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산 문화
1. 개요
[image]
홍산문화(紅山文化)는 B.C.4000~B.C.3000년경 지금의 랴오닝 성 서부에 위치하였던 신석기시대의 고고문화를 가리키는 말이다. 영문 위키백과에는 홍산문화의 연도를 B.C.4700~B.C.2900년경 까지로 서술하고 있다.
중국에서는 궈다순(郭大順) 이래 홍산 문화의 전기인 랴오닝 성 북부 지역인 남만주 지역에 있던 신락 문화(기원전 8000년)부터 홍산 문화(기원전 4000년)를 지나 하가점 문화(기원전 1500년)까지의 문화를 통틀어 요하문명(遼河文明)으로 말한다.
본 문서에서는 홍산문화를 전후하여 신락문화의 상한(B.C.5500)부터 소하연 문화의 하한(B.C.2000)까지를 광의의 홍산문화로서 다루도록 한다.
2. 발견
홍산문화의 발견은 20세기 전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08년 일본의 인류학자 도리이 류조가 최초로 적봉시 일대에서 신석기시대 유존을 발견하였고, 1919년에는 스웨덴의 지질학자 안데르손이 사과둔 유적을 발굴하였으며, 1919~1924년에는 프랑스의 고고학자 리쌍과 샤르뎅이 열하성에서 신석기시대 유존 여러 곳을 발견하였던 것이다. 이에 1935년에는 일본의 고고학자 하마다 고사쿠와 미즈노 세이치가 홍산후 유적을 발굴하면서 처음으로 이 지역의 신석기시대 후기 문화가 전면적으로 드러났다.
이후 1948년에 중국 고고학의 초석을 다진 페이원중(裵文中)은 홍산후 유적과 사과둔 유적 등을 중원의 채도문화와 북방의 세석기문화가 만나 탄생한 일종의 '혼합문화'로 규정하였다. 하지만 1955년에 인다(尹達)는 이 문화가 앙소문화와 북방문화의 영향을 받았으되 단순한 혼합문화를 넘어 새로운 유형을 창출하였다 인식하고 이것을 '홍산문화'라 이름하였으며, 이 명칭은 1958년에 뤼준어(呂遵諤)가 수용하면서 학계에 널리 수용되었다.[1]
그러나 당시까지의 유존 발굴은 계획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고고학계의 기본 전제도 황하 유역이 중국문명의 발상지라는 일원적 문명기원론의 입장이 지배적이었다. 더군다나 문화대혁명으로 고고학계의 분위기 자체도 대단히 경직되어 있었기에 이에 대한 반론이 자유롭게 제기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따라서 이 시기에 홍산문화는 근본적으로 북방문화의 영향을 받은 앙소문화의 변이형 정도로만 인식되었던 것이다. 당시까지 이 지역에서 홍산문화보다 선행하는 문화가 발견되지 않았으므로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던 중 1970년대에 중국에 탄소동위원소 측정이 본격화되는 동시에 각지에서 새로운 신석기시대의 대규모 유존들이 발견되었고, 이에 따라 1970년대 후반부터 황하 유역 중심의 일원적 문명기원론에 비판적인 시각이 등장하게 되었다. 비판자들은 중국문명 발생의 다원성, 지역문화의 다양성 등을 강조했는데 특히 쑤빙치(蘇秉琦)는 각 지방의 문화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공동으로 발전해 나갔다는 구계유형론을 그 대안으로 제창하였고 이는 지금까지도 중국 고고학계의 일반적인 통설이다.[2]
더군다나 그 영향으로 요서 일대에서도 대규모 발굴이 잇달아 이루어져 수많은 신석기시대 유존들이 추가로 확인되었다. 이에 홍산문화에 뒤이은 소하연 문화가 1974년에, 선행하는 흥륭와 문화가 1982년에, 직전의 조보구 문화가 1989년에 그 개념이 정의되었다. 또한 1973년에는 호두구 유적의 홍산문화 석관묘에서 옥기가 출토되었고, 1979년에는 동산취 유적에서 제사터와 여신상이 발견되었고, 1981년에 우하량 유적에서 대형 건물지와 적석총 등이 발굴되었다.
3. 전개
3.1. 신석기시대 중기
[image]
3.1.1. 신락 하층 문화
B.C.5300~4800[3]
[image]
1970년대 중기에 심양시 북쪽 신락숙사(新樂宿舍) 자리에서 세석기와 압인문 통형관의 공반을 특징으로 하는 신석기시대 중기의 문화가 발견되었다. 탄소동위원소 측정 결과 이는 7000BP[4] 이전의 것으로서 지금까지 발견된 모든 랴오닝 성의 신석기시대 문화보다 앞선 것이었다. 이후 요동반도 남단의 곽가촌(郭家村)이나 소주산(小珠山)에서도 같은 종류의 압인문 통형기가 발굴되었는데, 그 위에 대문구문화 전기의 문화 유존(6000BP)이 중첩되어 있는 현상이 발견되었다.[5]
신락문화의 주민들은 기장 위주의 원시농업을 하고 있었지만, 당시의 농업은 생산성이 적었으므로 부수적인 위치에 머물렀고 주된 생업은 어로 · 수렵 · 채집활동이었다. 출토된 세석기에서 화살촉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뗀석기로 만든 그물추가 함께 나온 점, 유적에서 멧돼지 · 사슴의 뼈와 조개껍질이 활발히 출토되는 점이 이를 잘 보여준다. 아직까지 가축화된 개 · 돼지의 사육은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시기상으로는 신석기시대 중기에 해당하지만, 실제 문화적 특징은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의 과도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신락문화의 주거지는 중앙에 1~2개의 화덕을 설치한 장방형 반움집으로, 줄을 지어 나란히 배치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가운데 2호 집자리는 면적이 95.5㎡에 달하고, 540여 점의 유물이 집중 출토되어 집회소의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 취락 전체가 발굴되지는 않았으나, 흥륭와문화에 비추어 보면 이 집회소를 중심으로 상당한 규모의 취락이 조성되었을 것이다. 또한 흑옥으로 만든 공예품이나 나무로 깎은 새 모양 지팡이가 발견되었는데, 이는 대체로 신락유적 사람들의 토템으로 해석되고 있다.[6]
3.1.2. 흥륭와 문화
B.C.5500~4800[7]
[image]
1980년대 초에 요하 서쪽에서도 압인문 통형관을 특징으로 하는 유적들이 발굴되었다. 이 유형을 대표하는 유적으로는 부신시에서 발굴된 사해유적(査海遺蹟)과 적봉시에서 발굴된 흥륭와 유적(興隆窪遺蹟)이 있으며, 이 때문에 사해-흥륭와 문화라고도 일컫는다. 탄소동위원소 측정 결과 사해유적 중기에 해당하는 제1호 주거지의 연대는 7040±100BP였으며, 흥륭와 유적 제119호 주거지의 연대는 7240±100BP였다. 그 범위는 북으로 시라무렌 유역, 남으로 대릉하 유역을 포괄하고 난하 유역에까지 이르렀다.
흥륭와 문화의 사람들도 신락문화와 같이 반움집에서 생활하였고, 집들이 규칙적으로 조밀하게 배치되어 있다. 또한 주거지역을 둘러싸고 환호가 구축되어 있어서 본격적인 집단사회(tribe)가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사해유적의 주거지역 중심부에는 광장이 있고, 이곳에는 유명한 용 모양의 돌무더기와 함께 취락에서 가장 큰 규모인 46호 주거지가 외따로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그 남쪽으로는 무덤군과 갱(坑)이 발견되었는데, 갱 안에서는 많은 규모의 돼지뼈가 발견되어 망자에 대한 제의가 집전되었음을 보여준다.[8]
그러나 이것이 중국 학계나 한국 일각의 주장처럼 수장사회(chiefdom)[9] 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주거지를 일정한 형태로 배치하고 중앙 광장에 집회소와 매장장(무덤)를 조성하는 취락 구조는 동시기 중국의 앙소문화와 일본의 조몬문화에서도 나타날 뿐만 아니라, 20세기에 오세아니아와 남아메리카에서도 조사되었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클로드 레비스트로스가 답사한 보로로(Bororo)족 마을은 26가구의 모계사회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직업적 전문화는 나타나지 않았으며 특정 여계 속에서 선출된 족장은 중재와 분배의 기능을 수행하였다.[10]
또한 이와 관련하여 주목받은 유물이 바로 옥기(玉器)이다. 흥륭와 문화에서 출토된 각종 옥기들은 중국 최초의 옥 가공품으로 꼽히는데다, 예로부터 옥은 귀금속으로 취급되었으므로 취락 내에서 소수의 인원이 옥기를 독점적으로 소유하고 있던 양상이 확인된다면 이것이 곧 수장사회 발달의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나아가 옥을 전문적으로 가공하는 직업이 탄생하고, 사회적 분업화와 위계화가 진전되어 사실상 청동기 없는 청동기 시대가 도래한 것으로까지 비약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 결과는...
[image]
'''망했어요(...).''' 사해유적에서 옥기는 주거지의 크기나 다른 유물의 수량과 무관하게 1~3개씩 고르게 소유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옥기를 소유한 이들의 주거지가 그렇지 못한 이들의 주거지와 공간상으로 확연하게 구분되어 있던 것도 아니다. 결정적으로 이들에게서는 단수 부장된 소량의 옥기를 제외하고는 다른 주거지들과 똑같은 양상으로 생산 활동을 의미하는 석기가 출토되었는데, 이는 오히려 흥륭와 문화 단계에서 직업적 전문화 · 계급적 분화가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훌륭한 증거가 된다.
흥륭와 문화의 주민들은 신락문화와 마찬가지로 어로 · 수렵 · 채집활동에 주로 의존하였으며, 농업은 부수적인 위치에 머물렀다. 유적 내에서는 사슴 · 멧돼지의 뼈가 대량으로 출토되었으며, 뼈를 정교하게 다듬은 작살도 나왔다. 흥륭와 유적 동북쪽에서는 200여 개의 구덩이가 물고기 뼈로 가득 차 있었다. 반면 농업과 관련해서는 갈돌과 갈판이 출토되었으나, 극히 개별적인 농작물의 흔적만이 발견되어 과연 농작물의 가공에 사용되었는지 단정하기 어려운 수준이다. 역시 가축의 사육은 보이지 않으며, 뗀석기와 간석기가 함께 출토된다.[12]
더불어 종전에는 흥륭와 문화에 선행하는 개념으로 B.C.7500년 정도의 소하서 문화(小河西文化)라는 개념이 제시된 바 있었지만, 소하서 문화는 토기 · 석기 · 골기 · 묘장 · 주거지의 형태가 모두 흥륭와 문화의 것과 일치한다. 더군다나 B.C.7500년이라는 연대도 7470±115BP를 오인한 것으로 드러나면서 B.C.5500년으로 연대가 내려와 궁극적으로 흥륭와 문화와 합치되게 되었다. 즉 소하서 문화라는 개념은 성립하지 않고, 단지 흥륭와 문화의 지역유형이었을 개연성이 더욱 크다.[13]
3.2. 신석기시대 후기
[image]
3.2.1. 조보구 문화
B.C.4500~4000[14]
[image]
흥륭와 문화가 발견된 것과 동시기에 같은 지역에서 독특한 흑도문화를 지닌 조보구 문화가 조사되었다. 탄소동위원소 측정 결과 조보구 문화의 유적 가운데 빠른 것은 적봉의 조보구 유적(趙寶溝遺蹟)으로 6220±85BP이고 늦은 것은 소산유적(小山遺蹟)으로 6060±85BP인데, 이것으로 미루어 조보구 문화는 흥륭와 문화에 후속하여 나타났으며 초기 홍산문화와는 같은 지역에 공존하면서 나란히 발전하였던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 범위는 북쪽으로 노합하에서부터 남쪽으로 난하 하구에 이르렀다.[15]
조보구 문화는 기본적으로 앞 시대의 압인문 통형관을 계승하면서도, 이에 더하여 기하학적인 무늬가 새겨진 간토기를 다양하게 제작하였다. 그 색깔로는 황갈색이 가장 많고, 그 다음이 회갈색과 홍갈색이며, 흑갈색은 비교적 적다. 동시기 중국의 산동성 일대에서는 북신문화(B.C.5900~B.C.4400)에서 대문구 문화(B.C.4300~2500)를 거쳐 산동 용산문화(B.C.2500~2000)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색깔의 간토기를 제작하고 있었는데, 조보구 문화에서는 이러한 산동성 일대의 채도문화를 일부 받아들였던 것으로 보인다.[16]
주거생활도 이전 시대를 계승하여 집자리가 몇 개의 줄을 이루어 나란히 배치된 모습을 유지한다. 경제활동에서는 농업 생산의 비중이 늘어나 보습 · 도끼 · 공이 등 농업과 관련된 대형석기가 대두되며, 사슴을 위주로 하는 야생동물의 뼈도 대량으로 출토되어 이전 시대의 수렵 · 어로생활도 유지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가축화된 개 · 돼지의 유골을 통해 이 시기에 비로소 개 · 돼지의 목축이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참고로 동아시아에서 돼지의 가축화는 기원전 6000년경 북중국의 츠산문화(磁山文化)로 거슬러 올라간다.[17]
조보구 문화의 특징적인 유물로는 흙으로 빚은 인면상(人面像)과 용 형상의 도안이 새겨진 도기(위 그림 좌측 하단)가 출토되었다. 그러나 도안을 엄밀히 관찰해보면 이것은 용이 아니라 새 · 사슴 · 멧돼지가 상서로운 기운에 싸인 모습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아직까지 독립적인 용의 형상은 나타나지 않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18]
3.2.2. 부하문화
B.C.3300~2700
3.2.3. 홍산문화
B.C.4000~3000[19]
[image]
3.3. 신석기시대 말기
3.3.1. 편복자 문화
B.C.3000
3.3.2. 소하연 문화
B.C.3000~2000
4. 문명인가?
고고학에서는 인류사에 영향이 크고 발달된 수준의 유물, 유적군 체계와 산물을 문명이라 한다. 한편 그렇지는 못한 단계의 유물, 유적군 체계와 산물은 보통의 경우 문화라 지칭한다. 어느 지역의 유물, 유적군이 다른 지역과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을 때 그것을 어느 한 문화로 규정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문화가 고도화 되고 어떠한 조건을 만족할 때 특별히 문명이라 부른다.
4.1. 문명으로 볼 수 있다
황하 문명과 다른 독자적인 기술 발전, 한반도 유적과 연결되는 특징이 있다. 아직 연구가 더 필요하지만 문명으로 부를 수 있는 근거는 있다고 볼 수 있다.
4.2. 문명으로 볼 수 없다
분명 황하 유역에서 시작한 신석기 문화와 별도의 계보를 가지는 요하, 양자강 중류, 양자강 하류, 아무르강 유역 문화가 존재했었다. 그러나 별개의 신석기 문화 모두가 문명으로 발달했다는 이야기를 할 수는 없다.
기본적으로 문명의 조건으로 꼽는 도시화, 직업과 계층의 분화, 문자의 사용 등을 만족하는 동아시아 지역은 기원전 2천년대 초반의 황하 지역을 기반으로 한 문화밖에 없다. 그나마도 메소포타미아나 인더스 강 유역에 비해 훨씬 늦은 시점이다. 그런데 신석기 시대에 문명을 운운하는 것은 독자적인 기준에서 억지로 문명을 인정하는 행위에 불과하다.
예를 들자면 신석기 시대 말기에 서안 강채유적(Jiangzhai, 姜寨)에서 5헥타르 정도 크기의 집 백여 채가 모여 있던 수준까지 발전했을 때 중동 지역과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우크라이나에서도 400 헥타르 크기의 집자리 유적이 나온다. 무엇보다도 양자강 문화를 주창하는 움직임은 일본의 조몬 문화를 조몬 문명으로 격상하고자 하는 움직임에서 파생된 것으로 농경조차 시작되지 않은 일본 열도가 도토리 채집을 기반으로 문명 수준에 이르렀다는 이야기를 가능케 하는 논리이다. 야스다 요시노리를 필두로 한 사람들이 이러한 주장을 하게 된 것은 오리엔탈리즘에 기반한 것으로 비옥한 초승달 지역에서 시작된 농경과 문명이 동아시아에 전파되어 비로소 동아시아에 농경과 문명이 시작된 것이 아니라 동아시아에도 문명의 기반이 되는 여러 비옥한 지역이 존재했다는 것을 어필하고자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서양의 영향 없이 동양에서 독자적으로 문명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는 당연한 소리를 엉뚱한 논리와 경로로 이야기하는 것이다. 기장이나 벼농사의 개시 시기가 아나톨리아의 밀농사의 시작 시기보다 느리고 레반트 지역의 도시 발달 시기, 메소포타미아의 청동기 사용 시기 비교 동아시아는 늦게 뒤쫓아가는 입장이지만 그것이 이 지역 사람의 열등함을 이야기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동일한 논리로 동아시아에서 홍산 유역의 발전이 가장 이른 시기에 이루어진다고 해서 중국 대륙 주민들이 저열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고 황하유역의 발전이 이른 시기에 이루어진다고 해서 한반도 주민이 저열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5. 고조선과의 관련성
홍산 문화를 한국 사학계에서 주시하는 이유는 고조선과의 연관성이 있을까 하는 점 때문이다. 특히 홍산문화가 곰을 신성시 여기고 여신 조각상이 출토되는 등의 특징이 우리가 알고 있는 단군설화에도 꽤 잘 맞물리기 때문. 게다가 중국이 동북공정과 관련해 이 고고문화를 중화제1촌, 중화시조취락 등 중화의 시조 마을로 내몽골 및 요하 일대에 널리 분포한 홍산문화를 이른바 요하문명론으로 부각시키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도 제기되어 주시하고 있다.
한편, 고조선은 홍산문화를 포함해 본 문서에서 다루는 신락 하층 문화~소하연 문화보다는 그 이후의 하가점 하층 문화(BC 2000~1500), 하가점 상층 문화(BC 1500~1000)과 오히려 관련이 더 높다는 의견도 있다. 하가점 하층 문화에 속하는 내몽고 적봉시 유적인 삼좌점(三座店) 석성은 그 형식이 고구려의 축성 형식과 매우 유사하며[20] , 하가점 상층 문화 지역에서는 고조선을 상징하는 유물이라 할 수 있는 비파형 동검이 대다수(국내 소장량보다도 훨씬 많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기타 내용은 고조선 문서도 참조.
5.1. 긍정론
홍산문화를 창조한 주역은 중국 문화를 창조한 화하족이 아니라 동이족이라는게 긍정론의 주장이지만 그때 최초로 동이라 인식된 집단들은 황하 하류의 산동성 및 하북성을 중심으로 하는 종족 집단들이다. 또한 동이라는 용어가 온전히 등장하는 시기는 기원전 11세기 서주 시대이다. 동이족일수도 있다는 확률도 있긴있다.
더 나아가 긍정론에서는 시기적으로 적석총에 앞선 빗살무늬토기도 발견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이형구가 1989년 논문에서 흥륭와문화와 홍산문화의 호선문(弧線文) 혹은 ‘之’자문토기로 불리는 토기를 한반도의 빗살무늬토기와 같은 계통으로 왜곡한 것이다. 또한 이형구는 2004년 저작에서는 토기 뿐만 아니라 고성 문암리 결상이식을 흥륭와 문화의 것과 연결시켜서 확대 해석했다.(후술)
미송리 유적과 요서지역 신석기문화가 일정 정도 관련성이 있음을 최초로 제기한 사람은 북한의 김용간이다. 그는 1963년 미송리 유적의 보고에서 신석기시대 토기를 보고하면서 2점은 ‘찍은’ 그릇 파편이며 나머지 토기들은 ‘그은’ 문양으로 차이가 있음을 파악했다. 동시에 적봉 홍산후라는 유적에서 유사한 토기가 출토되었으며 ‘이런 무늬 수법을 쓴 것이 우리나라에서 알려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고 지적했다. 뒤에 이 내용은 미송리 유적 하층의 자료를 요서가 아닌 요동의 소주산 하층 문화 혹은 신락 유적과 비교해서, 북한의 편년에도 이를 적용시키면서, 압록강 유역과 요서지역간의 관련성은 수정되었다.
처음 발굴조사 된 1959년과 보고된 1963년 당시에 요동과 요서지역의 신석기문화에 대한 자료가 부족해서 후에 이를 보완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문제는 40년 이상 지났으며, 중국의 새로운 자료가 넘쳐나고 있는 상황에서 요서 지역의 之자문토기가 한반도 빗살무늬토기 계통이라는 것은 전혀 맞지 않다. 이 논지는 이형구의 2009년 저작까지 그대로 적용되고, 2012년 위서 《환단고기》 역주본으로 이어졌다. 이형구의 주장은 한국 신석기문화가 시베리아에서 기원했다는 일본 학자의 주장을 뒤엎으려는 시도로 미송리유적 하층 유물을 근거로 한반도 신석기시대가 시베리아가 아닌 요서지역에서 기원했다는데 방점을 둔 것이다.[21]
부정론에 '''옥기는 중국에서도 많이 발굴된다'''는 말이 있는데, 옥기가 중국에서 잘 출토되는 것은 사실이나, '''중요한 것은 옥기가 아니라 옥결이다.''' 옥결은 모두 중원지역의 시기가 더 늦다. 옥결은 현재까지 출토된 바에 따라 유추하건대 흥륭와문화에서 처음 등장하여 홍산문화 시기에 황하문명의 앙소문화와 교류하면서 남하한 것으로 본다. 그 이전 시기에 요하 지역과 황하문명 지역의 교류를 보여주는 증거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이와 관련하여 중국의 학자 소병기(蘇秉琦)는 논문 "中華文明的新曙光(중화문명의 신서광)"(<東南文化(동남문화)> 제 5호, 1988)에서 황하문명 앙소문화가 황하 상류를 통해 북상, 현재의 만리장성 부근을 따라 요하문명[22] 홍산문화가 남하, 그리고 초원벨트를 따라 북방초원문화가 동진해 만나면서 Y자 형태를 이루어 서로 교역했다는 'Y자형 문화대'를 주장한 바 있다.
요하 지역의 옥기의 약 60%가 한반도 근처인 랴오닝 수암 지역과 약 20% 가량이 바이칼 호수 근처에서 나는 바이칼옥임을 생각해보면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다[23] . 추가로 소병기의 학설은 아니지만, 요하 지역의 옥결이 해안가, 즉 한반도 서해안과 중국 동해안을 따라 남하하여 동으로는 일본까지, 남으로는 장강 유역까지 전파되었다는 주장도 있는데, 이를 'A자형 문화대'라 한다. 중국의 옥결이 보통 해안가를 따라 출토되는 것을 보면 이도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다. 황하문명 및 이남 지역의 옥결은 홍산문화와 앙소문화의 교류 이후 시기에 출토된다. 그리고 홍산 옥기에는 중국에서는 없는 곰 형상이 투영된 유물이 여러 점 있고 제단 터에서는 희생된 곰 아래턱뼈도 발견되었다. 또한 농사를 지었으며 토기에는 선각 문양을 새겼다.
어쨌든 이와는 무관하게 돼지 머리 용, 사슴 머리 용, 봉황 등의 조각품이 많이 나오는데, 중국정부는 천하제일용(중화제일용)이라고 하여 이 용 유물을 중화민족의 첫 번째 용 유물이라고 홍보 중이다. 물론 이 문화는 중국과도 상관 없다.
또한 가장 중요한 것은 홍산 문화의 이전인 흥륭와 문화에서 발견되는 수많은 옥들인데 이것이 한반도의 강원도 죽왕면 문암리 유적과 전남 여수의 패총에 흥륭와 문화, 홍산 문화와 똑같은 옥 장신구와 귀걸이등이 발견된다는 것이며 그 옥들이 기원전 6천년과 7천년 것으로 흥륭와 문화에서 발굴되는 옥들과 같은 시기에 만들어 진 것이라는 말이 있으나 문암리 유적의 옥 귀걸이는 02-3호 수혈에서 토기, 석부와 함께 발견됐는데 이때 발견된 토기의 동위원소분석결과상 절대연대는 B.C. 5310~ B.C. 5020년으로 흥륭와문화와 공존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흥륭와 문화의 한쪽이 뚫린 옥 귀걸이(결상이식)과 강원도 고성 문암리의 옥귀걸이는 특징도 다르며, 그것들이 출토되는 양상도 다르고, 결정적으로 같이 출토되는 토기에 큰 차이가 있다. 여수의 안도패총에서 출토된 귀걸이도 귀걸이의 재질이 옥제가 아니라 석제이며(...), 크기 등도 흥륭와 문화의 옥귀걸이와 '''그냥 다르다.'''
그리고 부정론에서 말하는 한반도 농경 BC 1500년설은 잘못된 것이다. 한반도의 신석기 시대는 기원전 6천년부터 시작하며 한반도에서 기초적인 농경과 수렵에서 잡곡등의 농경으로 바뀐 것은 기원전 3500년전이였다. 그 전에도 중국이 장강 문명부터 농경이 일찍 시작된다고 해서 한반도에 똑같은 신석기 시대에 농업과 수렵을 하며 빗살무늬 토기를 만드는 사람들이 없었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한반도에도 이미 기원전 8천년경부터 덧무늬토기를 만드는 사람들이 어업과 수렵으로 패총을 만들기 시작하며 말기에는 벼농사를 시작하였다.또한 흥륭와 문화와 홍산 문명도 초기부터 농경을 한 것이 아니며 수렵과 사냥 채집을 하였으며 농경 문화가 특징인 문화가 아니고 옥기가 특징으로 옥기 문화라고도 부른다.위에 부정하는 주장을 하는 사람도 "홍산 문명은 농경의 문명에 달하지 않았다"라고 하지 않는가.수렵이나 농경등의 모든 문화가 이동에서 정주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과정일뿐이지 먹고 사는 생활 문화인 농경 문화를 문명의 척도로 보지 않는다.오히려 홍산 문명의 농경은 중국의 양쯔강의 장강 문명보다 늦으며 황하 문명 또한 수렵과 어업부터 시작하였다. 즉 홍산 문화에서 먹고 사는게 사냥이냐 농업이냐가 중요한게 아닌 것이다.즉 위 글이 말하는 기원전 5000년에 정확히 말하면 한반도와 가까운 랴오닝성 선양시 북부에서 기원전 8천년전부터 시작한 신러 문화(홍산 문화)가 존재할때도 한반도에 사람들이 살고 있었으며 한반도에 발견되는 7천년전의 옥기들이 홍산 문명의 전기인 興隆洼 文化(흥륭와 문화) 와의 옥기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사실이란 것이다.홍산문화와 관계없는 기원전 5천년의 이야기가 갑자기 농경이 기원전 1500년부터 시작했으니 한반도에 기원전 1500년전부터 사람의 문명이 있다는 듯이 주장하는데 한반도에서는 초창기 고산리식 토기는 기원전 8천년부터 시작하며 빗살무늬토기는 흥륭와문화의 토기처럼 기원전 6천년부터다.
홍산문화는 화하족(華夏族)이 창조한 중국의 황하 문명보다 더 오래된 문화라는 것이 주창자들의 주장이다. 여러 문화 중 홍산문화(6,000년 전)를 기준으로 잡더라도 1천여 년을 앞선 것인데,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 인더스 문명보다 그 편년이 더 올라가는 셈이다. 홍산문화를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화라고 자랑하는 이유다. 여기서 중요한 문제의 하나는 홍산문화가 화하족의 중국 문화(장강,황하)와 다르다는 것이다.#. 황하문화가 홍산문화의 영향을 받은 아류문화라는 건 중국인들에게 적지않은 충격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일부는 환빠들이 홍산문화를 좋아한다고 한반도와의 관련성을 완전히 부정하는 경향이 있는데, '홍산문화'와 '한반도 초기 문화'와의 관련성에 대한 진지한 학술적 접근 마저도 단순히 부정하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 '''상고시대에 요하에서 도읍을 정해 기원했다고 볼 수 있는 국가는 고조선이 유일하다.''' 중국에게 요하는 중원의 동쪽 변방에 있는 이민족의 땅이었을 뿐 중심이었던 적이 없다.
홍산문화에 대한 한국사와의 관련성 연구는 아직 다수파는 아니지만 제도권 학자들도 관심을 가지고 있는 연구이며, 계속 발굴되고 있는 유적에 관한 연구이기에 좀 더 지켜볼 필요가 있다.
5.2. 부정론
선각 문양은 발트해와 러시아 서부부터 한반도까지 걸쳐서 나타나는 세계 보편적인 문화이며, 한민족만의 고유한 문화가 아니라는 주장이 있다. 또한 홍산문화의 농경은 문명의 단계에 다다르지 못해 수렵과 목축이 그와 동등한 수준의 지위를 차지했다. 밀이나 벼는 중국에서도 신석기 시대 말에나 재배되는 작물이라 기장이 주된 곡물이었다. 또한 한반도에서 발견되는 신석기 토기 중 고산리식토기는 아무르강 하류의 오시포프카(Osipovka)문화에, 융기문토기는 아무르강 중류의 노보페트로프카(Novopetrovka)문화에서 기원하는 것으로 보이므로 요서지역의 신석기 토기와 계보를 달리한다.[24]
그리고 한반도에서 정착성 농경이 성립하는 것은 기원전 1500~700년경에 유행하는 미사리식 주거가 형성된 이후이며[26] , 홍산 문화와 수천 년 단위의 차이가 난다. 다시 말하지만 세계적으로 문명의 수준에 달하는 곳에서는 위에서 언급했듯 수백 헥타르 수준의 주거지 유적이 기본적으로 나오고 수만 명이 거주한 도시가 이미 발견되는데, 한민족이 기원전 5000년에 문명을 이루었다가 다시 기원전 1500년에는 정착을 시작하는 단계의 유적이 나온다면 한민족은 3500년 동안 무슨 일을 겪었다는 말인가. 아는 사람에게는 너무 기초적인 이야기라서, 또 환빠들에게는 너무 어려운 이야기라서 중간에서 소시민들만 이래저래 현혹당할 뿐. 게다가 홍산문화에서도 채도토기는 많이 발견된다.
고조선이 있던 평양 일대에서는 목곽묘 썼고. [27] 게다가 이를 한반도의 돌무지무덤과 연결 지으려는 시도는 우하량 유적의 피라미드는 무덤양식이 아니라 제사 터이고, 무덤은 그냥 흙 파서 토광묘 썼다는 기초적인 사실로 인해 반박된다[28][29][30]
결과적으로 연구가 더 진행되어야 하겠지만, 재야사학계의 의견처럼 한민족의 문화로 단정짓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주장도 있다. 홍산문화보다는 홍산문화를 계승한 청동기 문화인 하가점 하층문화가 오히려 고조선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아예 없지는 않지만, 이후 하가점 하층문화가 이민족 집단인 하가점 상층문화에 의해 단절되는 현상이 나타나서 역시 고조선과 관련짓기는 어렵다고 보는 게 주장도 있다.[31] 이다. 다만 동아시아에서 중원문화와는 다른 독특한 특성을 지닌 신석기 문화이기에 일정부분 한국인의 기원이 되는 신석기와 청동기 문화에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도 있지만, 말 그대로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중국정부는 이미 홍산문명을 고대 중화 한족의 문명으로 결론짓고 우리들이 이렇게 오래된 역사를 가졌다며 박물관까지 세워놓고 홍보 중이지만, 당연히 중국에서 역사관이 왜곡되고 과장되었다고 우리도 과장하자는 논리를 주장하는 것은 피장파장의 오류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중국 화하족의 문명이 아니라고 해서 그게 꼭 우리 문화라고 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홍산문화가 화하족이나 한족과 관련이 전혀 없다는 것일 뿐, 그렇다고 우리와 반드시 관련이 있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현재 만주 지역에 국가가 중국과 한국밖에 없다고 해서, 중국 게 아니니 한국 거라는 것은 흑백논리이다. 현재도 발굴이 계속 진행중이니, 발굴 및 연구 결과를 더 얻은 후에 따질 일이다. 2018년 기준으로 홍산 문화는 본격적으로 발굴이 시작된 지는 40년도 채 안 됐으며, 중국의 주장이긴 하나 '요하문명'이라 명명된 지도 이제 갓 20년이 조금 넘었을 뿐이다. 매년 100여 개에 가까운 새로운 유적들이 발견/발굴되는[32] 고고학계의 블루오션이다. 아직 확실히 한국사라고 판단하기에는 시기상조다 .하지만 고조선 자체가 만주에 있었고 고구려도 만주에 있었다. 전쟁등으로 영토가 사라졌다고 해서 한국사가 아니라고 아예 부정할 수도 없는 것이며 청나라의 만주족이 중국 한족에게 땅 한평 남겨주지 않고 청나라를 건국했다고 해서 중국 문명 전부가 청나라 여진족의 여진족사라고 할 수도 없듯이 말이다.
1980년대 전두환 시절 통일 후 국가전략을 담은 1급 기밀문서인 '백두산계획'이 있었다고 한다.# 7광구와 만주 고토 회복 등의 계획이 담긴 이 '백두산계획'에 한민족 역사의 한부분으로 홍산문명을 언급하여 만주지역에 대한 강한 연결고리와 정통성을 주장했다고 한다.
5.3. 기타
'''애초에 고조선과 중국 사이에 절묘하게 끼어 있는 홍산 문명이 양측 모두와 연관이 없다면 이상한 것이다.''' 흔히 "고조선만의 유물", "중국만의 유물"이라고 하는 것들은 그 지역에서 주로 출토되는 것들을 이야기하며, 고조선의 중심지와 중국의 중심지 사이에 있는 홍산 문명이 고조선과 전혀 관련이 없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리고 이러한 유물상의 연관성이 민족적 연관성을 나타내는 것도 아니며, 고조선과 중국 두 문명만 해도 서로 상호작용을 거듭하면서 존속했기 때문에 홍산 문명이 어디에 속한다고 단정해버리는 것은 매우 곤란하다.
괜히 요동사라는 용어가 있는 것이 아니다. 고대/중세 왕국들의 국경은 끊임없이 변화를 거듭해왔는데 지금 국경에 맞춰서 이 나라는 어디 역사, 저 나라는 어디 역사[33] 하는 식으로 나누는 것은 대단히 어불성설이다. 고대 왕국들 사이에 교류가 전혀 없었던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단순히 유물이나 유적만 가지고 어느 나라의 소속이었느니 따지는 것 역시 비논리적인 행각이며, 민족주의 사학이 근본부터 잘못되었다는 것이 이것 때문이다. 로마 제국은 이탈리아의 역사니까 프랑스나 영국, 터키, 이집트와는 관계없는 역사라고 할 수는 없고, 헬레니즘 제국이 마케도니아와 그리스의 역사라고 해서 이집트나 인도와 관계없는 역사라고 할 수도 없다. 마찬가지의 맥락으로 보아야 하며, "조상이 중국인이었으니까 넌 중국인", "조상인 한국인이었으니까 너도 한국인"이라는 식으로 우기는 것 역시 괴랄한 논리이다.
전근대의 피지배 계층은 전쟁을 거듭하면서 심한 경우 수십 개 국가들의 국적을 넘나들며 살아가기 일쑤였다. 뿐만 아니라 국가의 "정통성"을 따지는 것도 대단히 우스운 일이다. 그런데 동아시아에서는 이상하게 "우리는 어떤 오래된 문명의 후계자니까 너희보다 우수함! 빼애액!"하는 식의 괴악한 논리가 유독 강하게 통용된다.[34][35] 때문에 그냥 한민족과 한족의 영향으로 고루 받은 또다른 하나의 문화라고 넘기면 될 것을 굳이 고조선의 역사네, 중국의 역사네 하며 토론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6. 중국 정부의 주장과 문제점
6.1. 명명
사실 '요하문명'이라고 이름을 붙인 게 중국인데, 현대 중국 고고학의 아버지라 평하는 '곽대순'이 1995년 논문에서 '요하문명'이란 단어를 처음 사용한 데서 비롯되었다. 일반적으로 칭하는 '문명'이란, 1. 일정 지역 안에서 2. 도시화를 이룬 집단들이 3. 사회적으로 신분 분화, 노동 분업 등 다층의 계층을 구성하여 4. 하나 혹은 그 이상의 중심지를 가지고 5. 공통의 문자체계를 이룩한 집단이다. 그러나 고고학적 의미에서는 약간 다르다 . 먼저 선사유적(중국에서는 '유지')들이 발견되면 발견된 지역의 최소행정구역(우리나라는 동, 리, 중국은 촌)의 이름을 따 붙인다. 암사동 유적, 우하량 유지 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유적들이 다수 발견되어 동일한 문화권에 속한다고 생각될 경우 이를 '문화'라고 한다. 이는 한국 사학계에서는 쓰이지 않는 개념인데, 해당 문화 중 최초로 발견된 지역의 이름을 딴다. '홍산문화', '조보구문화'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 문화들이 시대적인 흐름을 가지고 변화하는 양상이 두드러질 경우 이를 문명이라 하며, 보통 주변의 가장 큰 강의 이름을 딴다. 요하 일대에서는 소하서문화(BC 7000~6500) - 흥륭와문화(BC 6200~5200) - 사해문화(BC 6000~5200) - 부하문화(BC 5200~5000) - 조보구문화(BC 5000~4400) - 홍산문화(BC 4500~3000) - 소하연문화(BC 3000~2000) - 하가점하층문화(BC 2000~1500) - 하가점상층문화(BC 1500~1000) 등으로 이어지는 흐름이 있으므로 문명으로 볼 수 있으며, 주변의 큰 강인 요하를 따 요하문명으로 명명한 것이다.[36] 현재 요하 중류 지방은 사막화가 진행되어 발굴 작업이 불가능한 상태인데, 만약 미래에 발굴하게 된다면 더 엄청난 유물 유적들이 훨씬 많이 발견될 것이라 기대한다고 한다. 실제로 주변 도시에는 가끔 사륜구동차를 타고 사막에 들어가서 모래 속에 묻혀있는 옥기류 등을 주워오는 골동품 수집가들이 많다고. 심지어는 비공식적인 관광상품으로 활용하기도 한단다.
위의 각종 문화 유적/유물들이 가장 많이 발견되는 중국의 적봉시에서는 매년 9~10월 경 '홍산문화고봉농단'이라는 학술대회가 개최되고 있는데, '''국제'''학술대회임에도 불구하고 '''중국 학자들밖에 없으며''', 당연히 '''영어는 사용하지 않고 중국어로 진행한다'''고 한다.
6.2. 옥기시대?
중국 학자들은 홍산문화 후기에 해당하는 BC 3500~3000년 경에는 해당 지역에 초기 국가단계의 집단이 형성되었으며 초급 문명사회에 해당한다고 주장한다. 무덤의 종류와 양식, 부장품의 종류와 수, 여신묘(우하량 유지 제1지점) 등을 볼 때 최소 6개에서 많게는 12개 이상의 계급 분화가 있는 신권정치 사회였으며, 따라서 해당 홍산문화 지역을 기반으로 한 초기국가 단계였다는 것이다.
문제는 문자의 사용이 없었다는 점과, 아직 석기시대에 해당한다는 것이다.[37] 이에 대하여 중국 학자들은 문명의 조건에서 문자 사용 여부를 따지는 게 합당하지 않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수암옥, 바이칼옥을 가공한 유물들이 다수 발견된다는 점을 근거로 아예 동양 선사시대에 한정하여 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 사이에 '옥기시대'를 넣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구석기 - 신석기 - 청동기 - 철기'의 시대구분은 서양의 오리엔탈리즘이고, 동양의 초기국가단계는 청동기시대가 아닌 옥기시대부터 시작된다는 것.
6.3. 요하문명은 화하족이 건설한 문명?
중국 학자들은 요하 일대에서 유물들이 다수 발견되자, 주류 사학계를 뒤집어버렸다. 기존에는, 황제(중국 신화)가 화하족을 형성하고 황하문명을 건설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요하의 유적들이 발견되자, 아예 '''황제족이 요하문명을 건설한 후 황하로 이동하여 황하문명을 또 건설한 것이라고 아예 주류 사학을 바꿔버렸다.''' '요하문명'이라 명명한 곽대순이 현대 중국 고고학의 아버지로 대우받고 있는 실정이다. 실제로 '요하문명'이 명명된 것이 1995년인데, 그 직후인 1996년부터 중국은 국가 차원에서 역사공정을 시작했다. 먼저 하상주단대공정(1996~2000)에서 하나라, 상나라, 주나라의 존립 연대에 대한 학설을 통일하고, 동북공정(2002~2007)에서 동북삼성의 역사를 정리, 즉 만주의 역사를 억지로 모두 중국사로 편입한다. 그리고 중화문명탐원공정(요하공정)(2003~2015)###에서 요순시대를 역사시대에 편입하고자 시도하고, 황하문명보다 빠른 요하문명을 중화 문명의 뿌리로 결론짓고 박물관 등을 세워 홍보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국사수정공정(2010~2013)에서 청사고를 정리한 후, 2016년부터는 '중화문명선전공정'을 준비하고 있다. 이는 세계의 화교 네트워크를 활용하여 수정된 중국사를 전세계에 선전하겠다는 계획이다. 2018년 현재까지도 시작은 하지 않았으나, 요하문명 명명자인 곽대순이 직접 주장한 계획이므로 머지 않아 실제로 실행될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말도 안 되는 말이지만, 이게 정설로 받아들여질 경우 큰 문제가 생긴다. ''''요하문명에서 황제의 화하족 발원 = 만주지역 소수민족들은 모두 황제의 후손 = 한국사도, 몽골사도 사실은 모두 중국사 = 한국과 몽골은 역사적으로 중국의 지방정권'이라는 기적의 논리'''가 만들어지기 때문.[38] 2017년 4월 초 시진핑이 트럼프에게 한 말을 보면 이미 이것이 현실이 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기사 따라서 한국 사학계에서도 동북공정과 함께 고구려사, 발해사의 중국사 편입 시도만 문제삼았던 한국 학계가 애초에 초점부터 잘못 맞춰왔었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홍산문화와 고조선 사이보다도 차이가 훨씬 큰 황하문명이지만 공산당 일당독재인 사회구조와 소수민족 독립을 극도로 두려워해 강한 주입식 역사관을 가르치는 막장스런 중국 정부에게는 사실 학술적인 참 거짓은 딱히 의미가 없다. (비슷한 예로 고구려, 발해 유적지에 한국인을 출입금지 시키고 당나라 건축양식으로 복원을 한다든가...) 우리나라 학계에서는 중국의 공간적, 시간적 영토를 넓히려는 작업으로 보고있다.
홍산문화에서 도소남신상이 발견되자 인민일보·CCTV 등 중국 언론들은 “5300년 전의 조상 발견”, “중화조신(中華祖神) 찾았다”는 내용으로 발굴성과를 대대적으로 보도하였다. [39] 이와 함께 2004년 11월, 기존의 랴오닝성박물관(遼寧省博物館, 요녕성박물관)을 개축하여 건축면적 2만 8900㎡, 12개 전시실에 전람면적 8530㎡에 이르는 신관을 개관하였고 2010년 8월 8일, 중국 내몽고 자치구 적봉박물관을 개관하였다.
이같이 중국 내몽고에는 박물관 신축과 개관, 확장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적봉시 인근의 오한기(敖漢旗)·임서(林西)박물관은 신축을 마치고 2010년 후반기에 이전했고 극십극등기(克什克騰旗) 역사박물관과 파림좌기(巴林左旗)의 요상경(遼上京)박물관은 그전에 이미 신축해 개관됐다. 요하를 중심으로 발견된 고고학적 성과, 즉 홍산문화를 정점으로 하는 요하문명을 집중 전시하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현재의 역사적 기원을 어디서든 긁어내려는 특이취향자 내지 정치병 환자, 국수주의자들이 들러붙는 통에, 여러 모로 한국과 중국의 역사적 병림픽 소재가 되는 꼴이라서 순수하게 홍산문화와 같은 인근 지역 신석기~청동기 문화를 분석하는 연구자들에게는 나날이 헬게이트가 꽃피고 있다(...).
7. 같이보기
[1] 궈다순·장싱더, 김정열 역, 『동북문화와 유연문명』, 동북아역사재단 번역총서 13, 동북아역사재단, 2008, 269~273쪽; 오강원·홍현선, 『중국고고(선사시대 편)』, 백산자료원, 1997, 292쪽; 이해련, 「홍산문화의 연구현황과 문제점: 토기와 옥기를 중심으로」, 『중국 동북지역 고고학 연구현황과 문제점』, 동북아역사재단, 2008,72~74쪽.[2] 이렇게 말하니 쑤빙치가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연구자인 듯 오해할 수 있으나, '''속아서는 안 된다.''' 당장 여기에서 쑤빙치는 홍산문화를 중국의 신화상 인물인 황제(黃帝)의 것으로, 이에 상응하여 앙소문화를 염제(炎帝)의 것으로 간주함으로써 오늘날의 장대한 중국문명 탐원공정의 신호탄을 쏘아올렸다. 이후에도 지극히 빈약한 억측을 가지고 고구려는 중국 상나라의 후예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3] "新樂文化", 《藝術與建築索引典》, http://aat.teldap.tw/AATFullDisplay/300264895, 2015/09/08 확인.[4] BP는 Before Present의 줄임말. 지질학이나 고고학에서 시간을 나타내는 단위로 사용되며, 1950년을 0BP로 잡는다.[5] 궈다순·장싱더, 김정열 역, 『동북문화와 유연문명』, 동북아역사재단 번역총서 13, 동북아역사재단, 2008, 230~231쪽.[6] 김정열, 「6. 만주의 선사고고학」, 『만주 이야기』, 동북아역사재단, 2013, 251~253쪽; "신러 유적", 《고고학사전》,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39091&cid=43065&categoryId=43065, 2015/09/08 확인; "시아오쮸샨문화", 《고고학사전》,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38970&cid=43065&categoryId=43065, 2015/09/08 확인.[7] "씽롱와문화", 《고고학사전》,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39157&cid=43065&categoryId=43065, 2015/09/08 확인.[8] 궈다순·장싱더, 김정열 역, 『동북문화와 유연문명』, 동북아역사재단 번역총서 13, 동북아역사재단, 2008, 234~241쪽.[9] "군장사회(=수장사회)는 수공업의 전문화와 사회적 위계화가 어느 정도 진행되었을 뿐 아니라 군장을 중심으로 한 엘리트 계층에 의해 일반 사회 성원들에 대한 사회경제적인 통제와 조절이 이루어지는 사회를 말한다. 따라서 이러한 단계에 도달한 사회에서는 군장을 비롯한 엘리트 계층이 자신들의 권위를 현시하는 특수 유물을 독점적으로 소유하며, 일반 성원들과의 차별성을 드러내기 위해 자신들의 생활 공간과 의례 공간을 공간적으로 구분하기 마련이다(오강원, 「동북아시아 속의 한국 청동기문화권과 복합사회의 출현」, 『동양학』 제51집, 2012, 단국대학교, 14쪽)."[10] 오강원·홍현선, 『중국고고(선사시대 편)』, 백산자료원, 1997, 116~117쪽; 나카자와 신이치, 『신의 발명』, 동아시아, 2005, 109~200쪽; C. 레비 스트로스, 박옥줄 역, 『슬픈 열대』, 한길사, 2007, 408~425쪽.[11] 刘赫东·田广林, 「兴隆洼文化查海遗址出土玉器发微」, 『赤峰学院学报』 제35권 1기, 2014, 4~5쪽. 유적 분류에서 F는 건물지(적색), FM은 거실묘(녹색), H는 매납갱(녹색)이다. 바 이후의 숫자는 흥륭와 문화의 2기·3기를 의미하고, 한자는 건물지의 크기가 소형·중형·대형임을 의미한다.[12] 궈다순·장싱더, 김정열 역, 『동북문화와 유연문명』, 동북아역사재단 번역총서 13, 동북아역사재단, 2008, 241~244쪽.[13] 박진호, 「요서지역 초기 신석기문화 연구 : 소하서·흥륭와문화를 중심으로」, 인하대학교, 2014, 108~115쪽.[14] 궈다순, 「요하유역의 신석기 및 초기청동시대 유적에 대한 고고학상 해석: 고고학상 드러난 요하유적의 시대구분」, 『박물관기요』 제15집, 단국대학교, 2000, 61쪽; 궈다순·장싱더, 김정열 역, 『동북문화와 유연문명』, 동북아역사재단 번역총서 13, 동북아역사재단, 2008, 288~289쪽.[15] 궈다순·장싱더, 김정열 역, 『동북문화와 유연문명』, 동북아역사재단 번역총서 13, 동북아역사재단, 2008, 288~289쪽.[16] 궈다순·장싱더, 김정열 역, 『동북문화와 유연문명』, 동북아역사재단 번역총서 13, 동북아역사재단, 2008, 295·303쪽; 오강원·홍현선, 『중국고고(선사시대 편)』, 백산자료원, 1997, 192·196·207쪽.[17] 돼지의 가축화는 유라시아 동부(동북~동남아시아)와 서부(서남아시아~유럽)에서 각각 독립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 통설이다. 유라시아 서부에서는 키프로스에서 기원전 97~94세기의 가축화된 돼지뼈가 발견되었고, 이를 근거로 터키 남동부 일대에서 기원전 100세기 경(괴베클리 테페) 돼지의 가축화가 시작되었다는 설이 있다. 유라시아 동부에서는 정피안(甑皮岩)유적을 근거로 기원전 70세기 남중국에서 가축화가 시작되었다는 설과, 자료상의 문제로 이를 부정하고 츠산(磁山)유적을 근거로 기원전 60세기 북중국에서 가축화가 시작되었다는 설이 있다.[18] 친원성 등, 조영현 역, 『문명의 새벽: 원시시대, 중국의 문명 1』, 시공사, 2003, 154쪽.[19] 송호정, 「요하유역 고대문명의 변천과 주민집단」, 『중국 동북지역 고고학 연구현황과 문제점』, 동북아역사재단, 2008, 28쪽.[20] 1. 평지성+산성 이중구조 2. 육합쌓기(축성시 돌 하나에 돌 6개가 맞물리게 지어 견고성을 높이는 방식) 3. 옹성의 전신인 '치'(평지성에서 15개, 산성에서 10개 발견) 4. 들여쌓기(지상 5~6m 정도는 사선으로 여러 겹(3겹 내외)을 쌓고 그 위로는 수직으로 쌓는 축성방식) 등 4가지 특징이 발견되는데, 이는 수나라와 당나라가 고구려를 침략한 이후에야 중원으로 전해진다.[21] 김재윤, 《2012년 『환단고기』 역주본, 고고학적 비판》, 한국상고사학보[22] 국내에서는 요하문명을 문명으로 인정하지 않지만, 중국 학자의 논문이니 넘어가자.[23] 옥은 산지가 한정되어 있어서 성분 분석을 해보면 그 산지가 어디인지 알 수 있다. 만주 지역 옥기는 약 60%가 수암옥, 20%가 바이칼옥이다.[24] 이동주, 「동북아시아 초기신석기문화의 형성과 전개」, 『문물연구』, 동아시아문물연구학술재단, 2006, 4~49쪽.[25] 당연히 한민족을 깎아내리는 것이 아니고, 세계 어느 지역이나 진정한 '문명' 지역과 비교하면 그럴 수밖에 없다. 신석기~청동기시대의 역사적 사실이 현대의 민족 의식을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26] 농경 자체가 정착을 동반하는 것이 아니냐... 고 교과서 수준으로 배운 사람이면 생각하겠지만, 이때의 농경은 토지의 비옥도 문제나 화전 등 농경 방식의 문제로 인해 주기적으로 이동하면서 이루어진 농경이다. 이를 극복하고 나서야 송국리 유적과 같은 정착성 집락이 등장하는데 이것도 수백~수천 명 단위의 것이다. 중동이나 이집트 등 문명의 대표 지역과 비교하면, 민족적 자긍심을 빼고 말하면 도시화의 시간은 수천 년 뒤처졌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25] 아울러 토기 사용과 농경의 시기도 '신석기 시대에 농경을 시작하면서, 토기를 만들어서 물건을 저장하게 되었고...'라는 식으로 도식화해서 외우지만 동북아시아에서 토기 사용과 농경의 시작은 수천 년씩 차이가 난다. 옆나라 일본의 경우 1만 년씩 차이가 나고 한반도에서도 3000년 정도는 차이가 난다.[27] 애초에 흙 파고 사람을 묻는 건 50만 년 전 호모 에렉투스에게서 기원했다.[28] 단 우하량 유지 피라미드 모두가 제사터였던 것은 아니다. 대표적으로 거대 피라미드로 잘못 알려졌던 우하량 2지점 유적은 제단으로 확정되었고, 우하량 2지점 1호총 21호는 석관적석묘 형태이다. 그러나 우하량 13지점의 거대적석형 건축물(지름 100m(최하단 지름 100m, 흙으로 쌓기 시작한 6단 지름 40m), 높이 7m, 7단(하단 5단은 돌, 상단 2단은 흙), 원형으로 추정)은 적석형 건축물과 함께 아예 바로 옆에 제단터(가로 60m, 세로 40m)가 따로 발견되었으며, 건축물 정남쪽 방면에서 인골이 발굴되어 적석총임이 증명되었다.(孟昭凱(맹소개), 金瑞淸(금서청) 공저, <五千年前的文明: 牛河梁遺址(오천년전의 문명: 우하량유지)>, 中國文聯出版社(중국문련출판사), 2009)[29] 건축물들의 경우 아직 발굴이 시작조차 안 된 것들이 많기 때문에, 적석총이라는 게 증명된 건축물이 발견된 이상 모두가 제사 터였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30] 반박을 하려면 정확한 지식을 가지고 반박하자. https://www.sciencetimes.co.kr/news/%EC%84%B8%EA%B3%84%EC%97%90%EC%84%9C-%EA%B0%80%EC%9E%A5-%EC%98%A4%EB%9E%98%EB%90%9C-%ED%94%BC%EB%9D%BC%EB%AF%B8%EB%93%9C/[31] 고조선의 기원적 문화에 대해선 아직 다수설이 없을 정도로 뚜렷한 유적이 없다.[32] 2017년 한해에만 127개 추가 발견[33] "일제강점기"는 우리 역사니까 일본의 역사는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는가?[34] 물론 어느 나라에나 이런 국뽕은 있다. 그러나 동북아의 수준은 정도가 심해도 너무 심하다.[35] 이 때문에 동아시아에서는 역사가 서양의 종교 역할을 대신하며, 그렇기 때문에 동아시아 국가들이 무종교자 비율이 높을 수 있는 것이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동아시아의 무의미하고 소모적인 역사 논쟁이 서양, 특히 중세 서양의 종교 논쟁과 아주 닮아 있기 때문이다.[36] 그러나 현재 홍산문화와 하가점하/상층문화의 경우 두 문화의 혈통 구성이 다르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요하문명을 '문명'으로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지역만 공유할 뿐 하나의 문명으로 이어진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37] 홍산문화 후기에는 청동기의 사용도 일부 나타나기는 한다. 그래서 학자에 따라 석기와 청동기를 함께 사용하는 '동석병용시대'라 하기도 한다.[38] 정설로 받아들여지지 않더라도 문제는 계속된다. 정설이건 아니건 공산당 독재인 중국의 학생들은 학교에서 그렇게 배울 텐데, 15억 중국인과 전세계 화교들이 모두 한국과 몽골이 역사적으로 중국의 지방정부였다고 알고 있다고 상상해보자......[39] 홍콩에서는 중화조신이 장학우를 닮았다고까지 선전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