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르헤 부루차가

 

'''호르헤 부루차가의 수상 이력'''

'''1983 코파 아메리카 득점왕'''
'''호르헤 부루차가'''

'''FIFA 월드컵 우승 멤버'''
'''1986'''

''' 아르헨티나의 축구감독 '''
''' 이름 '''
'''호르헤 부루차가'''
'''Jorge Burruchaga'''
''' 본명 '''
호르헤 루이스 부루차가[1][2]
Jorge Luis Burruchaga
''' 출생 '''
1962년 10월 9일 (62세) /
아르헨티나 엔트레리오스주 괄레과이
''' 국적 '''
아르헨티나
''' 신체 '''
176cm | 체중 70kg[3]
''' 직업 '''
축구선수(미드필더[4] / 은퇴)
축구감독
축구행정가
''' 소속 '''
''' 선수 '''
아르세날 FC(1979~1981)[5]
CA 인데펜디엔테(1982~1985)
FC 낭트(1985~1992)
발랑시엔 FC(1992~1993)
CA 인데펜디엔테(1995~1998)
''' 감독 '''
아르세날 FC(2002~2005)
에스투디안테스 라 플라타(2005~2006)
CA 인데펜디엔테(2006~2007)
CA 반필드(2008~2009)
아르세날 FC(2009~2010)
클루브 리베르타드(2011~2012)
아틀레티코 데 라파엘라(2012~2014)
아틀레티코 데 라파엘라(2016)
CA 사르미엔토(2016)
''' 기타 '''
아르헨티나 대표팀(2017~2019 / 단장)
''' 국가대표 '''
59경기 13골(아르헨티나 / 1983~1990)
'''정보 더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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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별명 '''
'''노새(El Burru)'''
'''SNS'''


1. 개요
2. 선수 경력
3. 플레이 스타일
4. 감독 경력
5. 기타 경력
6.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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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르헨티나축구선수 출신 감독, 축구행정가. 2017년부터 2019년까지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 단장을 맡았다.
아르헨티나 축구계 최고의 레전드 중 한명으로 1986년 멕시코 월드컵의 우승멤버 중 한명이며, 디에고 마라도나, 호르헤 발다노와 함께 1986년 멕시코 월드컵을 정복한 삼각편대의 일원이다. 유럽 빅클럽에서 활약한 선수가 아니라서 국가대표 동료 디에고 마라도나호르헤 발다노와 달리 국내에 대단히 잘 알려진 선수는 아니지만[6] 1986년 멕시코 월드컵의 결승전에서 마라도나의 패스를 받아 넣은 결승골로 축구사에 이름을 남겼다.

2. 선수 경력


부루차가는 1962년 괄레과이[7]에서 태어났고, 아르헨티나의 여느 어린 소년들이 그렇듯 축구에 빠져있었고, 아르세날의 유소년 팀에서 축구를 하며 성장했다. 그래도 나름 아르세날에서 유망주로써 성장한 듯 17세의 나이에 프로데뷔를 하게 된다. 당시 2부리그에 있던 아르세날이지만 성장 가능성을 눈여겨 본 CA 인데펜디엔테로 이적하게 된다.

2.1. CA 인데펜디엔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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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데펜디엔테 시절'''
인데펜디엔테는 누구나 알아주는 아르헨티나 명문팀이지만 1972년, 1973년, 1974년, 1975년 4연속으로 코파 리베르타도레스[8]를 지배하던 최고 전성기 이후는 실력들은 좋은데 성적은 잘 안나오던 좀 시들하던 팀이었다.[9]
그래도 부자는 망해도 3대는 간다 그랬던가.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 우승에 기여한 호르헤 올긴, 오스카르 알베르토 오르티스. 미겔 앙헬 오비에도등 훌륭한 멤버들이 가득한 팀이었고, 쟁쟁한 선배들 사이에 부루차가라는 신예가 자리하게 되었다.
부루차가는 1982년에서 1985년. 3년간 146경기 53골을 집어넣으며 인데펜디엔테를 대표하는 선수가 되었고, 1983년에는 전기리그 우승을 이끌며 인데펜디엔테의 새로운 전성기를 알렸다.
1983년에 워낙에 활약이 뛰어나다보니 코파 아메리카에도 불려갔고, 3골로 득점왕을 차지한다.[10][11]
그 다음 해. 1984년도에는 남미의 챔피언스리그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서 그야말로 팀을 전두지휘하는 활약. 결승전에서 결승골을 기록 하며 팀에게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우승컵을 안겨주고 본인은 6골로 득점왕을 거머쥐었다. 이후 이어진 인터컨티넨탈 컵에서 리버풀을 꺾고 우승을 차지하는데 공헌하며, 인데펜디엔테의 짧은 전성기를 함께했다.
소속 클럽, 국가대표에서 모두 훌륭한 활약을 보여주다보니 유럽에서도 그에게 관심을 가졌고, 프랑스 리그의 FC 낭트가 그를 영입하게 된다.[12]

2.2. 프랑스 리그와 말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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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C 낭트 시절'''
인데펜디엔테에서 프랑스로 간 이후는 사실 트로피만 봐선 선수경력은 오히려 퇴보했다고 할 수도 있다. 아르헨티나에서의 전성기와, 후술할 월드컵에서의 빛나던 모습은 프랑스 리그에선 그다지 보여주지 못했다. 본인의 문제는 아니고 팀 때문. 부루차가는 1985년부터 1992년까지 7년간 140경기 27골을 넣고, 85-86 시즌 '리그앙 최우수 외국인 상'을 수상하는 등 꾸준했지만 소속팀 낭트는 1985-1986 준우승 이후 우승권과 급격하게 멀어진 그저그런 팀으로 전락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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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랑시엔 FC 시절'''
1992년에 발랑시엔 FC로 이적하였고 1시즌간 32경기 10골을 넣게 되는데, 발랑시엔으로 이적할 때, 혹은 이적한 이후 당시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가 이적제의를 했지만 본인이 거절했다는 후일담이 있다.
부루차가는 여러모로 마르세유와 엮여있는데, 전성기였던 마르세유의 몰락을 촉발한 승부조작 사건에 부루차가가 연루되어 있다. 자세한 내용은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의 역사 항목을 잘 읽어보면 알수 있다. 결과적으로 돈을 받고 승부조작을 한 혐의가 입증되지 않아 무죄 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개인으로는 무죄였으나 발랑시엔은 3부로 강등. 다음해에는 자격 취소로 4부로 강등되며 부루차가는 발랑시엔을 떠나야만 했다. 95년에 친정팀 인데펜디엔테로 돌아와 3년간 더 뛰고 89경기 19골을 넣으며 수페르코파 수다메리카나 우승도 1회 하는 등. 빛나는 말년을 보내고 은퇴하게 된다.

2.3. 국가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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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루차가는 1983년의 활약으로 코파 아메리카 엔트리에 들게 되었고, 상술했듯 코파 아메리카에서 3골을 득점하며 득점왕을 차지한다. 비록 우승은 하지 못했지만 부루차가라는 이름을 전 세계에 알리게 된 계기가 된, 센세이션한 국가대표 데뷔였다.
이후 국제대회는 없었기에 국가대표로써 출전하며 경력을 이어가던 중. 드디어 부루차가의 선수 커리어에 있어 최고의 순간이 다가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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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히오 바티스타
네스토르 클라우센
오스카 가레
네리 품피도(GK)
루이스 이슬라
오스카 루게리
디에고 마라도나

호르헤 부루차가
리카르도 지우스티

엑토르 엔리케
호르헤 발다노

'''1986년 멕시코 월드컵'''
월드컵에서 선수가 기용되는 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부루차가가 기용된 이유는 개인의 실력도 뛰어났지만 공격과 미드필더진에서 모두 활동하는 폭 넓은 움직임과 현란한 테크닉, 마라도나가 공을 가지고 있지 않을 때에도 발다노와 같은 최전방 공격수에게 공을 연결할 수 있는 패스 능력, 그리고 결정적으로 '''마라도나와의 호흡'''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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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도의 아르헨티나의 엔트리인데, 예전의 포메이션까지 완벽히 구성된 내용은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마라도나와 발다노, 부루차가는 삼각편대를 이루며 움직였다.
단순히 이야기 하면 마라도나가 전진하면 부루차가가 패스하고, 부루차가가 전진하면 마라도나가 패스하고 하는 형식이었는데 타겟 플레이에 능한 발다노에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불리는 마라도나와, 결정력과 테크닉은 두말하면 서러운 부루차가가 그 뒤에 버티고 있으니 공격력 하나는 최고였다.
차범근[13], 박창선, 허정무, 정용환, 최순호, 조광래, 박경훈, 변병주, 김주성, 김종부 등. 역대급 엔트리를 가졌던 대한민국도 선전했지만 이 삼각편대에 무너졌고, 조별리그 불가리아 전에서 부루차가는 팀의 두번째 골을 넣어 2:0 승리에 공헌했다.
엔조 프란체스콜리가 이끌었던 우루과이는 골키퍼와 수비수들의 엄청난 선방[14]과 온갖 기회들을 발다노가 신나게 날려댄 덕분에 결과만 1:0이었다 뿐이지 마라도나와 부루차가에게 그야말로 관광을 당했다.[15]
잉글랜드는 선전하기는 했지만 마라도나에게 축구사에서 가장 유명한 2골을 먹으며 패배했으며, 1986년 멕시코 월드컵의 신인상을 수상한 엔조 시포가 이끈 벨기에 역시 4강전인 만큼 뛰어난 경기력을 보여줬지만 펠레 다음으로 축구의 신 포스를 뽐낸 마라도나에게만 2골을 얻어맞으며 탈락한다.
어째 부루차가 이야기는 별로 없고 마라도나 이야기 밖에 없는 것 같지만 실제로 1986년 멕시코 월드컵은 '''마라도나의, 마라도나에 의한, 마라도나를 위한 월드컵'''이었다. 발다노, 부루차가 모두 뛰어난 선수지만 진짜 그 당시에는 마라도나를 위한 조연처럼 보였다.
하지만 부루차가는 '''바로 다음 경기의 주인공이 된다'''.
1986년 월드컵 내내 마라도나가 주인공이었지만 결승전은 달랐다.
부루차가는 전반전 23분, 수비수 브라운의 헤딩골을 만들어내며 어시스트를 기록했고, 이후 마라도나와 콤비 플레이에 이은 드리블로 파울을 유도하며 좋은 위치에서 프리킥도 얻어낸다. 후반전 엔리케의 스루패스에 이은 발다노의 골 때에는 혼자서 수비수들을 달고서 반대편으로 발다노가 침투할 공간을 확보해 낸다.
그래도 역시 독일은 독일이라 2골로 앞서다가 안드레아스 브레메코너킥을 기점으로 카를하인츠 루메니게루디 푈러의 골로 동점이 되기는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경기 내내 대단한 활약을 하지 못한 디에고 마라도나[16][17] 수비수 4명 사이를 뚫고 나오는 어마어마한 킬패스를 찔러넣고, 골 결정력하면 두 말 하면 섭한 부루차가는 그대로 슛을 때려넣고 아르헨티나의 월드컵 2번째 우승을 확정 짓는 결승골이 된다. 그야말로 '''커리어 최고의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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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 우승을 자축하는 부루차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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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도 출전했으나 4년 전 삼각편대의 일원인 호르헤 발다노는 은퇴했고 아르헨티나는 개막전부터 카메룬에게 패하는 이변의 희생양이 되는 등 4년 전보다 전력이 약해졌다.
그러나 부루차가는 조별리그 2차전 소련과의 경기에서 두번째 골을 기록했고, 16강 브라질 전에서 후반 중반 부루차가의 중거리 슛을 시작으로 아르헨티나의 경기력이 서서히 살아났고 특히 전반에 불안한 모습을 보인 아르헨티나 수비수인 로제리는 후반 중반을 이 후로 물레르와 카레카를 잘 막아내면서 점점 브라질을 초조하게 만들었으며 결국 마라도나의 킬 패스를 받은 카니자의 결승골로 결국 8강에 진출한다.
그리고 8강 유고슬라비아승부차기에서 두 번째 키커로 나와 골을 성공시켰고, 4강 이탈리아승부차기에서도 두 번째 키커로 나와 골을 성공시켰다. 어쨌든 아르헨티나는 마라도나[18], 세르히오 고이코체아,클라우디오 카니자가 하드캐리하며 가까스로 결승전에 진출했다.
부루차가는 결승전에도 출전했으나 아르헨티나는 게르만 삼총사가 이끄는 서독에게 1:0으로 패했다.[19] 이후 부루차가는 국가대표팀에서 은퇴해 화려했던 국대 생활을 마감했다.

3. 플레이 스타일


1980년대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에 없어서는 안되었던 공격의 엔진으로 간결한 원터치플레이와 번뜩이는 센스를 자랑했으며, 드리블 돌파는 물론 오프 더 볼 능력 역시 뛰어나 당시 팀의 에이스였던 디에고 마라도나에게 집중되었던 상대 수비를 효과적으로 분산시켰다.

4. 감독 경력


2002년부터 지도자 생활을 시작, 자신의 친정팀인 아르세날의 감독을 맡았으며, 이후 에스투디안테스 라 플라타, 인데펜디엔테, CA 반필드 등에서 지도자 생활을 하였다.클루브 리베르타드[20]에서의 경력을 제외하면 대부분 아르헨티나에서 경력을 이어나간다.

5. 기타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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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부터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 단장을 맡았다가 2019년에 단장을 그만두었다.

6. 여담


  • 첫번째 부인인 로라 멘도사는 1995년사망했으며, 파비올라 폴라 로시라는 여성과 재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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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 아들 로만 부루차가는 현재 테니스 선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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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들 마우로 부루차가 역시 자신처럼 축구선수이며 현재 AC 키에보베로나에서 뛰고있다.
  • 2018년 러시아 월드컵에서 “우선 4강에 올라가야 한다. 7경기를 치를 수 있는 위치다. 4년 전 준우승은 과거가 됐다. 지금에 집중해야 한다. 복수라고 말하지는 않겠다. 다만, 우리는 우승의 새 기회를 얻었다”라고 아르헨티나의 월드컵 우승에 대한 열의를 내비쳤다. 그런데 정작 아르헨티나는 16강에서 프랑스에게 패해 탈락했다.
[1] 바스크어에서 유래한 성씨로, 원래 형태인 Burrutxaga에서 변형된 형태이다.[2] '부르차가'로 아는 이들도 있으나 틀린 표기이다. rr다음에 u모음이 있고, 스페인어에서는 이 모음을 명확하게 'ㅜ'로 발음한다. 마찬가지로 Uruguay도 '우르과이'가 아니라 '우루과이'이다. [3] 170cm 중반이 넘는건 확실한데 180cm, 176cm, 178cm 등 이야기가 많이 다르다.[4] 공격형 미드필더[5] 연고지의 이름을 따서 흔히 아르세날 데 사란디로 알려져 있다.[6]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코파 아메리카 득점왕도 할 만큼 실력은 확실했다.[7] 부에노스 아이레스주 바로 위에 있는 엔트레리오스주에 있는 도시이다. 우루과이와 인접한 지역이다.[8] 남미판 챔스로 인데펜디엔테가 총 7회 우승으로 최다 우승팀이다.[9] 한편으로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 에서 포텐을 만개하며 리그에서 맹활약하던 디에고 마라도나의 존재가 있기는 했으나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는 84, 85년에서야 리그 우승을 얻은, 그러니까 당시는 별 볼일 없는 팀이었다. 요약하자면 마라도나가 쩔어서 우승을 저지하고 뭐 그런게 아니라 인데펜디엔테가 한물 간 시기였다는 이야기다.[10] 정작 우승은 우루과이가 했다.[11] 운이 많이 따른 득점왕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득점왕으로 이름을 올렸다.[12] 지금에야 별 볼일 없는 리그1 팀이 된 낭트지만 1982-1983 시즌엔 우승을 하기도 하는 등. 1980년대 중반 당시엔 치열하게 우승경쟁을 하던 팀이었다.[13] 당시 33살로 은퇴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였지만.[14] 심지어 골라인에서 헤딩으로 걷어낸 것도 있다![15] 유일한 결승골을 만들어낸 킬 패스가 부루차가에게서 나왔다.[16] 대단한 활약을 하지 못했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마라도나를 기준으로 해서다.[17] 독일 중원에 있던 건 마라도나 본인이 최고의 라이벌로 인정한 로타어 마테우스펠릭스 마가트였다. 이전에 상대하던 팀들과 중원의 무게감부터가 다르니 마라도나가 이전처럼 최고의 활약을 펼치기에는 위험 부담이 따랐다. 덤으로 골키퍼하랄트 슈마허레프트백안드레아스 브레메였으니... 그야말로 희대의 괴수 대결전이라 하기에 충분하다.[18] 사실 마라도나도 기량이 하락한 상태였다.[19] 후반 43분에 서독에게 페널티 킥을 허용했고 안드레아스 브레메가 결승골을 넣었다.[20] 파라과이 프리메라 디비시온의 팀.[21] 가운데가 로만 부루차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