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제철 아톰즈/1992년
1. 개요
포항제철 아톰즈의 1992 시즌에 대한 문서.
2. 드래프트
2.1. 사건사고
1991년 드래프트에서 촉발되었던 황선홍, 홍명보의 드래프트 거부 파문의 여진은 이듬해인 1992년 드래프트까지 이어졌다.
1991년 4월, 6개월전 파문의 주인공 이었던 황선홍, 홍명보 두 선수가 동시에 포항제철 아톰즈에 입단하면서 2차 드래프트 거부 파동이 시작되었다. 당시 포항제철은 아마추어 축구팀[1] 으로 선수를 입단시킬 경우, 드래프트에 신청하지 않은 선수도 입단 가능하다는 점을 이용해 황선홍과 홍명보를 포항제철 소속으로 입단시키는 편법을 동원한 바 있다. 이같은 편법은 아마추어 입단자의 프로 승격은 3년동안 해당 아마팀에서 뛴 후에야 가능하다는 규정상 지금껏 어느 팀도 쉽게 시도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이에 대해 현대 호랑이를 비롯한 타 구단들은 포항제철의 행태를 조항 위반이라고 격렬히 반발했으며 사태는 점점 확산되었다. 특히 입단과 동시에 황선홍, 홍명보 모두 출전 불가 기간인 3년동안 해외 축구 유학을 보내겠다고 포항제철이 언론에 발표하면서, 추문은 일반 축구팬들에게도 전해지게 되었고, 선수권익을 무시하는 기업구단의 담합 행태에 대한 고발 기사와 성토도 쏟아지기에 이르렀다. 결국 1991년 7월, 각 구단의 단장들은 회의를 거쳐, 기존의 드래프트 1순위, 2순위 계약금을 3천만 원, 2천5백만 원에서 각기 5천만 원, 4천만 원으로 상향조정하였고, 황선홍 선수는 포항제철의 공언대로 독일 분데스리가로 진출하면서 포항제철 입단 파문은 어느 정도 포철의 판정승으로 가라앉는 듯했다.
1991년 10월, 2차 파동 6개월여 만에 사태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드는데, 당시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대표로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었고, 당연히 1992년 드래프트에서 1순위 최우선 지명이 확실시되었던 서정원, 신태용, 정광석, 김병수 네 명의 선수가 드래프트 거부를 선언한 것이었다. 서정원 선수를 필두로 4선수는 구단 간의 공공연한 담합으로 계약금의 자유경쟁이 아닌 5천만 원 상한선 책정에 그쳤음을 성토하면서, 드래프트제의 폐해를 고발하고자 거부를 선언했노라고 밝혔다. 이 때를 같이해, 당대 대학권의 최고 스트라이커였던 김정혁 선수가 대우 로얄즈와 비밀리에 선계약을 맺고 대우 선수단에 합류했다는 소식과 홍명보 선수와 황선홍 선수에게 포철이 각기 지급한 계약금이 1억 원을 넘긴다는 소식을 다룬 폭로성 기사가 쏟아지면서 화살은 프로 구단 전체와 드래프트 제도에 집중되었다. 여기에, 다른 선수와 형평성을 고려하지 않고 개인의 안위를 우선시했다는 점을 들어, 주요 선수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높아졌다. 요컨대, 프로축구팀과 구단주, 선수들 모두가 자정이 필요하다는 점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었다.
자칫 프로축구 이미지의 씻을 수 없는 타격과 김종부 스카우트 파동 당시의 팀 해체 불사와 같은 극단 상황을 막기 위해 대한축구협회와 한국프로축구연맹은 일단 올림픽 대표 4인방의 드래프트 거부 문제부터 해결을 보기로 한다. 그리고 10월 중순으로 완료되었던 신청 기한을 드래프트 하루 전날인 11월 18일까지 연장하면서 수습했고, 구단주 협의회와 포항제철 측과의 진통 끝에 홍명보를 1992년 드래프트에 내놓기로 합의를 얻어내면서 사태는 급진전의 기회를 얻었다. 결국 최종 마감일이었던 18일, 홍명보, 서정원, 신태용이 드래프트 신청을 완료하면서 포철과 타 구단 간의 알력 다툼과 파문 소동은 어느 정도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초미의 관심사였던 계약금 상한선 폐지 문제는 어물쩡 넘어갔고, 서정원, 신태용을 제외한 김병수 선수와 정광석 선수는 끝끝내 신청을 거부하면서 불씨는 여전히 남아있는 상태였다. 결국 이런 임시방편적 뒤처리는 불과 이틀 뒤인 드래프트 지명장에서 벌어진 K리그 역사상 전무후무한 트레이드 소동으로 귀결되었다.
2.2. 선발 결과
2.2.1. 선발 이 후
1991년 11월 19일 드래프트 지명장에서 홍명보는 유공 코끼리에 지명되었고, 김진형과 조정현은 포항제철이 각각 지명했다. 그러나 불과 4시간 만에 사태는 급반전되었는데, 홍명보에게 이미 1억이 넘는 금액을 지불했었던 포항제철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홍명보를 확보하라는 윗선의 지시에 따라 드래프트장에서 포철이 1순위로 지명한 김진형, 2순위 지명 조정현, 1990년 11월 22일 열린 1991 K리그 드래프트에서 유공 1순위로 지명됐지만 1991년 7월 김홍운과의 맞트레이드를 통해 포철 유니폼을 입은 이석경을 한꺼번에 유공으로 내주면서 홍명보를 데려오는 전대 미문의 1:3 트레이드를 성사시키기에 이른다.
또한 LG 치타스는 전경준을 4순위로 지명했지만 드래프트 며칠 뒤였던 1991년 12월 6일 골키퍼 차상광과 함께 포항제철로 넘겼고 이 과정에서 포항제철은 수비수 손형선과 골키퍼 박철우를 LG로 넘기는 2:2 트레이드를 단행했다.
3. 외국인 선수
4. 한국프로축구대회
4.1. 대회 개요
- 리그 방식은 단일 리그 제도로 진행되고, 6 라운드 로빈으로 총 6개 구단이 팀당 30경기씩 총 90경기를 치렀다.
4.2. 경기 결과
4.3. 결과
- 30경기 13승 9무 8패(승점 35점)로 우승을 차지했다.
- 입단 과정에 수 많은 잡음을 만들었던 홍명보가 입단 첫 해 최우수 선수상을 수상했다.
- 박창현이 21경기 7득점 4도움을 기록하여 득점순위 5위 도움순위 8위를 차지하며 맹활약하였고, 감투상을 수상하였다.
- 박태하가 28경기 5도움으로 도움순위 5위를 기록했다.
- 이회택 감독이 감독상을 수상했다.
5. 리그컵
5.1. 대회 개요
- 경기 수를 늘려 선수들의 기량 향상을 도모하기 위하여 시작된 리그컵 대회의 첫 시즌이다.
- 아디다스 제품을 생산하는 제우교역의 후원으로 아디다스컵으로 불렸다.
- 승리시 3점, 무승부시 승부차기를 해서 승리 1.5점, 패배 1점을 주는 방식으로 진행하였다.
- 2라운드 로빈의 풀리그 방식으로 팀 별 10경기씩 치른 후 1위 2위 팀이 결승전을 통해 우승팀을 가린다.
5.2. 경기 결과
5.3. 결과
- 이기근이 6경기 1득점 3도움을 기록하며 도움상을 수상했다.
[1] 당시 일부 프로구단들은 2군의 형식으로 아마추어(실업) 축구단을 운영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