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센의 공녀 빅토리아
1. 소개
헤센 대공국 대공 루트비히 4세와 영국의 앨리스 공주[1] 의 2남 5녀중 첫째이다.
2. 생애
2.1. 어린 시절
1863년 4월 5일에 윈저성에서 외할머니 빅토리아 여왕이 보는 앞에서 출생했다. 빅토리아는 여왕의 총애를 많이 받았는데, 빅토리아가 영국에서 최초로 태어난 손녀였으며, 여왕의 이름을 땄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2] 어머니 앨리스 공주는 혼인한 이후에도 생활 방식은 영국식을 고수했고 교육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빅토리아는 어린 시절부터 책 읽는것을 좋아했으며, 여동생 엘리자베트와 친밀하게 지냈다.
행복해 보였던 빅토리아의 유년 시절은 1878년 끝이 난다. 대공가를 덮친 디프테리아는 빅토리아의 바로 아래 동생인 엘리자베트를 제외한 모든 가족들에게 마수를 벌렸다. 결국 투병하던 막내 여동생 마리는 11월 16일에 사망한다. 어머니 앨리스 공주는 그 전부터 혈우병 환자였던 차남 프리드리히의 죽음으로 깊은 우울감을 느끼고 있었고, 가족의 병간호를 하다 자신도 디프테리아에 전염되어 아버지의 기일인 12월 14일에 세상을 떠나고 만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대공국의 가장 지위 높은 여성이 된 빅토리아에게는 아버지를 보좌해 궁정을 이끌 책무가 있었고, 동생을 돌보는 것까지 빅토리아의 몫이 되었다.[3] 빅토리아 여왕은 이런 외손녀를 위해 자주 편지로 조언을 해 주었고, 이는 여왕과 빅토리아의 관계가 조손관계보다 모녀관계에 가깝게 되는 계기가 된다. 이러한 영향으로 빅토리아와 여동생들은 자신을 정서적으로 영국인이라고 느끼게 된다.
2.2. 연애 결혼
빅토리아는 5촌 관계인 바텐베르크의 루트비히와 결혼한다. 할머니 빅토리아 여왕과 아버지 루트비히 4세는 상대가 귀천상혼 가문 출신이라는 점을 들어 반대했다. 여왕은 빅토리아가 동생들을 좀 더 돌봐야 한다고 생각했고 영국 해군으로 일하는 루트비히의 근무 특성상 거주지를 자주 옮겨야 하므로 동생들에게 소홀하게 될 것을 지적했다. 그러나 빅토리아의 간곡한 설득으로 여왕은 마음을 바꿔 결혼을 허락하게 된다. 다만 약혼 기간은 어느 정도 긴 1년이었고, 손녀의 결혼으로 헤센 대공가를 방문한 여왕은 사위 루트비히 4세가 귀천상혼을 하게 된 것을 발견하고 불같이 화를 냈다. 결국 루트비히 4세가 혼인 무효화를 하여 빅토리아의 결혼은 무사히 진행된다.[4]
2.3. 결혼 생활
1885년 2월 25일, 빅토리아는 그녀의 첫 아이인 앨리스를 여왕의 뜻에 따라 자신이 태어났던 윈저 성에서 출산한다. 앨리스는 선천적인 청각장애인이었으나 빅토리아의 헌신적인 교육과 보살핌으로 독순술로 영어, 그리스어, 독일어 등 다양한 언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 여왕은 이 증손녀를 매우 총애했다. 빅토리아는 남편의 근무에 따라 자주 영국과 헤센, 몰타를 오갔다. 앨리스가 어느 정도 자라자 여왕은 다시 아이를 낳을 것을 권유하였고 빅토리아는 차녀 루이즈(1889), 장남 조지(1892), 차남 루이(1900)를 출산했다.
2.4. 가문의 수많은 비극을 지켜보다.
전 유럽이 서로 총구를 겨눴던 제1차 세계 대전은 빅토리아의 가정에도 변화를 불러왔다. 영국 내의 반 독일 감정에 따라 조지 5세는 독일 친척들에게 그들의 작위를 포기하라고 명령했다. 빅토리아 부부와 자녀들은 독일식 성인 바텐베르크에서 영국식으로 변형한 '마운트배튼'이라는 성씨를 얻었다. 그러나 이는 변화의 일부분일 뿐이었다. 불행하게도 러시아 황실로 시집 간 두 여동생 엘리자베트와 알릭스가 볼셰비키에 처형당했다. 전쟁은 그녀의 남동생인 에른스트의 대공위도 앗아갔다. 빅토리아는 겉으로는 상심하지 않은 것으로 보였지만 두 동생들의 죽음을 잊기 위해 하루에 몇 시간이나 고된 정원일을 하였다.
그렇게 비극이 끝나면 좋았겠건만 장녀 앨리스가 시집간 그리스는 정치적으로 불안정했고, 결국 망명길에 오르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앨리스가 조현병 진단을 받으며 긴 요양 생활을 시작하여 빅토리아는 손자 필리포스를 돌봐야 했다.
빅토리아는 1937년 또다시 깊은 슬픔을 마주하게 된다. 남동생 에른스트의 사망으로 형제를 또 잃었는데, 헤센 대공가 비행기 추락 사고로 증손녀 요한나를 제외한 대공가의 가족들은 전원 사망한다.[5] 사고를 피했던 요한나도 수막염으로 요절해 버렸다. 섬뜩하게도 빅토리아의 막내 동생 마리의 사망일과 조카 엘리자베트의 사망일, 사고가 일어난 날은 모두 11월 16일로 동일했다.
3. 말년
4. 자녀
5. 기타
현재 영국의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부군 에든버러 공작 필립 왕자의 외할머니[8] 이기도 하다.
[1] 빅토리아 여왕과 앨버트 공의 딸이다.[2] 첫 손녀였던 프로이센의 샤를로트 공주(빅토리아 황후의 장녀)의 이름을 빅토리아라고 짓지 않은 것에 대해 서운해 했다고 한다.[3] 살아남은 아이 중 막내였던 알릭스는 이때 채 일곱살도 되지 않았다.[4] 훗날 빅토리아의 막내 이모인 베아트리스 공주가 남편 루트비히의 동생 하인리히와 결혼하게 되어 이모-조카는 동서관계가 된다.[5] 게오르크 도나투스 대공은 빅토리아의 조카였으며 대공비 체칠리아는 빅토리아의 외손녀였기에 두 사람은 빅토리아의 가까운 가족이었다.[6] 요르요스 1세의 4남이다.[7] 에든버러 공작 필립 왕자 등[8] 장녀 앨리스의 아들이 필립 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