그보다 조금 전인 1943년에 국왕 보리스 3세는 아돌프 히틀러와 회담한 뒤 급서했고(독살설이 유력하다), 6살 난 시메온 왕세자(시메온 2세)가 왕위를 이었다.

2.3. 시메온 2세 치세


국왕의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숙부 키릴 왕자가 섭정 자격으로 실권을 행사했다. 그리고 불가리아에서는 사흘만에 항복, 전향하고 불가리아 조국전선이 정권을 잡아 소련과 강화를 맺고 과거 동맹국이던 독일에 선전포고했다. 이후 불가리아군은 유고슬라비아, 헝가리, 오스트리아 축선에서 소련군을 보조했다.
불가리아는 이번에도 패전국이 되어 소련군에게 점령당하였다. 전쟁 이후에는 소련위성국으로 전락했고, 공산당 투표를 통해 1946년 9월 9일, 왕정 폐지가 결정되면서 불가리아 왕국은 종말을 맞았다. 그리하여 소련에 의해 점령된 타 유럽 국가들처럼 공산주의 국가인 불가리아 인민 공화국이 수립되었고, 시메온 2세는[5] 아직 어린아이였기 때문에 모후와 함께 망명이 허락되었지만, 숙부 키릴 왕자는 추축국 편에 선 결정에 대한 책임을 고스란히 지고 결국 처형당하고 만다. 참고로 '''은거한 페르디난트 1세는 살아있었다'''.[6]

3. 역대 차르


삭스코부르고츠키 왕조

4. 여담


세르비아 왕국과는 철천지원수 관계였다. 제1차 세계대전 직전 페르디난트 1세는 대놓고 '''"내 삶의 목적은 세르비아의 파멸"'''이라고 말했을 정도다. 불가리아가 세르비아의 영토를 점령한 뒤에는 세르비아인들을 학살하고, 마케도니아인들을 불가리아인들로 동화시키려고까지 했다.


[1] 왕국이었지만 불가리아 왕의 칭호는 '차르(цар)'였다. 러시아 제국의 그 차르 맞다! 그래서 "불가리아 제3차르국"으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이 때쯤 되면 "차르"는 황제가 아니라 왕작으로 이미 격하가 완료된 상태였다. 러시아 황제가 폴란드 입헌왕국의 국왕을 겸할 때 폴란드 국왕 작위를 "폴란드 차르"라고 했다. 하지만 폴란드와 세르비아에서 차르는 여전히 황제를 뜻하는 단어다.[2] 현재 불가리아 영토인 남부 도브루자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들은 제2차 세계 대전 말기에 포기한다.[3] 다만 불가리아 역시 추축국에 가담한 이상 완전무결한 나라는 '''절대''' 아니었고 자국 영토로 합병한 마케도니아와 트라키아를 불가리아화시킨다는 명분으로 이 지역에 살고 있던 그리스인이나 세르비아인들에게 그리스어와 세르비아어의 사용을 금지한 다음 이들을 추방하고 저항하는 사람들은 강제수용소에 가두거나 학살하는 등 전쟁범죄를 저질렀다.[4] 물론 양국의 전쟁상태는 사흘 정도 지속되다 끝났고 그 사흘간에도 제대로 된 교전은 없었다.[5] 참고로 시메온 2세는 불가리아 민주화 이후 불가리아로 돌아와 총리가 된 인물이다!!(재임 2001~2005)[6] 페르디난트 1세는 망명지인 독일 코부르크에서 1948년 9월 10일에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