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세 데 산 마르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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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남아메리카의 독립운동가이자 군인. 스페인에 맞서서 남아메리카의 독립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 생애
2.1. 독립운동 이전
1778년 아르헨티나(당시 스페인 라플라타 부왕령) 코리안테스 주 야페유에서 태어나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성장한 이후 스페인 군대에 입대하여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싸우고, 영국군의 포로가 되어 1년 이상 수감 생활을 하기도 했다. 이후에는 나폴레옹의 프랑스 군대와 싸우면서 군사적 경험을 쌓았는데, 이때 남아메리카의 독립 운동가들과 접촉한 것으로 보인다.
2.2. 독립운동
1812년 라플라타 부왕령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투신했고 베르나르도 오이긴스(Bernardo O'Higgins), 마누엘 벨그라노(Manuel Belgrano) 등의 인물과 '북부군', '안데스군' 을 지휘했다. 산마르틴은 상(上) 페루(현재의 볼리비아)를 통해 진군하는 기존의 공격 방식이 별 효과를 얻지 못할 거라고 여기고, 안데스 산맥을 넘어 칠레를 공격하고 거기서 다시 육군과 해군이 합동으로 진격해 페루를 독립시킨다는 계획을 세운다. 산 마르틴은 국경 도시 쿠요의 행정관으로 부임하여 1817년 초 안데스 산맥을 넘었고, 샤카부코 전투(1817년 2월 12일)에서 스페인 왕당파군을 공격해 승리했다. 칸샤 레야다 전투(1818년 3월 19일)에서 일시적으로 패배를 맛보고 후퇴하지만 이어서 마이푸(1818년 4월 5일) 전투에서 승리하여 칠레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의 시민들은 산 마르틴을 해방자로서 환영하고 칠레 정부의 수반으로 추대했다. 그러나 산 마르틴은 정부수반직을 베르나르도 오이긴스에게 양보하고 이후 영국 백작 토마스 코크런을 해군 지휘관으로 초빙하여 자신이 계획했던 육해군 합동 작전을 실행시키고, 1821년 7월 28일에 리마에서 페루의 해방을 선포하고 '페루의 보호자(Protector Of Peru)'라는 호칭을 얻어 페루의 국가원수자리에 앉는다. 그러나 산 마르틴의 페루 해방은 불완전한 것이었으며, 페루 내 각 세력들의 다툼으로 혼란이 극에 달한 상태였다.
2.3. 과야킬 회담
이후 페루의 완전한 독립을 논의하기 위해 에콰도르의 과야킬에서 시몬 볼리바르와 회담을 진행했다. 이 회담의 공식 기록은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작은 밀실에서 볼리바르와 산 마르틴 두 명만 남고 이외에 아무도 들어가지 않은 채 회담을 진행했기 때문이다. 두 명은 서로 인격적으로 존중하고 존경하는 사이였지만, 의견 차이가 굉장히 갈렸던 것으로 보인다. 산 마르틴은 자신의 지휘권을 포기하고 볼리바르 군대와 합류하는 것까지 제안했지만, 볼리바르는 거부하였다. 현재까지 잘 알려져 있는 것은 식민지 독립 이후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의 정치 체제에 대해 산 마르틴은 유럽의 왕족을 초빙하여 군주가 통치하는 군주제를 주장하고,[2] 볼리바르는 공화정에 입각한 독립국가 건설을 주장하며 언쟁을 벌였다는 이야기가 존재할 정도다. 또한 볼리바르는 페루의 완전한 해방 및 독립을 자신이 실행시키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산 마르틴은 특별한 소득 없이 볼리바르와의 만남을 끝마친다.
2.4. 은퇴 및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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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란 콜롬비아 정부의 전폭적 지원을 받았던 볼리바르와는 달리 산 마르틴은 부에노스아이레스 정부로부터 더 이상의 지원을 받을 수 없는 입장이었다. 결국 산 마르틴은 자신의 모든 정치적 입지를 포기하고 은퇴하여 유럽으로 건너간다. 그는 프랑스에 입국하려 했지만 거절당하고 영국 런던과 벨기에 브뤼셀을 떠돌며 쓸쓸하게 중년을 보낸다. 도중에 몇 번 귀국을 시도했지만 대부분 그 당시 아르헨티나 정치 지도자들과 의견이 맞지 않아 끝내 실행되지 못했다. 1830년 벨기에의 네덜란드 독립 전쟁 때 혁명군 지도자로 참가할 것을 제안받았지만 거절하고 프랑스 파리로 이주한다. 이후 1848년 다시 불로뉴쉬르메르로 간 다음 2년 후에 사망했다.
시신은 사후 1880년 부에노스 아이레스 대성당에 안치되었다.
3. 여담
시몬 볼리바르 못지않게 훌륭한 독립운동가로 아르헨티나, 칠레, 페루 세 나라의 독립에 공헌했고 그 자신의 이름을 딴 훈장은 아르헨티나의 최고 훈장이며 아르헨티나 어딜 가도 동상을 볼 수 있는 인물이다.
과야킬 회담 당시 겨우 44세였고, 은퇴 이후에도 25년 이상을 더 살았던 것을 보면 만일 이 사람이 아르헨티나에 더 머물렀다면 분명히 그란 콜롬비아 공화국의 시몬 볼리바르나 칠레의 베르나르도 오이긴스처럼 오랫동안 정치지도자로 남았을 인물. 하지만 포르투갈과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남미 각국의 행보를 볼 때 산마르틴이 유럽으로 안 가고 모국인 아르헨티나에 남아 아르헨티나 독립 후 국가원수의 자리에 올랐었다고 해도 대콜롬비아 공화국, 칠레 독립 이후 각각 모국들의 초대 대통령이 된 시몬 볼리바르처럼 독재정치를 펼치며 반대파 세력들과 대립하며 실권하거나, 오이긴스처럼 반대파 세력들의 압력으로 축출당했을 가능성도 높아보인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산마르틴은 볼리바르나 오이긴스에 비하면 박수칠 때 잘 떠난 것인지도 모른다.
아르헨티나 페소에서 5페소의 인물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