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라스노스트/페레스트로이카
1. 개요
''' '''
영어:Glasnost/Perestroika.
러시아어:Гласность(개방, 직역하면 공표 혹은 발표)/Перестройка(재건 혹은 재편성 이라는 뜻)
소련 공산당의 마지막 서기장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주도 하에 펼쳐진 일련의 개혁·개방정책으로, 결국 본인의 실각과 소련 해체, 냉전의 종식으로 이어졌다.
2. 배경 : 공산주의의 약화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마르크스-레닌주의, 스탈린주의, 마오주의 혹은 그 외의 어떠한 형태이든, 공산주의를 채택한 국가들에 내재된 문제가 갈수록 심화되고 있음이 명백해졌다. 그리고 점차 가속화되는 몰락의 중심에는 공산권의 핵심인 소련이 있었다.
소련은 관료제 사회의 내재적인 계급모순과 그에 따른 부정부패가 심각했다. 이론적으로 정치사상적인 면에서의 자유주의가 개인의 자유를 우선시한다면 공산주의는 자유를 제한하는 대가로 평등을 추구한다. 실제로 서방세계의 다수 국가들은 '''"비효율적이고 무자비한 공산주의가 그럭저럭 돌아가게나마 하는 원동력은 청백리같은 고위 간부들 때문이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이상론은 소위 '공산귀족', 즉 노멘클라투라 계급의 부상으로 철저히 논파되었다.
물론 당시의 관료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문제점을 인식하지 못했을 리는 없었다. 그러나 서방의 68혁명의 여파로 헝가리[1] , 체코슬로바키아[2] , 폴란드[3] 등에서 벌어진 일련의 개혁적 시도들은, 동유럽권의 영향력 감소를 두려워한 소련의 강경노선에 의해 진압되었고, 이후로는 사실상 의미있는 기록조차 남기지 못했다. 더하여 이러한 강경노선은 동유럽의 공산정부가 가졌던 '''최소한의 지지와 정통성마저 상실'''하는 연쇄작용을 불러왔다. 계속되는 위기 속에서,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미국과 함께 초강대국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던 소련만이 공산정권들의 유일한 버팀목이었다.
그러나 정작 소련의 경제 상황도 그다지 좋지 못했다. 2차 대전이 끝나고 소련식 공산주의 및 계획경제가 제3세계에 그토록 매력적으로 보였던 것은, 무엇보다도 소련이 단기간에 '''가난한 농업국에서 세계 2위의 공업국[4] 으로의 변신'''을 성공적으로 끝마쳤기에 가능한 일이었다[5] . 그러나 고르바초프 서기장이 취임하던 1980년대 중반에 이르면 소련은 연 평균 경제 성장률이 1%에서 2%를 웃돌고 있었다. 이 시기 소련은 수출품의 38%가 천연가스, 나머지는 중공업, 화학 제품이었다.[6]
막대한 군비경쟁도 문제였다. OPEC의 석유 가격담합으로 197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일시적으로 호황을 누린 소련[7] 은, 마침내 1985년 사우디아라비아가 미영에 대항하여 석유 생산을 급속히 늘리는 바람에 석유값이 급속하게 떨어지자 경기기 다시 후퇴하였다. 게다가 소련은 1979년부터 10년간 지속된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 막대한 군비지출을 강요당했던 반면, 미국은 서서히 베트남 전쟁의 후유증에서 벗어나 제자리를 찾아가던 상황이었다.
그나마 중앙계획이 어느 정도 가능했던 소련 및 일부 위성국들에서는 1980년대 초 일시적으로 경기 회복현상이 나타나기는 했으나[8] , 근본적인 개혁이 실패한 이상 이러한 호조가 지속되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었다.[9] 개혁에 실패한 관료들에게 주어진 선택지라고는 고작해야 영토 내에 묻혀 있는 천연자원들을 팔아 하루하루 연명해나갈 돈을 벌면서, 한편으로는 계속되는 생활고와 역사적 민족감정이 맞물려 점증하는 '''자국 인민들의 불만을 강압적인 수단으로 억제'''하는 정도밖에 없었다.
'''이제는 공산주의의 가장 열렬한 신봉자들조차 현 체제가 자본주의와의 체제 경쟁에서 앞서나갈 수 있으리라고 믿지 않았다.'''
3. 발단 : 고르바초프의 취임과 개혁
1985년, 이처럼 암울한 상황에서 마침내 미하일 세르게예비치 고르바초프가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 취임한다. 비교적 젊은 나이에 권력의 정점에 오르게 된 고르바초프의 급진적인 개혁은 소련의 사회 전반에 폭풍우를 몰고 오게 되고, 이는 1991년 결국 소비에트 연방의 역사적인 해체와 본인의 실각으로 이어진다.
고르바초프가 청년기를 보낸 흐루쇼프의 집권기는, 강력한 통제와 억압으로 점철된 소련의 역사 속에서 잠시나마 해빙의 분위기가 사회를 휩쓸었던 시기이기도 했다. 이러한 젊은 시절의 경험에 더해 소련의 경직된 관료 사회를 몸소 겪었던 고르바초프는, '''서기장에 임명되기 전'''에 이미 '''소련의 공산주의를 서구의 사회민주주의와 유사한 모델로 변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일찌감치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고르바초프의 정책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 글라스노스트(Гласность/Glasnost)
정보의 자유와 공개를 의미한다. 당시 소련에 만연해 있던, 언론 검열 및 어용화, 사상 탄압 등 경찰국가주의에 대한 변혁을 의미한다. 흔히 '개방'으로 번역된다.
- 페레스트로이카(Перестройка/Perestroika)
정치·경제적 개조를 의미한다. 부패한 관료제 타파, 공산주의 경제의 체제적 한계점을 개선하고 점진적인 시장자유화를 추구하는 등의 정책을 포함한다. 흔히 '개혁'으로 번역된다.
대외적으로는 모스크바의 노선에서 벗어나는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에 대한 공식적인 간섭권을 명기한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폐기하는 한편, 다른 사회주의 국가에 대한 정책지시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10] 이어 경제 규모가 소련의 2배에 달하는 미국과의 군비경쟁에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판단하여 각종 군사용 무기 감축을 시도한다.4. 전개 : 흔들리는 소비에트권
4.1. 개혁의 실패와 동유럽의 붕괴
냉전의 한 축을 이루는 소련 최상층부에서 쏟아져나온 혁신적인 정책들은 이념을 막론하고 전 세계에 엄청난 평지풍파를 몰고 왔다. 이때까지만 해도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의 많은 사람들은 막연히 개혁·개방이 공산권을 지금보다는 더 살기 좋게 하리라라고 기대했을 뿐, 그 최종적인 결론, 즉 냉전의 종결에 대해서는 함부로 예상하지 못했다.
고르바초프 개혁의 한계는 바로 '''글라스노스트와 페레스트로이카 사이의 근본적인 모순'''을 간과했다는 점이다. 단기간에 '페레스트로이카'를 추진하기 위해서는 본질적으로 '''강력한 중앙권력이 필요'''했으며, 고르바초프는 '글라스노스트', 즉 '''정보의 자유화가 여기에 필요한 대중적 지지를 이끌어내리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자신들의 부패를 숨기고자 하는 관료들의 위선적인 태도와 체제의 경직성이 맞물리면서 글라스노스트는 오히려 중앙권력의 추진력을 갈수록 약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더 큰 문제는 열린 사고를 가진 개혁가들조차, ''''글라스노스트'가 '페레스트로이카'보다 훨씬 더 명확한 강령이었다'''는 점이다. 정보의 자유화나 민주 질서의 수립은 기본적으로 '통제' '허용'의 문제였지만, 오래 전부터 수렁에 빠져 있던 정치·경제적 지표들을 재건하는 일은 나아가야 할 방향조차도 뚜렷하지 않았다. 소련의 주요 재정적 기반인 석유수입은 석유값은 1986년 중하반기 들어 다소 회복되기는 했지만 이미 고점에 비해 반에도 못미치는 수준이라 이미 망가진 재정을 재건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고, 미국과 영국 등지에서 온 경제 전문가들은 무조건적인 시장개방을 주장하였지만, 이미 내적 균형이 붕괴된 경제가 아무런 보호장비 없이 자본주의의 바다 속에 떠밀려갈 경우 그 결과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그리고 탈냉전과 소련 붕괴 이후 그 결과로 많은 러시아 국민들은 보리스 옐친 정부 하에서 극심한 물가상승과 빈부격차 확대, 복지체계 붕괴를 겪어야 했다.
게다가 몇개 공화국의 독립에 대한 열망과 수십년간 공산당의 강력한 탄압에 억눌려 있던 연방의, 페레스트로이카(정치·경제적 개혁)가 뒷받침되지 못한 글라스노스트(개방)는 그야말로 '''통제 불능의 사회적 혼돈'''으로 이어졌다. 동유럽의 지도자들은 곧 정권의 힘만으로는 끝없이 불어나는 대중의 힘을 통제조차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소련은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일찌감치 폐기함으로서 이미 위성국의 공산당에 대한 보호를 사실상 철회한 상태였다. 결국 1989년에서 1991년 사이 동유럽의 대다수 국가들은 격변기를 거쳐 민주정부로 이양하게 된다.[11]
4.2. 소비에트 연방에 미친 영향
소비에트 연방에 직접적으로 소속되어 있던 사회주의 공화국들에서는 상황이 사뭇 달랐다. 고르바초프의 개혁은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있던 일부 개혁적인 지식인들에게는 성대한 환영을 받았던 반면, 예상외로 '''대다수의 소련 인민들에게는 별다른 지지를 얻지 못했다'''.
고르바초프 자신의 경험도 그의 행보에 영향을 주었다. 혁명 영웅이던 레닌과 스탈린, 무학(無學) 광부로 출세한 흐루쇼프 , 공산당에 참여하기 전까지는 제철소 기사였던 브레즈네프와는 달리, 고르바초프는 국립 모스크바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 엘리트 계층의 인물이었다. 때문에 고르바초프는 기존의 서기장들과는 달리 서민들의 생활과 사고방식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상대적으로 적었고, 이는 현실과는 동떨어진 채 급진적인 개혁안만을 내놓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개혁이 실패한 가장 큰 원인은 바로 '''급격한 체제 변화에 대한 혼란'''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 1920~30년대 사이 나름대로 짧은 시기로나마 비공산주의 국가였었던 폴란드ㆍ체코슬로바키아ㆍ불가리아ㆍ유고슬라비아 등 다른 동유럽의 공산주의 국가들과는 달리,[12] 대다수의 소련인들[13] 은 1917년 러시아 제국의 멸망 이후 곧바로 소비에트 러시아, 그리고 소련으로 이어지는 기억을 갖고 있었다. 게다가 소련 말기에는 초고령층을 제외한 대다수의 일반인들은 소련이 건국된 이후에 태어났던 사람들이었다. 고르바초프 서기장 자신도 소련인으로 태어난 처음이자 마지막 서기장이었고.
고르바초프가 취임하던 1985년을 기준으로 40세 이상의 모든 폴란드인들이 비(非) 공산주의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었던 데다가 공산체제 하에서도 두 차례에 걸쳐서(1956년, 1970년) 정권을 뒤엎은 경험까지 가졌던 반면에 68세 이하의 모든 본토 출신 소련인들은 공산주의 외의 사상으로부터 차단되어 있었다. 당대 소시민들의 입장에서는 러시아 혁명이란 '''러시아 제국의 차르가 소련의 서기장으로 바뀐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것이다.
때문에 대다수 소련인들이 정권과 정책을 평가하는 기준은, 서구 사회와는 달리 어디까지나 '''개개인의 삶의 질 변화'''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이를테면 이들은 유가 폭등으로 막대한 흑자를 벌어들인 70년대 말을 즈음하여 국민적 생활수준이 급격하게 향상되었던 기억을 잊지 못했고, 당시의 실질적인 국가경제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도 없었고, 설령 알 수 있더라도 알고 싶어하지도 않았다. 쉽게 말해 글라스노스트와 페레스트로이카가 소련의 일반 대중에게 지지받기 위해서는 단기간에 혁신적인 삶의 질 향상이 뒤따라야 했으나, 이미 석유값이 고점에 비해 절반에 못 미치던 상황에서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5. 절정 :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
자본주의화는 이미 경쟁력 없는 소련의 경제에 치명타를 가했는데 고르바초프는 생필품의 생산을 늘리기 위해 국영기업들의 경영을 자율화시켰지만 막상 국영기업들은 경영자율화를 기회삼아 생산되는 상품의 생산량을 늘리기보다는 몇배의 가격으로 시장에다가 비싸게 팔아치우기 시작하면서 국영상점에 납품되는 물건수가 줄어드는 바람에 소비자들은 더 긴줄을 서야했고, 결국 소련 당국에서 돈을 더 찍어내야했기 때문에 물가상승으로 이어졌다. 또한 서구 소비재들의 수입이 늘어났지만 이는 무역역조 현상을 심화시켰다. 마침 허용된 언론과 발언의 자유는 그동안 억눌렸던 대중적 분노에 불을 붙였다. 국제적으로도 소련의 영향력은 동유럽을 비롯한 전 세계에서 놀라운 속도로 사라져갔고, 마침내 1990년 동독이 서독에 흡수 통일되기까지 이른다.
중앙정부의 통제 하에 유지되던 질서가 무너지면서 각지에서 폭동과 민란이 일어났고, 지방 행정단체의 수장들은 권력을 이용해 무너져가는 경제 속에서 식량과 무기를 비축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게다가 결과론적으로 볼 때 고르바초프는 급증하는 혼돈 속에서 그 자신이 닻을 올렸던 "민주적 공산주의"를 성공적으로 완주시키기에는 정치적 역량이 부족했다.
1991년 초까지도 (발트 3국과 몰도바, 조지아, 키르키즈스탄을 제외한) 9개 공화국은 연방 해체에 반대했다. 이들은 '''각 공화국들이 동등한 주권을 인정받는 연합체로서''' 소련의 존속에 찬성했다. 1991년 3월의 국민투표에서 고르바초프는 76%의 지지를 얻어 '''소련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복고적 쿠데타가, 조금씩 안정화되어 가던 소련에 마지막 일격을 가하게 된다.
6. 출처
- 『극단의 시대 : 20세기 역사』, 에릭 홈스봄 저, 이용우 역, 까치출판사
[1] 사실 1956년에 일어난 일이라 68운동과는 거리가 있다. 또한 이때의 임레 너지는 니키타 흐루쇼프와 정치적 성향이 비슷했지만 고무우카가 집권한 폴란드와는 다르게 아예 바르샤바 조약기구에 탈퇴하고, 중립화 선언을 검토 하는 등 소련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고 했기에 흐루쇼프가 위신실추에도 불구하고 헝가리에 군대를 내보내서 정권을 뒤엎게 된 것.[2] 프라하의 봄 참조[3] 폴란드/역사 레흐 바웬사 참조. 단, 폴란드는 1950년대 중반에서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는 그래도 (타 공산권 국가에 비하면) 온건파가 집권했었기는 했다. 경제가 침체일로에 벗어나지 못했다는게 문제지.[4] 1위는 미국.[5] 이오시프 스탈린 항목 참조[6] "80년대 소련 수출 비중 정보". 2018년 10월 24일 확인[7] 쉽게 간과할 수 있겠지만, 소련-러시아는 세계 최대의 천연자원 생산국이다.[8] 1981년에서 1984년간 외채가 약 35~70%가량 하락[9] <Kollo>, p.41[10] 이는 고르바초프가 1987년 11월 4일, 러시아 혁명 70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각국 사회주의 국가 사절들에게 행한 연설에서 밝힌 것으로 자신과 다른 견해의 수용을 거부하는 오만과 폐쇄성은 생산적인 토론을 불가능하게 만들어 오히려 사회주의 운동을 저해한다고 비판했다. 한국 보도 내용[11] 그런데 선거가 허용되자마자 공산당이 다시 여당으로 당선된 케이스도 있다. [12] 폴란드나 체코슬로바키아, 불가리아 등 한때 공산권에 속해 있었던 동유럽의 국가들도 제2차 세계 대전 중 나치 독일군에게 두들겨 맞고 전쟁이 끝나고 나서 다시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이전의 정치 권력 체제로 되돌아가려고 하던 중 동유럽 일대로 밀고 들어온 소련 군대에 의해 원하지 않게 공산주의 정치를 강요당했다.[13] 독소 불가침조약과 제2차 세계대전 전후로 확장된 일부 영토는 제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