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베트 알렉산드라 루이제 알릭스

 

'''Prinzessin Elisabeth
von Hessen und bei Rhein
'''
'''이름'''
독일어
엘리자베트 알렉산드라 루이제 알릭스
(Elisabeth Alexandra Luise Alix)
러시아어
옐리자베타 표도로브나 로마노바
(Елизавета Фёдоровна Романова)
'''출생'''
1864년 11월 1일
독일 연방 헤센 대공국 베순젠
'''사망'''
1918년 7월 18일 (53세)
소비에트 러시아 알라파옙스크
'''배우자'''
러시아 대공 세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 (1884년 결혼 / 1905년 사망)
'''아버지'''
헤센 대공국 대공 루트비히 4세
'''어머니'''
영국앨리스 공주
'''형제'''
빅토리아, 이레네, 에른스트 루트비히, 프리드리히, 알릭스, 마리
1. 출생
2. 유년 시절
3. 러시아의 대공비 생활
4. 남편의 죽음
6. 러시아 혁명과 비참한 죽음


1. 출생


헤센 대공국 대공 루트비히 4세영국앨리스 공주[1] 사이에서 2남 5녀중 둘째이자 차녀로 태어났다. 언니 빅토리아에든버러 공 필립의 외할머니이며, 여동생 알릭스니콜라이 2세의 아내로 러시아의 황후였다. 엘리자베트는 할머니 프로이센의 엘리자베트로부터, 루이제와 알릭스는 각각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름으로부터 따왔으며, '엘라' 라는 애칭으로 불리곤 하였다.

2. 유년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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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6년 가족사진
대공가의 공녀였음에도 비교적 평범하게 자랐다. 방 청소도 직접 하였고 어머니 앨리스 공주가 직접 만든 옷을 입었다고 한다.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당시 어머니를 따라 부상당한 군인들을 돕기도 하였다.
영국인이었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독일어보다 영어에 더 능통하였다. 어머니에겐 영어로, 아버지에겐 독일어로 이야기했다고 한다.
엘리자베트가 14살일 때 어머니와 막내 여동생 마리를 디프테리아로 잃었다. 당시 엘리자베트만 할머니의 집에 격리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족 중 유일하게 감염되지 않을 수 있었고, 이후 외할머니 빅토리아 여왕의 곁에서 자랐다.
미모가 뛰어나고 매력적이었던 엘리자베트는 당대 유럽 왕실 최고의 미녀로 손꼽혔고, 그만큼 많은 이웃 나라의 왕자들이 그녀를 좋아했다. 그 중에는 사촌오빠인 프로이센의 빌헬름 왕자도 있었다. 그는 본 대학에 다니면서 주말에 이모 앨리스의 집에 종종 방문하곤 했는데, 그러면서 사촌 엘리자베트에게 사랑에 빠져버린 것. 빌헬름 왕자는 1878년 엘리자베트에게 청혼했으나 거절당했다. 그를 제외하고도 찰스 몬태규나 헨리 윌슨 등이 엘리자베트를 좋아했다고 한다. 빌헬름 1세의 외손자이자 바덴의 대공이었던 프리드리히 2세는 빅토리아 여왕이 특히나 사윗감으로 마음에 들어했는데 엘리자베트가 거절하자 여왕의 상심이 컸다고 전해진다.
이렇게 엄청난 경쟁을 거치고 엘리자베트가 사랑에 빠진 사람은 바로 알렉산드르 2세의 5남인 세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이었다. 세르게이의 어머니인 마리아 알렉산드로브나 황후는 그녀의 아들들을 데리고 친정인 헤센에 자주 방문하곤 했다. 그래서인지 엘리자베트와 세르게이는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낸 사이였는데, 결혼할 나이가 되자 서로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2] 두 번의 청혼 끝에 엘리자베트는 결혼을 약속했지만 러시아 황족을 싫어했던 외할머니 빅토리아 여왕은 분개했다.

3. 러시아의 대공비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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옐리자베타와 세르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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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게이와 엘리자베트는 1884년 6월 15일 상트페테르부르크 겨울 궁전의 예배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과 함께 루터교에서 러시아 정교회로 개종했고, 이름을 옐리자베타 표도로브나로 바꿨다. 엘리자베트의 결혼식은 여동생 알릭스러시아 제국니콜라이 황태자가 처음 만나게 된 자리이기도 했다.
러시아 황실을 비롯해 국민들은 아름답고 매력적인 새 대공비 옐리자베타 표도로브나에게 호감을 품었다. 그러나 엘리자베트 부부에게는 평생 아이가 없었다. 결국 엘리자베트가 37살 되는 1901년, 남편 세르게이 대공은 (자기 동생 파벨 알렉산드로비치 대공과 첫 번째 아내와의 사이에서 낳은) 마리아 파블로브나 여대공과 드미트리 파블로비치 대공을 아내와 한 마디 상의도 없이 입양하였다.
엘리자베트는 시조카 니콜라이 2세와 여동생 알릭스의 관계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러시아 황족을 싫어했던 빅토리아 여왕과 달리 엘리자베트는 두 사람의 관계를 도왔는데, 종교 때문에 니콜라이 2세의 청혼을 거절한 알릭스를 설득하기도 했다. 결국 며칠 뒤 알릭스는 청혼을 받아들여 러시아 제국의 황후가 되었다.
한편 1903년에 알렉세이 황태자혈우병을 고친다는 명목으로 라스푸틴이 러시아 황실에 드나들기 시작했다.

4. 남편의 죽음


1905년 세르게이 대공이 혁명가 청년에게 암살되었고, 엘리자베트는 산산조각이 난 남편의 시신을 수습하며 오열했다. 엘리자베트는 직접 감옥으로 찾아가 암살범의 구명을 청원했으나 상대가 이를 거부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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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녀가 된 엘리자베트.
남편이 죽은 뒤 상복을 입고 채식을 하였으며, 보석이나 장신구 등을 팔아서 자금을 마련하였다. (입양된) 아이들이 결혼하거나 독립하여 품을 떠나자, 1908년에 집을 수녀원으로 바꾸고 스스로 수녀원장이 되었다. 1909년에는 가지고 있던 보석 장신구 등을 팔아 자금을 마련하더니, 병원이나 고아원 등을 세우고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봉사하며 살았다.
엘리자베트는 자신이 세운 수녀원에서 입을 수도복도 디자인했는데, 사진을 보면 러시아 정교회의 수도복보다는 (아마도 엘리자베트에게 더 익숙했을) 성공회가톨릭의 수도복과 유사했다. 그러나 지금 해당 수녀원 소속의 수녀들은 창설자가 디자인한 수도복이 아니라, 다른 러시아 정교회 수녀들의 복장에 가깝게 바꾼 수도복을 착용하는 듯하다.

5. 그리고리 라스푸틴의 등장


1884년 엘리자베트의 결혼식에서, 엘리자베트의 여동생 알릭스 대공녀와 시조카 니콜라이 황태자(훗날의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가 만나, 12살 소녀와 16살 소년은 서로 첫눈에 사랑에 빠졌다.
10년이 지나 1894년, 두 사람은 당시로서는 드물게 연애결혼을 했다. 엘리자베트와 알릭스의 외할머니인 빅토리아 여왕은 러시아의 정치가 불안정하다는 이유로 두 사람의 결혼을 끝까지 반대했으나, 알릭스는 사랑을 위해서 종교도 루터교회에서 러시아 정교회로 개종하고, 이름도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라고 개명하여 알렉산드라 황후가 되었다. 그러나 시어머니 마리아 황태후와 성격 차이, 친정의 입장[3], 아들 출산의 압박 등으로 심한 고부갈등을 겪었다.
알렉산드라 황후는 딸만 넷을 낳다가 드디어(!) 다섯째로 아들 알렉세이 황태자를 낳았으나, 불행히도 알렉세이는 빅토리아 여왕으로부터 물려받은 혈우병 때문에 몸이 허약했다. 그리고 당시의 의학으로는 혈우병을 치료하거나 증세를 완화시킬 수 없었다. 그런데 1903년에 요승 라스푸틴모스크바에 나타나 이름을 날렸다.
알렉산드라 황후는 자신 때문에 아들이 몹쓸 병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자책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다는 심정이었는지, 라스푸틴을 불러들여 아들의 치료를 부탁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나름대로 효험을 보았다. 그러자 황후는 라스푸틴을 덜컥 신뢰하며 가까이에 두었다.
엘리자베타는 그런 여동생을 걱정하여, 니콜라이 2세의 여동생인 올가 알렉산드로브나 로마노바와 함께 알렉산드라 황후에게 편지를 쓰는 등 노력했다. 그러나 허사로 끝났다. 오히려 자매 및 올케 사이만 악화될 뿐이었다.
라스푸틴알렉산드라 황후의 지원을 등에 업고 국정에 관여하고, 농민들에게 생계유지조차 어려울 만큼 가혹한 세금을 거둬들여 사리사욕을 채웠으며, 이에 항의하는 농민들에게는 총탄을 퍼붓기까지 했다. 뜬금없이 황실에 나타난 요승 한 명이 부린 전횡 때문에, 러시아 제국의 백성들은 라스푸틴뿐만 아니라 차츰 독일(헤센 대공국) 출신 외국인 황후에게도 불만을 품었다.
결국 1916년, 라스푸틴은 펠릭스 유스포프를 중심으로 한 반대파들(황족&귀족)에게 암살되었다. 엘리자베타 대공비의 양아들 드미트리 대공이 유스포프와 함께 라스푸틴 살해에 앞장섰기 때문에 알렉산드라 황후는 언니 엘리자베타 대공비가 암살에 관여했다고 믿었으므로, 자매 사이는 더욱 나빠졌다. 니콜라이 2세도 분노하여 드미트리 대공을 추방했다.

6. 러시아 혁명과 비참한 죽음


러시아 혁명이 발발하고 나서도 망명하지 않은 채 엘리자베트는 러시아에 남았다. 엘리자베트는 죽는 순간까지 다른 황족들을 보살피며 기도생활과 봉사에 충실하였으나, 결국 1918년 7월 18일 갱도 안에 끌려가 폭탄으로 살해되었다. 시신에는 죽을 때까지 다른 사람들을 도왔던 흔적이 남았다고 한다.
이후 엘리자베트를 포함하여 폭탄으로 살해된 6명의 시신은 후에 베이징에 옮겨져 안장되었다가 사후 2년 뒤인 1920년, 언니 빅토리아에 의해 엘리자베트의 시신은 예루살렘의 막달라 마리아 교회[4]에 수녀 바바라[5]와 함께 이장 되었다.
해외러시아정교회[6]가 1981년, 러시아 정교회가 1992년에 각각 엘리자베트를 순교자라고 인정하고 시성하였다. 정교회 성인으로서의 축일은 (율리우스력) 7월 5일[7]이다. 이와 별도로 러시아 정교회는 소비에트 연방 시절에 순교한 이들을 '러시아의 새 순교자들과 증거자들'이라고 하여 따로 묶어서 기념하는데, 엘리자베트도 '새 순교자'로서 함께 공경받는다.

[1] 빅토리아 여왕의 차녀이다.[2] 세르게이 대공이 부모를 잃은 후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은 엘리자베트와 깊은 공감대가 형성되었으며, 서로 비슷한 점이 많았던 것에 끌렸다고 한다.[3] 당시 독일과 마리아 황태후의 친정인 덴마크는 사이가 나빴다.[4] 이유는 엘리자베트가 생전 이 교회의 준공식에 참석했을 때 후에 자신이 죽은 후 시신을 이곳에 안장되고 싶다고 언급했기 때문이다.[5] 바바라 역시 엘리자베트와 함께 폭탄으로 살해되었다.[6] 원래는 러시아 정교회 성직자 일부가 공산당 세력을 피해 해외로 나가면서 생긴 교회. 실질적인 설립은 1920년에 되었으나 1927년에 모스크바 총대주교가 공석인 상태에서 수도대주교 세르기우스가 소련 정권에 충성을 서약하자, 이를 계기로 공식적으로 결별을 선언하였다. 2007년에 다시 러시아 정교회(모스크바 총대주교청)과 일치하였는데, 이때 러시아 정교회는 해외러시아정교회가 독립적으로 시성한 성인들도 인정하기로 하였다. 현재 해외러시아정교회는 모스크바 총대주교청 산하 준자치교회로 운영된다.[7] 엘리자베트가 죽은 날짜를 율리우스력으로 환산한 것이다. 위에서 설명한 1918년 7월 18일은 그레고리력 날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