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샤와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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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라니 제국의 황궁으로 쓰이던 발라 히사르 성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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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샤와르의 구시가지 모습.
영어: Peshawar
우르두어: پشاور
파슈토어: پېښور
페샤와르는 파키스탄의 카이베르파크툰크와 주의 주도이며, 한때 연방 직할 부족 지역의 주도이기도 했다. 아프간의 주민족 파슈툰족의 주요 도시로써 아프가니스탄 국경에서 40km 정도밖에 떨어져있지 않다. 역사적으로는 남아시아와 중앙아시아를 연결하는 카이베르 고개 길목에 위치하여 번영을 누렸던 도시이기도 하다.
페샤와르는 기원전 5세기에 산스크리트어의 푸루샤푸라라는 이름으로 세워졌었는데, 오래된 역사만큼 많은 제국과 왕국의 지배를 거쳐왔다. 다만 그 유구한 역사 동안 대도시로 번영했음에도 왕국의 수도가 되지는 못하였다.
기원전 326년 경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점령당해 마케도니아 제국의 일부가 되었는데,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사후 쪼개진 제국 중의 셀레우코스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는데, 셀레우코스 제국이 마우리아 제국과의 전쟁에서 패해 페샤와르를 다시 뺏기게 된다. 이때 헬레니즘의 영향으로 간다라 양식이 발달하기도 한다.
마우리아 제국이 쇠퇴하자, 이번에는 아프가니스탄 지역에 있던 박트리아에게 점령당한다. 그러나 이번에도 다시 쿠샨 제국의 손에 들어가게 된다. 기원전 128년경에는 쿠샨 제국의 수도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점령당하고 또 점령당하는 페샤와르의 기구한 운명은 끝나지 않았다. 얼마 후 백흉노(에프탈)이 쿠샨 제국을 침공하고 간다라 시절의 수도원들을 부쉈다.
16세기에 무굴 제국이 주변 술탄국(이슬람 왕국)들을 점령하고 페샤와르에 입성한다. 이때 페샤와르에 많은 모스크가 세워진다. 무굴 왕조가 쇠퇴하자 아프간족의 두라니 왕조이 차지했다가 1818년에는 시크 왕국이 세력을 키워 이곳을 차지하게 된다. 하지만 서구 열강의 침입으로 인도와 함께 영국령 동인도 회사의 지배를 받는다. 인도 대봉기에서 영국은 아프간의 바라크자이 왕조에 끼어들지 않는다면 페샤와르를 할양할 것을 제안하였지만 아프간 왕국은 영령 인도를 쳤다가 패한다. 이후 듀랜드 라인으로 인도 제국의 통치하에 놓여졌다.
독립 이후 파키스탄의 땅이 되었지만 페샤와르는 아프가니스탄으로 가는 길인 키베르 패스[1] 의 관문이었기 때문에 아프간의 고토 회복 주장 및 아프간-파키스탄의 파슈툰족이 하나로 통일해야 한다는 대아프간주의, 통칭 파슈파니스탄 분리주의가 횡행하면서 현재는 소련, 미국, 무자헤딘, 탈레반, 파키스탄 등등 서로서로 치고받는 도시가 되고 말았다. 탈레반의 폭정과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 인한 아프간 난민들이 쏟아져들어와 도시의 인구 중 약 20%가 아프간인이 되었다. 현재도 테러단체의 활동과 키베르 패스를 통한 마약과 조직 범죄의 온상이 되고 있다.
이 도시가 발전한 이유 자체가 예전부터 주변국의 복잡한 사정으로 얽혀있는 키베르 패스에 있다. 이 지역에서 아프가니스탄으로 이동하는 길목으로 되었기 때문에 상업이 번창한 도시로 발전하게 되었다. 지금은 파키스탄 정부에서 교역을 위한 경제자유지역으로 산업단지를 유치하는 중인 듯 하다. 교통의 중심지 중 한 곳이기도 하기 때문에 물류적 중심지로 발전할 가능성도 있다. '''아프간 내전만 멈춘다면 말이다.'''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 서방과 중국, 파키스탄이 이 지역을 통해 무자헤딘을 지원했기 때문에 서방권(특히 CIA)으로부터 주로 지원받는 주요 7파벌을 '페샤와르 7' 이라고 불렀는데, 그 중에는 아흐마드 샤 마수드의 파벌도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2]
두라니 제국의 황궁으로 쓰이던 발라 히사르 성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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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샤와르의 구시가지 모습.
1. 개요
영어: Peshawar
우르두어: پشاور
파슈토어: پېښور
페샤와르는 파키스탄의 카이베르파크툰크와 주의 주도이며, 한때 연방 직할 부족 지역의 주도이기도 했다. 아프간의 주민족 파슈툰족의 주요 도시로써 아프가니스탄 국경에서 40km 정도밖에 떨어져있지 않다. 역사적으로는 남아시아와 중앙아시아를 연결하는 카이베르 고개 길목에 위치하여 번영을 누렸던 도시이기도 하다.
2. 역사
페샤와르는 기원전 5세기에 산스크리트어의 푸루샤푸라라는 이름으로 세워졌었는데, 오래된 역사만큼 많은 제국과 왕국의 지배를 거쳐왔다. 다만 그 유구한 역사 동안 대도시로 번영했음에도 왕국의 수도가 되지는 못하였다.
기원전 326년 경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점령당해 마케도니아 제국의 일부가 되었는데,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사후 쪼개진 제국 중의 셀레우코스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는데, 셀레우코스 제국이 마우리아 제국과의 전쟁에서 패해 페샤와르를 다시 뺏기게 된다. 이때 헬레니즘의 영향으로 간다라 양식이 발달하기도 한다.
마우리아 제국이 쇠퇴하자, 이번에는 아프가니스탄 지역에 있던 박트리아에게 점령당한다. 그러나 이번에도 다시 쿠샨 제국의 손에 들어가게 된다. 기원전 128년경에는 쿠샨 제국의 수도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점령당하고 또 점령당하는 페샤와르의 기구한 운명은 끝나지 않았다. 얼마 후 백흉노(에프탈)이 쿠샨 제국을 침공하고 간다라 시절의 수도원들을 부쉈다.
7세기에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시작된 이슬람 왕조의 통제권에 들어가게 된다. 1001년에는 가즈나 왕조와 카불 왕조의 전쟁(페샤와르 전투)이 시작되고, 가즈나 왕조, 이후 구르 왕조, 델리 술탄 왕조가 페샤와르를 점령하게 된다.카슈미르에서 서북쪽으로 산을 넘어 한 달을 가면 건타라국에 이른다. 왕과 군사는 모두 돌궐(에프탈?)인이고 토착민은 소그드인과 같으며 바라문도 있다. (카슈미르와 다르게) 포도는 없고 사탕수수는 있다. 왕은 코끼리 5마리를 가지고 있으며, 양과 말은 헤아릴 수 없이 많고, 낙타와 노새, 당나귀 등도 많다.
혜초 왕오천축국전
16세기에 무굴 제국이 주변 술탄국(이슬람 왕국)들을 점령하고 페샤와르에 입성한다. 이때 페샤와르에 많은 모스크가 세워진다. 무굴 왕조가 쇠퇴하자 아프간족의 두라니 왕조이 차지했다가 1818년에는 시크 왕국이 세력을 키워 이곳을 차지하게 된다. 하지만 서구 열강의 침입으로 인도와 함께 영국령 동인도 회사의 지배를 받는다. 인도 대봉기에서 영국은 아프간의 바라크자이 왕조에 끼어들지 않는다면 페샤와르를 할양할 것을 제안하였지만 아프간 왕국은 영령 인도를 쳤다가 패한다. 이후 듀랜드 라인으로 인도 제국의 통치하에 놓여졌다.
3. 현재
독립 이후 파키스탄의 땅이 되었지만 페샤와르는 아프가니스탄으로 가는 길인 키베르 패스[1] 의 관문이었기 때문에 아프간의 고토 회복 주장 및 아프간-파키스탄의 파슈툰족이 하나로 통일해야 한다는 대아프간주의, 통칭 파슈파니스탄 분리주의가 횡행하면서 현재는 소련, 미국, 무자헤딘, 탈레반, 파키스탄 등등 서로서로 치고받는 도시가 되고 말았다. 탈레반의 폭정과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 인한 아프간 난민들이 쏟아져들어와 도시의 인구 중 약 20%가 아프간인이 되었다. 현재도 테러단체의 활동과 키베르 패스를 통한 마약과 조직 범죄의 온상이 되고 있다.
이 도시가 발전한 이유 자체가 예전부터 주변국의 복잡한 사정으로 얽혀있는 키베르 패스에 있다. 이 지역에서 아프가니스탄으로 이동하는 길목으로 되었기 때문에 상업이 번창한 도시로 발전하게 되었다. 지금은 파키스탄 정부에서 교역을 위한 경제자유지역으로 산업단지를 유치하는 중인 듯 하다. 교통의 중심지 중 한 곳이기도 하기 때문에 물류적 중심지로 발전할 가능성도 있다. '''아프간 내전만 멈춘다면 말이다.'''
4. 기타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 서방과 중국, 파키스탄이 이 지역을 통해 무자헤딘을 지원했기 때문에 서방권(특히 CIA)으로부터 주로 지원받는 주요 7파벌을 '페샤와르 7' 이라고 불렀는데, 그 중에는 아흐마드 샤 마수드의 파벌도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2]
[1] 영어 발음은 '카이버 패스'. 이 길을 통해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도중 수많은 무자헤딘들이 서방 세력들로부터 지원 받았다.[2] 다만 중국은 주로 아프가니스탄 북부의 중국과의 접경지대에 있는 ''와칸 회랑"을 통해 무자헤딘들을 지원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