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틴 전투

 


'''하틴 전투'''
영어: battle of Hattin
아랍어: معركة حطين
[image]
'''시기'''
서기 1187년 7월 4일
'''장소'''
이스라엘 갈릴리 지방 티베리아스 인근
'''교전국'''
[image] 예루살렘 왕국
[image] 트리폴리 백국
[image] 안티오키아 공국
[image] 성전 기사단
[image] 구호기사단
[image] 아이유브 왕조
'''지휘관'''
[image] 기 드 뤼지냥
[image] 애므리 드 뤼지냥
[image] 레몽 3세
[image] 험프리 4세
[image] 발리앙 디블랭
[image] 제라르 드 리드포르
[image] 가르니에 드 나블루스
[image] 르노 드 시돈
[image] 조슬랭 3세
[image] 르노 드 샤티용
[image] '''살라흐 앗 딘'''
[image] 알 무자파르 우마르
[image] 알 아딜 1세
[image] 알 아프달 이븐 살라흐 앗 딘
'''병력'''
총원: 18,000 ~ 20,000명
기사: 1,200기
맨앳암즈: 3,000명
투르크 기병: 500기
보병 15,000명
총원: 20,000 ~ 40,000명
기병: 12,000명
'''피해'''
전멸
불명
'''결과'''
아이유브 왕조예루살렘 입성.
1. 개요
2. 전투 배경
2.1. 아이유브 제국의 성립
2.2. 예루살렘 왕국의 분열
3. 진행
3.1. 티베리아스 포위
3.2. 양측의 전력
3.3. 전투 경과
4. 결과 및 의의
5. 매체에서의 등장

[clearfix]

1. 개요


Battle of Hattin. 1187년 7월 4일에 벌어진 십자군 예루살렘 왕국아이유브 왕조의 결전으로, 아이유브 왕조가 예루살렘 왕국의 가용 병력 대부분을 궤멸시키는 대승을 거두었다. 그 결과 예루살렘을 포함한 대다수의 십자군 도시/요새들이 점령되었고, 이 소식이 유럽으로 전해져 제3차 십자군 원정을 촉발하였다.
히틴(Hittin) 혹은 하틴의 뿔 전투라고도 하는데, 히틴은 전투가 벌어진 지역의 현지어 이름이며, 하틴의 뿔 전투라는 이름은 전장 근처에서 가장 눈에 띄는 두 개의 언덕을 하틴의 뿔이라고 부른 데서 유래했다.

2. 전투 배경



2.1. 아이유브 제국의 성립


1174년, 장기 왕조의 누르 앗 딘의 측근 살라흐 앗 딘이집트파티마 왕조를 멸망시켰다. 이는 곧 레반트 지역을 뒤흔든 정치적 격변의 시작이었으며 곧 노쇠한 누르 앗 딘이 죽자 그의 세력을 흡수하고 시리아까지 손에 넣으면서 예루살렘 왕국은 살라흐 앗 딘의 거대한 세력권 아래 포위된다.
1177년, 기세등등하던 살라흐 앗 딘의 군대는 몽기사르 전투에서 젊고 유능한 예루살렘의 보두앵 4세에게 크게 격파당해 그 세가 다소 주춤해졌지만 보두앵 4세의 건강 문제와 예루살렘 왕국의 근본적인 국력 부족 문제로 살라흐 앗 딘은 휴전협정을 맺는 선에서 전쟁을 멈출 수 있었고 휴전이 성립된 뒤 알레포와 모술에 웅거하던 장기 왕조의 잔당을 처리하며 오히려 세를 더욱 불렸다.
[image]
당시 지도, 노란색이 살라흐 앗 딘이 차지한 영역으로 동쪽으로는 압바스 왕조의 영역과 접하지만 살라흐 앗 딘은 칼리파를 지지하며 동맹 관계를 구축했고, 서쪽으로는 무와히드 왕조와 접하지만 이들과 충돌을 피하며 불필요한 전쟁을 벌이지 않았다.[1] 결국 예루살렘 왕국을 포함한 십자군 국가들은 그 어떤 우호세력도 없이 '통일된' 무슬림 세력과 대치하게 되었다.

2.2. 예루살렘 왕국의 분열


결국 예루살렘 왕국은 젊고 유능한 보두앵 4세에게 국가의 운명이 걸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는데, 보두앵 4세가 문둥병에 걸리며 왕국의 운명에 큰 위기를 맞기 시작한다. 보두앵 4세는 지금 같은 정세에서 살라흐 앗 딘과 전쟁을 벌이는 것은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몽기사르 전투에서 승전한 이후 살라흐 앗 딘과 휴전협정을 맺어둔 것이나 전(前) 안티오크 공작이자 케락의 영주였던 샤티용의 르노가 국왕이 맺은 휴전협정도 무시한 채 공공연하게 무슬림들을 공격하였고 보두앵 4세는 이런 자살행위를 제어하지 못한 채 1185년 병사했다. 왕의 누이 시빌라의 어린 아들 보두앵 5세가 왕위를 이었지만, 그 역시 1년도 안 돼 죽었고 시빌라는 자기 남편이었던 기 드 뤼지냥에게 왕위를 넘겨주었다.
이는 예루살렘 궁정에 큰 분열을 가져왔다. 르노나 리드포르의 제라르 같은 성전기사단장은 새 왕을 지지했던 반면, 보두앵 5세의 섭정이기도 했던 트리폴리 백작 레몽 3세를 비롯한 다른 귀족들은 새 왕에게 노골적인 반감을 드러냈다. 이들의 관계는 서로 무력 충돌까지 갈 뻔할 정도로 험악해졌으나, 이벨린의 발리앙이 중재하여 내전까지는 피할 수 있었다.
그런데 레몽 3세가 살라흐 앗 딘과 개인적으로 휴전 협정을 체결하면서 문제가 생겼다. 살라흐 앗 딘은 우호의 표시로 레몽의 영토에 군대가 지나다닐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고 레몽은 이를 수용했는데, 마침 기 왕과 레몽 3세의 화해를 주선하기 위해 그의 영토로 가던 성전기사단/구호기사단 지도부와 무슬림 군대가 마주친 것이다. 기사단 지도부는 압도적인 숫적 차이를 이기지 못하여 성전기사단장 제라르 외 3인을 빼고는 몰살당했고, 이 사건으로 인해 전쟁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되자 왕국에서 홀로 고립될 처지에 놓인 레몽은 국왕에게 사죄하고 절대복종을 서약하였다. 반대 세력이 완전히 없어진 기 왕은 살라흐 앗 딘을 공격하기 위해 전군을 소집했다. 이때가 1187년 7월이다.

3. 진행



12분 50초부터

3.1. 티베리아스 포위


예루살렘 왕국의 군대에 소집되자 살라흐 앗 딘 역시 자신의 군대를 불러모았다. 살라흐 앗 딘은 속전속결을 원했는데, 왜냐하면 그의 제국은 중앙집권 국가라기보다는 살라흐 앗 딘 개인에게 복종하는 여러 에미르들의 연합체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당장은 살라흐 앗 딘의 세력과 지하드라는 대의명분이 그들을 붙잡아둘 수 있지만 전쟁이 장기화되고 가을의 수확 시기가 다가오면 이탈자가 속출할 것이 우려되었다.[2] 따라서 살라흐 앗 딘은 더운 여름이라 수원(水原)을 끼고 버티고 있는 예루살렘 군대를 전장으로 끌어내야 했다.
그렇기에 살라흐 앗 딘은 우선 레몽의 영지 티베리아스를 공격하였다. 티베리아스에는 방어병력이 얼마 없어 성 함락은 손쉬운 일이었으나 예루살렘 왕국군을 유인해 낼 필요가 있었기에 살라흐 앗 딘은 티베리아스의 외성을 간단하게 함락한 뒤에서 짐짓 시간을 끌면서 내성을 포위하고 공격의 기세를 다소 늦추었다.
이 소식은 곧 예루살렘 왕국에도 도달했다. 7월 2일, 티베리아스의 영주인 레몽은 내성 안에 자신의 부인인 에시바 백작부인이 남아 있다는 점도 알고 있었으나 살라흐 앗 딘이 왕국군을 끌어내기 위해 계략을 꾸민 것을 간파하여 설령 자신의 영지와 아내를 잃는 한이 있더라도 왕국을 위기에 빠뜨릴 수 없다며 티베리아스 구원에 반대하였다. 그러나 르노는 레몽이 비겁한 겁쟁이라며 비웃으며[3] 당장 티베리아스 구원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결국 르노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예루살렘 왕국의 전군이 출병하게 된다. 살라흐 앗 딘의 계획이 성공한 것이다.

3.2. 양측의 전력


예루살렘 왕국은 동원 가능한 전군을 동원했으며, 성전기사단과 구호기사단도 대부분 가담했다. 그 병력은 1,200명의 중무장한 기사, 그보다 많은 수의 기병, 1만 명 이상의 왕국 보병, 주로 이탈리아 출신으로 이루어진 석궁병들, 튀르크인들을 포함한 용병 등을 합하여 대략 2만~2만 5천명 정도였다. 왕인 뤼지냥의 기를 포함하여 트리폴리의 레몽, 샤티용의 르노, 리드포르의 제라르, 이블랭의 발리앙 등 다수의 주요 귀족들이 참전했다.
살라흐 앗 딘의 군대 역시 2만에서 3만 명 사이였다. 정확한 병력 구성은 알 수 없으나 상당수가 기병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보병은 주로 이집트 군대가 많았다. 기병 부대의 대부분은 휘하 아미르들이 모아 온 튀르크, 아랍, 베두인 경기병/궁기병이었지만, 쿠르드인과 튀르크인들로 구성된 살라흐 앗 딘 직속의 중장기병들도 있었다.

3.3. 전투 경과


7월 3일 예루살렘 군대가 수원이 있는 세포리아(아랍어로는 사푸리야)를 출발했다. 그들은 진지를 나서자마자 살라흐 앗 딘이 보낸 궁기병들의 지속적인 공격을 받았다. 예루살렘 군대는 기사, 보병 할 것 없이 큰 방패와 갑옷으로 중무장했으므로 궁기병들의 공격에 큰 피해를 받지는 않았지만 진격 속도가 다소 늦어져버렸고 한 낮의 사막에서 내려쬐는 강렬한 햇빛은 곧 이들의 체력을 빠르게 소신시켰다.
예루살렘 군대는 필사적으로 진군하여 반나절 동안 약 9.6km를 지나 우물을 찾아 잠시 휴식을 취하였다. 티베리아스까지는 약 14.4km가 남은 상황이었으나 지친 이들로써는 가혹한 행군이 될 것이나 구원이 시급한 상황이라 결국 진군을 개시하였고 아니나다를까 무슬림 기병들의 공격을 받아 티베리아스에 도달하지 못하고 저녁쯔음 '하틴의 뿔'이라 불리는 언덕 근처에 진지를 차릴 수밖에 없었다.
[image]
예루살렘 군대는 이미 체력을 크게 소모하여 모두가 지쳐있고 식수가 부족하여 갈증까지 심해진 상황이었다. 기습 위협까지 시달리며 겨우 밤을 보내자 무슬림 군대는 불을 지펴 연기를 날려보내 매캐한 연기까지 진지를 덮치기 시작했고 아침을 맞은 예루살렘 병사들의 눈 앞에는 갈릴리 호수가 어른거렸지만 이미 살라흐 앗 딘의 군대가 사방을 포위하고 있었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예루살렘 군대는 전투 대형을 갖추고 공격을 시작했으나 호수에 당도하기 위한 기사들의 절망적인 돌격은 오히려 보병대와 기병대 사이에 빈틈이 생기며 각 부대가 분리되는 결과를 낳았고 곧 몰려든 무슬림 군대에 의해 각개격파되었고 국왕의 근위대는 최후까지 적을 몰아붙이며 분전하였으나 결국 모두 궤멸되었다.

4. 결과 및 의의


[image]
살라흐 앗 딘에게 항복한 기 드 뤼지냥.
약 2만 명이 넘던 예루살렘 왕국의 군대는 전멸하였다. 약 3천 명이 살아남았으나 국왕 기 드 뤼지냥과 르노, 성전기사단장 제라르를 비롯한 다수의 귀족과 지휘관이 사로잡혔고 레몽과 발리앙은 전투 도중 포위망을 벗어나 각각 트리폴리와 예루살렘으로 도주하였다.
살라흐 앗 딘의 군대가 입은 피해는 미미했다. 붙잡힌 국왕 기 드 뤼지냥은 다마스쿠스에 잠시 압송되었다가 훗날 석방되었고 과거 휴전협정을 어기며 무슬림들을 살상하던 르노 드 샤티용은 살라흐 앗 딘에게 손수 처형당했으며 나머지 귀족들은 모두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났다.
이후 레몽의 영지인 트리폴리와 결사 항전으로 버텨낸 티레 등을 제외한 예루살렘 왕국의 거의 모든 영토가 살라흐 앗 딘에게 항복하거나 점령당했다. 발리앙이 지키던 예루살렘도 협상 끝에 수비군 및 민간인들을 무사히 보내주는 대가로 살라흐 앗딘이 점령했다. 유럽에도 그 소식이 알려져 제3차 십자군 원정이 벌어진다.

5. 매체에서의 등장


유명한 역사 RTS 게임인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 에이지 오브 킹살라흐 앗 딘 캠페인의 테마이며 3번 미션으로 구현되었다. 여기서만 등장하는 특수지형인 거대한 바위산 두 개가 있는데, 별 효과는 없지만 하틴의 뿔이라는 상징적인 지형을 나타내기 위해 일부러 만든 것. 한국어 버전에서는 하틴의 뿔'''나팔'''이라고 오역되었고 결정판에서는 뿔로 올바르게 수정되었다.

▲영화 킹덤 오브 헤븐에서의 히틴 전투.[4]
킹덤 오브 헤븐에서는 보급 부족과 강행군 상태로 싸우다 전멸한 걸로 압축했다. 주인공 발리앙은 '''"군대는 물이 있는 곳에 있어야 한다."'''며 출병을 경고했으나 와 주교들은 하느님이 도와주실 것이라는 대책없는 소리를 늘어놓으며 출병을 강행하였고 그 결과는 윗 동영상대로 적과 싸우기도 전에 탈진해 쓰러져가는 병사들의 모습에서 알 수 있다.
패러독스 인터랙티브의 중세 배경 대전략 게임 크루세이더 킹즈 2의 BGM중 하나로 이 전투를 언급하는 곡이 있다. 곡명은 하틴의 뿔, 그리고 그 뒤이다. 격렬한 하틴의 뿔 전투를 묘사하는 관현악부가 전반에 나오며, 이 주제부가 끝난 뒤부터는 전사자들과 성지의 상실을 애도하는 듯한 성가풍의 곡이 뒤를 잇는, 또렷한 묘사가 일품인 명곡이다. 이 곡에서 계속 나오는 코러스는 'Non nobis, Domine, non nobis, sed nomine tuo da gloriam(주님, 저희가 아닌, 저희가 아닌, 당신의 이름에 영광을)'이라는 라틴어 찬송가 구절인데 성당기사단이 잘 썼다.

[1] 시리아의 아사신파나 모술을 거점으로 버텼던 장기 왕조의 잔당들처럼 노골적으로 살라흐 앗 딘에 적대하는 세력들도 있었으나 그 세력이 미약했다.[2] 특히 원정에 대한 비용은 모두 에미르들이 부담해야 했기에 장거리 원정을 할수록 부담이 커지다보니 에미르들은 원정을 싫어했다. 1188년에도 살리딘은 시리아 북부를 점령한 뒤 안티오케이아까지 정복하려 했지만 에미르들의 반대로 포기해야 했다.[3] 레몽이 "지금까지 내가 본 어떠한 이슬람 군대도 살라흐 앗 딘이 이끄는 군대보다 그 수가 많지도, 강하지도 않소. 그러니 지금은 나가서 싸울 때가 아니오."라고 반대하자, 르노는 "지금 당신은 겁을 먹었군. 그들의 수가 많다고 하는데, 나는 이렇게 묻고 싶소. 불이 타는데 나무의 양이 무슨 상관인가, 나무가 많다고 불이 타지 못하는가."라고 조롱했다. 출처: 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 아민 말루프 저/ 김미선 역/ 아침이슬[4] 단 전투 장면은 생략되었고 전투 초반부와 전투 종료 후 풍경만 나온다. 아무래도 원래 러닝타임이 긴 영화다보니 커트해낸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