잭 더 리퍼
'''Jack The Ripper'''[1]
1. 개요
1888년 8월 31일부터 11월 9일에 걸쳐 영국 런던 이스트엔드 지역의 윤락가 화이트채플에서 매춘부 최소 5명을 갈기갈기 찢어 살해한 연쇄살인범으로, 일명 '''살인마 잭'''. 그가 저지른 화이트채플가의 연쇄살인은 오랫동안 연구의 대상이 된 유명한 미제 사건이다.
현재는 사건이 발생한 지 130년도 더 지난 시점이어서 범인 본인은 이미 오래 전에 사망했을 테니 완벽한 영구 미제 사건으로 남게 되었다. 안 잡힌 이유 중엔 과학수사가 별로 발달하지 않았던 시기였던데다, 찰스 워런이 워낙 수사를 부실하게 했던 탓이 있다. 오늘날이라면 아마 거의 100% 잡혔을 것이다.
2. 사건의 배경
잭 더 리퍼 사건의 배경을 살펴보려면 먼저 영국 산업혁명기의 병폐들을 알아보아야 한다.
19세기 영국은 산업혁명과 의료기술 발달, 농업 기술 발달의 결과로 인구가 급속히 증가하였다. 1851년에 영국 인구는 1,680만 명이었지만, 1901년에는 3천만 명으로 늘었을 정도인데 당대에 영국이 수많은 식민지를 차지하여 많은 이들이 기회를 찾아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인도, 남아공. 탄자니아, 나이지리아, 홍콩 등의 식민지로 이주한데다가 또한 적지 않은 영국인들이 미국, 브라질, 아르헨티나, 멕시코 등의 아메리카 국가로 이주했음에도 영국 본토의 인구만으로도 엄청난 인구성장세가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이처럼 늘어난 인구는 산업혁명기에는 쉽게 대체 가능한 잉여노동력이 늘어났다는 뜻이기도 했다.
노동환경은 열악하고 대체인력 수급은 쉬우니, 당연히 고용주들은 임금을 제대로 주지 않았다. 영국의 하층 여성들은 같은 계층 남성들보다 더 혹독한 현실에 부딪혀야 했다. '''예를 들어, 1890년 기준으로 영국의 말단 하녀가 12시간 매일 일하고 받은 연봉은 13파운드 정도였는데, 현재 기준으로 환산하면 1,300달러, 우리나라 돈으로 140만 원이 조금 넘는다.''' 결국 여성들이 기존에 버는 돈으로는 도저히 생계를 유지할 수 없었기에, 이는 여성들이 매춘을 부업 또는 전업으로 삼는 큰 요인이 되었다. 잭 더 리퍼의 희생자들을 통해 그 일면을 어느 정도 볼 수 있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이드는 스웨덴에서 지주의 집 하녀로 일하다가 식모 일을 하러 런던으로 이주하였으나 매춘에 발을 들였고, 애니 채프먼은 때때로 하녀 일을 하거나 뜨개질을 하여 돈을 벌었으나 수입이 부족하여 매춘으로 생활비를 벌충했다.
게다가 여성의 성비는 1851년 통계에 의하면 50만에서 100만 명 정도로, 남성보다 더 많았다. 당시 남성이 여성보다 수가 적었던 이유는, 현재도 그렇지만 과거에도 여성의 평균수명이 남성보다 높았고, 산업혁명이 시작되며 생겨난 공장들에서 일어난 사고의 사망자들이 남성이었기 때문이다. 또, 당시 영국의 식민지가 전세계에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어서 식민지 지역으로의 이주가 활발히 진행된데다가 미국과 라틴 아메리카 일대로 이주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는데, 남성 이민자들이 더 많았다. 주둔군으로 파견된 남자들이 현지 주민들과 빈번히 통혼하고, 7년 전쟁, 미국 독립 전쟁, 나폴레옹 전쟁, 미영전쟁, 아편전쟁 등 대규모 전쟁들이 빈번하게 일어나 징발된 남자들이 전투나 풍토병으로 죽자, 미혼 여성의 숫자는 더욱 늘어났다.
25세에서 40세 사이 여성 중 15% 이상이 결혼을 할 수 없었다. 남성의 경제권이 강하던 시대에 여성의 경제적 지위 하락으로 이어지는 문제였다. 이렇게 노동과 결혼에서 수많은 젊은 여성들이 소외됨으로써 영국의 매춘부 수는 폭증하였다. 당시 계간지였던 The Westminister Review에서 추산한 영국 전체의 매춘부 숫자는 5만 명에서 36만 8천 명이었다. '''이 통계수치가 맞다면, 매춘은 영국 여성의 직종들 중 4번째로 흔했다.''' 잭 더 리퍼 사건이 첫 발생한 1888년, 영국 경찰이 파악한 런던의 매춘부 수는 5,678명이었고, 영국과 웨일스 전체에서는 2만 4,311명이라고 한다. 또한 1888년 10월 잭 더 리퍼 사건이 벌어지는 중 사건의 배경이 된 화이트채플에서 공식적으로 경찰이 집계한 매춘부의 숫자는 1,200명이었다. 하지만 통계수치마다 숫자가 모두 다르고, 경찰이 집계한 숫자는 부족한 당시 치안력으로 파악한 최소치임을 감안하면, 실제 매춘부의 숫자는 경찰의 파악보다 훨씬 많았을 것이다. 그리고 경찰이 확실히 집계한 숫자로 한정하여 생각해도, 런던 전체에서 화이트채플의 매춘부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히 컸다. 잭 더 리퍼 사건의 희생자들 대부분은 결혼하였어도 남편과 사별하거나 헤어져서 안정적인 생계 유지가 어려워진 여인들이다. 즉 실패한 결혼 생활이 이들을 생활전선으로 내몰았고, 복지정책이 제대로 마련되어 있지 않았던 당시 영국 사회에서 희생자들이 살아남기 위해 선택한 것은 매춘이었다.
사건의 배경이었던 화이트채플은 그 중에서도 매춘으로 악명 높은 곳이었고, 이미 유대인, 아일랜드인, 기타 외국인들이 모여들어서 사회 혼란의 진원지가 되고 있었던 곳이다. 잭 더 리퍼에게 희생당한 5명의 피해자들 중 2명이 잉글랜드 본토 출신이 아닌 외지인이었다는 것에서도 이 점을 엿볼 수 있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이드가 스웨덴 출신, 메리 제인 켈리가 아일랜드 출신이었다. 사회적 약자 중의 약자였던 매춘부들은 잭 더 리퍼 사건이 발생하기 이전에도 범죄의 표적이 되어 살해당하거나 갱단으로부터 보호비 명목으로 돈을 갈취당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춘부들은 제대로 된 치안의 보호를 받지 못함이 현실이었다.
전술했듯 잭 더 리퍼 사건이 발생하기 전인 1888년 초중순에도 많은 매춘부들이 길 한복판에서 살해당했지만, 범인이 누구인지 밝혀내지 못했다. 다만 살해 수법을 보았을 때 잭 더 리퍼 사건의 피해자는 아닌 것으로 여겨진다. 게다가 당시 매춘부들의 절망적인 생활 패턴이 맞물려 매춘부들은 잭 더 리퍼 같은 살인자들에게 손 쉬운 표적이 되었다. 매춘부들은 당시 빠른 성행위에 4펜스 남짓 푼돈을 받았고 그 돈으로 그날 먹을 비스킷과 진을 사면 숙박비를 구할 수 없어 노숙하거나, 영국의 하층민들이 이용한 2펜스 정도의 푼돈을 내고 벽가에 설치된 긴 벤치에 서로 붙어앉아 자는, Two Penny hangover라는 간이 숙박 시설 등을 써야 했다. 이건 말이 숙박이지, 그냥 달랑 야외 혹은 지붕만 있는 실내에 의자 하나와 자다가 앞으로 넘어지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 벽에 걸려 있는 기대는 긴 밧줄에 기대어서 자는 '''준 노숙'''으로, 아침이 되면 주인이 밧줄을 풀어서 깨워 주었다.
심지어 Penny sit-up이라고, 반값이지만 대신 기댈 밧줄도 없고 등받이도 없는 의자에서 자야 하는 곳도 있었다. 숙박비를 벌지 못한 많은 매춘부들이 이런 식으로 잠을 자야 했다.[2] 19세기 말부터 1900년 무렵 런던의 가장 저렴한 숙박업소에서 침대 하나를 하룻밤 빌리는 데 지불해야 하는 가격은 4펜스에서 6펜스 남짓이었다. 매춘부들이 한 번의 야외 매춘으로 번 돈은 개인마다 차이는 있었지만 2펜스에서 4펜스 정도였다. 이러한 시세의 영향으로 당시 퍼진 속어가 twopennies upright, 2페니를 주고 담벼락에 기대 선 채로 매춘부와 하는 성관계를 나타내는 말이었다. 야외에서 적당히 으슥한 곳에 가서 유방과 성기 정도만 노출하고 잽싸게 끝내는 착의섹스로, 저렴한 만큼 질도 낮은 서비스이다. 이때 영국 화폐는 1파운드가 240펜스였던 때였다. 1889년 기준으로 1파운드는 현재의 15만 원이 조금 넘는다. 그렇게 따지면 4펜스는 지금의 2,600원 정도 가격이다. 그리고 당시 매춘부들이 물처럼 마시던 진 1잔은 3펜스 정도였다.
살해당한 5명 중 4명이 모두 새벽에 손님을 구하다가 목숨을 잃었고, 마지막 희생자는 살해당할까 두려워 집 안에 머물렀지만 결국 자기 집 안에서 살해당했다. 야간에 조용한 장소에서 손님을 만나야 하는 매춘부들의 직업 특성상, 잭 더 리퍼에게 있어서는 손쉬운 살해조건이 널린 것이다.
'''결국 잭 더 리퍼 사건은 영국 산업혁명기의 열악한 노동 조건, 노동과 결혼에서 소외된 여성들의 매춘 문제와 한 미치광이 살인마의 광기가 결합하여 만들어진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3. 잭 더 리퍼의 의미
잭 더 리퍼라는 이름 자체는 직역하면 '찢는 자 잭'[3] 이 되고 조금 더 자연스러운 의미를 부여하면 '면도날 잭' 혹은 '칼잡이 잭' 정도이다. 그리고 잭(Jack)은 특정인의 이름이 아니라, '아무개'라는 뜻인 존 스미스, 존 도와 비슷하니 이를 감안하여 의역하면 '''살인자 모(某) 씨''' 정도가 된다.
4. 살인마, 화이트채플을 휩쓸다
악명을 빌려 잭 더 리퍼를 사칭한 모방범죄가 극심하게 발생하여 피해자 수가 정확히 집계되지 않았다.[4] '''진짜 잭 더 리퍼 본인'''이 저지른 살인으로 널리 인정받는 것은 '''5건'''으로 이 다섯 건은 '''Canonical Five'''라고 불린다.
4.1. 1번째 사건: 1888년 8월 31일
1888년 8월 31일 새벽 3시 40분, 메리 앤 니콜스(Mary Ann Nichols, 43세)라는 매춘부가 벅스 로우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그 전날인 8월 30일 23시 경, 니콜스가 화이트채플 거리를 걷는 모습이 목격되었고, 31일 0시 30분에는 스피탈필즈의 주점에서 나오는 것이 목격되었다.
1시 20분에서 40분 경에는 숙박업소의 침대를 빌릴 4펜스가 없다는 이유로 숙박업소의 부엌에서 쫓겨났다고 한다. 숙박업소 관리자가 자신을 쫓아내자 니콜스는 "침대 하나를 비워달라"고 부탁하며 이렇게 말했다. "신경 쓰지 말아요. 금방 숙박비를 벌어올테니. 여기 이 예쁜 모자 보이죠?" 관리자의 증언에 의하면, 그 모자는 지금껏 니콜스가 사용하지 않았던 새 검은색 보닛 모자였다고 한다.
니콜스가 생전 마지막으로 목격된 것은 2시 30분, 오스본 가에서 친구이자 룸메이트였던 에밀리 홀랜드와 만난 것이었다. 이 때가 니콜스가 사망하기 약 1시간 전이라고 추정한다. 홀랜드와 이야기하면서 니콜스는 자신이 "숙박비의 3배를 벌었으나, 3번 모두 술을 마시는 데 다 써버렸다."라고 말하였다. 홀랜드는 "니콜스가 굉장히 취한 채로 벽에 기대어 서 있었으며, 그녀와 7~8 분간 동안 대화하고 헤어졌다." 하고 증언하였다.
3시 15분 경, 니콜스의 시신이 발견되었던 벅스 로우를 2명의 경관이 순찰하고 있었으나, 이들은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였다"고 증언하였다. 3시 40분에서 50분 사이, 수레꾼들과 경관들에 의해 니콜스는 벅스 로우 거리에서 누워 있는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검시 결과, 니콜스의 목과 배에는 깊은 자상이 있었고 목에는 숨통이 졸린 자국이 있었다. 니콜스의 몸 주변에서 피가 많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니콜스의 사인은 자상이 아닌 질식사인 듯하다. 니콜스의 시신을 검시한 의사는 "니콜스의 몸에 있는 자상은 모두 아주 날카로운 칼 한 자루만으로 생겼고, 범인은 왼손잡이이며, 범인은 다른 곳에서 살해한 후 시신을 벅스 로우로 옮겨 시신을 훼손한 것 같다"는 의견을 피력하였다.
참고로, 메리 앤 니콜스가 살해당하기 전, 엠마 엘리자베스와 마사 타브람이라는 두 매춘부가 살해당한 사건이 있었다. 그러나 잭 더 리퍼 특유의, 칼로 베는 시신 훼손 수법을 토대로 분석했을 때 니콜스가 당한 살해가 잭 더 리퍼가 최초로 저지른 범행이란 추측이 많다. 그러나 당시 런던 경찰국은 이 사건이 연쇄살인사건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과거 화이트채플에서 14년 동안 근무했던 프레드릭 애벌라인(Fredrick Abberline) 경위를 파견했다. 그러나 후술했듯, 당시의 수사력으로는 어느 누구도 범인을 잡기는 무리였다.
그리고 이 당시 런던 경찰의 총 책임자[5] 를 맡고 있던 사람은 찰스 워런 경(Sir Charles Warren, GCMG, KCB,)이라는 사람이었다. 문제는 워런이 '''무능력하기 짝이 없는 인물'''이었다는 것. 사실 그는 전문적인 경찰관이나 형사가 아니었다. 게다가 워런은 1887년에 트라팔가르 광장에서 있었던 실직자들의 폭동을 지나치게 과격히 진압해 2명이 사망했고 수백명이 부상당했기 때문에 이미 내외적으로 신뢰를 잃은 인물이었다.
4.2. 2번째 사건: 1888년 9월 8일
1888년 9월 8일 새벽 6시 경, 애니 채프먼(Annie Chapman, 47세)이라는 매춘부가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9월 8일 1시 35분, 채프먼은 숙박업소에서 침대를 빌릴 돈이 없다는 이유로 쫓겨나자 "곧 숙박비를 벌어서 돌아오겠다." 하는 말을 남기고 길거리로 나갔다.
채프먼이 시신으로 발견되기 30분 전인 5시 30분, 목격자였던 엘리자베스 롱의 증언에 의하면 애니 채프먼은 한버리 29가에서 사냥 모자를 쓴 추레한 남성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고 한다. 롱이 엿들은 그들의 대화 내용에 따르면, 남성은 "하겠는가?"라고 물어봤고, 채프먼은 "예"라고 답했다고 한다.
그리고 5시 30분에서 6시 사이, 한버리 29가에 거주하던 젊은 목수 앨버트 카도시의 증언에 의하면, 자신이 집 밖으로 나왔을 때 울타리 너머에서 한 남성의 알아들을 수 없는 목소리, 여성의 "안 돼!" 하는 비명 소리, 무언가 쓰러지는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6]
그 후 6시, 한버리 29가 3층에 거주하던 수레꾼 존 데이비스가 채프먼의 시신을 발견했다.
검시의 조지 백스터(George Bagster Phillips)가 채프먼을 검시한 결과, 혀가 이빨 사이에 끼워져 있었고 얼굴이 부풀은 점으로 보아 아마 피해자가 목에 두른 스카프로 교살한 듯하였다. 첫 번째 살인이 비교적 평범한 살해였음에 비해, 이 살인은 배를 열어 내장을 어깨에 걸쳐놓은[7] 시신훼손이 워낙 잔혹하여 단숨에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한 더 큰 원인이 된 것은 그가 신문사에 보낸 편지였다. 편지는 9월 27일 소인이 찍힌 채 Central News Agency of London 신문사에 발송되었다. 이 편지는 후대에 수신인 표시 부분을 따서 'Dear Boss Letter'로 불리게 된다.
잭 더 리퍼, 즉 살인자 잭이라는 별명이 처음으로 소개된 이 편지는 런던을 발칵 뒤집어 놓았고, 화이트채플의 살인자는 순식간에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이렇게 신문사에 범행 사실을 알려주었기에, 그의 범죄는 '''최초의 극장형 범죄'''로 기록되었다.[9] 그러나 각주에서도 언급했듯, 이 편지가 진짜로 범인이 보낸 것인지 누군가의 단순한 장난이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나는 경찰들이 나를 잡았으며 아직 날 처리해 버리지 못 한 거라는 말을 계속 듣고 있다. 그들이 똑똑한 척하며 올바른 방향으로 가는 것에 대해 얘기할 땐 웃음이 나더군. 그 가죽 앞치마[8]
에 대한 농담은 정말 웃겼어. 난 창녀들이 혐오스럽고 내가 쇠고랑을 찰 때까지 그들을 찢는 것을 멈추지 않겠다. 저번 일은 대단했지. 난 그 여자가 찍찍댈 시간조차 주지 않았다. 이제 어떻게 그들이 날 잡을 수 있을까. 난 내 일이 좋고 다시 시작하고 싶다. 너도 곧 나와 내 즐거운 작은 놀이에 대해 듣게 될 거다. 최근 사업의 성과로 얻은 생강맥주 병에 담아놓은 빨간 물질로 편지를 쓰려고 했는데 풀처럼 굳어버려서 못 쓰게 되었다. 붉은 잉크면 충분하길 바란다. 하하. 다음 번에 할 일은 여자의 귀를 잘라버리고 재미로 경찰에 보내는 거지. 그렇지 않나. 내가 좀 더 일할 때까지 편지를 보관하다 공개하도록. 내 칼이 아주 좋고 날카롭기에 기회만 있으면 바로 써보고 싶어. 행운을 빌며, 안녕히, 잭 더 리퍼로부터(Jack The Ripper)이 별명을 거리낌 없이 사용하시길. PS 내가 두 손을 붉은 잉크로 다 적시기 전에 이걸 부쳐서 다행이지 않나. 빌어먹을, 운도 없지. 이젠 그들이 나더러 의사라더군 하하.
이 편지가 이틀 후인 9월 29일 경찰에 보고되었을 때 경찰은 이것을 누군가의 장난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다음날인 30일, 여자의 귀를 자르겠다고 편지에 언급되었던 대로 캐서린 에도우즈가 귀가 잘린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경찰은 이 편지가 진범이 보냈을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편지를 일반에 공개했다. 필적을 아는 누군가의 제보를 바란 것이었지만, 소득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잭 더 리퍼'라는 별명에 영감을 받은 수많은 사람들이 잭 더 리퍼를 사칭하는 가짜편지들을 써서 보낸 계기를 낳고 말았다.[10]
살인사건들이 끝난 후, 경찰 내부에서는 이 편지가 지역 신문사 기자의 장난이었을 거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나, 1931년에 와서야 한 기자가 "Dear Boss 편지는 내가 썼다"고 고백하는 일도 있었다. 한편 Dear Boss 편지는 후술되는 From Hell 편지와는 달리 글씨체가 훨씬 깔끔하고, 철자법 사용이 비교적 정확한 편이다.
4.3. 3, 4번째 사건: 1888년 9월 30일
1888년 9월 30일, 더블 이벤트(Double event)라고 불리는[11] 사건이 발생했다. 이날 새벽 1시와 1시 45분에 두 여성의 시신이 발견되었는데, 그 당시의 사건 기록을 살펴보면 '''경찰들이 주변을 순찰 중이었으며''' 주변을 지나던 행인의 수도 적지 않았다. 그런데도 범인은 경찰뿐만 아니라 행인 등 어느 누구에게도 붙잡히지 않았고, 불과 1시간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사람을 2명이나 죽이고 사라져 버렸다. 살해된 두 여성은 엘리자베스 스트라이드(Elisabeth Stride, 45세)와 캐서린 에도우즈(Catherine Eddowes, 46세)라는 매춘부들이었다.
스트라이드가 시신으로 발견되기 전, 0시 35분과 45분에 남성과 같이 있는 모습이 각각 목격되었다.
0시 35분, 순경이었던 윌리엄 스미스는 스트라이드가 어두운 코트와 사냥모자를 착용한 28세 정도의 젊은 남성과 같이 있는 것을 목격했다.
0시 45분에는 이스라엘 슈바르츠(Israel Schwartz)라는 유대계 헝가리인이 "한 남성이 여성을 공격하는 것을 목격했는데, 그 남성은 30대 정도에 어두운 머리색, 갈색 수염이 있었고, 어깨 너비가 한 5피트 5인치(약 165 cm) 정도의 어두운 색깔의 재킷을 입었으며, 챙 달린 검은 모자를 썼다"고 증언했다. 슈바르츠의 증언은 굉장히 중요하게 여겨지는데, 스트라이드가 살해되었을 현장에서 남성이 여성을 공격하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슈바르츠에 의하면 자신이 길을 건너던 중, 한 남성이 여성과 이야기를 나누다 여성을 길거리에 집어던졌다고 한다. 여성은 작게 비명을 3번 질렀고, 남성은 여성을 골목길 안으로 끌고 가면서 길 건너편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던 다른 남성을 향해 "립스키!"(Lipski)라고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이 립스키라는 소리에 대한 해석은 여러 가지가 있다. 립스키는 유대인의 성으로도 쓰였고, 유대인을 비하하기 위한 목적의 호칭으로도 사용되었다. 게다가 잭 더 리퍼 사건 1년 전에는 립스키라는 성의 유대인이 여성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한 적도 있다. 따라서 이는 여성을 공격하던 남성이 주변에 서 있는 슈바르츠를 포함한 유대인들에게 "여긴 더 볼 것이 없으니 꺼지라"는 경고 내지는 모욕의 의미로 사용했을 수도 있다. 또는, 립스키라는 말을 들은 담배를 피우던 남성이 자신을 쫓아왔다는 슈바르츠의 증언을 감안한다면, 여성을 공격한 남성과 담배를 피우던 남성은 공범관계이고, 유대인인 슈바르츠 자신을 쫓아내기 위해 고안한 그들만의 신호일 수도 있다. 잭 더 리퍼에 대한 책을 저술한 폴 베그의 주장에 의하면 "립스키"라는 외침은 잭 더 리퍼 본인이 담배를 피우던 남자에게 자신은 여성을 구하는 사람이고 슈바르츠야말로 여성을 공격한 유대인이라는 인상을 심어주는 데 사용했던 것일 수도 있다고 한다. 그게 사실이라면 당시의 반유대감정을 교묘하게 이용해서 목격자를 쫓아내 버린 범인의 지능적 책략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슈바르츠가 영어를 잘 못하던 외국인인 것을 감안했을 때, 슈바르츠가 들은 말이 과연 유대인을 모욕하는 욕설인 '립스키'일지는 확신할 수 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슈바르츠는 "담배를 피우던 남성이 갑자기 내 쪽으로 걸어와서, 나는 도망쳤다"고 경찰에 증언하였다. 그리고 슈바르츠 본인이 본 공격당한 여성이 살해당한 스트라이드가 맞다고도 확인하였다. 그러나 여성을 공격하던 남성과 자신과 같이 길 건너편에 있던 남성이 서로 아는 사이였는지는 모르겠다고 증언하였다. 경찰은 이 증언을 꽤 신빙성 있게 보았다. 실제로 슈바르츠의 증언이 사실이고, 공격당한 여성이 스트라이드가 맞다면 슈바르츠는 '''잭 더 리퍼를 목격한 유일한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관심을 끌기 위한 목적으로 거짓 증언을 하거나 진범을 사칭한 편지들이 횡행하고 있었던 당시 상황을 보았을 때, 정말 슈바르츠의 증언이 사실인지 확인할 방법이 없다는 문제가 있다.
결국 1시, 스트라이드는 끝내 덧필드 야드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시신을 발견한 행인의 증언에 의하면, 자신의 말이 무언가 낌새를 차렸는지 사건 현장으로 가지 않으려고 고집을 부렸고, 스트라이드의 시신을 찾아내 만졌을 때는 시신이 아직 식지 않은 상태였다고 한다. 말 그대로, 스트라이드는 살해당한 직후에 발견된 셈이다. 피웅덩이 속에 누워 있던 시신의 목에는 칼에 찔린 상처가 발견되었으나, 다른 신체 부위에는 비교적 상처가 없었다. 범인이 행인이 다가오는 것을 알고 몸을 피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그 대신 시신 근처에 있던 벽에는 "유대인들은 아무 이유 없이 비난받지 않을 존재이다.(The Jewes are the men that will not be blamed for nothing)."[12] 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한편, 또 다른 피해자였던 캐서린 에도우즈는 그 전날인 9월 29일 저녁에 술에 취한 채 길거리에서 자고 있다가 경찰에 의해 끌려가 유치장에 감금되었고, 1시 경에 그곳에서 풀려났다. 에도우즈가 마지막으로 목격된 것은 시신으로 발견되기 불과 '''10분 전인''' 01시 35분 무렵이었다. 남성 3명이 길을 가다가 에도우즈를 보았는데, 그들의 증언에 의하면 선원 복장을 입고 붉은 스카프를 맨, 키가 5피트 7인치(170.2cm) 정도 되는 수염을 기른 남성과 대화 중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45분, 순찰 중이던 경찰이 에도우즈의 시신을 발견하였다.
시신을 검시해보니 신장이 없어졌고 얼굴 주변에 상처가 있었으며, 하복부는 절개된 채였다. 덤으로, 10월 1일에 화이트채플 감시위원회(Whitechapel Vigilance Committee)의 위원장인 조지 러스크(George Lusk)에게 편지 1통이 도착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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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편지가 사람들의 공포심을 더욱 키웠다. 이 '지옥으로부터(From Hell)'온 편지에는 신장 반쪽이 동봉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신장이 진짜로 에도우즈의 것인지에 대해서는 당대의 의사들 사이에서도 논쟁거리였다. 동봉된 신장이 여러모로 인간 여성의 것, 과음을 한 흔적, 적어도 3주 전에 죽은 사람의 것임을 밝히는 정황은 많았으나, 남아있는 에도우즈의 완벽히 건강한 오른쪽 신장과는 너무 큰 차이를 보였기 때문이었다. 많은 경찰들과 의사들은 편지에 동봉된 신장에 대해 "신장을 쉽게 구할 수 있는 의대생의 장난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결국 지금까지도 이 편지와 신장이 에도우즈 살해 사건의 진범이 보낸 것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흉흉한 소문이 돌기 시작하자 거리에는 인적이 끊겼고, 경찰들은 여장까지 해가면서 그를 찾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그들의 지휘자였던 찰스 워런 경은 잭 더 리퍼가 썼을지도 모를 The Jewes are the men that will not be blamed for nothing이라는 낙서를 지우라고 명령했다. 반유대주의 폭동이 일어날 것을 염려한 것이지만, 필적 감정을 해도 모자를 중요한 단서를 지운 이 만행은 수사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그 외에도 워런 경의 악행(?)은 계속되었는데, 사례를 들자면 무턱대고 거리에 개를 풀어서 범인을 잡으라고 시킨 것이다.[15] 더블 이벤트 사건이 발생하고 이틀 후, 더 타임즈 지에 퍼시 린들레이(Percy Lindley)라는 블러드하운드 사육자가 올린 투고문이 올라왔다. 그 투고문에는 '개들을 동원해서라도 범인의 흔적을 찾아야 한다.'는 주장이 실려 있었다. '만약 사건현장에 범인의 냄새가 생생히 남아있는 곳에 개가 투입되면 경찰이 놓쳐버린 범인을 잡을 수 있을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더블 이벤트 사건 이후 다급해진 경찰국은 일단 그 주장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워런 경도 아주 백치는 아니었던지라 린들레이에게 개가 사건현장에 도착하면 범인의 냄새만을 구별할 수 있는지, 만약 냄새를 찾더라도 수많은 시민이 오가는 런던 시내에서 어떻게 범인의 냄새만을 찾을 수 있는지 질의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발등에 불이 떨어진 입장이었던 워런 경과 경찰국은 블러드하운드를 범인 추적에 사용하기로 하였다.
그 결과 에드윈 브로우(Edwin Brough)라는 사육자가 데려온 바나비와 버고라는 이름의 블러드하운드 2마리가 투입되었다. 이 개들을 대상으로 하이드 파크 같은 공개적인 장소에서 추적 훈련이 실시되었는데 한 번은 워런 경도 사냥감 역할을 맡으면서 개들을 훈련시키기도 했다. 블러드하운드 2마리가 주어진 환경에서 사람을 추적하는 능력은 꽤 괜찮았기에 워런 경도 만족을 표했다.
그러나 이것을 도그 쇼에 참가했거나 다른 주인에게 일시적으로 맡겨졌다가 훈련 중 길을 잃은 개들로 훈련을 시키는 것으로 오해한 언론들이 워런 경의 멍청함에 비난을 퍼부어댔고, 워런 경의 우유부단함과 겹쳐 개들은 활용될 기회를 잃은 채, 그 뒤로 투입되는 일이 없었다. 이러한 해프닝은, 범인을 잡지 못한 경찰이 개들까지 동원할 정도로 절박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4.4. 5번째 사건: 1888년 11월 9일
1888년 11월 9일, 메리 제인 켈리(Mary Jane Kelly, 25세)라는 매춘부가 자신의 거주지인 도르셋 가 밀러스 코트에서 살해당했다.
참고로, 도르셋 가는 런던 내 최악의 우범지대 중 하나였다. 잭 더 리퍼 때문에 켈리도 불안감에 한동안 계속 집에 있었으나, 돈이 궁했던 데다가 때마침 6주 동안 밀려 있던 집세 29실링이 있어서, 다시 매춘을 하다가 집에서 살해당했다.[16]
켈리의 이웃이었던 매춘부 메리 앤 콕스의 증언에 의하면, "켈리가 살해되기 전날인 11월 8일 밤 23시 45분 경, 켈리가 붉은 머리의 남성과 같이 집으로 들어왔고, 1시 경까지 계속 노래를 불러댔다"고 한다. 켈리의 윗방에 살던[17] 엘리자베스 프레이터는 켈리의 노래가 1시 30분에 그쳤고, 콕스는 "3시 경에 켈리의 방에서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고, 빛도 새어나오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4시 경, 프레이터는 자신이 기르던 고양이가 자신의 목을 밟는 바람에 잠에서 깨어났고, 그 직후 "살인이야!" 하는 비명을 들었지만 그런 외침은 이스트 엔드 지역에서는 흔했기 때문에 무시했다고 한다. 그리고 프레이터는 5시 45분 경에 누군가 밀러스 코트를 빠져나가는 소리를 들었지만 그 당시에는 별 의심을 하지 않았었다.
오전 10시 45분, 토마스 보우어(Thomas Bowyer)는 고용주 존 매카시(John McCarthy)의 지시에 따라 켈리에게서 6주 동안 밀린 집세 29실링을 받기 위해 켈리의 방을 찾아가 문을 두드렸는데 아무 대답이 없었다. 그래서 깨진 창문 틈으로 방 안을 들여다 보았더니, 처참하게 난도질당한 채 침대에 누운 켈리의 시신이 있었다. 켈리의 얼굴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살점이 잘려나갔고[18][19] 오른쪽 대퇴부와 두 유방이 모두 잘려나갔으며 뱃속의 자궁, 신장, 간, 내장, 비장[21] 등이 적출되어 주변에 널렸을 뿐만 아니라, 심장은 사라져서 찾을 수 없었다.[20] 앞서 잭 더 리퍼에게 살해당한 다른 4명의 시신도 심하게 훼손되었지만 켈리는 특히 그 훼손 정도가 심각했는데, 이는 범인이 실외가 아닌 실내에서 홀로 작업할 시간이 충분했기 때문인 것 같다.
범행 시간은 본드의 추정 결과 새벽 2시에서 8시 사이였고, 2번째 피해자인 채프먼을 검시한 적 있는 조지 백스터는 '적어도 이 훼손이 2시간은 걸렸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한편, 오전 11시쯤 사건 현장에 도착한 경찰들은 2시간이 걸려서야 문을 부수고 켈리의 방으로 들어갔는데, 이는 워런 경이 개들을 사건 현장에 투입하려면 아무도 그 전에 사건 현장을 건드리지 말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일선 경찰들과 경찰국간의 의사소통의 부재가 빚어낸 해프닝으로, 켈리가 살해되기 직전, 워런 경은 사임했으며, 개들은 투입되지 않기로 되어 있었다. 결국 경찰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무능했다.
이후 모든 영국 국민들이 공포를 넘어 분노했고, 빅토리아 여왕은 '반드시 그를 잡으라.'는 어명까지 내렸다.
'''그러나 그는 끝내 붙잡히지 않았다.'''
5. 범행의 공통점
희생자는 모두 매춘부였고, 범행장소는 공공장소 혹은 그에 가까운 장소 등 야경꾼이나 행인이 지나갈 수 있는 장소가 많았다. 범인의 대담성과 계획성을 보여주는 항목이며, 때문에 범인의 대략적인 인상을 말한 증인도 있다.
살해수법의 특징은, 칼로 살해한 후 '외과 수술용 칼' 같은 예리한 날붙이'로 시신을 해부했다는 점이다. 이래서 널리 알려지게 된 이름이 Jack the Ripper가 된 것. 직접적인 사인은 대개 목에 가해진 자상 또는 교살이었고, 주로 훼손된 부분은 복부와 내장, 얼굴이었다. 이런 범죄치고는 특이하게도 무릎을 꼭 붙인 채 사망한 희생자도 있었다. 여성의 생식기를 절개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범인이 일반적인 성행위에는 흥미가 없었음을 보여주는 사실.
해부학 지식이 상당했던 듯하다. 한밤중에 조명도 없는 곳에서 캐서린 에도우즈의 신장을 적출했다는 점, 게다가 신장은 막으로 가려져 보이지 않는데도 적출해냈다는 점에서 부검의들 일부는 '범인이 상당한 외과적 기술이 있는 것이 아닐까.' 추측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범인이 해부학적 지식이 있는 의사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는데, 한편으론 전문 의사의 솜씨로 보기에는 조금 조잡하다며 그 당시에 취미 생활로 사냥과 사냥감 해체를 자주하던 상류층 남성이라는 반론도 있었다.[21]
캐서린 에도우즈가 살해되기 직전, 에도우즈를 목격한 증인(조지 허드슨)[22] 의 말에 따르면 "상당히 깔끔하고 번듯해 보이는 차림[23] 의 남자와 대화를 하고 있었다." 한다. 이 자와 만나고 얼마 지나 캐서린의 시체가 발견되었으므로 이 자가 바로 잭 더 리퍼일 가능성이 높으며, 상류층 출신일 가능성도 높다.
또한 정신에 상당한 문제가 있는 것도 분명해 보인다. 그의 범행은 일반적인 살인자와 달리 증거를 많이 노출한 데다가, 너무나 참혹하고 잔인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잭 더 리퍼가 '여성'이라는 대상에 '''비정상적인 증오'''를 품은 인간이 아닌가 하는 분석도 나왔다.
6. 용의자
어떤 사람이 그인지 모르기에 다양한 인물이 용의자로 올라갔다. 용의자로 오른 인물은 의사부터 공작 나으리까지 다채롭고, 그 외에도 작가 루이스 캐럴, 화가 월터 시콧 등 다양한 인물들이 용의자 후보로 올라있다. 더 알고 싶으면 영어 위키백과 잭 더 리퍼 용의자 항목을 참조하자. 그 외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잭 더 리퍼 용의자로 지목되어 곤욕을 치렀으며, 영국인(...)이 이런 짓을 할 리가 없다며 유대인과 외국인이 의심받기도 했다.
역사 기록을 바탕으로 제작된 몽타주가 공개되었지만. 기록이 오래되었고 목격자도 거의 없어서 크게 신빙성은 없다 몽타주가 또 바뀌었다!
아래와 같이 여러 용의자들이 있지만, 진실은 저 너머에.
6.1. 애런 코즈민스키(Aaron Kosminski)
당시 잭 더 리퍼를 추적하던 '도널드 스원슨' 경감은, 애런 코즈민스키(Aaron Kosminski)[24] 라는 폴란드계 유대인을 유력 용의자로 생각하고 있었다.
유일한 목격자는 "애런이 범인이 맞다"고 지목했으며, 결정적으로 애런이 정신병원에 수감된 이후부터 잭 더 리퍼가 사라졌다.
이견이 있을 수 있는게, 애런이 수감된 것은 1891년이며, 잭 더 리퍼의 범행으로 확실시되는 범행은 1888년 8-11월의 범행이다. 당시 화이트채플의 여성 연쇄 살인은 1891년을 마지막으로 끊긴 것은 맞으나, 마지막 케이스인 1891년의 프란시스 콜 살인 이전 벌어진 살인은 1889년 9월 10일 발견된 이름모를 여성의 훼손된 몸통이 끝이였으며 시간적 간극을 보면 잭 더 리퍼와의 연관성이 높진 않다. 애런이 수감된 1891년과 연쇄살인이 종료된 시점은 들어맞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
스원슨 경감이 코즈민스키가 유대인이란 이유로 증언에 부담을 가져 그를 체포하지 않았기 때문에, 코즈민스키는 스원슨 사후에 남겨진 메모를 통해 용의자로 떠오르게 되었다. 링크
6.2. 몬터규 존 드루이트
잭 더 리퍼의 수사를 담당한 멜빌 맥노튼 경은 3명의 용의자를 지목했는데, 그중 가장 유력한 용의자가 바로 '''몬터규 존 드루이트'''이다.
그는 사건이 시작된 곳 근처에 사는 변호사이며, 의사가 아니지만 의학이 '''취미'''였고, 친척이 운영하는 병원도 있었으며, 후에 자살했다. 그가 자살한 이후 경찰은 수사를 종료[25] 했으나, 정확히 그가 범인이라고 단정하기에는 미심쩍은 점도 많다. 관련 내용은 영어 위키백과 Montague Druitt를 참조하자.
6.3. 앨버트 왕자
빅토리아 여왕의 손자이자 에드워드 7세의 장남인 앨버트 왕자와 관련되어 있다는 설도 있다. 왕자가 매독으로 미쳐서 매춘부를 살해한 것이라는 루머와[26] , 앨버트 왕자가 매춘부와의 사이에서 자식을 가졌는데 여자가 가톨릭이고 앨버트도 가톨릭으로 개종하려고 했기 때문에 빅토리아 여왕이 이 사실을 은폐하고 왕실을 지키기 위해 프리메이슨을 동원해서 매춘부와 그 사실을 알고 있는 4명을 죽이게 했다는 루머도 있다. 나이트라는 작가가 화가 월터 시콧과 살해된 매춘부의 딸 사이에 나온 남자 에게 증언을 들었다는 게 증거인데… 몇년 뒤 자기가 다 꾸며낸 일이라고 실토했다.
만화 '프롬 헬', 1979년 영화 '살인 지령(Murder By Decree)'[27] 등의 모태가 바로 왕자의 음모설. 여기다 프리메이슨까지 결합해서 나름 무적의 가설이 나왔다.
문제는 영국 왕실은 절대로 중혼을 인정하지 않았고, 왕가의 허가 없는 결혼을 인정하지 않아서, 앨버트 왕자가 무슨 일을 해도 별 문제는 없었다는 것.[28] 굳이 살인까지 벌여서 입을 막을 필요는 없었다.
6.4. 월터 시콧
앨버트 왕자를 지목한 월터 시콧 역시도 한 작가에 의해서 살인자 잭이라는 의심을 받았다. 그에게 유년기의 트라우마가 있어서 성적 충동으로 인한 살인동기가 있으리라는 점, 그가 남긴 작품 중에 섬뜩한 그림이 다수 있으며, 필적이 살인자 잭의 편지와 흡사한 데다가, 편지지 역시도 살인자 잭의 것과 같은 회사의 갈은 묶음이라는 것이 근거인데, 이를 반박하는 증거도 많기 때문에 논란이 많다.
6.5. 토머스 닐 크림
동시대의 살인의사 토머스 닐 크림은, 처형되기 전 자신이 잭 더 리퍼라고 주장했다.[29] 하지만 토머스 크림은 피해자들을 비소로 독살했기 때문에, 신빙성이 떨어지는 주장.
6.6. 질 더 리퍼
어쩌면 여자일지 모른다는 주장도 있다. 소위 '질(Jill. '잭'과 비슷하게 쓰이는 여자 이름) 더 리퍼' 음모론.
6.7. 프랜시스 텀블티
7. 진범 발견?
사건으로부터 126년이 지난 2014년, DNA 감식을 통해 '''범인은 애런 코즈민스키라는 결과가 나왔다.''' 캐서린 에도우즈가 둘렀던 숄이 경매에 올라왔는데, 이 숄에 남은 DNA를 분석해 코즈민스키의 후손과 대조해본 결과 일치했다는 것. 관련기사(영문)
법의학계에서 진범을 가리는 데 결정적인 증거가 되는 핵 DNA가 아닌 모계 유전인 미토콘드리아 DNA를 추출해 대조해본 것이기 때문에 아직까진 신빙성을 장담할 수 없다는 의견도 있다. 미토콘드리아 DNA 분석은 상대적으로 특이도가 낮다. 코즈민스키와 같은 아슈케나짐계 유대인이라면 DNA 서열이 서로 유사할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당시 경찰과 후세 연구자들이 언급하는 용의자들 중에 푸주한 제이콥 레비[30] 도 유대인이고, 제빵사 존 파이저도 유대인이다. 그외에도 영문위키 자료에 의하면, 의심 받던 유대인 용의자가 2명이나 더 있다. 화이트 채플에 원래 유대인들이 많이 살았기 때문, 사건이 일어나던 무렵, 근처 강당에서 국제유대인회의가 열리기도 했다.
그리고 과학자들이 너무 오랜 시간이 흘러버렸으므로 해당 DNA에 일부 문제가 발생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증거로서 불충분하다는 반론을 낸 상황이라 '''영원히 진범은 밝혀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관련기사(영문)
그렇지만 그 DNA를 증거로 제시한 에드워드에 말에 따르면아론 코스민스키가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될 당시 살해 현장에서 200m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던 것과 그가 신체를 노출하거나 성도착증세를 갖고 있었던 점, 에런이 정신병원에 수용된 시기가 잭 더 리퍼의 범행이 끝난 시기와 정확히 일치한다는 정황증거도 있다.[31]
일단 에런 코즈민스키의 후손의 DNA를 분석한것으로 보아 다른 용의자들의 후손들도 아직 살아있을 가능성이 있기에 진범이 나올 가능성이 아주 없지는 않다는 점은 보여준 점에서는 의미도 있다.
거기다가 아래 후대의 추리 및 미디어 항목에서도 서술되어 있듯이 정황증거와 프로파일러의 설명까지 전부 분석해보면 지금으로서는 코스민스키가 가장 유력한 후보인 것은 맞다.
8. 코난 도일의 추리
시대 배경이 딱 셜록 홈즈 시리즈와 맞아 떨어지고 이는 즉 실제 작가인 코난 도일이 살던 동시대의 일이라는 의미다. 그러나 코난 도일은 그를 소설에 등장시키지 않았다.
영국 경찰이 하도 안잡히다보니 실제로 코난 도일에게도 의뢰를 했지만 그래도 잡지 못한 일이 있었다는 말이 있다. 사실이라면 자신도 잡지 못한 인물을 언급하고 싶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홈즈 소설에 잭 더 리퍼가 등장하고, 홈즈가 특정인을 잭 더 리퍼로 추리했다가 다른 놈이 잭 더 리퍼라고 밝혀지면 홈즈는 놈에게 속아넘어간 허당 탐정이 되고 만다! 이런 걸 바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므로 코난 도일의 처사는 매우 현명했다.
그뿐만 아니라 윤리적으로 봐도 이게 옳은 것이, 책을 연재하던 시기와 이 사건이 일어난 시기가 거의 겹친다. 실시간으로 피해자가 생기는 사건을 책 인기 끌자고 넣었다가 유족들에게 어떤 상처를 줄지 생각해보면 설령 범인이 잡혀 정체가 드러났다 할지라도 넣지 않는 것이 옳은 결정이다.[32] 또한 홈즈 시리즈의 추리 콘셉트에는 연쇄 살인자라는 소재가 맞지 않기 때문에 작품의 분위기를 해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넣지 않은 것이 현명한 결정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코난 도일 본인은 인터뷰에서 잭 더 리퍼의 정체에 대해 추리했었다. 코난 도일은 잭 더 리퍼가 보낸 편지에 fix it up 등 영국에서는 쓰이지 않는 표현이 많아 그런 말들이 자주 쓰이는 미국 출신이나 미국에서 살던 사람일 거라고 추리했고, 미국과 영국의 신문사에 잭 더 리퍼의 편지를 공개해서 그 필체를 아는 사람들의 제보를 통해 추적해야 된다고 얘기했다.
코난 도일은 잭 더 리퍼가 여장남자였을 거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경찰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 그랬다는 거다. 명탐정 코난 극장판 베이커가의 망령에서 이 설정을 적용하였다.
9. 영향
- 물론 살인마의 본의는 아니었겠지만, 잭 더 리퍼 사건은 화이트채플 빈민가의 비참한 삶의 모습을 온 세상에 알리게 되었고, 빈민구제의 계기가 되었다. 이를 두고 조지 버나드 쇼는 "그는 어떤 사회개혁가보다도 화이트채플 빈민가의 비참한 삶을 널리 알렸다."고 평했다.
- 잭 더 리퍼의 정체를 밝혀내려는 연구가들의 노력 덕분에, 빅토리아 여왕 시대에 과학 추리도 크게 발전했다.
- 잭 더 리퍼를 사칭하거나 그의 범죄 수법을 따라하는 모방범죄가 극심하게 발생해서, 화이트채플에서는 위에 언급된 살인 외에도 다수의 살인사건이 일어났다. 다만 아무나 잭 더 리퍼가 되는 것은 아닌지, 대부분은 잡혀서 교수대 위로 올라갔고, 정말 정상참작이 되고 또 되어야 종신형을 받을 수 있었다.
- 선정적인 언론들이 연쇄살인자에게 별명을 붙이기 시작했으며, 리퍼와 비슷한 범죄를 저지르는 연쇄살인자들에게는 'XXX의 리퍼'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 잭 더 리퍼가 언론에 편지를 보낸 이후, 조디악 킬러 같은 연쇄살인범들이 이를 따라하는 경우가 많았다.
- 사형판결을 받은 살인자들 중에 잭 더 리퍼와 살인수법이 비슷한 자들 중심으로 자신이 잭 더 리퍼임을 주장하며 사형집행을 연기시키려고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들 모두 잭 더 리퍼가 아님이 드러나고 곧바로 처형되었다. 이들 중에는 사형이 집행될 때 "내가 잭 더 리퍼다"라고 외치고 죽은 자도 있다.
- 셜록 홈즈 시리즈로 대표되는 추리물이 인기를 끌자 잭 더 리퍼 사건은 세간의 엄청난 관심을 받았다. 시민들이 보낸 어처구니 없는 조언이 들어있거나 범인을 사칭한 편지들이 경찰과 언론사에 쏟아졌다.
- 그리고 사건이 미제로 종결되었음에도 범인을 특정하려는 노력에 빅토리아 시대 후기 사회사와 인물사 연구를 곁들인 리퍼학(ripperology)까지 생겨났다. 미제 사건이라는 점이 오히려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한 것이다.
- 이후 여러 차례 만화, 뮤지컬, 영화, 게임 등에서 이야기 소재로 쓰이며 사건 자체가 하나의 산업이 되었다.[33] 지능범이 경찰과 언론을 농락하고 끊임없이 사람을 죽이면서도 결코 잡히지 않는다는 미제 사건을 다루는 고전적인 플롯은 이 사건을 모방한 것이며, 리퍼라는 말 자체가 살인자를 의미하는 고유명사가 되었을 정도다. 또한 동시대와 다음 세기의 살인자들에게 영감을 제공하기까지 했다.
- 잭 더 리퍼 이후, 칼로 해체하거나 찌르는 형태를 주로 보이는 연쇄살인자들은 리퍼형 연쇄살인자로 분류되었다.
- BBC 히스토리 매거진에 의해 '사상 최악의 영국인'으로 선정되었다.
10. 창작물
셜록 홈즈가 당대 제일의 명탐정이고, 잭 더 리퍼가 당대 최악의 연쇄살인범이자 모든 영국인의 추적을 뿌리치고 완전범죄를 성공시킨 자이므로 둘의 대결을 다룬 작품은 매우 많다. 그러나 잭 더 리퍼의 정체를 세상에 공개하는 엔딩은 별로 없으며, 홈즈가 그의 정체를 알아내더라도 어른의 사정으로 입을 닫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실제 역사에서 잭 더 리퍼의 정체를 누구도 알아내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결말이 나올 수밖에 없다.
베어링굴드가 지은 셜록 홈즈 가상 전기인 '베이커가의 셜록 홈즈'에서는 잭 더 리퍼의 정체가 네 개의 서명에 등장한 경찰인 존스 경감이었고, 홈즈와 왓슨이 존스를 붙잡았지만 경찰의 명예를 위해 극비에 붙인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크리스토퍼 플러머가 홈즈 역을, 제임스 메이슨이 왓슨 역을 맡은 1979년 영화 '살인 지령 Murder by decree '에서는 범행의 배후가 왕세손 앨버트 왕자임을 알게 된 셜록 홈즈가 영국 총리와 정치적 타협을 하여 왕자의 정신병원 평생 감금, 총리가 사임하는 조건으로 이 일을 비밀에 부치기로 한것으로 나온다.영화소개 1986년 KBS 명화극장을 통해 국내 방영된 적이 있다.
알란 무어의 그래픽 노블 프롬 헬 역시 앨버트 왕자가 잭 더 리퍼 사건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전제 하에 시작한다. 앨버트 왕자가 신분을 숨기고 서민의 삶을 체험하던 중 사탕가게 여점원과 결혼, 아기까지 낳게 되는데, 이 왕실 추문을 알게 된 4명의 매춘부들이 왕실을 협박하자 빅토리아 여왕의 밀명을 받은 왕실 의사 윌리엄 위시 걸 경이 매춘부들을 살해한다는 내용. 윌리엄 위시 걸은 실제 존재했던 인물로 잭 더 리퍼 사건의 용의자 선상에 올라있다.
이 스토리는 스티븐 나이트의 확인되지 않은 주장에 의거한 것으로, 알란 무어 역시 이 추리를 사실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다.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스토리를 빌려 온 것으로 봐야 한다. 윌리엄 위시 걸은 프리메이슨 사상에 심취해 매춘부를 살해하는 것이 신이 자신에게 준 신성한 사명이라 생각하며, 여성 자체를 증오하는 인물이다. 하술하는 프로파일러의 분석으로 이 왕실 의사는 잭 더 리퍼와는 거리가 먼 인물로 보이나, 실제 잭 더 리퍼는 윌리엄과 마찬가지로 여성을 혐오하는 인물이거나, 여성만 노리는 보잘것 없는 인물이었을 것이다.
Michael Dibdin이 쓴 <The Last Sherlock Holmes Story>[34] 에는 셜록 홈즈 자신이 오랜 스트레스 끝에 광증이 발생해 직접 잭 더 리퍼가 되었고, 진실을 알게 된 왓슨이 친구인 아서 코난 도일에게 자신의 기록을 전달하여 책이 나오게 된 것으로 묘사한 내용도 있다! (코난 도일의 원작에는 왓슨이 직접 책을 펴내는 설정으로, ACD가 직접 등장하진 않는다)[스포일러][35]
1988년 잭 더 리퍼 사건 100주년 기념으로 방영한 <살인광 잭의 숨겨진 정체>라는 방송에서 FBI 유명 프로파일러 존 더글러스[36] 는 다음과 같이 추론했다.
범죄심리학과 유명 교수인 데이비드 캔터 또한 유력 용의자 코즈민스키의 거주지가 살인사건이 발생한 장소를 원으로 그릴 경우 중앙에 위치하다는 사실을 말하며 에런을 지목했다.경찰에게 보낸 편지는 범인이 보낸 것이 아니다. 이런 유형의 인물은 경찰에 노골적으로 도전할 인물이 되지 못한다. 시체를 끔찍하게 훼손했다는 것은, 정신 장애와 섹스 부적응 등의 문제가 결합하여 여자들에게 엄청나게 적개심을 느끼고 있는 인물임을 보여준다. 또한 여자를 전격적으로 해치웠다는 것은 범인이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부적응의 문제가 있음을 보여준다, 이런 점을 보면 말더듬이 등 언어 구사가 부자연스러운 자일 가능성이 크다. 범죄 현장을 살펴보면 창녀의 환경 속에 잘 어울려 창녀의 의심이나 공포를 자아내지 않는 자이다. 외로운 늑대 유형이지 힘센 학살자 유형은 아니다. 밤마다 거리를 배회하며 살해 현장으로 되돌아올 그런 유형이다.
런던 경찰은 이 범인을 이미 조사했을 것이다. 단지 그가 범인인줄 몰랐던 것이다. 살해 후의 시체 훼손 때문에 의학 지식이 있는 자라는 의견이 있지만, 그 훼손 행위는 지극히 원시적이고 야만적이다. 우리는 이미 오래전부터 연쇄살인범이 피살자를 제멋대로 해부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에드 게인, 에드 켐퍼, 제프리 다머, 리처드 마켓 등은 의학 지식이 하나도 없었지만 끔찍하게 시체를 제멋대로 훼손했다.
우리에게 제시된 여러 후보 중 에런 코스민스키가 가장 프로파일에 부합한다. 그러나 코스민스키는 우리에게 제시된 용의자들 중의 한사람일 뿐이며, 그를 잭 더 리퍼라고 확신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하지만 잭 더 리퍼가 코스민스키와 '유사한' 인물이라는 점은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리퍼에 대하여 다룬 여러 미디어는 잭 더 리퍼(동음이의어) 참고할 것.
11. 여담
멍청한 수사로 잭 더 리퍼의 검거 실패에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한 찰스 워런 경은 나중에 보어전쟁에 장군으로서 참가, 스피온 콥 전투에서도 살인자 잭 사건 때와 같은 안일한 작전으로 영국군의 엄청난 참패를 초래한다. 이때 젊은 종군기자 한 사람이 "상황이 안 좋은데 뭐라도 하셔야 되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했는데, 그의 말에 발끈한 워런은 "당신이 상관할 일이 아니오. 이 사람을 당장 끌어내!"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리고 쫓겨난 이 종군기자는 워런 경의 실책을 낱낱이 고발했고, 이로써 워런 경은 '''왕립군사학교가 배출한 최악의 인재'''라는 악명을 얻게 된다.[37]
결국 비난 속에 1905년 한직으로 전출되었다가 1908년 사임하며 은퇴한다. 그 뒤로도 영국 귀족계에서도 비웃음을 당했고, 워런 본인도 이런 비난에 시달리던 걸 신경쓰며 자서전이랍시고 책을 쓰며 자기 변명이나 하다가 보이스카우트 운동에 나서기도 했다. 하지만 기록에 보면, 1921년 친척에게 '거리를 지나가면 사람들은 나를 손가락질하며 비웃는다'고 할 정도로 영국에서 욕을 두고두고 먹었다. 그리고 그 때문인지 1927년 86세로 죽을 때까지 오래오래 살았다. 위키백과 항목을 참조하자.
런던에는 잭 더 리퍼 소굴(Jack the Ripper Haunts)이라는 관광상품이 있다. 잭 더 리퍼가 연쇄살인을 벌인 범행현장을 일일이 걸어서 찾아가는 것이라고 하며, '올해의 관광 가이드 상'을 받은 적도 있다고 한다.
재밌게도 그의 이름이 드라마 셜록 시즌 3 1화에서 언급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