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리스 모드 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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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빅토리아 여왕과 앨버트 공의 셋째이자 차녀이며, 헤센 대공국 루트비히 4세#s-4의 아내이다. 빅토리아 여왕의 자녀들 중 처음으로 사망한 자녀이기도 하다.
빅토리아 여왕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자로 인해 혈우병 보인자였다. 이 혈우병 보인자가 앨리스의 자녀들에게도 유전되어 차남 프리드리히를 잃었고, 4녀 알릭스 또한 아들의 혈우병을 치료하려다 온 일가가 총살당하였다.
2. 작위
- 앨리스 공주 전하 Her Royal Highness The Princess Alice (1843년 4월 25일 ~ 1862년 7월 1일)
- 헤센의 루트비히 공자비 전하 Her Royal Highness Princess Louis of Hesse and by Rhine (1862년 7월 1일 ~ 1877년 6월 13일)
- 헤센의 대공비 전하 Her Royal Highness The Grand Duchess of Hesse and by Rhine (1877년 6월 13일 ~ 1878년 12월 14일)
3. 생애
3.1. 어린 시절
1843년 4월 25일 버킹엄 궁전에서 태어나, 6월 2일 버킹엄 궁전에서 성공회 세례를 받았다. 당시 영국에서 앨리스라는 이름이 유행이 아니었으나 빅토리아 여왕이 신임하던 총리 멜번 경의 추천으로 이름이 정해지게 되었다. 모드[1] 는 앨리스의 대모이자 조지 3세의 조카인 소피아 마틸다로부터 따왔고, 메리는 조지 3세의 딸 메리 공주와 같은 날에 태어나서 정해졌다고 한다.
앨리스의 출생으로 버킹엄 궁전이 사생활 보호에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한 빅토리아 여왕은, 와이트 섬에 위치한 오스본 하우스에서 아이들을 양육한다. 앨리스는 그곳에서 살림이나 요리 등을 배웠고,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를 할 수 있었다. 검소한 생활을 중시했던 아버지 앨버트 공의 교육 철학에 따라 화려한 공주보다는 중산층의 자녀처럼 자랐다. 궁전 밖의 생활도 궁금해 하곤 해서 한 번은 몰래 나갔다가 들키기도 했다. 어린 시절에 언니 빅토리아 아델레이드 메리 루이자 공주, 오빠 에드워드 7세와 친했다고 하며, 특히 빅토리아 공주가 결혼했을 때는 언니와 떨어지기 싫어 상당히 힘들어 했다고 한다.
타인에 대한 동정심이 커서, 외할머니 켄트 공작부인 빅토리아가 아팠을 때나, 아버지 앨버트 공이 병마와 싸우고 있을 때 곁에서 정성것 간호했다. 1861년 앨버트 공이 세상을 떠난 후 상심이 컸던 어머니 빅토리아 여왕의 비서 역할을 하며 나랏일을 도왔다.
3.2. 결혼
빅토리아 여왕은 자신이 그러했듯 자신의 자녀들도 연애결혼을 하길 바랐지만, 그렇다고 아무하고나 결혼시킬 수는 없었다. 그녀는 앨리스의 남편감으로 네덜란드 빌럼 3세의 아들 빌럼 왕자와, 프로이센의 알버트 왕자[2] 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빌럼 왕자는 앨리스에게 관심이 적다는 이유로, 알버트 왕자는 공주의 남편으로 적합하지 않다는 이유로 남편감에서 제외되었다. 그 이후 빅토리아 공주가 독일 왕족이었던 헤센 대공국의 루트비히 왕자를 추천하였고, 두 사람은 1861년 4월 30일 약혼하게 된다.
그러나 그녀의 결혼은 독일 국민들에게 환영받지 못했다. 빅토리아 여왕은 신혼집을 위해 새 궁전을 짓길 바랐는데, 이것이 국민들의 분노를 일으켰고 미운털이 박힌 앨리스는 신혼집마저도 불확실해졌다.
설상가상으로 결혼 준비가 한창이던 1861년 12월 14일, 아버지 앨버트 공이 사망한다. 여왕의 슬픔에도 결혼 준비는 계속되었으며, 1862년 7월 1일 오스본 하우스에서 루트비히 왕자와 결혼한다. 앨버트 공의 죽음으로 결혼식 분위기는 굉장히 우울했다. 앨리스 공주는 본식을 제외하고는 검은 옷을 입어야 했고, 빅토리아 여왕은 결혼식 내내 울음을 참았다고 한다. 여왕이 딸 빅토리아 공주를 비롯하여 지인들에게 쓴 편지에는 "결혼식보다 장례식 같았다", "내가 기억하는 가장 슬픈 날이었다" 등으로 결혼식을 언급했다.
앨리스는 결혼생활을 하는 동안 친정어머니 빅토리아 여왕을 기분 나쁘게 하지 않도록 노력했다. 여왕이 찾아올 때면 그녀는 행복한 척을 하지 않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왕은 사랑에 물들어 있는 딸을 질투했다고 한다.
3.3. 결혼 생활
1863년 오빠 에드워드 7세와 덴마크의 공주 알렉산드라의 결혼으로 영국을 방문한 앨리스는 그곳에서 첫 딸 빅토리아를 낳는다. 1864년에는 둘째 딸 엘리자베트를 낳았다. 직접 모유수유를 하길 원했던 그녀는 양육 방식에 있어 빅토리아 여왕과 갈등이 있었고, 어머니와의 관계는 점점 멀어졌다.
셋째 아이를 임신 중이던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이 발발하였다. 헤센 대공국은 오스트리아를 지지했기 때문에 언니 빅토리아 공주와는 대척점에 서게 되었다.[3] 남편 루트비히 왕자는 기사로 전쟁에 참가하였고, 아이들은 영국으로 보내졌다. 임신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만삭의 몸으로 병원을 돕는 등 왕족으로서의 의무를 충실히 하였다.
전쟁이 한창이던 그 해 7월, 앨리스는 셋째 딸 이레네를 낳았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남편과 재회했으며 부상자들을 간호했다고 한다. 이때 친해진 사람이 바로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이다. 나이팅게일은 영국으로부터 앨리스에게 돈을 전해주었고, 앨리스는 간호를 하며 그녀의 조언을 따르곤 했다.
3.4. 말년
앨리스의 말년은 정말 불행했는데, 1873년 그녀가 가장 사랑했던 막내아들 프리드리히가 창문 밖으로 떨어지는 사고로 죽었기 때문이었다. 프리드리히는 외할머니 빅토리아 여왕으로부터 유전된 혈우병 환자였기 때문에, 사고가 났을 때 피가 멈추지 않았다.[4] 이 일이 일어난 이후 앨리스는 사망할 때까지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첫째 아들 에른스트와 막내 딸 마리[5] 에게 집착하게 되었다. 말년에는 남편과의 사이도 좋지 않았고, 헤센 대공국의 대공비가 된 이후에도 국민들의 지지를 얻지 못해 심적 부담감이 컸다고 한다.
3.5. 사망
1878년 11월, 첫째 딸 빅토리아가 디프테리아에 걸렸다. 디프테리아는 순식간에 다른 아이들에게 전염되었다. 남편 루트비히 4세도 잠깐이지만 감염되었었고, 시어머니 엘리자베스 공주에게 있었던 둘째 딸 엘리자베트만이 유일하게 전염되지 않았다. 결국 막내딸 마리는 어린 나이에 사망하고 말았다.[6] 앨리스는 이 사실을 다른 아이들에게 숨겼으나, 몇 주 뒤 아들 에른스트에게 말하였다. 이에 충격을 받아 우는 아들의 이마에 입맞춤을 하다가 본인마저도 감염되어 버렸다.
결국 친정아버지 앨버트 공의 기일인 12월 14일, 병세가 심각해져 "사랑하는 아빠(dear Papa)" 라는 마지막 유언을 남기고 사망하였다. 그녀의 관은 유니언 잭에 감싸져 다름슈타트의 로젠호헤에 묻혔다.
그녀의 사망으로, 친정어머니 빅토리아 여왕과 언니 빅토리아 공주를 비롯한 영국 왕실 일원들은 큰 충격에 빠졌다. 특히 빅토리아 여왕은 17년 전 남편이 죽었던 그 날 또 딸을 잃었다는 사실에 망연자실했다고 한다.
4. 자손과 비극
남편 루트비히 4세#s-4 사이에서 2남 5녀를 낳았다.
첫째 딸 빅토리아의 아들이자 인도의 마지막 총독이었던 루이 마운트배튼 경은 1979년 IRA 폭탄 테러로 사망했다. 빅토리아의 외손자 필립 마운트배튼은 현재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부군이다.[7][8]
둘째 딸 엘리자베트는 러시아 제국의 세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9] 과 결혼해서 러시아 황실로 시집을 갔다. 세르게이는 1905년에 암살당하였고, 과부가 된 엘리자베트는 수녀가 되어 자선과 봉사에 전념하였다. 그러나 그녀 또한 여동생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가 처형당한 다음 날 볼셰비키에 의해 살해당하였다.
셋째 딸 이레네는 앨리스 공주의 언니 빅토리아 아델레이드 메리 루이자 황후의 아들 하인리히 왕자와 결혼하여 3남을 낳았다. 그러나 역시 혈우병 보인자로 두 아들(첫째(1889~1945), 셋째(1900~1904) - 셋째는 4살때 요절, 첫째는 결혼했으나 자녀 없음)에게 혈우병을 물려주었고, 둘째 아들(1896~1978)의 딸의 후손만 현재 남아있다.
장남 에른스트 루트비히는 사촌 작센-코부르크-고타의 공녀 빅토리아 멜리타[10] 와 결혼하였으나 딸 엘리자베트를 낳고 이혼하였다.[11] 이후 졸렘호엔졸름리히의 공녀 엘레오노레와 재혼하여 2남을 낳았는데, 장남 게오르그 도나투스와 그의 아내 세실리아[12] 는 일가가 비행기 사고로 막내 요한나[13] 를 제외한 전원이 사망하였다. 헤센 대공가 비행기 추락사고 참조. 에른스트의 차남 루트비히 또한 자식 없이 사망하며 헤센-다름슈타트 대공가의 직계 자손은 끊기게 된다.
넷째 딸 알릭스는 러시아 제국의 니콜라이 2세와 결혼했다. 러시아로 시집가면서 알릭스는 루터회에서 정교회로 개종했고, 이름도 러시아식으로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라고 바꾸었다.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는 딸만 4명을 낳은 끝에 어렵게 아들 알렉세이를 낳았는데, 불행히도 이 아이는 빅토리아 여왕으로부터 유전된 혈우병을 가지고 태어났다. 아들의 혈우병을 치료하기 위해 노심초사하던 알렉산드라 황후는 요승 그리고리 라스푸틴에게까지 매달리게 되었고, 라스푸틴의 전횡으로 러시아 제국은 몰락한다. 1918년, 알렉산드라 황후는 남편과 아이들과 함께 볼셰비키에 총살당하여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였다.
차남 프리드리히는 1873년 창문 밖으로 떨어져 사망하였고, 5녀 마리는 1878년 디프테리아로 요절하였다.
이러한 비극적인 죽음으로 현재까지 남아 있는 앨리스의 자손은 장녀 빅토리아, 3녀 이레네의 후손들 뿐이다.
5. 가족관계
5.1. 조상
5.2. 자녀
빅토리아 여왕/가족관계#s-3 참조.
[1] 마틸다의 애칭[2] 언니 빅토리아 공주의 남편 프리드리히 3세의 사촌이었다.[3] 빅토리아 아델레이드 메리 루이자 공주는 프로이센의 왕세자비였기 때문이다.[4] 피가 멈추었더라면 살았을 것이라고 한다.[5] 프리드리히 사후에 태어났다.[6] 막내딸의 죽음에 앨리스가 어찌나 상심했는지 죽기 직전 마리의 애칭인 '메이'라는 말을 유언으로 말할 정도였다.[7] 따라서 필립 공과 엘리자베스 2세는 8촌 관계이다.[8] 필립 공의 모계 혈통이 앨리스였기 때문에 후에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의 미토콘드리아를 검사할 때 필립 공의 DNA와 대조할 수 있었다. 미토콘드리아는 모계 유전만 되기 때문이다.[9] 알렉산드르 2세의 아들이자 니콜라이 2세의 삼촌. 모계 쪽으로는 엘리자베트와 5촌 관계이다.[10] 빅토리아 여왕의 둘째 아들 알프레드 왕자의 둘째 딸, 1876~1938[11] 엘리자베트는 8살에 요절(1895~1903) 했다. 참고로 빅토리아 멜리타는 이후 외사촌인 러시아의 키릴 대공(멜리타의 어머니인 마리야의 오빠이자 러시아 차르 알렉산드르 2세의 넷째 아들인 블라디미르 대공(1847~1909)의 아들)과 연애를 했으나 황실의 반대에 부딪혔는데, 멜리타의 전 남편 에른스트 루트비히의 여동생 헤센의 알릭스가(바로 아래 문단에 나오듯) 키릴의 사촌인 니콜라이 2세의 황후인 것도 큰 몫을 했다. 알릭스 입장에서는 오빠와 이혼한 전 올케가 자기 남편의 사촌과 재혼한 격. 이후 빅토리아 멜리타는 러일전쟁과 1차 대전을 거치며 겨우 인정을 받아 키릴 대공과 혼인했으나, 곧 러시아 혁명이 터지면서 전 시누이 일가(니콜라이 2세와 알릭스의 가족)를 비롯한 황실 인사들이 볼셰비키에 의해 몰살당하는 비극을 겪었다. 그래도 겨우 외국으로 망명하여 천수를 누렸다.[12] 앨리스의 장녀 빅토리아의 손녀이자 필립 마운트배튼의 누나이다. 즉, 남편 게오르그 도나투스와 5촌 관계이다.[13] 유일하게 살아남은 이 아이마저도 3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수막염으로 사망한다.[14] 그리스와 덴마크의 안드레아스 왕자비 앨리스, 스웨덴의 루이즈 왕비, 제1대 버마의 마운트배튼 백작 루이 마운트배튼 등[15] 알렉산드르 2세의 5남이다.[16] 프리드리히 3세의 차남이자 빅토리아 여왕의 손자이다.[17] 빅토리아 여왕과 알렉산드르 2세의 손녀이다.[18] 러시아 제국 여대공 올가 니콜라예브나, 러시아 제국 여대공 타티아나 니콜라예브나, 러시아 제국 여대공 마리아 니콜라예브나, 러시아 제국 여대공 아나스타샤 니콜라예브나, 러시아의 황태자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