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버트 공

 

'''Albert, Prince Consort'''
'''이름'''
프란츠 알베르트 아우구스트 카를 에마누엘
(Franz Albert August Karl Emanuel)
'''출생'''
1819년 8월 26일
작센코부르크고타 공국 로제나우 성[1]
'''사망'''
1861년 12월 14일 (42세)
윈저 성
'''배우자'''
빅토리아 여왕 (1840년 결혼)
'''자녀'''
빅토리아, 에드워드 7세, 앨리스, 알프레드, 헬레나, 루이즈, 아서, 레오폴드, 베아트리스
'''아버지'''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에른스트 1세
'''어머니'''
작센고타알텐부르크의 공녀 루이즈
'''형제'''
에른스트 2세
[image]
[image]
빅토리아 여왕과 함께 한
모습의 그림
말년의 모습을 담은
흑백 사진
1. 개요
2. 생애
2.1. 가계
2.2. 유년기
2.3. 결혼
2.4. 부군으로서
2.5. 가정 생활과 자녀
2.6. 정치 관여
2.7. 말년과 사망
3. 기타


1. 개요


영국빅토리아 여왕의 부군으로, 에드워드 7세를 비롯한 빅토리아의 자녀들의 부친. 본명은 프란츠 알베르트 아우구스트 칼 에마누엘(Franz Albert August Karl Emanuel)로, 미들 네임인 '알베르트'를 영국식으로 변형한 '앨버트'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있다.

2. 생애



2.1. 가계


작센-코부르크-잘펠트 공국의 에른스트 1세와 작센-고타-알텐부르크의 루이제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앞에 '작센'이 똑같이 붙는 데서 알 수 있듯, 앨버트 공의 친가와 외가는 둘 다 작센의 지배 가문인 베틴 왕조의 분가로, 그 중에서도 장자인 에른스트 계열이었다.
차자 집안인 알브레히트 계열이 작센 왕국과 폴란드 왕 자리를 차지하며 잘 나간 건 후대의 일이고, 원래 작센 지방은 에른스트 계열과 알브레히트 계열이 반분해 다스렸다가, 에른스트 계열인 작센 선제후 요한 프리드리히 1세가 종교개혁 당시 가톨릭을 버리고 마르틴 루터개신교를 지원했다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카를 5세에게 밉보여 방계인 알브레히트 계열에 작센 선제후 지위를 찬탈당했고, 분할상속을 택해 수시로 영지가 분리되고 통합되곤 했기 때문에, 하나의 강력한 가문으로 성장하지 못 하고 중소영지를 통치하는 중소가문의 집합으로 영락한 상태였다.[2]
앨버트 공의 부모가 결혼할 당시 에른스트 계열은 크게 네 가문[3]으로 분리되어 있었고, 그 중에서도 외가인 작센-고타-알텐부르크 공작가가 남자 후손이 없어 단절이 예정된 상태에서[4], 베틴가문 에른스트 계열의 영지 재조정을 유리하게 하기 위해 작센-코부르크-잘펠트의 후계자와 작센 알텐부르크의 딸을 정략결혼시킨 것. 결국 1826년 작센-고타-알텐부르크 공국 계열이 단절되면서, 친가인 작센-코부르크-잘펠트는 영지 중 비교적 작은 영지인 잘펠트를 다른 친척에게 넘기고, 대신 처가로부터 고타를 물려받아 영지를 재조정, '''작센-코부르크-고타'''로 통치령명이 변경된다.[5] 그리고 에른스트 3세는 작센-코부르크-고타의 에른스트 1세가 된다.
비록 작은 가문이었으나 베틴 가문은 작센-폴란드 왕실의 통치가문이고, 에른스트 계열은 그 친척으로 최초의 신교도 제후 집안이었다. 그래서 신교도 가문에서 존경받는 뿌리가 깊은 가문이었기 때문에, 작은 통치령에 비해 큰 나라 군주와 통혼이 가능했다. 선대 조상대부터 신교도 제후인 네덜란드 오라녜, 호엔촐레른, 헤센, 하노버, 팔츠계 비텔스바흐 가문과 통혼했고, 가까운 시기엔 빌헬름 1세의 황후도 베틴가문 에른스트 계열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공국 출신. 게다가 앨버트 공의 아버지 대에서 삼촌과 고모들이 러시아[6], 포르투갈, 영국 왕가와 혼사를 맺는 등 운이 트이면서 앨버트 공의 운명도 달라지게 된다. 앨버트 공이 결국 대영제국 여왕의 부군으로 간택된 배경도, 그의 삼촌이자 벨기에의 왕이 되는 레오폴 1세조지 4세의 후계자였던 샬럿 공주의 부군이었고, 동시에 고모 빅토리아가 빅토리아 여왕의 어머니인 켄트 공작부인이었기 때문.

2.2. 유년기


어린 시절은 매우 불행했다고 한다. 앨버트 공의 부모는 영지 문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가문 내의 결정에 따라 정략결혼했던 탓에, 앨버트 공이 태어났을 때 이미 각자 애인을 두고 있을 정도로 사이가 매우 나빴다. 결국 이것이 화근이 되어 이혼까지 한 데다[7] 사실상 쫓겨난 어머니가 얼마 지나지 않아 프랑스 파리에서 일찍 객사하기까지 이른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아내에 대한 화가 풀어지지 않았던 앨버트 공의 부친 에른스트 1세는 두 아들이 죽어가는 어머니를 만나러 가는 것은 물론 장례식에 참여하는 것도 금지했고, 앨버트 공은 부모의 이혼 이후 영영 어머니를 보지 못했다. 이런 불행한 가정사를 어린 나이에 겪어야 했던 앨버트 공은, '''자신은 가정을 꾸리면 좋은 남편, 성실한 아버지가 되겠노라 다짐했다'''.[8]
1836년 형 에른스트 공세자(훗날의 에른스트 2세)와 함께 고모인 켄트 공작부인을 만나러 간다는 핑계로 영국을 방문해, 사촌이자 당시 켄트 공녀였던 빅토리아와 첫 선을 보았다. 처음 빅토리아가 마음에 들어했던 사람은 유쾌하고 명랑한 성격의 에른스트였지만, 미남미녀를 대놓고(…) 좋아하는 것으로 유명했던 빅토리아는, 얼마 못 가 자신의 일기장에 "푸른 눈에 아름다운 코, 하얀 치아" 등 온갖 미사여구를 늘어놓았을 정도로 대단한 미남이었던[9] 앨버트 공에게 반해버렸다. 게다가 함께 지내면서 앨버트 공이 겸손하고 뛰어난 인품까지 갖춘 인물임을 알게 되자, 여왕은 즉위 3년 뒤 직접 청혼했다.[10]
낭만적이고 감성적이었던 빅토리아는, 앨버트가 청혼을 받아주자 너무나 기쁜 나머지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천사 같은 앨버트에게 사랑받는 느낌은 인간의 언어로는 결코 표현할 수 없다."고 일기에 적었을 정도였지만, 막상 앨버트는 '''"빅토리아는 나에게 너무 잘해주고 친절해요. 그녀가 나에게 보여주는 사랑을 생각하면 난감할 때가 있어요."'''라고 형에게 편지를 썼다고(…). 심지어 여왕의 시녀조차 결혼 첫날밤을 보낸 직후의 부부에 대해, 여왕은 앨버트에게 깊이 빠져 있지만 앨버트는 행복하지 않은 것 같았다고 증언해서 잠시나마 입장이 곤란해지기도 했다.

2.3. 결혼


부부생활은 주로 앨버트 쪽이 인내하는 편이었다고 한다. 처가살이하는 데릴사위라는 입장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앨버트의 성격이 진중했던 반면에, 빅토리아 여왕은 고집불통에 매우 화를 잘 내는 불 같은 성격이었기 때문. 부부싸움은 주로 사소한 사건에도 자주 성을 내곤 했던 빅토리아의 신경질로 시작되었는데, 이때 앨버트가 분위기 파악 못 하고 시시비비를 논리적으로 가리면서 빅토리아를 가르치려 들거나, 아니면 아예 입을 꾹 닫고서 그러려니 하는 무심한 태도를 보이면, 여왕은 점점 스팀이 오르다가 결국엔 참다 못해 이리저리 도망다니는 앨버트의 꽁무니를 쫓아다니며 짜증을 쏟아부었고, 나중에는 도저히 참지 못 한 앨버트가 꽥 소리를 지르거나 뛰쳐 나가버리는 패턴의 반복이었다고. 그 시절이나 지금이나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부부싸움은 거기서 거기인 모양이다.(...)
게다가 빅토리아 여왕의 주치의들조차 여왕이 할아버지 조지 3세처럼 하노버 왕조의 광기를 물려받아 정신이상자가 되는 게 아닌가 걱정했을 정도로, 빅토리아 여왕이 한 번 화가 났을 때 부리는 성질은 보통의 일반인들과는 차원이 다른 수준이었다고 한다. 그나마 앨버트쯤 되는 보살급 멘탈이니 그 성격 감당하고 산다는 게 당대에도 이미 중론(…).
그러나 이런 더러운 성미와는 별개로, 일단 흥분이 가라앉으면 여왕은 앨버트의 말이 맞고 자기가 너무 지나치게 화를 냈다는 걸 거의 인정해서, 먼저 다가가 용서를 빌고 화해를 청하는 쪽도 주로 빅토리아였다고 한다. 하루는 대판 싸운 앨버트가 자기 방에 틀어박혀 문을 잠가버리자, 빅토리아가 문을 열 것을 명령하며 "영국의 여왕이에요."라고 했을 때는 대꾸도 하지 않았지만, 다시 노크하며 "당신의 아내 빅토리아예요."라고 말하자 기쁘게 문을 열었다는 일화는 유명한 에피소드.
빅토리아 여왕은 근세 여성 군주의 한계상, 군주임에도 여느 여염집 아낙처럼 부군에게 순종하고 권력을 공유해야 하는 게 싫다는 이유로 엘리자베스 1세처럼 독신으로 살고 싶다고 처녀 시절 누차 언급했을 정도로 기가 세고 독립적인 여성이었지만,[11] 그러다가 앨버트와의 결혼 기간이 길어지면서 남편을 깊이 신뢰하게 되었고, 종국에는 완전히 앨버트 공에게 의존하는 성격으로 변해버렸다. 비록 여왕 본인이 내색은 안 했지만 스스로도 자신의 대단한 성격을 알고 이를 묵묵히 받아주는 앨버트에게 큰 감사함을 느끼게 된 것이다. 심지어 딸에게 보내는 편지에 '''"앨버트가 하지 말라고 하면 리본 하나라도 절대 함부로 매지 않았다."'''고 자랑스럽게 썼을 정도. 다만 빅토리아 여왕은 앨버트에게 심적으로 의존하는 것과는 별개로 여전히 매우 독립적이고 강인한 여성이였고 자신의 의지대로 통치했다.[12]

2.4. 부군으로서


200년만의 '여왕의 부군'[13]으로서 여러 선례를 스스로 만들어야 했으므로 고생이 심했다. 앨버트 이전에 앤 여왕의 부군으로 덴마크의 왕자였던 컴벌랜드 공작 조지가 있기는 했지만, 그는 앨버트와 달리 정치에 전혀 관심이 없었고, 앤 여왕에게 살아있는 후계자를 만들어주는 데도 실패하면서 공기급의 존재감을 과시했던 데다,[14] 아내가 여왕이 된 지 6년만에 사망한 탓에 별다른 선례가 없었기 때문.
또한 외국인이었기 때문에 결혼 초기에는 경계의 대상이 되어 꽤 고독했다고 한다. 삼촌 레오폴드 1세가 영국 왕위 계승자였던 샬럿 공주와 결혼해 벼락출세를 노린다는 험담을 들은 것처럼, 그도 여왕의 재산을 탐하고 여왕을 조종해 영국을 지배하면서 모국 독일의 이익에 충실하려 한다는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여왕과의 약혼 발표가 나자마자 영국 대중들 사이에서는 '''"새신랑은 의심의 여지 없이 뚱뚱한 영국 여왕의 두툼한 돈지갑을 노리고 왔노라"'''라고 앨버트를 조롱하는 발라드가 대유행을 했을 정도.
법적 지위를 부여받는 데도 앨버트는 푸대접을 받았는데, 결혼 후 17년 뒤인 1857년에야 간신히 '여왕의 배우자(The Prince Consort)' 칭호를 받았으며, 그 전에는 원래의 호칭인 'Prince Albert of Saxe-Coburg and Gotha, Duke of Saxony'에 직계 왕족과 결혼하면 무조건 붙는 HRH(His Royal Highness)이 추가로 붙은 것 외에 어떤 영국의 작위나 공적 지위도 없었다.[15]
원래 빅토리아 여왕은 앨버트 공에게 'King Consort' 호칭을 주고 싶었으나 독일인이라는 이유로 실패했고, 이후 의회와의 줄다리기 끝에 어렵게 남편에게 'The Prince Consort' 호칭을 부여하는 데 성공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앨버트에게 해군 제독 지위도 주고 싶어했지만, 이 지위는 기어이 못 받았다.[16]
이에 더해, 앨버트의 성격이나 성향도 영국인들과는 별로 맞지 않았다. 농담을 즐기고 재치 있는 사람을 좋아하는 영국인들에게 앨버트는 지나치게 진지하고 유머 감각도 없고 우울하기까지 한 사람이었던 것. 앨버트 공은 사교생활을 즐기지 않아 영국 귀족들과 사귀는 것이 매우 느렸던 데다[17], 밤늦게까지 호화로운 파티를 열고 춤추며 노는 영국 상류층들의 관습[18]은 아예 이해를 못 하다 못해 경멸해서, 성실하게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것을 강조했다.
게다가 앨버트 공은 복도 청소를 하는 하녀 옆을 지나갈 때조차 귀부인에게 하는 것처럼 모자를 벗고 "방해해서 미안합니다. 나는 신경쓰지 마세요."라며 정중하게 행동했고, 당시 상류층 남성이라면 흔히 두었던 애인 하나 제대로 만들지 않았던 데다, 임신해서 몹시 살찌고 예민해져 있는 아내 빅토리아 여왕을 보고[19] "미래의 어머니가 될 임산부는 너무나도 아름답다.",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내 아내"라고 부르며 옆에서 아주 충실하게 수발을 들어주었다. 이러한 19세기 영국인의 기준에 지나칠 정도로 도덕적이고 모범적이었던 앨버트의 행실과 마인드는 존경스러운 수준을 넘어서 왠지 가식적이고 위선적인 오버액션 정도로 받아들여졌다.
이런 상황이 곂치면서 앨버트 공은 덕망 있는 성품과 고결한 행실로 가족들과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존경을 받았지만, 이에 비해 친구는 별로 없어서 영국 귀족층들 사이에서는 배척을 받았다. 심지어 안 그래도 외국인 왕족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던 일반 대중들을 대상으로 한 신문지상에서는 '''차가운 샌님''', '''사이비 현학자'''라며 심심할 때마다 까이곤 했다. 앨버트 공의 도덕률에 깊이 공감했던 데다 열렬한 남편의 지지자였던 빅토리아 여왕은 앨버트가 지위고하를 불문하고 영국 신민들에게 평가절하 당하는 것에 몹시 분개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고.

2.5. 가정 생활과 자녀


이렇듯 안팎으로 도와주는 사람이 없다 보니, 결혼초의 앨버트는 자연스럽게 가정내의 문제에만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 켄트 공작부인과 집사인 존 콘로이의 폐쇄적인 양육하에서 자라난 빅토리아 여왕은 어머니를 몹시 싫어했고, 대신 가정교사인 레젠 여남작에게 의존했다. 이 때문에 켄트 공작부인은 딸의 정적들을 지원했을 정도로 여왕을 괴롭혔고, 레젠 남작은 자신만을 의지했던 빅토리아의 사랑이 앨버트에게 넘어갈 것을 염려해서 빅토리아와 앨버트 부부를 이간질하는 등, 빅토리아의 가정환경 역시 앨버트의 가정이 그랬듯 평범치 않았다. 사위이지만 동시에 친정 조카라는 이점을 살려 켄트 공작부인의 마음을 사로잡은 앨버트는 공작부인과 여왕을 어느 정도까지는 화해시키는 데 성공했고, 레젠 여남작을 독일로 쫓아내면서 문제를 해결했다. 이 시점 이후로 앨버트는 가정내의 문제 해결사 혹은 중재자의 역할을 맡게 된다.
여왕과의 금슬이 매우 좋아서 9남매를 낳았다. 빅토리아 여왕/가족관계 참고. 이 중 특히 앨버트가 사랑한 자녀는 첫째이자 장녀로 후에 독일황후가 되는 빅토리아 아델레이드 메리 루이즈(통칭 비키)로, 빅토리아 여왕이 내심 질투할 정도로 이 딸을 귀여워했다고 한다. 비키는 6세에 프랑스어를 완벽하게 소화하고, 14살에는 정치, 외교, 사회 다방면에서 막힘 없이 대화할 수 있는 지적 능력을 갖추었을 정도로 여왕의 자녀들 중에는 가장 탁월한 수재였는데, 이런 딸의 성향과 재능이 교양수준 높고 지적 욕구가 대단했던 앨버트의 구미에 딱 맞았던 것.
맏이의 성취에 감격한 앨버트와 빅토리아는 자식들의 능력을 과대평가한 나머지 둘째이자 왕세자인 버티에게는 측근 스톡마 남작마저 기겁할 정도로 빡센 교육 커리큘럼에 더해 왕세자 전용 군사교육까지 시켰다. 그러나 누나만큼 지적이지 못했던 버티는 이를 따라가지 못 했고 점점 비뚤어지기 시작했다. 여왕은 게으르고 공부를 멀리하며, 맨날 애인이 바뀔 정도로 사생활도 문란하고, 부모 말도 징그럽게 안 듣는(…) 장남을 매우 못마땅히 여겨 들들 볶았는데, 그런 빅토리아와 버티 사이를 더 나빠지지 않도록 중재했던 것도 앨버트였다. 그러나 앨버트 역시 외가인 하노버 왕조의 왕자들을 닮아 자신과는 성격이 완전히 다른 아들을 이해하지는 못 했고, 버티 또한 냉정하고 도덕적인 아버지의 설교에 그다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고. 후일 에드워드 7세가 되는 버티는 실제로 평범한 재능의 평범한 왕이었다는 평을 듣기는 해도, 빅토리아 여왕이 평한 것처럼 최악의 성품과 지능을 가진 둔재는 아니었으며, 오히려 외교 정책에 있어서는 부모보다 낫다는 평가도 있다.

2.6. 정치 관여


앨버트는 꽤 똑똑했고 의지도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여왕에게 조언하는 방식으로 간접적으로 정치에 관여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여왕임에도 여성은 정치에 관여해서는 안 되고 남편에게 순종해야 한다는 보수적인 여성관을 가지고 있던 빅토리아 여왕은 그의 조언에 잘 따르는 편이었다. 공식 직함은 없었지만, 단순히 여왕에게 조언하는 데 그치지 않고, 죽기 전까지 공식 문서는 앨버트가 먼저 읽어서 답변을 써놓으면, 그대로 신하들한테 주진 못 하고 빅토리아가 열심히 베껴써서 문서를 처리했다고 한다. 학식과 지성을 갖춘 데다 자유주의 성향이었는데 신하들은 독일 남자가 여왕을 조종한다고 신나게 깠다고.
업적으로는 수정궁으로 유명한 1851년 영국 만국박람회를 주도했으며, 이 박람회가 성공적으로 치러지자 빅토리아 여왕은 남편의 성공에 크게 기뻐했다고 한다.

2.7. 말년과 사망


1859년 8월, 앨버트는 위경련을 앓아 병상에 누웠다. 1860년 가을에는 코부르크에 가던 중 타고 있던 마차의 말이 달아나서 타박상을 입기도 했다. 이 때 앨버트는 형 에른스트 2세와 장녀 빅토리아 공주에게 죽을 때가 된것 같다고 털어놓았다고 한다.
1861년 3월, 빅토리아 여왕의 어머니 켄트 공작부인이 사망했다. 여왕은 생전 어머니를 싫어했지만 사망하자 매우 깊은 슬픔에 빠졌다. 앨버트는 위가 좋지 않았지만 슬픔에 빠진 여왕을 보좌했다. 그 해 8월에는 여왕과 함께 장남 앨버트 왕세자가 군 복무를 하고있는 아일랜드를 방문했으나 정작 왕세자는 그곳에서 아일랜드 여배우 넬리 클리프덴을 만나고 있었다.
1861년 11월에는 빅토리아 여왕과 앨버트 공의 사촌들인 페드루 5세와 페르난두 왕자가 장티푸스로 사망하였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앨버트는 왕세자가 여전히 넬리 클리프덴을 만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고, 이에 충격을 받은 그는 아픈 몸을 이끌고 직접 왕세자를 찾았다.
하지만 이후 앨버트의 몸 상태는 급격히 악화되어 결국 12월 9일 장티푸스 판정을 받았고, 12월 14일 윈저 성에서 빅토리아 여왕과 다섯 자녀가 곁을 지키는 가운데 사망했다. 당시에 주치의는 장티푸스로 진단했으나 지속적인 위경련과 통증 등으로 보았을 때 크론병이나 신부전증, 또는 이 사망원인이었을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많다.
빅토리아 여왕은 죽을 때까지 상복을 입고 남은 평생 그의 죽음을 애도했고, 남편이 망나니 아들을 훈계하러 무리해서 움직인 탓에 사망했다고 믿었기에 죽는 날까지 에드워드 7세를 용서하지 않았다.

3. 기타


  • 영국 런던의 유명 박물관 중 하나인 빅토리아-앨버트 박물관은 두 부부의 이름을 따 명명되었다.
  • 일본 판타지 소설 이상적인 기둥서방 생활의 주인공인 야마이 젠지로가 이 사람을 모티브로 했다는 주장이 있다. 실제로 둘을 비교하면 겹치는 부분이 많다. 정부()을 들이지 않고 일편단심 여왕만 바라본다거나[20], 나름대로 뛰어난 재능을 지녔지만 직접 정치에 나서지 않고 아내에게 조언하는 역할만 하는 등.
  • 형제로 형 에른스트 2세가 있었으며 아버지의 뒤를 이어 49년간 작센-코부르크-고타 공국을 통치했지만, 앞에서 말한 불행한 가정환경을 본 후유증으로 여자와 결혼에 대한 불신에 사로잡혀 방탕하게 생활하다 성병에 걸려 후사를 얻지 못하고 1893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 이후 작센-코부르크-고타 공국 공위와 1918년 이후의 가문의 수장 자리는 빅토리아 여왕과 앨버트의 차남인 에든버러 공 앨프러드와 그 후손들이 이어간다.
  • 앞의 유년생활에서 언급했듯이 불행한 가정 환경에서 자라났지만 이를 극복하고 훌륭한 아버지이자 남편이 되었던 케이스였기에, 아동학대 피해자 또는 잘못된 가정환경에서 자란 사람이 대물림을 끊고 훌륭한 부모가 되는 대표적인 사례로 언급된다. 또한 아내인 빅토리아 여왕 또한 부군 못지 않게 불행한 유년시절을 보냈기에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해주고 행복을 준 앨버트 공의 죽음에 대해 누구보다 큰 상실감을 느꼈으며 윈저 성에 앨버트 공이 사망한 방을 그대로 보존하는 등, 평생동안 그를 기리며 지내왔다
  • 뜬금없게도 페니스 피어싱 종류 중에 이 분의 이름을 따온 것이 있다. 이는 앨버트 공이 그곳에 피어스를 했다는 루머를 따른 것인데 물론 사실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다. 일설에 따르면 그곳의 치료를 위해 했다고 하지만, 검열삭제 시 즐거움을 위해 하는 경우가 많은 듯하다. 링크 다만 점잖고 엄숙주의적이었던 앨버트 공이 이런 것을 정말 했을지에는 의문이 든다.
  • TRPG 메이지 디 어센션에서는 오더 오브 리즌의 2인자이자, 아내인 빅토리아 여왕과 함께 오더 오브 리즌을 현대의 테크노크라시로 재구성한 위대한 테크노크라트로 묘사된다. 그가 주최한 1851년 런던 엑스포는 오더 오브 리즌이 테크노크라시로 재탄생하는 무대가 되었다. 앨버트 공의 죽음 이후 빅토리아 여왕은 테크노크라시의 운영과 후원에 더욱 깊이 관여하게 되었는데, 이는 아마도 테크노크라시를 남편의 유산으로 생각했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된다.

[1] 현 독일연방공화국 바이에른주 코부르크[2] 작센-코부르크-고타는 에른스트 계열의 막내뻘이다.[3]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작센마이닝겐, 작센코부르크잘펠트, 작센힐그부르크하우젠[4] 독일 왕가는 남계상속만 인정한다[5] 유럽 통치가문들은 베틴이니 비텔스바흐니 호엔촐레른이니 하는 본성이 있지만 영지명을 성으로 사용한다. 애초에 호엔촐레른, 부르봉, 발루아, 합스부르크 등 우리가 알만한 가문들의 성은 대부분 영지명에서 유래되었다. 예외가 있다면 카페 왕조오토 왕조 정도. 카페 왕조가 설립될 당시에는 가문명=영지명이라는 규칙이 생기기 전이었다.[6] 고모 중 하나가 러시아의 콘스탄틴 대공(니콜라이 1세의 형)과 결혼했다[7] 19세기까지 유럽 상류사회에서 이혼은 어디까지나 자녀가 없고 정치적, 경제적 이유가 확실한 경우 합의 하에 하는 것이 보통이었고, 불임 외의 개인적 사정이나 외도를 이유로 이혼하는 사례는 극히 드물었다. 그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이혼했으니, 전 유럽 상류층의 흥밋거리로 전락한 것은 물론, 두 사람 사이에서 난 자녀들의 평판에까지 영향을 미쳤을 정도로 커다란 스캔들이 되었다.[8] 그러나 불행하게도 앨버트 공의 형 에른스트 2세는 이와는 정반대로 여자와 결혼에 대한 불신에 사로잡혀, 방탕하게 생활하다 성병에 걸려 후사를 얻지 못 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래도 형제간의 사이는 원만했다고 한다.[9] 너무 잘 생겨서 공작의 아들이 아니라 이혼당한 공작부인이 잘 생긴 유대인 정부와의 사이에서 낳은 사생아라는 소문이 돌았을 정도였다. 물론 이는 악의적인 헛소문에 불과했다. 코부르크 가문에는 레오폴 1세를 비롯해 외모가 출중하다고 평가되는 인물들이 제법 있는 편이었다.[10] 빅토리아 여왕은 이때의 청혼에 대해 일기에 자세히 적어놓았다. "앨버트는 내가 기다리고 있는 접견실로 들어왔다. 그에게 접견실로 부른 이유를 알 거라고 하면서 내가 원하는 것에 그도 동의한다면 무척 기쁠 것이라고 말했다. …(중략)… 우리는 서로 포옹했다. 그는 무척 다정하고 친절했다. …(중략)… 나는 내가 그에게는 너무 부족한 사람이고 나와 결혼하면 많은 희생이 따를 거라고 말했다. 앨버트는 결코 희생이 아니며 나와 함께 일생을 보내는 것에 동의하는 것 이상으로 기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11] 빅토리아 여왕이 앨버트와의 결혼을 결심한 데에는 앨버트의 매력에 굴복한 탓도 있었지만, 당시 수상이었던 멜번과 지나치게 친밀한 모습을 보이면서 그와 결혼할지도 모른다는 괴소문이 퍼지는 바람에, 의회에서 '멜번 부인'이라는 조롱을 당할 정도로 여왕으로서의 체통에 큰 타격을 입고 있었던 점도 컸다. 적당한 왕족과 결혼해서 성실한 결혼생활 모습을 보여주는 것 외에는 스캔들을 잠재울 뾰족한 수가 없었던 것.[12] 사실 영국 내 귀족사회에서 은근한 따돌림을 받은 앨버트가 정치에 뭐라할 처지도 아니었지만....[13] 엘리자베스 1세는 결혼하지 않았고, 메리 1세의 남편 펠리페 2세는 영국 여왕의 부군이라기보다는 에스파냐의 왕이었으며, 메리 2세의 남편 윌리엄 3세는 자신도 영국 왕위 계승자였기 때문에 공동즉위했다.[14] 명색이 여왕의 정식 남편이라는 신분이었음에도, 사망했을 때 장례식조차 개인장으로 치러버렸다. 안습.[15] 왕이 아니면서 여왕의 부군이 된 또 다른 케이스인 앤 여왕의 부군 조지와 엘리자베스 2세의 부군 필립 공은 각각 컴벌랜드 공작, 에든버러 공작이라는 영국 작위를 받았다. 다만 'The Prince Consort'라는 호칭은 액면 그대로 해석하면 '여왕의 배우자'라는 단순한 호칭에 불과하지만, 역대 영국 여왕의 부군들 중 이 호칭을 부여받은 인물이 오직 앨버트 1명밖에 없을 정도로 귀한 호칭이다. 현 엘리자베스 2세의 부군인 필립 공조차 'The Prince Philip'일 뿐, 'The Prince Consort' 칭호는 아직까지도 받지 못 했다.[16] 후계자가 아닌 남성 왕족들은 군인으로 빠지는 게 일반적이었던 시대임에도 앨버트 공은 군대 경력이 없었다. 세계 최강의 해군이라는 굉장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던 영국 해군과 신하들 입장에서는, 아무리 여왕의 남편이라 해도 외국 출신 미필(…)에게 명예직일망정 제독 지위를 안겨준다는 것은 몹시 타협하기 힘든 일이었던 것도 사실. 현재 영국의 국서인 필립 마운트배튼 경은 해사 출신이라서인지, 해군 최고사령관직과 육해공군 원수직을 겸하고 있다.[17] 결혼 후 1년이 지난 시점에조차 본가의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에 친구라고는 코부르크에서부터 함께 온 시종과 애완견밖에 없다고 적었다.[18] 빅토리아 시대 사교계의 여왕으로 꼽혔던 베드포드 공작부인(버트런드 러셀의 큰할머니)은 새벽 4시까지 즐거운 나이트 라이프를 실컷 즐기고 다음 날 낮 11시에 일어나는 생활방식을 고수했다. 영국 요리의 전세계적인 '''악명'''에도 불구하고 영국식 아침식사와 함께 쿠키, 케이크가 곁들여지는 애프터눈 티는 양도 많고 맛도 좋은 것으로 유명한데, 애프터눈 티를 즐기는 문화가 그렇게 발전한 것은 애프터눈 티가 간식이라기보다 이렇게 늦게 일어나는 귀부인들의 아점용이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19] 원래부터 키가 작고 뚱뚱했던 빅토리아 여왕은 임신을 하면 "술통 같이 부풀어오르고 있다"고 표현될 정도로 더더욱 살이 쪘고, 성격 또한 원래의 급함에 더해 몹시 까칠해지곤 했다. 특히 앨버트가 눈에 보이지 않으면 매우 화를 냈다고. 자리를 옮기고 싶을 때마다 앨버트로 하여금 자신을 번쩍 들고 옮겨달라고 요구했던 것은 유명한 일화. 안 그래도 빅토리아 여왕이 정신줄을 놓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하던 그녀의 주치의들은 여왕의 성격이 임신할 때마다 위험 수준으로 괴팍해지자, 어느 정도 왕실 자녀들이 태어난 뒤에는 더 이상 아이를 가지지 말 것을 권유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이들을 몹시 좋아했던 앨버트와 아이들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사랑하는 앨버트의 말이라면 일단 따랐던 빅토리아는 그 권고를 무시했다.[20] 비록 그 이전시대보다는 여성의 권리가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빅토리아 여왕이 다스리던 시절에도, 귀족 부인들이 애인을 만들면 욕을 먹지만, 남성 귀족들이 정부를 만드는 건 도덕적으로 전혀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던 사회였다.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 예카테리나 2세도 남편의 정부 때문에 마음고생을 심하게 했다. 정부를 전혀 만들지 않았던 루이 16세가 오히려 무능력한 남자 취급을 받고, 그의 아내 마리 앙투아네트프랑스 국민들로부터 투기가 심하다고 비난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