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텐베르크의 공자 루트비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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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루트비히 알렉산더 폰 바텐베르크[1]
(Ludwig Alexander von Battenberg)
'''출생'''
1854년 5월 24일
오스트리아 제국 그라츠
'''사망'''
1921년 9월 11일 (67세)
영국 런던
'''배우자'''
헤센의 공녀 빅토리아(1884년 결혼)
'''자녀'''
앨리스, 루이즈, 조지, 루이
'''아버지'''
헤센의 알렉산더
'''어머니'''
율리아 하우케
'''형제'''
마리, 알렉산더, 하인리히, 프란츠 요제프
1. 소개
2. 생애
3. 여담


1. 소개


영국귀족, 군인, 초대 밀포드 헤이븐 후작(1st Marquess of Milford Haven).
독일의 왕족 출신이지만 영국 해군에 복무하여 제1해군경까지 오른 인물로 버마의 마운트배튼 백작 루이의 아버지이자 에든버러 공작 필립의 외할아버지이다.

2. 생애


1854년 오스트리아 제국 그라츠에서 헤센의 알렉산더와 율리아 하우케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난다. 아버지인 헤센의 알렉산더는 헤센의 대공 루트비히 2세의 4남으로 여동생인 마리가 러시아 제국의 황태자비였기 때문에 러시아 군에서 복무하고 있었다. 잘생기고 유능했던 알렉산더는 러시아에서 용감한 군인들에게 수여되던 성 조지 훈장을 수여받으며 스스로의 능력으로 러시아 군에서 인정받았지만, 여동생의 시녀였던 율리아 하우케[2]에게 반해 그녀와 야반도주하여 귀천상혼을 하게 된다. 야반도주한 부부를 본 형인 루트비히 3세는 달가워하지 않았지만 율리아에게 바텐베르크 백작 부인의 작위를 내려주었고 루트비히가 태어난지 4년 후 바텐베르크 공비로 승격되었다. 이로 인해 루트비히는 바텐베르크 공자로 불리게 되었다. 루트비히가 태어났을 무렵 알렉산더는 오스트리아 군 소속으로 제2차 이탈리아 독립전쟁에 파견되기도 하였다. 그로 인해 루트비히는 이탈리아 북부를 오가면서 성장했다.
루트비히의 고모가 러시아의 황후였고 친가 역시 헤센 대공가였지만, 귀천상혼으로 태어났기에 독일에서 사회적인 한계를 느낄 수밖에 없던 루트비히는 해군에 푹 빠지게 되어 해군이 되는 것을 꿈꾸게 된다. 그러나 당시 독일 해군은 미약했기 때문에 사촌인 루트비히 4세와 결혼한 앨리스 공주의 도움으로 영국 해군에 입대하게 된다.
14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영국 해군 사관후보생이 된 루트비히였지만 당시 영국 해군의 시스템에 따르면 사관후보생은 어려서부터 배를 타왔기 때문에 14살에 사관후보생이 된 루트비히는 해군으로서 알아야 할 것을 몰라서 적응에 힘들어 했으며, 귀족이었기 때문에 선원들의 거친 대화와 행동에 충격을 받았다. 또한 어린 나이에 집을 떠났기 때문에 향수병에 걸리게 된다. 그런 루트비히를 당시 웨일즈 공이었던 에드워드 7세 부부는 자신들의 순방에 따라오게 하면서 적응을 도왔다고 한다. 이 여행으로 기운을 차린 루트비히는 사관 후보생 과정을 마무리하기 위해 아메리카로 떠나게 되었고 아메리카에서 3년 이상 머물면서 적응하는데 성공해 훌륭한 해군 장교가 될 수 있었다.
1876년 해군 대위로 승진한 루트비히는 그에게 늘 호의적이었던 웨일즈 공에게서 시종 무관이 되어달라는 제의를 받게 되어 말버러 하우스에 방을 얻게 된다. 그리고 이 때 웨일즈 공 일가와 친분을 쌓게 된다. 그러나 바다에 있기를 원했던 루트비히는 해군에 복무하고 있던 웨일즈 공의 동생인 에든버러 공작 앨프리드[3]의 제의로 다시 배를 타게 된다.
1883년 루트비히는 자신의 5촌 조카인 헤센의 공녀 빅토리아와 연애하게 된다. 둘이 처음 결혼하겠다고 했을 때 빅토리아의 아버지인 루트비히 4세와 외할머니인 빅토리아 여왕 모두 반대했다. 특히 여왕은 빅토리아가 혼자 사는 아버지의 곁에 남아서 아직 어린 동생들을 돌보고 아버지를 보좌해야하는데 루트비히와 결혼하면 영국에서 살아야 한다는 점 때문에 결혼에 반대했다. 하지만 빅토리아와 루트비히는 여왕에게 루트비히는 1년에 반 이상 바다에 있어야 하고 그 시기에 빅토리아가 집에 돌아와 아버지와 동생들을 돌보면 된다고 여왕을 설득해 결혼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둘의 결혼식에서 빅토리아 여왕의 막내 딸인 베아트리스 공주와 루트비히의 동생인 하인리히가 첫 눈에 반해 결혼하게 된다.
결혼까지의 과정은 부부가 서로를 잘 이해할 수 있게 했다. 루트비히는 해군 장교였기 때문에 늘 빅토리아의 곁에 머무를 수 없었고 빅토리아 역시 아버지와 동생들을 위해 남편과 태어날 아이들에게 온 신경을 쏟을 수 없었다. 하지만 둘은 서로의 상황을 이해하고 서로 보완되는 역할을 하면서 행복한 결혼 생활을 누리게 된다. 빅토리아는 루트비히보다 지위가 높았지만 결혼 생활 동안 자신의 신분을 내세우지 않고 남편의 신분에 맞는 지위를 사용했으며 루트비히는 자신의 동료들에게 자신의 아내는 자신이 극동으로 발령나더라도 완벽하게 짐을 꾸려줄 수 있다고 자랑했다.
루트비히는 재산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일반적인 영국의 중산층처럼 살았으며 여왕은 정원 없는 집에서 증손자들이 뛰어 놀 공간이 없을까봐 걱정되어 버킹엄 궁전의 열쇠를 내주기도 했다.
왕실 요트 HMY 빅토리아 & 앨버트의 함장이었던 루트비히는 결혼한 뒤 중령으로 진급했다. 해군 장교로서 제대로 된 함선을 지휘하고 싶어했던 루트비히는 1889년 어뢰순양함 HMS 스카웃의 함장으로 임명되었다. 1891년 대령으로 승진한 루트비히는 해군과 육군 사이의 연락 장교로 일을 했고 짬을 내어 1892년에는 배들 간의 상대 속도를 측정하는 기기를 고안하기도 했다.[4] 이후 1894년에는 지중해 함대에서 방호순양함 HMS 캠브리안의 함장으로 근무했고, 1897년에는 해협 함대에서 전함 HMS 마제스틱의 함장으로 근무했으며, 1899년에는 해군 정보국 부국장으로 임명되었다.
1901년에는 지중해 함대에서 전함 HMS 임플레커블의 함장이 되었으며 1902년 지중해 함대 부사령관이 급사하자 선임 대령[5]으로 진급해 공백을 메웠고, 그 해 해군 정보국장이 되었다. 1904년 소장으로 진급한 루트비히는 도거 뱅크에서 러시아 해군이 영국 어선에 발포한 사건이 일어나자 자신의 인맥을 이용해 사건을 해결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이후 루트비히는 2년 동안 제2 순양함 전대장을 지냈고, 이후 지중해 함대 부사령관을 지냈다. 1907년 중장으로 진급한 루트비히는 대서양 함대 사령관이 되었다. 2년 뒤인 1909년에는 새롭게 창설된 본토 함대의 제3-4전대장이 되었다.
1911년 드레드노트급의 건조를 이끌었던 존 피셔 제독은 "그는 해군성의 목록에 있는 제독들 중 가장 유능한 관리자입니다."라며 해군 장관 윈스턴 처칠에게 루트비히를 제1해군경으로 추천했다. 하지만 언론은 그가 독일 왕족 출신임을 들어 반대했고 결국 루이는 제1해군경이 아닌 제2해군경[6]이 되었다. 1년 후 대장으로 진급한 루트비히는 제1해군경이 되었지만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독일 왕족 출신이라는 그의 신분이 또 다시 발목을 잡게 되어 1914년 제1해군경을 사임하고 예비역으로 편입하게 된다.
이 사태에 대해 가장 분노한 사람은 아내인 빅토리아였다. 빅토리아는 남편이 영국 해군으로서 누구보다 자부심을 가져왔던 사람임을 알기에 부당한 대우에 크게 분노했으며 자신의 사촌인 조지 5세를 비난했다. 루트비히가 공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영국 내의 반 독일 정서는 심각했고 조지 5세는 왕가의 이름을 작센코부르크고타에서 윈저로 개명하게 된다. 이와 함께 독일계 귀족들도 영국식으로 개명할 것을 요구했고 루트비히 역시 이를 받아들여 성을 마운트배튼으로 고치고 밀포드 헤이븐 후작위를 받게 된다.
제1차 세계대전은 루트비히와 그의 집안에 큰 비극이 되었다. 그리스로 시집간 은 망명해야 했으며 러시아로 시집간 들은 살해당했고 독일 쪽 처제는 적이 되었다. 특히 러시아로 시집간 자신의 두 동생들이 살해당한 것에 충격받은 빅토리아를 위로한 루트비히는 빅토리아와 독일 쪽 동생들(이레네(1866~1953), 에른스트 루트비히(1871~1937))이 만나는 걸 돕고 엘리자베트의 시신을 예루살렘으로 이장할 때 빅토리아와 동행하기도 했다. 재정적으로도 크게 안좋아져 러시아에 투자했던 돈은 모두 볼셰비키에 의해 몰수되었고, 독일에 있던 재산은 마르크화의 붕괴로 인해 아무런 쓸모가 없게 되었다. 결국 루트비히는 살던 집과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았던 하일리젠베르크 성을 팔아야 했다.
전쟁이 끝난 뒤 1921년 조지 5세는 루트비히를 예비역 원수로 진급시켰다. 그러나 루트비히는 그 해 9월 11일 런던에서 심부전으로 사망하고 장례식은 와이트 섬 위핑험 세인트 밀드레드 교회에서 치루어졌다.

3. 여담


  • 루트비히는 젊은 시절 에드워드 7세의 정부였던 릴리 랭트리와의 관계를 가진 적이 있었고, 랭트리가 아이를 임신하자 자신의 아이라 생각해 결혼을 심각하게 고려를 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랭트리의 남편이 이혼을 거부했고 루트비히의 부모 역시 결혼을 반대해 둘은 헤어지게 되었다. 이후 루트비히는 이 스캔들로 인해 한동안 해외를 돌아야 했는데 1881년 릴리 랭트리의 딸인 잰 마리 랭트리가 태어나자 학비를 지원했다고 한다. 이외에도 결혼 전에는 잘생긴 외모로 인해 바람둥이로 소문났었다고 하며, 훗날 자녀들을 위한 회고록에 자신의 미혼 시절 연애사 역시 기록했는데 이 부분에 "Not for My Daughters"라는 태그가 붙어 있었다고 한다.
  • 빅토리아 여왕과 에드워드 7세 사이의 일화가 남아있는데, 빅토리아 여왕은 외손녀인 헤센의 공녀 빅토리아를 아껴 빅토리아가 영국에 있을 때마다 항상 외할머니인 여왕과 같이 지내오게 했다. 그로 인해 남편인 루트비히 역시 자주 윈저 성에서 머물렀는데 1889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아내와 함께 윈저 성에 머물던 루트비히는 여왕이 아침식사에서 가족들에게 "사람들이 버티를 해군 원수로 임명하라고 하는구나. 하지만 나는 이를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하지만 웨일즈 공의 해군 원수 임명이 해군에게 있어서 일종의 위신 문제인 것을 알고 있는 루트비히는 식사 후 아내에게 이것이 중요한 문제임을 이야기 해주고 빅토리아 역시 남편의 말을 이해해주었다. 며칠 후 빅토리아가 여왕에게 왜 그런 이야기를 했느냐고 물어보자 여왕은 "아주 오래 전 내가 결혼했을 때, 나는 사람들에게 내 남편에게 해군 원수 직을 주자고 했지만 그들은 거절했었단다."라고 했다. 즉 여왕은 사랑하던 남편이 생전 받지 못한 직위를 못마땅한 아들에게 주자고 한 것에 화가 났던 것이었다. 그러자 옆에서 이야기를 듣던 루트비히가 여왕에게 웨일즈 공이 해군 원수가 되어야 하는 당위성을 열심히 설명했고, 여왕은 한 마디도 이야기 하지 않았지만 며칠 후 웨일즈 공에게 해군 원수 직을 수여해주었다고 한다.
  • 1880년 루트비히는 아버지와 함께 건강이 안좋았던 고모 마리야 황후를 보러 러시아로 갔다. 둘을 맞이하기 위해 러시아 황실 가족이 모두 기차역으로 마중을 나갔는데 폭설이 내려 기차가 30분 연착했고, 황실 가족이 겨울 궁전으로 돌아오는 시점에 식당에서 폭탄 테러가 일어났다. 만일 기차가 연착하지 않았다면 황실 가족 모두가 식사를 하고 있었을 시간에 폭탄이 터졌을 것이라고 한다. [7]
  • 루트비히의 둘째 아들인 루이도 1955년 제1해군경에 임명되면서 부자가 나란히 제1해군경을 역임하는 진기록을 세웠다.

[1] 개명 후 이름은 루이 알렉산더 마운트배튼(Louis Alexander Mountbatten)[2] 폴란드 국방차관이었던 한스 모리츠 하우케 백작의 딸이었다.[3] 에든버러 공작 역시 해군에 복무했고 해협 전대장, 지중해 함대 사령관, 플리머스 해군 기지 사령관 등을 지냈다.[4] Battenberg Course Indicator, 이 기기의 처음 디자인을 루트비히가 했고 이후에도 여러 번 개량되지만 기본적인 원리는 루트비히가 고안한 방식이다.[5] Commmodore 2nd Class.[6] 제2해군경은 영국 해군의 모든 인사 업무를 관장하는 직책이었다.[7] 마리야 황후는 얼마 뒤 세상을 떠났고, 알렉산드르 2세는 이듬해 3월 결국 폭탄 테러로 암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