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랄트 슈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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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의 前 축구선수. 골키퍼. '토니 슈마허'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서독 국가 대표팀의 역대 골키퍼 계보 중 한 명이다. 대표팀에서 76경기에 출장하며 유로 80 우승, 82 월드컵 준우승, 86 월드컵 준우승을 차지했다. 현역으로 무려 24년간이나 선수 생활을 했다.[2]
2. 클럽 경력
2.1. 1. FC 쾰른
슈마허는 1972년 1.FC 쾰른에 데뷔하는데 볼프강 오베라트, 볼프강 베버와 함께 팀을 이끌었고 1976-1977 DFB-포칼컵 우승을 차지하고 1977-1978 시즌에는 분데스리가 우승과 DFB-포칼컵 2연패를 달성하며 더블을 차지한다. 그후 슈마허는 1987년까지 쾰른의 주전 골키퍼로 활약하며 DFB-포칼컵 우승 3회, 분데스리가 우승 1회를 안겨주며 쾰른을 떠났다.
2.2. 이후
쾰른을 떠나 터키의 페네르바체 SK로 이적해 리그 우승을 차지한다. 독일 통일 이후 1991년 바이에른 뮌헨에 이적하였으나 후보에 그쳤고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어쨌든 도르트문트는 분데스리가 우승을 차지했고 슈마허는 1996년에 선수 생활을 마쳤다.
3. 국가대표 경력
슈마허의 메이저대회 첫 줄전은 UEFA 유로 1980이었고 카를하인츠 루메니게의 맹활약과 슈마허 본인은 대회기간 3골만 허용하며 조국의 우승에 도움을 주었다.
1982년 스페인 월드컵 서독은 알제리에게 이변의 희생양이 되었으나 오스트리아와 조별리그 최종전에서 1:0으로 앞서나간 후 시간을 끄는 등 논란을 일으키며 가까스로 조별리그를 통과한다.[3] 어쨌든 2차 조별리그에서 서독은 잉글랜드와 스페인을 제치고 미셸 플라티니가 이끄는 프랑스와 마주한다.
이 때 그 유명한 '바티스통 충돌 사건'이 발생하는데 문전에서 득점 기회를 얻은 프랑스 수비수 파트리크 바티스통의 얼굴을 골반으로 가격한 것이다. 이 가격에 의해 바티스통은 턱뼈가 부서지고[4] 치아와 척수 손상까지 입은 의식 불명 상태로 바로 병원으로 실려갔지만, 당시 심판이었던 찰스 코르버르(Charles Corver)는 오히려 '''바티스통의 파울'''이라는 판정을 내렸다! 축구 역사상 최악의 오심으로 알려져 있는 이 사건에서 심판이 제대로 판정했다면 슈마허에게 최소한 옐로 카드가 주어져야 했다. 이에 격앙된 프랑스인들은 그를 "세비야의 도살자(Butcher of Seville)"로 부르기도 했다. 그래도 나중에 슈마허는 바티스통에게 공식적으로 사과했고 바티스통은 이를 받아들였다. 그의 자서전에서 슈마허는 이 일이 있고 바로 바티스통의 상태를 체크하고 싶었지만 프랑스 선수들이 위협을 가해서 그러지 못했다고 서술했다.'''"그때 바티스통이 죽은 줄 알았지..."'''
천신만고 끝에 승부차기로 프랑스를 꺾고 결승전에 진출했으나 이탈리아와의 결승전에서 파올로 로시, 마르코 타르델리, 알레산드로 알토벨리에게 3골을 얻어맞으며 1-3으로 패배해 준우승에 그쳤다.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서 서독은 초반에 좋지 않은 모습을 보여 가까스로 조별리그 2위로 진출하나[5] 토너먼트에서 16강에서 모로코를 격파하고 멕시코를 8강전에서 승부차기 끝에 물리쳤고, 준결승에서 4년 전 '바티스통 사건'과 악연이 있는 프랑스와 재회한다. 바티스통과 재회했으나 충돌은 없었고 미셸 플라티니가 침묵한 프랑스를 꺾고 결승전에 진출한다. 결승전 상대는 디에고 마라도나가 이끄는 아르헨티나였다. 전반전 23분에 호세 루이스 브라운에게 선제골을 먹히며 전반전을 1-0으로 종료했다. 후반전이 되자 역시 아르헨티나의 일방적인 경기로 돌아갔고 결국 55분에 아르헨티나의 호르헤 발다노에게 추가골을 먹혀 2-0이 되었다. 그러나 서독은 교체출전한 루디 푈러가 카를하인츠 루메니게의 골을 어시스트하더니 이후 루디 푈러 자신이 직접 골을 넣으며 2:2 동점까지 따라잡으며 마라도나를 비롯한 아르헨티나 선수들 전체를 당황하게 만든다.[6] 그러나 평정심을 되찾은 마라도나의 킬패스를 받은 호르헤 부루차가에게 결승골을 허용하며 결국 3:2로 패배하여 아르헨티나에게 우승을 내주게된다. 그래도 슈마허는 대회 실버볼을 차지하기는 했다.
1979년부터 1986년까지 서독 축구 국가대표팀에서 76경기에 출장하였고, 1980년대 서독 축구 국가대표팀의 명 골키퍼로 활약하며 팀의 UEFA 유로 1980 우승, 1982 FIFA 월드컵 스페인·1986 FIFA 월드컵 멕시코 준우승을 이끌어냈다.
하지만 1987년 당시 발간된 자서전에서 독일 대표팀 동료들을 비판하는 내용이 알려져 그후로 국가대표팀은 물론이고 쾰른에서 떠났다. 하지만 그의 기량 자체가 하락세에 들어선데다가 같은 소속팀에서 영건 보도 일그너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4. 지도자 경력
은퇴한 뒤에는 1998년 포르투나 쾰른의 감독을 맡았으나, 성적 부진으로 하프 타임에 코치와 함께 해임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하였다.
[1] 토니 슈마허로 유명하기도 하다. 토니는 미들 네임인 안톤의 애칭이다.[2] 물론 커리어 후반에는 터키 리그도 갔었고, 말년 바이에른 뮌헨과 도르트문트 시절은 거의 후보였다.[3] 이 사건때문에 마침내 UEFA 유로 1984를 시작으로 각종 국제 대회에서 조별리그의 마지막 경기는 승부조작을 막기 위해서 모든 팀이 동시간대에 경기를 시작하도록 제도가 바뀌게 된다.[4] 바티스통처럼 턱뼈가 골절되면, 뇌진탕 부상을 당할 위험이 굉장히 크다. 복싱선수들이 턱을 보호하는 훈련을 하는 이유이다.[5] 쇠락해가던 우루과이와 무승부를 기록하고 첫 출전한 덴마크한테 2:0으로 박살났다.[6] 여담으로 서독의 2골은 안드레아스 브레메의 코너킥으로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