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텐베르크의 공녀 앨리스

 

'''Prinzessin Alice von Battenberg'''
'''이름'''
빅토리아 앨리스 엘리자베스 줄리아 마리
(Victoria Alice Elizabeth Julia Marie)
'''출생'''
1885년 2월 25일
잉글랜드 버크셔 윈저 성
'''사망'''
1969년 12월 5일 (84세)
잉글랜드 런던 버킹엄 궁전
'''배우자'''
그리스덴마크안드레아스 왕자
(1903년 결혼 / 1944년 사망)
'''자녀'''
마르가리타
테오도라
체칠리아
소피아
필립
'''아버지'''
바텐베르크의 공자 루트비히
'''어머니'''
헤센의 공녀 빅토리아
'''형제자매'''
루이즈
조지
루이
1. 소개
2. 생애
2.1. 유년기
2.2. 결혼
2.3. 전쟁과 망명생활
2.4. 정신병
2.6. 말년과 사망
3. 가족관계
3.1. 조상
3.2. 자녀


1. 소개


필립 공의 어머니이자 현 영국 여왕인 엘리자베스 2세의 시어머니. 루이 마운트배튼의 누나이기도 하다.

2. 생애



2.1. 유년기


바텐베르크[1]의 공자 루트비히와 헤센의 공녀 빅토리아[2]의 장녀로 버크셔 윈저 성에서 증조할머니 빅토리아 여왕이 지켜보는 가운데 태어났다. 동생 루이즈, 조지, 루이는 훗날 각각 스웨덴의 왕비, 밀퍼드 헤이븐 후작, 버마의 마운트배튼 백작이 된다. 독일 출신이지만 빅토리아 여왕의 증손녀였기 때문에 어린 시절 영국에서 지내기도 했다. 선천적인 청각장애가 있었으나 어머니 헤센의 공녀 빅토리아가 독순술을 가르쳐 겉으로 보기엔 비장애인과 다름이 없었다고 한다.[3][4] 1893년 조지 5세테크의 메리의 결혼식에서 화동을 맡기도 하였다.[5]
여담으로 미남미녀를 좋아하기로 유명한 빅토리아 여왕이 얌전하고 예쁜 증손녀 앨리스를 매우 아꼈다고 한다.[6] 커서도 아름다운 외모로 친척들이 입 모아 칭찬했을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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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여동생 루이즈, 남동생 조지, 앨리스

2.2. 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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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와 안드레아스 왕자
앨리스는 1902년 에드워드 7세의 대관식에서 그리스덴마크의 안드레아스 왕자[7]를 처음 만나 1903년 10월 6일 다름슈타트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앨리스는 빅토리아 여왕의 증손녀였고 안드레아스 왕자는 크리스티안 9세의 손자였기 때문에 많은 유럽의 왕족들이 결혼식에 참석하였다. 안드레아스 왕자와 결혼한 이후에 앨리스는 그리스와 덴마크의 안드레아스 왕자비로 불렸고, 두 사람 사이에서는 마르가리타, 테오도라, 체칠리아, 소피아, 필립의 1남 4녀가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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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년 결혼했을 때의 앨리스.
결혼 이후 안드레아스 왕자는 그리스에서 육군 생활을 계속했고, 앨리스는 자선 사업에 참여하였다. 이모인 옐리자베타 대공비를 만나 그녀가 준비하고 있던 자선사업을 돕기도 하였다. 그러나 1909년을 기점으로 그리스에서 쿠데타가 일어나 정치 상황이 점점 악화되었고, 남편 안드레아스는 사임되었다.

2.3. 전쟁과 망명생활


발칸 전쟁이 일어나자 안드레아스 왕자는 다시 육군에 복귀할 수 있었고, 앨리스는 야전병원을 운영했다. 제1차 세계 대전 때 시숙(남편의 형)인 콘스탄티노스 1세는 중립국으로 남길 원했지만 당시 그리스의 권력자인 베니젤로스는 연합국에 참전하길 바랐다. 왕당파와 베니젤로스파로 나뉘어 불안정한 정세를 보이는 동안 앨리스의 가족은 궁전 지하 창고에 숨어 지내야 했다. 1917년 6월, 결국 콘스탄티노스 1세는 퇴위했고 그리스 왕실 가족은 모두 망명 생활을 하게된다.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인하여 해군이었던 아버지 바텐베르크의 공자 루트비히는 독일 출신이라는 이유로 일을 그만둬야 했다. 조지 5세의 권유로 바텐베르크의 공자 라는 작위를 포기하고, 바텐베르크의 영국식 명칭인 마운트배튼으로 성을 바꾸었으며, 밀퍼드 헤이븐 후작이라는 작위를 받았다.
1917년에는 러시아 혁명 이후 두 이모 러시아의 황후 알렉산드라옐리자베타 표도로브나 대공비볼셰비키에게 살해당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의 끝에 러시아 제국, 독일 제국 그리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멸망하여 외삼촌인 에른스트 루트비히가 헤센 대공국의 대공 자리에서 물러났다.
1920년에 콘스탄티노스 1세가 복귀함에 따라 앨리스의 가족들도 잠시 그리스에 머물게 되었다. 하지만 그리스-터키 전쟁에 패하자 왕실의 인기는 땅에 떨어졌고 혁명파들은 국왕에게 망명생활을 요구했다. 정부는 전쟁의 책임을 물을 책임자를 찾고 있었고, 많은 군인들이 체포되었으며 전쟁에 참여했던 안드레아스 왕자 역시 체포되었다. 재판 후에 안드레아스 왕자에게는 추방령이 내려졌고 앨리스의 가족들은 영국의 지원을 받아 또 다시 망명 생활을 시작하였다.

2.4. 정신병


앨리스는 동서인 마리 보나파르트[8]의 도움을 받아 파리 근교의 생클루에 정착하였다. 그곳에서 그녀는 그리스 난민들을 받는 자선사업을 시작했다. 힘든 망명 생활에 지쳤던 앨리스는 점점 신앙심이 깊어졌고 1928년 10월에는 그리스 정교회로 개종하였으나, 얼마 후부터 그녀는 자신이 신의 계시를 받는다거나 치유 능력이 있다고 믿기 시작했다. 1930년, 결국 조현병에 걸렸다는 진단이 내려졌고 가족들에게서 떨어져 스위스에 있는 요양원에 보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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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즈음, 마지막 가족사진. 왼쪽 두번째 금발의 남자아이가 필립 공이다.
긴 요양 기간 동안 앨리스의 딸들은 모두 독일의 왕족들에게 시집을 갔고, 남편과도 헤어져 가족이 뿔뿔이 흩어졌다. 아들 필립은 영국에서 외할머니 헤센의 공녀 빅토리아, 외삼촌 조지 마운트배튼과 루이 마운트배튼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다.
정신병원에서 앨리스는 1936년까지 어머니를 제외한 모든 가족과 연락을 하지 않았다. 그러던 1937년, 셋째 딸 체칠리아의 가족 전원이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였다는 소식을 접했다. 장례식장에서 6년 만에 가족들과 재회한 이후, 앨리스는 조현병이 상당히 호전되어 1938년 홀로 아테네에 돌아가 자선 사업을 시작했다.[9]

2.5. 제2차 세계 대전


앨리스가 그리스로 돌아간 직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다. 사위들은 독일의 옛 왕족/귀족으로 독일군에서 싸우고 있었고 아들영국에서 해군으로 복무중이었기 때문에 제2차 세계 대전은 가족간의 싸움이었다. 앨리스는 독일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독일군을 굉장히 싫어했는데, "필요한 것이 있소?" 라고 묻는 독일군의 말에 "내 나라에서 떠나시오." 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전쟁이 일어나는 동안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머물렀던 다른 그리스 왕족과는 달리 앨리스는 동서 엘레나 블라디미로브나 여대공[10]과 함께 그리스에서 지냈다. 그녀는 굶주린 사람들을 도우며 여동생 루이즈 왕세자비를 만나러 간다는 핑계로 스웨덴에서 의약 용품을 가져오기도 했다.
1943년 9월, 독일군은 아테네를 점령했다. 그리스에 살고있던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강제 수용소에 끌려가 죽임을 당했고,[11] 남아있는 소수의 유대인들은 피난처를 찾아야 했다. 이 시기에 앨리스는 레이첼 코엔이라는 여성과 그녀의 두 아이들을 숨겨주었다. 레이첼 코엔의 남편이 예전에 요르요스 1세를 도운 적이 있었는데, 그 보답으로 원하는 것이 있냐고 물어보았던 것을 코엔의 아들이 기억한 것. 그래서 당시 그리스에 남아있었던 왕족인 앨리스와 엘레나 대공비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었다.
1944년 10월 독일군의 아테네 점령이 끝났지만 상황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그리스 사회주의 군대(ELAS)와 영국군 간의 싸움이 시작되었기 때문이었다. 내전을 겪는 동안 앨리스는 통행금지령을 어기고 경찰들, 아이들에게 배급량을 나누어주었다. 그러던 중 앨리스는 더 충격적인 사실을 듣게 되는데, 바로 남편 안드레아스의 사망 소식이었다. 두 사람은 1939년 이후로 한 번도 보지는 않았지만, 앨리스는 사망한 남편을 추모하였다.

2.6. 말년과 사망


1947년 4월 아들 필립 마운트배튼조지 6세의 장녀, 즉 영국의 왕위 계승자인 엘리자베스 공주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영국에 방문했다. 앨리스의 딸들은 모두 독일 왕족/귀족에게 시집을 갔기 때문에 결혼식에 전원 참석할 수 없었다.
1949년 1월, 앨리스는 이모 옐리자베타 표도로브나 대공비가 그랬듯이 그리스 정교회 수도원을 세웠다. 1950년과 1952년에 자금을 벌기 위해 미국에 방문하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자금 부족으로 수도원 건설은 실패로 돌아갔다.
1952년에는 며느리 엘리자베스 공주가 여왕이 되었고, 1953년 6월에 대관식에 수도복 차림으로 참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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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의 앨리스. 손자 찰스 왕세자, 손녀 앤 공주와 함께.
1967년, 그리스에서 쿠데타가 일어나 그리스 군사정권이 수립되자 쇠약해진 앨리스는 아들 필립 마운트배튼과 며느리 엘리자베스 2세의 요청에 따라 영국 버킹엄 궁전에서 여생을 보냈다. 그 해 12월, 그리스에서는 왕당파의 역쿠데타가 실패해 조카의 아들(큰 시아주버님인 콘스탄티노스 1세의 막내 아들 파블로스 1세의 외아들)인 콘스탄티노스 2세안나마리아 왕비, 그리고 조카 며느리인 프레데리카 왕대비(파블로스 1세의 부인이자 콘스탄티노스 2세의 어머니)는 망명길에 올랐다.
영국에서 지낸 지 2년 뒤인 1969년, 노쇠한 앨리스는 자던 중 숨을 거두었다. 유품은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유해는 앨리스가 태어났던 윈저 성에 묻혔다가 생전 유언에 따라 1988년 예루살렘 올리브 산에 있는 세인트 마리아 막달레나 수녀원[12]으로 이장되었다.

3. 가족관계



3.1. 조상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바텐베르크의 공녀 앨리스
(Princess Alice
of Battenberg)

바텐베르크의 공자 루트비히
(Prince Louis of Battenberg)
헤센 대공국의 공자 알렉산더
(Prince Alexander
of Hesse and by Rhine)

헤센 대공국 대공 루트비히 2세
(Louis II,
Grand Duke of Hesse and by Rhine)

바덴의 공녀 빌헬미네
(Princess Wilhelmine of Baden)
율리아 하우케 여백작
(Countess Julia Hauke)
한스 모리츠 하우케 백작
(Count John Maurice Hauke)
소피 라퐁텐
(Sophie Lafontaine)
헤센 대공국의 공녀 빅토리아
(Princess Victoria
of Hesse and by Rhine)

헤센 대공국 대공 루트비히 4세
(Louis IV,
Grand Duke of Hesse and by Rhine)

헤센 대공국의 공자 카를
(Prince Charles
of Hesse and by Rhine)

프로이센의 엘리자베트 공주
(Princess Elisabeth of Prussia)[13]
영국의 앨리스 공주
(Princess Alice of the United Kingdom)
작센코부르크고타의 공자 앨버트
(Prince Albert
of Saxe-Coburg and Gotha)

빅토리아 여왕
(Victoria)

3.2. 자녀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 / 자녀'''
1녀
호엔로에랑겐부르크 공작부인 마르가리타
(Margarita, Princess of Hohenlohe-Langenburg)
1905년 4월 18일
1981년 4월 24일
호엔로에랑겐부르크 공작 고트프리트
슬하 4남 1녀
2녀
바덴 변경백비 테오도라
(Theodora, Margravine of Baden)
1906년 5월 30일
1969년 10월 16일
바덴 변경백 베르톨트[14]
슬하 2남 1녀
3녀
헤센 대공국 공세자비 체칠리아
(Cecilie, Hereditary Grand Duchess of Hesse)
1911년 6월 22일
1937년 11월 16일
헤센 대공국 공세자 게오르크 도나투스[15]
슬하 2남 1녀
4녀
하노버의 게오르크 왕자비 조피
(Sophie, Princess George of Hanover)
1914년 6월 26일
2001년 11월 24일
헤센의 공자 크리스토프[16]
슬하 2남 3녀
하노버의 게오르크 빌헬름 왕자[17]
슬하 2남 1녀
1남
에든버러 공작 필립 왕자
(Prince Philip, Duke of Edinburgh)
1921년 6월 10일

엘리자베스 2세
슬하 3남 1녀[18]

[1] 헤센 대공국의 대공 루트비히 2세의 막내아들 알렉산더가 율리아 하우케와 귀천상혼하면서 생긴 가문이다. 알렉산더의 아들이 바로 바텐베르크의 루이이다.[2] 헤센 대공 루트비히 4세앨리스 공주의 장녀[3]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를 구사했으며 결혼 후에는 그리스어까지 배웠다. 그리고 성인이 된 후에도 큰 소리는 들렸다고.[4] 다만 어머니인 헤센의 공녀 빅토리아가 청각장애를 가진 딸 걱정을 많이 했다. 그 때마다 빅토리아의 큰 이모인 빅토리아 아델레이드 메리 루이즈는 앨리스가 대답이 느릴 뿐 아무 문제 없다고 말했다고 전해진다.[5] 빅토리아 여왕이 증손녀를 직접 지목(!)했고, 화동을 한 앨리스를 보고 여왕이 '아주 예뻤다'고 적었다고 한다.[6] 앨리스의 친가인 바텐베르크 가문은 미남미녀가 많기로 유명했다. 앨리스는 친가 쪽을 닮아 어렸을 때부터 뛰어난 미모로 유명했지만 외가 쪽을 닮은 여동생 루이즈는 안습(...)[7] 알렉산드라 왕비의 남동생 요르요스 1세의 4남이다.[8] 요르요스 1세의 2남 요르요스 왕자의 부인이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남동생 뤼시앵 보나파르트의 증손녀[9] 딸 일가의 죽음을 겪은 앨리스는 매우 슬퍼했지만, 동시에 남은 가족들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반대로 남편인 안드레아스는 가장 아끼던 딸의 죽음으로 가족과 연을 거의 끊고 살 정도로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했다.[10] 요르요스 1세의 3남 니콜라오스 왕자의 부인[11] 75,000명 중 60,000명 가량이 끌려갔다고 한다.[12] 이모 옐리자베타 대공비가 묻혀있는 곳이다.[13]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의 손녀이다.[14] 막시밀리안 폰 바덴의 아들[15] 촌수로는 체칠리아와 5촌이다. 체칠리아의 어머니 앨리스 왕자비의 외사촌이기 때문.[16] 프리드리히 3세의 외손자이다.[17] 빌헬름 2세의 외손자이다.[18] 웨일스 공 찰스, 프린세스 로열 앤, 요크 공작 앤드루 왕자, 웨식스 백작 에드워드 왕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