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엑셀
HYUNDAI EXCEL
1. 개요
현대 엑셀은 현대자동차에서 생산했던 전륜구동 소형 승용 자동차의 모델명이다.
현대의 소형차의 1세대인 포니, 포니2의 후속이다.
2. 1세대 (X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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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수출용. (당시 미국 안전규정 때문에 헤드라이트, 범퍼 모양이 내수용과 달랐다.)
미국시장 프리런칭 광고(자막 버전)
현대자동차의 전륜구동 소형 승용차. 개발프로젝트명은 X카.[1] 포니의 후속 모델로 1985년 2월에 출시했으며, 대한민국 최초의 전륜구동 승용차이다.
1세대인 X1은 1985년 2월 해치백형인 (포니)엑셀이 먼저 출시되었고, 반년 후인 7월 세단형 프레스토[2][3] 가 출시되었다. 이 모델 이전까지 현대자동차의 대표작이었던 해치백 포니의 성공을 잇기 위해 해치백을 먼저 출시했고 이것이 시장에 안착한 후 반년 뒤에 세단형을 출시했다. 해치백은 포니를 능가한다는 의미의 '포니엑셀'이라 명명했고, 세단형은 포니와 달리 해치백이 아니기 때문에 '프레스토'라는 별도의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1986년에는 해치백 모델에서도 포니를 떼고 '엑셀'이라는 모델명으로 변경했다.
80년대 후반은 3저 호황에 힘입어 대한민국 역사상 최고의 성장률을 보이던 시절이었고 이를 바탕으로 마이카 붐이 일어 1세대 엑셀/프레스토는 큰 성공을 거둔다. 특히 높아진 소득 수준으로 인해 해치백 엑셀보다 세단형인 프레스토의 판매량이 더 좋았고, 2세대 엑셀부터는 세단형이 기본 모델로 자리잡게 되었다.
현대자동차는 1986년 이 모델을 통해 처음으로 미국 시장에 진출했다. 북미에서는 세단형, 해치백형 모두 '엑셀'이라는 모델명으로 통일하여 판매했다. 유럽에서는 전작 포니의 인지도를 바탕으로 포니라는 이름을 이어가자는 딜러들의 의견으로 '포니'라는 이름으로 판매되었다.
2.1. 엑셀 (해치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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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형 엑셀 해치백 미국수출형(내수용과 헤드라이트, 그릴, 범퍼 모양이 다르며, 내수용에 있던 도어 새시의 크롬몰딩이 없다. 헤드라이트가 안으로 들어가 있는 형태인 것은 당시의 미국 법규에 맞추기 위한 것이고, 당시에는 미국에서 판매되는 자동차들은 모두 이처럼 안으로 파묻힌 헤드라이트를 달고 있었다. 이후 1985년에 미국 법률이 개정되어 1986년경부터는 이런 헤드라이트가 아닌 일반적인 형태의 헤드라이트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고, 미국수출형 엑셀 역시 국내 엑셀에 달려 있던 본래의 헤드라이트로 변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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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형 엑셀 해치백.
포니와 마찬가지로 조르제토 쥬지아로의 손을 거친 디자인을 받아 설계/생산하였으며, 플랫폼은 미쓰비시의 1세대 미라지의 전륜구동 플랫폼을 활용했다.# 포니의 흔적이 남아 있지만 세련되어진 디자인과 1.3/1.5리터의 미쓰비시 오리온 엔진을 얹었다. X1 엑셀에는 전자식 카뷰레터인 FBC[4] 방식의 연료제어 장치가 들어가 겨울 시동성과 출력, 연비가 향상되었다.
특이한 점은 개발 과정에서 차체 스타일링은 4도어 형태인 프레스토가 2달 먼저 만들어졌으나 정작 5도어 해치백형 모델인 포니 엑셀이 먼저 생산되었다는 것이다. 이전까지 현대자동차의 대표 모델이 포니2였고 때문에 포니2의 성공과 명성을 그대로 이어가려는 의도였던 것으로 보였다. 포니와 포니2의 동시대 모델이자 동급의 세단형 승용차인 맵시나가 포니 시리즈에 비해 매우 저조한 판매량을 보였다는 점에서 당시까지만 해도 소형차 라인업에 세단형을 출시하는 것은 아직 충분히 모험이라 여겨졌을 수 있다. 때문에 해치백형을 먼저 출시하여 포니2의 후광을 받아 시장에 안착시킨 후 세단형을 출시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해치백형은 출시 당시 '포니엑셀'라는 모델명으로 출시되었는데, 현대자동차는 이 차가 기존의 5도어 해치백 차량인 포니 2의 후속임을 명시함과 동시에 '전륜구동 + 해치백'이라는 점을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하지만 한편으로 트렁크가 달린 세단이라야 품위가 있다고 생각하는 우리나라 시장을 고려하여 세단형도 개발했다. 해치백 포니엑셀이 먼저 출시되어 시장에 확실히 안착한 후 약 반년 후에 프레스토가 출시되었다. 해치백이 아니기 때문에 포니라는 이름을 사용할 수는 없었고 프레스토라는 별도의 이름으로 출시되었다.
1986년 중반 대우자동차에서 경쟁 모델인 르망을 출시할 무렵 3도어 모델과 AMX(보통 아멕스라고 불렀었다)[5] 를 발매하였고, 해치백 모델명을 '포니엑셀'에서 '엑셀'로 바꾸었다. 3도어 모델은 '엑셀 스포티'[6] 였다. AMX가 출시되면서 차체 또한 다소 커졌다.
포니에 이어 자체적으로 개발, 생산한 2번째 모델이다. 하지만 아직 별다른 기술력이 없던 시절인지라 지금 기준으로 볼때 서스펜션을 비롯한 설계 전반에서 허술한 점이 많아[7] 노면이 조금이라도 거칠어지면 출렁대는 차체, 잦은 잔고장이 있었다.
하지만 당시 기준으로 볼 때 엑셀과 프레스토는 제대로 된 최초의 현대적 개념의 승용차라 할 수 있는 차량으로 당시에는 첨단 사양으로 대거 무장했다는 평가를 받았을 정도로 편의 사양 등에서 장족의 발전이 있었던 모델이었고 이를 바탕으로 미국에 수출하여 초반에 큰 성공을 거두기도 했을 정도였다. 80년대 후반 세계 경제 호조에 따른 한국의 고도의 소득성장과 궤를 같이 하며 이전까지 자가용은 부자들이나 소유하는 것이라는 인식에서 한가정에 자가용 한대는 가지게 되는 마이카 시대로 전환되던 당시 그 마이카의 상징과도 같았던 차량이었다.
당시 3저 호황으로 초고속 성장기에 있던 대한민국의 분위기를 타고 엑셀과 프레스토는 큰 성공을 거두었고, 소득수준의 향상과 함께 갈수록 해치백 엑셀보다 세단형 프레스토가 더욱 큰 인기를 끌게 되었다.[8]
엑셀과 프레스토의 폭발적인 인기로 타사에서 서둘러 경쟁 차종을 출시했다. 특히 1986년 르망이 보다 커진 차체와 개선된 편의사양 등으로 좋은 평가를 받으며 엑셀, 프레스토의 아성을 위협하기 시작했으나, 엑셀, 프레스토도 르망에 비해서 싼 값과 뛰어난 연비가 강점으로 꼽히며 꾸준히 팔려 나갔다. 1987년에는 자동차공업합리화조치 해제로 승용차 시장에 다시 뛰어든 기아자동차가 경쟁 전륜구동 차량인 프라이드을 내놓으면서 경쟁에 가세했다. 르망의 꾸준한 상품성 개선[9] 으로 대응했다. 엑셀, 프레스토 역시 AMX 출시 등으로 상품성을 개선해 나갔으나, 선발 주자의 한계로 디자인과 섀시 등 성능 면에서 경쟁력이 떨어져 갔다. 그리하여 1989년 4월 풀체인지 모델인 2세대 엑셀이 출시되었다.
1세대 엑셀과 프레스토는 처음으로 본격적으로 해외로 수출된 차종이다. 포니, 포니2도 해외 수출되기는 했지만 수출량이 크지 않았고, 수출 국가도 제한적이었으며, 특히 배기량 기준 때문에 미국으로 수출되지 못했다. X1 엑셀/프레스토는 미국 시장에 처음 출시된 현대자동차였다.
미국과 캐나다 시장에서는 엑셀이라는 이름으로 수출되었고,[10] 유럽에서는 포니라는 이름으로 수출되었다.
유럽 지역에서 포니라는 이름으로 수출되었던 것은 딜러들의 요청이었는데, 포니가 싼 값에 뛰어난 디자인 감각으로 꽤나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11] 그리고 차량의 이름을 잘 바꾸지 않는 외국 문화와도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국에서도 사실 포니란 이름을 존치하자는 의견과 엑셀이라는 이름을 새로 붙이자는 의견이 충돌하다가 결국 두 이름을 모두 사용하는 것으로 절충했다는 설이 있다. 참고로 미국에서는 포드 머스탱, 쉐보레 카마로 등을 미국에서 지칭하는 표현이 바로 '포니카'라고 불리는데, 이 때문에 경제적인 소형차에 '포니'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은 미국에서는 굉장히 쌩뚱맞은 것이다. 하지만 유럽에서는 사정이 다르므로 포니라는 이름이 계속 이어졌는데 1994년 등장한 엑센트까지 유럽에서는 포니로 불리면서 포니의 명맥을 이어 갔다.
수출 첫 해 16만 여대가 판매되어 그 해 최다 판매된 소형 수입차에 선정되었다.[12] 매우 싼 가격에 탈 만한 차임은 입증된 셈이다.[13] 영화 터미네이터2(1991) 트럭 추격씬에서 도로 상에 등장하는 등 당시 미국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차가 되었다. 그러나 1988~1989년에 이르러서 수출된 차들이 말썽을 부리기 시작할 즈음, 제대로 된 정비망 하나 갖추지 못했던 현대자동차는 현다이(DIE!)라는 오명을 얻고 말았다. 차가 고장나도 부품을 구할 곳이나 수리할 곳이 마땅치 않았던 것이다. 이후 X2 엑셀이나 엘란트라, 아반떼와 같은 차량들이 X1 엑셀에 비해 품질이 발전했음에도 불구하고 판매는 계속 시망.. 게다가 1989년 현대자동차 파업사태가 겹치면서 현대자동차의 이미지는 미궁 속으로 빠져들어갔다.(그래도 살 사람은 다 샀다.) 다행히 뼈를 깎는 노력 으로 이런 평가는 NF 쏘나타를 미국에서 생산하기 위해 앨라배마 주에다가 공장을 세운 2005년 즈음에서야 겨우 어느 정도 회복하는데에 성공했다.
2.2. 프레스토 (세단)
해치백 (포니)엑셀이 출시된지 약 반 년 후인 1985년 7월 4도어 세단형이 출시되었다. 차명은 (포니)엑셀과 다른 프레스트라는 별도의 이름이 네이밍되었다. 세단형이었기 때문에 해치백에 쓰이던 포니[14] 라는 네이밍을 할 수 없었기 때문. 단, 이는 어디까지나 우리나라 국내 시장에서 해치백형인 포니 엑셀과 차별화하기 위해서 별도의 이름을 붙인 것일 뿐이며, 해외 시장에서는 포니 엑셀과 동일한 포니(북미 외의 시장용) 또는 엑셀(북미 시장용)로 불렸다.
2.3. 기타
모형화된 제품은 크로바완구,세창기업의 1/32 스케일 다이캐스팅 모델과 아카데미과학의 1/24 스케일의 프라모델 제품이 있다. 다만 제품화된 시기가 30년을 넘은 제품인지라 구하기 힘들고 프리미엄이 상당히 센편이다. 다이캐스팅 모델 중에 완성도가 뛰어난 제품은 세창기업 제품이다. -
프라모델의 경우 다이캐스팅 미니카 모델만큼이나 구하기 어려운 편에 속했으나 최근 수출용 물량이 국내에 어느정도 풀려서 구하기가 약간은 수월해졌다. 물론 가격이 부담스럽긴 하지만 그나마 다이캐스팅 모델이나 아카데미 국내판 프라모델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저렴한 편에 속한다. 다만 프라모델의 경우 내구성 문제라던가 구매자가 직접 조립을 해야하는 번거로움, 제작자의 실력에 따라 완성도가 나뉜다는 점 때문에 자동차모형 수집가들은 그다지 선호하지 않고 프라모델 수집가나 장난감 자료수집가들이 찾는 정도라고 한다. 그렇지만 다이캐스팅에 비해 상대적으로 구하기 쉽고 디테일도 무난하고 저렴하니 포니엑셀을 찾는다면 구매해볼만하다.
람보르기니 쿤타치의 옵션으로 있던 스포일러의 별명이 현대 윙이었는데 그 이유가 그 스포일러가 이 차보다 비쌌기 때문이다.
3. 2세대 (X2)
미국과 한국에서의 이름은 엑셀, 유럽에서의 이름은 포니[15] 였다.
1세대 엑셀/프레스토(X1)의 풀체인지 모델이다. 개발 코드네임명은 X2. 1989년 4월 1일에 정식으로 출시되었다. X1 엑셀, 프레스토와 차대를 공유하였다. 하지만 새로운 설계가 들어갔으며, 실내 장폭도 늘어났다.
당시 세계적으로 급 유행하던 유선형 디자인을 받아들여 1세대 엑셀/프레스토와는 외관에서 다른 느낌을 주었다. 당시 현대자동차는 이와 같은 유선형 디자인을 모든 차종에 반영하여 2세대 쏘나타(Y2), 2세대 그랜저 또한 각진 디자인에서 유선형으로 바꾸었다.
현대자동차의 섀시 개발 능력은 이로부터 일신하여 X2 엑셀의 전륜구동 플랫폼으로 스쿠프도 생산했다. 이 때문에 스쿠프를 엑셀 쿠페로 보는 시각도 있다.[16] 스쿠프가 엑셀의 차대를 이용했다고 해서 사람들의 놀림거리가 되었지만, 꽤 오랜 기간 모터 스포츠판에서 생존했던 것을 기억한다면 현대자동차의 섀시 개발 능력이 어떻게 성장해 왔는지 추측할 수 있는 중간 단계가 바로 엑셀이다.[17]
3.1. 초기형 (1989 ~ 1991)
1986년부터 약 3년 여에 걸쳐 1,500억원을 투입해 개발했으며, 1세대 엑셀 및 프레스토의 전륜구동 플랫폼이었던 미쓰비시 미라지/콜트 A150의 플랫폼을 이월하여 개량한 신형 미라지 C10/30 플랫폼을 바탕으로 기존의 각진 스타일에서 벗어나 컴퓨터 설계를 통해 풀 에어로 다이나믹 스타일의 디자인으로 실내공간을 넓혔다.[18] 미쓰비시의 오리온 엔진을 그대로 썼지만, 당시 현대자동차 승용모델 중 쏘나타나 그랜저 등의 고급 라인업에나 들어가던 다중 연료분사(MPI) 엔진을 1.5리터 배기량 형식으로 탑재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본래 현대자동차에서 기획한 모델명은 다른 것이었지만 수출 전략 차종으로 활약하던 1세대 엑셀의 후속 모델이었던 만큼 미국 딜러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기존 '엑셀'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으로 타결되었다고 한다.
1989년 4월 1일에 정식 출시되어 무난한 가격과 괜찮은 성능 그리고 모나지 않은 디자인으로 큰 인기를 얻으며 페이스리프트가 출시되기 전까지 3년간 판매량 1위를 기록하였다. 국내 출시와 동시에 미국시장에도 선보일 예정이었으나 1세대 엑셀의 재고 처리 문제 때문에 수출 계획에 차질을 빚기도 했다[19] . 그래도 이후 X1 엑셀의 후속 모델로 해외 수출에 호조를 띠며 쏘나타와 함께 현대자동차의 해외 진출에 기여한 모델로 기록된다.
출시 당시에는 기본 트림인 1.3리터 및 1.5리터 L, 중급형인 1.5리터 GL, 1.5리터 MPI 엔진이 탑재된 고급형인 GLSi 등 4가지 트림으로 출시되었다. 이후 출시 4개월 뒤인 1989년 8월부터 고급형 트림 GLSi에서 자동변속기, 강력 에어컨, 파워스티어링, 중앙집중식 잠금 장치, 광폭 타이어 및 전용 알루미늄 휠 등을 기본 사양으로 적용한 최고급형 트림인 TRX(Top Range eXcel)를 추가로 출시하였다.
1990년에는 소형택시 모델을 출시하기도 했으나,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정부가 택시 중형화/고급화 정책을 펼치면서 중형택시 열풍의 수혜자가 된 스텔라의 아성에 눌려 별로 빛을 보지 못했다.[20]
더불어 X1 엑셀의 컨셉을 물려받은 3도어와 5도어 트림도 추가로 출시하였는데 이들은 전부 1.5리터 배기량으로만 구성되었고 3도어에는 GLS를, 5도어에는 GL을 각각 붙였다. 1991년 2월에는 200만대 생산 기념으로 1.3리터 배기량의 3도어 저가형 모델인 '엑셀 R'을 시판하기도 했다.[21]
3.2. 후기형 (1991 ~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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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5월에 페이스리프트가 이루어져 보닛 끝단을 낮춰 전방 시야를 넓히고[22] 실내 인테리어도 곡선으로 다시 디자인하였다. 그리고 이 시점부터 현대자동차 CI가 오늘날의 형태로 변경되어 엑셀 역시 새로운 CI 엠블렘이 적용되었다. X1 엑셀의 후속모델 격인 3도어 및 5도어 트림은 '엑셀 GS'라는 이름으로 새로 분류되었으며, 포니2의 단종 이후 명맥이 잠시 끊겼던 승용 화물차로 3도어 트림을 기반으로 한 '엑셀 밴'이 추가 출시되었다. 또한 후미에 붙여진 모델 명칭 엠블럼의 경우 초반에는 페이스리프트 전과 같이 플라스틱 글자 형태였으나 얼마 안 가서 각인 인쇄 형태로 변경되어 ☰XC☰L 비슷한 글씨로 디자인도 변경된다.
배기가스 규제에 대응하여 엔진출력이 디튠되었다. 1.5 MPI 97마력에서 90마력, 1.5 FBC 87마력에서 74마력, 1.3 FBC 82마력에서 72마력으로 변경.
1992년 10월에는 창사 25주년 기념으로 리어스포일러, ETR 카오디오, 고급화된 내장재, 바디칼라 도어핸들, 바디칼라 사이드미러, H 엠블럼[23] 등을 적용한 스페셜 팩 모델을 4,000대 한정으로 판매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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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4월에 출시된 후속모델인 엑센트에게 자리를 넘겨주며 단종될 것으로 보였으나, 엑센트로 넘어가며 단종된 화물 적재용 3도어[24] 의 구매층[25] 과 딜러들의 요청으로 7월까지 연장생산되는 저력을 보였다. 덧붙여 직계 후속은 없지만 따지자면 아토스 밴 → 모닝 밴/레이 밴 정도가 되겠다.
엑셀 밴은 레이서를 키우는 차량과 모양이 비슷하다보니, 국내의 매니아들은 두부집 차량 도색으로 꾸미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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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엑셀 밴에 현대 벨로스터 N의 2.0 터보엔진을 스왑한 차량이 존재한다. 벨로스터 N의 플로어 판넬을 엑셀 밴의 하부에 이식한 다음 이식한 플로어 판넬을 기준으로 엑셀의 차체를 편집하고 벨로스터N의 엔진과 부품들을 배치하여 스톡카 형식과 유사한 방식으로 제작하고 여기에 옵션도 이식했다. 이후 N을 상징하는 하늘색 바디 컬러와 WRC 랠리카 느낌의 리버리 데칼로 장식했다. 실내가 모두 이식되지는 않았지만 각종 전장류를 이식하면서 실내에 벨로스터N의 대시보드가 자리잡게 되었다.[26]엑셀N의 제작과정이 담겨있는 영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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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는 완성되었고 인제 스피디움 서킷을 돌기도 했다. 기록은 1분 59초,[27]# 해당 차량의 소유주는 세상에 이런일이에 출연한 적이 있는 현직 의사인 민봉기씨인데,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엑셀밴을 AE86처럼 꾸며 아마추어 경기에 참가하는 등 매니아였고 벨로스터N의 스펙을 엑셀에 구현하자는 계획을 세워 차체를 한 대 더 구해 벨로스터N의 플로어 판넬과 2.0T 세타2엔진등 모든 부품들을 이식했다고 한다.
3.3. 평판
3.3.1. 국내
1980년대 후반 자동차 시장은 지금과 같이 중~대형 비중이 높지 않았다. 여전히 자동차는 고가의 사치품이라는 인식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 호조에 따라 한국경제가 양적으로 팽창하면서 각 가정에도 마이카 붐이 일었고, 구매력이 있는 30~50대에서 첫 차로 소형차를 선호했기 때문에 소형차 시장이 자동차 시장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자동차 회사에서도 소형차 판촉에 가장 열을 올렸는데 당시 시장에는 1986년에 출시된 르망과 1987년에 출시된 프라이드가 불티나게 팔리고 있었다. 1980년대 후반 한국의 평균 자동차 수명은 '''6~7년'''[28] 이었다. 현대에서는 이에 따라 1985년에 출시된 X1 엑셀의 후속 차량을 개발했고 그것이 바로 엑셀이었던 것이다.
당시 기아 프라이드는 일본에서 막 들여온 따끈따끈한 차체 설계에 뛰어난 동력 성능과 경제성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었지만 국내에선 크게 인기를 얻진 못했다. 그 이유는 바로 프라이드가 해치백이었기 때문. 지금이야 해치백이란 개념이 크게 요상하게 다가오지 않지만, 당시에는 해치백을 타면 뒷좌석에 앉은 사람이 사고시에 바로 골로 간다거나(!) 하는 인식이 많았고, '꽁지 빠진 차'라는 별명을 얻어 미운 털 박히기 일쑤였다.[29] 1988년 프라이드의 베이스인 포드 페스티바, 마쓰다 121에는 있지도 않은 5도어 해치백 모델[30][31] , 1990년에는 4도어 세단 모델(프라이드 베타), 1996년에는 5도어 왜건 모델까지 생산하면서 마음을 돌려보려고 한다. 많이 팔긴 했지만 시장을 선도하진 못했다.
르망은 한국에 월드카 개념으로 GM의 자회사인 오펠의 카데트 E를 조립생산한 것인데, 폭스바겐 골프와 경쟁차는 자동차 답게 달리는것에 관련된 기본기에 관한 기술은 매우 우수한 편이었으나, 문제는 카데트 E가 유럽시장에 등장한 것은 1984년으로 다소 오래된데다, 유럽차 특유의 실용적이며 성능위주의 설계사상 때문에 사실상 국내 소비자들이 요구하는 부분인 안락한 승차감이나 푹신하고 넓은 시트, 우수한 NVH, 내장재의 내구성과 변형으로부터 확보되는 실내부품의 내구성, 그러면서도 뛰어난 정비성 등의 부분들은 기술적으로 뛰어난 차량이 아니었다.[32] 1986년 3도어 해치백 레이서와 르망살롱(GTE), 1988년 5도어 해치백 펜타파이브, 1989년 GSI와 1.6 TBI, 1990년 임팩트, 1991년 이름셔 등 정말 다양한 엔진 및 트림을 내놓았고, 특히 날렵한 디자인과 중후한 승차감, 다른 차량에 비해 넓은 실내공간으로 젊은 층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르망은 소형차 중에 가장 고가였고, 젊은이들이 돈이 어디 있겠는가. 게다가 대륙 국가의 실정에 맞춰져 고속 주행에 중점을 둔 기어비 때문에 가벼운 무게에도 불구하고 둔중하기 이를 데가 없이 느껴지는 낮은 순발력에, 당시 대우차 특유의 엉망진창인 조립 품질이 더해져 시장에서도 고만고만한 판매율을 유지했다.
이런 상황에서 엑셀의 등장은 상당히 신선한 것이었다. 1988년 등장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Y2 쏘나타의 얼굴과 꽁무니를 그대로 이식한 듯한 모습에 동글동글하고 귀여운 스타일은 소형차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중후한, 40대 아저씨 같은 모습이었다. 그럼에도 실내 디자인은 소형차의 기본에 충실하였고, 쏘나타에 달리던 전자제어식 연료분사장치를 달아 힘과 연비를 동시에 잡았다.[33] 당시 잡지 기사를 보면 엑셀을 마치 스포츠카처럼 묘사하는데, 이는 어디까지나 균형잡힌 기어비[34] 와 리스폰스가 우수한 엔진의[35] 감각 덕이지, 실 성능은 체감 성능만큼 라이벌들을 압도할 정도는 절대 아니었다.[36]
하지만 실제 운전자들의 체감 성능은 매우 경쾌하고 날렵했으며, 연비 면에서 프라이드와 비교해서도 그다지 꿀리지 않으면서 결정적으로는 현대자동차가 가장 자신있어 하는 세팅이자, 한국사람들이 차량 선택에 있어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부드럽다 못해 물컹할 정도의 안락한(?) 승차감 또한 라이벌들의 경쟁력을 깎아내렸다. 현대가 기본적으로 스프링과 댐퍼를 워낙 무르게 세팅한 탓도 있지만, 구조상으로도 프라이드나 르망은 리어에 토션빔 서스펜션을 채용했지만, 엑셀은 리어에도 독립식 서스펜션인 풀 트레일링 암 방식을 채용했기 때문에[37] 승차감에서는 감히 명함도 못 내밀 정도의 수준이었던것. 거기에 쏘나타를 닮은 중후한 맛의 디자인과, 당시에는 국내 자동차 제조사 중에서는 최고 수준의 조립 품질을 자랑하던 현대자동차의 나름(...) 치밀한 실내 마감[38] 등으로 인해 소형차 임에도 그리 궁색해 보이지 않는 그런 차가 나타난 것이다. 현대차 모델 포지셔닝의 승리이다.[39]
광고에 나오는 여자아이 모델은 김민정이다.
엑셀은 등장과 동시에 거의 매달 베스트셀러를 차지했다. 한 두 번 프라이드에게 자리를 내주었었고, 엘란트라에게 한 번 자리를 내주었다. 하지만 1992~1993년을 기점으로 점점 소비자들이 준중형, 중형차량을 선호하기 시작하면서 엘란트라와 쏘나타에게 베스트셀러 자리를 내어주게 된다. 그럼에도 1994년까지 수출 포함 144만여대를 판매하여 밀리언셀러를 달성했고, X1 엑셀과 합하면 250만여대를 판매하여 현대자동차의 양적 성장에 크게 기여했다. 한마디로 1980~1990년대의 현대자동차의 엑셀 수출이 그 당시 현대자동차의 대부분의 수익을 이룩한 것이다.
3.3.2. 해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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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유럽 사양. 유럽 등 많은 지역에서의 수출명은 현대 '포니'였다. 즉, 포니의 4세대 모델로 취급되었다.[40]
해외에서는 과거 평판이랄 게 있지도 않았을 때부터 엑셀이 투입되기 시작했다. 미국시장에서는 포니라는 이름 대신에 엑셀이란 이름이 사용되었다.[41] 유럽시장과 캐나다에는 계속해서 포니라는 이름으로 수출되었다.[42] 영국, 독일 등 경제 대국에 최초로 수출된 현대 차량이기도 하다.
평판이랄 게 없는 이유는 이미 현대가 미국에서 딸리는 품질을 만회하기 위해 물량공세를 펼쳤기 때문이다. 당시 선대 모델인 X1 엑셀의 주요 광고 카피는 '@@@달러에 차를 사세요'였다. 너무나 싼 가격에 겨우 달릴 수 있는 차를 판매한 것이다. 하지만 차를 팔 줄만 알았지 서비스 센터나 부품 수급은 엉망이었다. 결국 '몇 번 타다 버리는 현대', '걍 싼차'라는 이미지를 굳건히 구축하고야 만다. 품질이 좋아진 모델이 들어가봤자 개선된 서비스 정책이 없으면 내리막길이 75도로 깔려 있었던 것이다. 결국 엑셀은 선대 모델의 이미지를 뒤집어쓰고 계속 싸고 싼 차로 악명(?)을 떨친다.
하지만 평균적으로 한국 사람들보다는 외국인들이 주로 차량 관리를 잘하는 편인지라, 구글 검색을 하면 여전히 쌩쌩하게 엑셀을 운용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문화적 차이라기 보다는 자동차 문화 성숙도의 차이라 보면 된다.
재밌는 사실은 현대에서 북미에서 미쓰비시 딜러망을 통해서 미쓰비시 브랜드로도 판매했다는 사실이다. 미쓰비시 딜러용 차량의 이름은 미쓰비시 프레시스(Mitsubishi Precis). 당시 해외 진출에 있어서 걸음마 수준이었던 현대의 서비스망과 판매망, 그리고 브랜드 인지도를 고려해 현대와 기술적 제휴관계에 있었던 미쓰비시 자동차에서 도움을 준 것...이 아니고 당시에 미쯔비시에서 자사의 소형차보다 더 가격이 낮은 모델이 필요했는데 이를 배지 엔지니어링으로 해결한 것이다. X1 엑셀부터 베르나까지, 1986년부터 이런 판매방식이 부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43]
일본에서도 판매된 적이 있다. 일본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현대 XL이라는 이름을 달고 1988년에 1988년 서울 올림픽을 기념하기 위해 150대 한정으로 미쓰비시를 통해 카 프라자 대리점에서 판매되었다고 한다.
미국의 자동차 커뮤니티 Edmunds.com에서 가장 못생긴 차 100위 중 83위에 올랐다. 오른 다른 국산차로는 오피러스[44] , 티뷰론 터뷸런스[45] 가 있다.
3.4. 미디어에서
- 월야환담에 찬조 출연한 적이 있다. 캐런 몬티가 이름에 대해 평하길 밟고 뒤지라고....
- 마음의소리 946화에서 서울대가 흰색 엑셀을 BMW(작중 명칭은 BWM)라고 소개해 조준을 낚았다. 그 이후로 통닭집 배달차로 써먹다가 조준의 자가용으로 이용되는 듯.[46]
- MBC 시트콤 안녕, 프란체스카에서 2세대 후기형 모델이 나왔다. 두일의 아파트 경비원 동료가 빌려줘서 두일은 식구들과 놀이공원에 갔지만 창문도 고장나서 안열리고 안전벨트 버클이 고장나서 앙드레가 하루종일 갇혀있다가 부탄가스에 라이터로 불을 붙여서 폭파시켜버렸다(...)
4. 둘러보기
[1] 페이스리프트 된 유선형 엑셀은 X2카, 엑센트는 X3카로 X계보가 이어지다가 베르나는 LC로 바뀐다.[2] 이탈리아 어로 '빠르게' 등의 의미가 있는데(주로 음악 용어로 자주 쓰인다), 당시 현대차에서는 세계 시장을 '빠르게' 석권(...)하겠다는 의미로 지었다고 한다. [3] 다만 개발 과정에서 차체 스타일링은 세단형인 프레스토 (1982년 6월 초)가 해치백형인 (포니)엑셀 (1982년 8월 중순) 보다 2달 먼저 만들어졌다고 한다. #[4] Feed Back Carburetor[5] AMerica eXport - 5마일 우레탄 범퍼와 사이드 마커, 제3 정지등 등의 미국 수출 사양을 적용한 차량으로, 3 - 4 - 5도어 모델 전체에 적용되었다. [6] 맨 처음에는 '엑셀 스포트'였다.[7] 다만, 이 서스펜션 자체는 미쓰비시의 것을 그대로 들여온 것이므로 현대자동차의 기술력이고 뭐고 논할 것이 없다. 당시는 현대의 주행시험장도 겨우 가동을 시작했던 시기이고 부품의 성능과 품질에 대한 테스트도 미흡했던 시기이다. 현대자동차가 이런 것들을 제대로 하게 되는 것은 이보다 10년 이상의 세월이 흐른 후의 일이다.[8] 공교롭게도 전륜구동 플랫폼을 제공한 차량인 미라지/랜서 피오레의 경우도 해치백형의 미라지가 1978년 3월에 먼저 등장하고, 한참 지난 모델말기인 1982년 2월 에서야 페이스리프트 되면서 4도어 세단형이 출시. 그와 동시에 판매채널을 달리해서 4도어 세단을 랜서 피오레 라는 다른 이름으로도 출시했다.[9] TBI 엔진의 장착 등. SPI(Single point injection) 방식으로 불리기도 하는 TBI 엔진은 컴퓨터 제어식 연료분사 장치로, MPI에 비해 수준이 낮지만 당시 소형자에 들어가는 기술로서는 역시 고급 형식이었다. 참고로, SPI는 연료 분사기가 흡기관 입구에 한개 (때로는 2개)인 반면, MPI(Multiple point injection) 방식은 각 실린더 갯수 만큼 연료 분사기가 꽂힌다. 즉, 4기통은 4개의 바늘을 통해 연료가 제어되어 분무된다.[10] 대한민국에서는 캐나다 수출형 모델을 포니2 CX(Canada eXport edition)라는 라인업으로 판매했다. 같은 경우로 스텔라는 CXL 트림으로 판매했다.[11] 특히 네덜란드쪽[12] 가격도 가격이었지만 일본에 대한 미국의 수출규제도 한몫했다. 당시 미국은 대형차 제작에만 급급해 정작 소형차 시장에는 신경을 쓰지 못했는데, 이 소형차 시장을 일본이 독식해버리자, 미국은 일본에 자율적으로 수출량을 규제할 것을 요구했고, 일본은 이로 인해 연간 230만 대로 자동차 수출량이 제한되자 이익을 더 남기려는 의도로 중형차 시장으로 눈길을 돌렸다. 이렇게 비어버린 소형차 시장을 엑셀이 채우게 된 것이었다. [13] 미국 진출 초기에 HYUNDAI 상표가 생소해서 '헌데이(...)' 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었고, 그것이 일본의 HONDA와 비슷하게 들려서 그 회사의 염가 상표인 줄로 안 미국인들도 있었다고 한다. [14] 단, 포니 1 세대 모델은 해치백형이 아니었다. 즉, '포니'라는 이름이 반드시 해치백에 한정된 것은 아니었다.[15] 포니의 제 4세대 모델이었다. 물론 포니와 포니 2를 같은 1세대로 볼 경우는 제 3세대가 된다.[16] 엄밀히 따지면 엑셀 쿠페인 것이 맞다. 단지 차별화하기 위해 별도의 이름을 붙였을 뿐인데, 이는 포니 엑셀의 세단형에 프레스토라는 별도의 이름을 붙인 것과 같은 개념의 네이밍이라고 볼 수도 있다. 스쿠프는 외관상 공유하는 부분이 없는 완전한 별개의 디자인을 사용했으므로 당시 기준으로는 별도의 이름을 붙이는 것이 더 적절했을 것이다. 다만, 외판의 부품을 전혀 공유하지 않는 완전히 다른 디자인이지만 같은 이름의 자동차의 쿠페 버전으로만 취급되는 경우는 의외로 흔하다. 같은 이름을 쓰는가 별개의 이름을 쓰는가는 어디까지나 마케팅 목적으로 정해지는 것일 뿐이다.[17] 엑셀의 후속으로 등장했던 엑센트는 모두들 알다시피 세피아에 이어 전륜구동 섀시(차대)를 독자 개발한 2번째 모델이다.[18] 유선형 에어로 다이나믹이라고 주장은 하는데, 아무리 봐도 여전히 각진 스타일이다. 다만 헤드라이트 부분 등에서 둥글한 이미지를 넣으면서 프레스토나 스텔라와 비교하면 둥글어 보이기는 한다.[19] 국내 출시 초기에 MPI모델인 GLSi 대신 일반 카뷰레터 모델인 GLS가 대거 풀렸는데, 그것이 미국 수출용으로 선적됐던 것을 국내로 돌린 것이라는 설도 있었다.(...)[20] 중형택시 제도를 도입한 대도시보단 아직 도입하지 않은 중소도시 및 농어촌 지역을 중심으로 판매되었다. 이는 1989년 2월 택시 트림이 추가된 르망도 마찬가지다.[21] 페이스리프트를 앞두고 판매량이 열세였던 3도어 모델의 재고물량을 털기 위한 방편으로 보기도 하지만, 재고털이를 위해 새로운 엔진 트림을 추가한다는 발상을 납득하기는 쉽지는 않다는 의견도 있다.[22] 어디까지나 마케팅 문구일 뿐이며, 실제 차량을 자세히 비교해 보면 그런 느낌이 잘 나지 않는다. 게다가 애초에 페이스리프트 전에도 보닛의 각도가 급하게 떨어지는 디자인(이후 등장한 후속 모델들과 보닛 각도를 비교해 보면 엑셀의 보닛 경사가 얼마나 급한지 잘 알 수 있다)이라서 운전석에서 보닛이 잘 보이지도 않는다....[23] 1990년 엘란트라를 시작으로 도입된 현재 사용하고 있는 엠블럼이다.[24] 포니 트럭에서 이어진 계보의 모델로 뒷 좌석 및 트렁크 공간 모두 화물 적재공간으로 설계했으며 최대적재중량은 300kg이었다. 당시 승용차 같은 느낌이면서도 화물차 기능을 하기에 나름 인기가 좋았으나, 승용차 급으로 작으면서도 봉고의 형태로 나온 타우너와 다마스의 등장으로 수요가 감소하면서 엑센트에서부터 단종되었다.[25] 화물용 3도어의 경우 395만원의 가격으로 당시 엑셀의 최저가였고, 티코의 가격에 근접해 있었으며, 세법상 화물자동차로 분류되기에 동급 승용차 대비 90%의 세금을 절약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승용차를 기반으로 한 밴은 경차 기반으로, 적재함의 규격이 화물차 기준에 미달되기 때문에 승용차 번호판을 발급받는다.''' 승합차를 기반으로 한 밴만 화물차 번호판을 발급 받을 수 있다.[26] 참고로 번호판이 80번대로 시작한다. 80~97번대(지역별 외번대 번호판 시절의 7~8번대였다.) 현재에는 트럭에 달리는 번호이지만 이건 당시 자동차 관련 법률에 따라 승용 밴은 화물로 분류되었기 때문에 이런 번호판 넘버링이 가능하다. 지금은 모닝, 레이, 스파크 승용밴도 다른 승용차처럼 멀쩡히 01~69번(100~699번) 번호판 달고 나온다. 즉, 엑셀밴은 화물차로 분류되었다는 소리. 같은 이유로 소형 해치백 기반의 기아 프라이드 1세대/대우 르망 밴, SUV 기반의 현대 갤로퍼/아시아 록스타/기아 레토나/스포티지/쌍용 코란도/무쏘 밴, 승합차 기반의 현대 그레이스/기아 봉고/베스타/프레지오/아시아 토픽/쌍용 이스타나 밴 차량들도 녹색의 지역별 외번대 번호판때는 7번과 8번대 번호판을 장착하였고(경차 기반의 대우 티코/마티즈/현대 아토스/기아 비스토 밴은 적재함의 규격이 화물차 기준에 미달되기 때문에 7~8번대가 아닌 1~4번대를 장착하였다.) 이후에도 등록분은 80번대 이상으로 시작하며, 두 자리 번호판으로 바꿔달라고 해도 80번대 이상으로만 바꿔준다. 고로 이 차량은 세금이 싸지만, 보험료가 비싸고, 정기검사를 1년마다 받아야 하며, 고속도로 1차선에는 들어갈 수 없다는 소리.[27] 벨로스터N 순정 차량보다는 같은 제원에 무게가 가벼워졌음에도 인제 랩타임이 몇 초 더 느린데, 이는 기존 벨로스터N의 부품들이 훨씬 가벼운 엑셀의 차체로 이식되면서 이에 따른 무게배분 균형이 저하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영상에서 보면 코너에서 기존 벨로스터N보다 언더스티어가 조금 더 심하게 발생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28] 2020년 현재 10년 이상으로 늘어난 것에 비교하면 정말 짧다. 그런데 그게 이유가 있다. 당시 국산차의 성능이 딱 그 정도였다. 국내 기술이 없어 해외 차들을 뱃지 엔지니어링으로 들여왔어도 조립 기술 및 강판 방청 기술이 떨어지는 바람에 3년 타면 신차와는 많은 차이가, 8년쯤 타면 폐차 일보 직전일 정도로 하체 부식이 심했다. 게다가 당시에는 정비망이 열약해서 단종된 지 오래 지난 경우에는 부품은 있어도 구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1996년만 해도 1986년식 차를 길에서 거의 볼 수 없었다. 2021년 현재 2010년대의 초의 차는 흔하게 볼 수 있고, 2000년대 초의 차도 제법 보이는 것은 물론, 심지어 1990년대의 차도 간혹이나마 보이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또한 해외 메이커의 이 차 저 차를 뱃지 엔지니어링으로 들여오다 보니 모델간 일관성도 없었고 이는 단종시 부품 수급에도 문제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환경이 80년대 부터 imf 이전까지 폐차를 쉽게 생각하는 풍토가 깔릴 수 밖에 없었다. 그 이전 1985년 스텔라의 광고에선 대놓고 교체 주기를 2년 정도로 말할 정도였다.
과거 한국의 중고차 시장 추이를 보면 1990년대까지도 국산 중고차=수출 정도로 인식되다가 1997년 외환 위기 직후인 1990년대 말에 한 번 급성장한 후 2008년 금융위기까지 대체로 답보 상태였다가 이후에 지속적인 상승세를 보이는데 이즈음 해서 국산 중고차도 꽤 몰 만하다는 인식이 확산된 덕분이다. 1990년대 말~2000년대 초에 자동차 10년 타기 운동 같은 게 벌어졌어도 씨알도 안 먹혔던 게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그나마 품질이 많이 높아진 지금도 러시아처럼 주행 환경이 좋지 않은 지역에서는 버스 같은 고가품이 아닌 이상 우핸들 일본제 중고차량을 선호하지, 한국제 중고차량은 찬밥 취급이다. 물론 이는 2000년대 국산차가 원가절감이 워낙 심해 부식이나 소음 문제가 심각하기 때문이고, 러시아에서도 한국제 신차는 일제만큼은 아니지만 상당히 인기가 많다. 국산차도 결함 차종이 아닌 이상 50만 km 주행은 기본인 시대다.[29] 돈이 문제였다. '세단에서 트렁크 길이가 잘린 차'면 손해보는 느낌이 드니까 그만큼 싸야지 싶은데 그 정도로 싸진 않았으니까.[30] 한국에서 도어 숫자를 계산하는 방법은 최근까지 유리가 달린 문이었으나, 벨로스터부터는 아닌 듯 한데, 이 기준에 따르면 벨로스터는 4도어 차량이다.[31] 기아자동차가 내수를 위해 자체 개조한 5도어는 이후에 페스티바, 121로 역수출나갔다. 아예 없지는 않다.[32] 때문에 엑셀이 출시된 이후에도 르망이 한국에서 "고속도로의 왕자"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33] 다만 이 전자제어식 연료분사장치(MPI)가 달린 모델인 TRX와 GLSi 모델의 경우 당시의 일반 배터리가 아닌 특수 배터리를 순정으로 장착해야 했기에, 차량 유지비가 조금 더 나가기도 했다.[34] 전반적인 기어비가 프라이드와 거의 비슷할 정도로 굉장히 길긴 하지만, 프라이드나 엑셀이나 기어비가 길다한들, 1단의 기어비가 워낙 높아서, 결국엔 5단의 nv ratio가 기어비가 아주 짧은편의 르망의 5단과 비슷한 수준으로 만들어 놓았다. 참고로 프라이드나 엑셀은 1단에서 40km/h정도면 거의 레드존 이지만, 르망은 혼자 1단에서 60km/h 가까이 찍어낸다.[35] 당시 미쓰비시 엔진들은 그 귀하고 비싼 칼만와류 방식의 에어플로우 센서를 적극적으로 채용하여 왠만한 스포츠카도 울고 갈 뛰어난 엔진 반응을 보여 주었다. 칼만와류 방식의 에어플로우 센서는 나름 비싸다는 핫필름 방식의 센서를 '싸구려'로 전락시킬 정도로 고가이다.[36] 엑셀의 공차 중량은 950kg으로써, 860kg인 프라이드는 고사하고 935kg인 르망보다도 무거웠다! 한마디로 중량이 동급에서 가장 돼지였다(...). 당시도 그렇고 최근까지도 '대우(쉐보레)차는 무겁고 현대차는 가볍다' 등의 통념이 있었으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엑셀과 비슷한 시기의 쏘나타도 로얄살롱보다 무거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차가 가볍고 대우차는 무겁다는 통념이 생긴 것은 대우차의 변속기 세팅 때문에 초반 가속이 굼떴기 때문이다. 준중형급의 경우 크루즈(라세티 프리미어)가 등장함으로써 비로소 대우차가 무거워졌고, 그 전에는 언제나 엘란트라/아반떼보다 가벼웠다.[37] 덕분에 2000년대 이전의 옛날 현대차는 엘란트라와 아토스를 제외하면 의외로 토션빔 서스펜션을 사용한 자동차가 없다. 엑셀의 후속인 엑센트의 리어 서스펜션은 스트럿 방식을 조금 변형시킨 듀얼링크 타입으로 진화한다. 르망과 프라이드의 후속이었던 라노스와 아벨라는 계속해서 토션빔으로 생산했다.[38] 당시의 대우 에스페로보다 현대 엑셀의 인테리어 재질이 더 좋다. 대우는 이 당시 이제 막 고유모델을 내놓기 시작하던 시절이라서 경험 부족이 매우 심했으나 현대는 이미 오랫동안 자체 모델을 내놓아 왔으므로 상당한 경험을 갖고 있었던 상태라서 벌어진 대우의 비극이다.[39] 이후 국내 자동차 관련 언론에서 현대의 모델 포지셔닝을 기준으로 차급을 선정하는 것이 대세가 됨에 따라 경쟁사 차들 중 현대차 기준 포지셔닝에 잘 안맞는 차들(즉 소형인지 중형인지 애매한 차종)은 더 성능이 우수한 모델이라도 심한 판매 부진에 시달려야 했다.[40] 엑셀의 후속 모델인 엑센트도 지역에 따라 포니라는 이름으로 수출되었다. 즉, 엑센트가 포니 5세대였다.[41] 기존의 X1 엑셀이 '엑셀'이라는 이름으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기 때문이다.[42] 현대는 1986년 북미시장 진출 이전에 캐나다와 동구권 국가에 포니를 먼저 소량 수출하였다. 따라서 유럽시장에선 포니의 이미지를 계속 부여했던 것이다.[43] 참고로 4세대 엑센트도 멕시코에서 닷지 애티튜드(Attitude)라는 이름으로 판매되었다. 이것도 물론 크라이슬러가 현대를 도와주거나 하는 그런 얘기가 아니라 크라이슬러의 필요에 따라 배지 엔지니어링을 한 것 뿐이다.[44] 24위[45] 66위[46] 덧붙이자면 BMW라고 속은 것을 알고도 계속 아끼는 것 같다. 나중에는 아버지인 조철왕이 조석의 리무진 이벤트를 피자 배달용으로 써 버리자, 리무진 차량 대용으로 엑셀을 다시 이용했다.
과거 한국의 중고차 시장 추이를 보면 1990년대까지도 국산 중고차=수출 정도로 인식되다가 1997년 외환 위기 직후인 1990년대 말에 한 번 급성장한 후 2008년 금융위기까지 대체로 답보 상태였다가 이후에 지속적인 상승세를 보이는데 이즈음 해서 국산 중고차도 꽤 몰 만하다는 인식이 확산된 덕분이다. 1990년대 말~2000년대 초에 자동차 10년 타기 운동 같은 게 벌어졌어도 씨알도 안 먹혔던 게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그나마 품질이 많이 높아진 지금도 러시아처럼 주행 환경이 좋지 않은 지역에서는 버스 같은 고가품이 아닌 이상 우핸들 일본제 중고차량을 선호하지, 한국제 중고차량은 찬밥 취급이다. 물론 이는 2000년대 국산차가 원가절감이 워낙 심해 부식이나 소음 문제가 심각하기 때문이고, 러시아에서도 한국제 신차는 일제만큼은 아니지만 상당히 인기가 많다. 국산차도 결함 차종이 아닌 이상 50만 km 주행은 기본인 시대다.[29] 돈이 문제였다. '세단에서 트렁크 길이가 잘린 차'면 손해보는 느낌이 드니까 그만큼 싸야지 싶은데 그 정도로 싸진 않았으니까.[30] 한국에서 도어 숫자를 계산하는 방법은 최근까지 유리가 달린 문이었으나, 벨로스터부터는 아닌 듯 한데, 이 기준에 따르면 벨로스터는 4도어 차량이다.[31] 기아자동차가 내수를 위해 자체 개조한 5도어는 이후에 페스티바, 121로 역수출나갔다. 아예 없지는 않다.[32] 때문에 엑셀이 출시된 이후에도 르망이 한국에서 "고속도로의 왕자"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33] 다만 이 전자제어식 연료분사장치(MPI)가 달린 모델인 TRX와 GLSi 모델의 경우 당시의 일반 배터리가 아닌 특수 배터리를 순정으로 장착해야 했기에, 차량 유지비가 조금 더 나가기도 했다.[34] 전반적인 기어비가 프라이드와 거의 비슷할 정도로 굉장히 길긴 하지만, 프라이드나 엑셀이나 기어비가 길다한들, 1단의 기어비가 워낙 높아서, 결국엔 5단의 nv ratio가 기어비가 아주 짧은편의 르망의 5단과 비슷한 수준으로 만들어 놓았다. 참고로 프라이드나 엑셀은 1단에서 40km/h정도면 거의 레드존 이지만, 르망은 혼자 1단에서 60km/h 가까이 찍어낸다.[35] 당시 미쓰비시 엔진들은 그 귀하고 비싼 칼만와류 방식의 에어플로우 센서를 적극적으로 채용하여 왠만한 스포츠카도 울고 갈 뛰어난 엔진 반응을 보여 주었다. 칼만와류 방식의 에어플로우 센서는 나름 비싸다는 핫필름 방식의 센서를 '싸구려'로 전락시킬 정도로 고가이다.[36] 엑셀의 공차 중량은 950kg으로써, 860kg인 프라이드는 고사하고 935kg인 르망보다도 무거웠다! 한마디로 중량이 동급에서 가장 돼지였다(...). 당시도 그렇고 최근까지도 '대우(쉐보레)차는 무겁고 현대차는 가볍다' 등의 통념이 있었으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엑셀과 비슷한 시기의 쏘나타도 로얄살롱보다 무거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차가 가볍고 대우차는 무겁다는 통념이 생긴 것은 대우차의 변속기 세팅 때문에 초반 가속이 굼떴기 때문이다. 준중형급의 경우 크루즈(라세티 프리미어)가 등장함으로써 비로소 대우차가 무거워졌고, 그 전에는 언제나 엘란트라/아반떼보다 가벼웠다.[37] 덕분에 2000년대 이전의 옛날 현대차는 엘란트라와 아토스를 제외하면 의외로 토션빔 서스펜션을 사용한 자동차가 없다. 엑셀의 후속인 엑센트의 리어 서스펜션은 스트럿 방식을 조금 변형시킨 듀얼링크 타입으로 진화한다. 르망과 프라이드의 후속이었던 라노스와 아벨라는 계속해서 토션빔으로 생산했다.[38] 당시의 대우 에스페로보다 현대 엑셀의 인테리어 재질이 더 좋다. 대우는 이 당시 이제 막 고유모델을 내놓기 시작하던 시절이라서 경험 부족이 매우 심했으나 현대는 이미 오랫동안 자체 모델을 내놓아 왔으므로 상당한 경험을 갖고 있었던 상태라서 벌어진 대우의 비극이다.[39] 이후 국내 자동차 관련 언론에서 현대의 모델 포지셔닝을 기준으로 차급을 선정하는 것이 대세가 됨에 따라 경쟁사 차들 중 현대차 기준 포지셔닝에 잘 안맞는 차들(즉 소형인지 중형인지 애매한 차종)은 더 성능이 우수한 모델이라도 심한 판매 부진에 시달려야 했다.[40] 엑셀의 후속 모델인 엑센트도 지역에 따라 포니라는 이름으로 수출되었다. 즉, 엑센트가 포니 5세대였다.[41] 기존의 X1 엑셀이 '엑셀'이라는 이름으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기 때문이다.[42] 현대는 1986년 북미시장 진출 이전에 캐나다와 동구권 국가에 포니를 먼저 소량 수출하였다. 따라서 유럽시장에선 포니의 이미지를 계속 부여했던 것이다.[43] 참고로 4세대 엑센트도 멕시코에서 닷지 애티튜드(Attitude)라는 이름으로 판매되었다. 이것도 물론 크라이슬러가 현대를 도와주거나 하는 그런 얘기가 아니라 크라이슬러의 필요에 따라 배지 엔지니어링을 한 것 뿐이다.[44] 24위[45] 66위[46] 덧붙이자면 BMW라고 속은 것을 알고도 계속 아끼는 것 같다. 나중에는 아버지인 조철왕이 조석의 리무진 이벤트를 피자 배달용으로 써 버리자, 리무진 차량 대용으로 엑셀을 다시 이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