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베클리 테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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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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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한국어
괴베클리 테페
영어
Göbekli Tepe
프랑스어
Göbekli Tepe
국가·위치
터키 샨르우르파

등재유형
문화유산
등재연도
2018년
등재기준
(i)[1], (ii)[2], (iv)[3]
지정번호
1572
'''【언어별 명칭】'''
한국어
괴베클리 테페
터키어
Göbekli Tepe
아르메니아어
Պորտասար (Portasar)
쿠르드어
Girê Miraz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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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연도
3. 유적지의 건설
4. 몰락
5. 해석
5.1. 천문 현상과의 연관성?
6. 슈미트 교수
7. 기타
7.1. 아르메니아의 반발
8.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9. 관련 문서


1. 개요


'''Göbekli Tepe'''
터키어로 '배불뚝이 언덕'이란 뜻으로, 터키 남동쪽 샨르우르파(Şanlıurfa)도 외렌직(Örencik)군에 있는 유적.
2018년 6월 바레인 마나마에서 열린 유네스코 제42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터키의 18번째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이 유적은 해발 760미터에 위치한 언덕 정상에 묻혀 있었는데 현지인이 우연히 찾아서 몰래 파내려다가 발견되었다. 이후 1963년에 미국 시카고 대학과 터키 이스탄불 대학이 공동조사를 하여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독일인 고고학자 클라우스 슈미트(Klaus Schmidt)를 단장으로 한 조사단이 1994년부터 2014년까지 본격적인 발굴조사를 하였다. T자 형태 돌기둥 2백 개 이상이 늘어서 스무 겹으로 원을 이루는 형태가 특징인데, 기둥 중 가장 높은 것은 5.5 m에 달한다.
이렇게 보면 그냥 평범한 고대 유적지로 보이지만...

2. 연도


2010년 발표된 결과로는 가장 오래된 부분이 '''기원전 9600년 무렵''', 즉 토기 없는 신석기 시대(PPNA) 초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한다.[4] 이 정도 크기의 인공 구조물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대표적인 대규모 고(古)유적이자 세계 7대 불가사의이기도 한 이집트 피라미드가 대략 기원전 2000~2700년 무렵 유적인데 괴베클리 테페는 이 기록을 가뿐히 뛰어넘는다. 단순 계산으로 따져도 피라미드가 지어진 시기와 현대까지의 기간(4000년)보다, 괴베틀리 테페가 지어지고 피라미드가 지어지기까지의 기간(7000년)이 3000년이나 더 길어서 그 사이에다 기원 후부터의 인류 역사를 한 번 더 욱여넣어도 1000년 가량이 남는다.
슈미트 교수에 따르면 기둥에 새겨진 부조나 주변에 나타난 흔적 등을 토대로 보건대 수렵채집인들이 건축한 듯[5] 보이나, 일 년 중 일정 기간은 마을에서 거주했던 듯하다.#
유적이 위치한 아나톨리아 지역은 현재까지 발견된 도시중 가장 오래되고 초기 밀농사를 했다고 추정되는 유적들도 발견되므로, 수렵인들이 이런 종교시설을 건축하며 모여 살다가 농사를 지으며 정착민으로 변화하지 않았을까 하는 새로운 학설이 제시되었다.아래 항목 참조
물론 존재 자체로도 놀라운 유적이지만, 현재는 연구가 막 시작된 단계라 아직 모르는 부분들이 많다. 인터넷상에서는 설레발이 심하지만, 아직은 딱히 이렇다 저렇다 할 만한 명확한 성과가 나오진 않았기 때문에 좀 더 두고 보아야 할 것이다. 특히 그레이엄 핸콕 같은 초고대문명설을 주장하는 부류는 온갖 주장을 남발하는 중이니 가려 듣도록 하자.
이 시점이 중요하다는 것은 인류가 원시 생활에서 벗어나 일정 규모의 인구가 모여 연대를 붙이는 것이 의미 있는, 즉 문명이라고 부를 수 있는 최초의 고고학적 업적을 만든 시발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괴베클리 테페를 의식한 것은 아니지만) 1993년 이탈리아계 미국인 지질학자 체사레 에밀리아니(Cesare Emiliani)는 서력기원의 연대에 1만을 더해 홀로세기원(Holocene era), 또는 인류기원(Human Era)이라고 이름지어 약칭 HE라고 쓰자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서기 2020년은 12020 HE라고 하자는 것이다.

3. 유적지의 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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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베클리 테페는 언덕 위에 스톤헨지처럼 원 모양으로 세운 돌기둥이 특징인데, 기둥들에는 여러 가지 곤충동물 형상이 양각되어 있다. 돌기둥들은 T자 형상을 하였는데 사람을 나타낸 듯하다. T자형 돌기둥의 몸통 부분(ㅣ부분)에는 손과 인체형상이 조각되었지만 얼굴 부분(ㅡ부분)에는 아무 조각도 없다. T자형 유물은 한국의 솟대나 일본의 토리이에서도 볼 수 있는데, 가 하늘과 인간을 연결해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새가 앉는 횃대를 형상화한 것이다. 다른 유적에는 사람 얼굴을 새겼으므로, 여기서는 얼굴을 조각할 수 있지만 하지 않았다고 추정한다.
이곳이 일상생활을 위한 장소가 아님이 유력하다. 굳이 중간에 T자형 돌기둥을 세워 몸통 부분에 손 모양을 조각한 점을 볼 때 신앙을 위해 신을 형상화했지만 얼굴은 조각하지 않았다고 추정한다. 유적지 주변에서는 농사를 짓거나 사람이 거주했던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지만, 학자들은 수렵채집에 의존했을 건립집단이 이곳에서 연중 어느 정도는 머무르며 종교적 행사를 치렀으리라 본다. 이는 주변에서 잡아서 이곳으로 가져와 먹고 묻은 야생동물들의 뼈가 대량으로 발견된 점에서 유추하였다.
돌기둥을 세우고자 인근에 위치한 석회암 언덕에서 바위를 떼어내 운반했는데, 기둥 하나의 무게가 10~20톤에 달하기 때문에 운반과 조각, 건설에 적어도 5백 명 이상 대규모 인력이 필요했으리라 보인다. 이 시기는 겨우 원시적인 농업이 시작되려던 신석기 시대 초기로 추정한다. 고고학계의 기존학설에 따르면, 인류가 이러한 거대유적을 조성하려면 체계적으로 토목활동이 가능한 대규모 노동력이 필요하고, 이를 뒷받침하려면 농경생활에 따른 체계화된 사회조직이 등장해야 한다. 그런데 괴베클리 테페에서 문자[6]바퀴, 토기, 청동기의 사용흔적이 발견되지 않은 점, 그리고 농업이나 가축 사용을 짐작하게 할 만한 유물도 발견되지 않은 점이 기존 신석기 혁명과 농업발전을 통한 인류의 집단사회 구조형성[7]과 충돌한다.
사실 집단사회 형성이 농경보다 앞설 수 있음은 학계에서는 이미 20년 이상 전부터 논의되어 충분히 받아들여진 내용이므로 그 자체가 그렇게까지 충격적인 것은 아니다[8]. 다만 농경 이전의 집단사회가 이러한 대규모 토목사업을 벌일 수 있을 정도로 체계적이고 대규모일 수 있다는 사실은 확실히 놀랍다.

4. 몰락


괴베클리 테페는 세워진 뒤 자그마치 약 2천 년간[9] 신전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곳에 세워진 기둥들은 고의적으로 메워진 뒤 인근에 새로운 기둥들로 다시 세워지는 등 몇 번 변화를 겪었다. 후기로 갈수록 기둥을 제작하는 방식은 단순해지고 조잡해지는 경향이 있고, 결국 기원전 8천 년쯤 괴베클리 테페는 버려져 땅속에 묻혔다. 특이한 점은 사람들이 고의적으로 땅을 파 기둥을 메운 뒤, 그 위에 석회 자갈과 석기도구들, 동물과 인간의 뼈를 묻고 버렸다는 사실이다. 보통은 사람들의 왕래가 끊기며 자연스럽게 신전은 묻힐 텐데 말이다.
이 때문에 고의적으로 신전을 매장한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볼 때 종교/정치적인 분쟁이나, 지배계급에 대한 반란 등에 휘말렸으리라는 시각이 있다. 예를 들면 새로운 종교를 믿는 무리가 신전 일대를 지배하여 괴베클리 테페를 이교도의 건축물로 규정하고 묻어버렸거나, 혹은 그 이전에 누군가가 돌기둥들을 숨기거나 보존하기 위해 묻었다는 것. 후자의 주장은 돌기둥들이 파괴되지 않고 비교적 '온전하게' 묻혔다는 사실로 유추할 수 있다.

5. 해석


이처럼 괴베클리 테페는 학계에 큰 혼란을 야기하면서도 동시에 향후 인류 발전사 연구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유적으로 여겨진다. 다만 문제는 유적의 극히 일부만이 출토된 상황이기 때문에 제대로 된 연구가 나오려면 발굴기술의 발전 등 좀 더 시간이 필요하다. 아직 겨우 10% 남짓 발굴되었는데, 이희수 교수의 글에 의하면 적어도 60~70년은 걸릴 것이라고.
현재까지 발굴 성과에서 유추된 가설들은 대부분 발굴을 진행한 독일고고학연구소 클라우스 슈미트 교수가 제기하였다. 교수는 신전의 성격을 돌기둥의 동물 형상들이 수렵의 사냥감으로 묘사된 것이 아니라 신격화된 형상의 사자나 거미, 뱀, 전갈이라는 점에서 이곳을 사냥 성공을 기원하기 위해 지어진 곳이라기 보다는 죽은 자들을 보호하는 신들을 모시는 장소로 보았다. 또한 새들, 특히 독수리 형상이 많이 보이는데 이는 차탈회육(Çatal höyük)과 예리코에서 많이 보이는 독수리 이미지와 비슷하여 괴베클리 테페를 비롯한 고대 아나톨리아와 중동권에서도 조장 풍습이 존재했으리라 추측된다.
가 인간과 하늘을 연결하는 매개체라고 보는 풍습은 한국의 솟대나 일본의 토리이에서도 볼 수 있다. 아마도 고대의 조장 풍습을 행했던 사람들은 인간이 죽으면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가 시신을 먹어 그 영혼을 하늘로 인도한다고 생각한 듯하다. 실제로 유적지에서는 인골들이 출토되어 이곳이 당시 사람들의 사후 세계관과 연관된 장소임을 추측 가능하게 한다. 돌기둥들의 T자 형태를 두고 교수는 앞의 가설과 더불어 동물신들이 보호하는 죽은 자들, 즉 당시 사람들의 조상들을 형상화하지 않았나 생각했다. 교수는 이러한 괴베클리 테페의 언덕 위 신들의 이미지가 고대 기억으로 남아 수메르인들에게 이어져 메소포타미아 신화 속 에쿠르 신전 이야기로 전해내려왔다는 가설도 제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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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베클리 테페를 해석하는 데 가장 관건이 되는 것은, '''농경사회가 등장하기 전인 토기없는 신석기 시대에 어떻게 조직 노동력과 문화가 등장했느냐'''는 점이다.
아직까지 괴베클리 테페에서는 농경지나 거주지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으나 인근에 위치한 후대 유적인 네발르 초리(Nevalı Çori)에서 괴베클리 테페와 비슷한 양식의 돌기둥과 조각들이 발견되고 또한 괴베클리 테페와는 달리 집터들과 원시적인 농사 흔적이 밝혀졌다. 네발르 초리(Nevalı Çori)는 1983년부터 1991년까지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초기 신석기 거주지 유적으로 농업의 흔적과 매장의 흔적도 발견된 곳이다. 약 기원전 8400년에 세워져 8100년에 몰락한 것으로 추정한다.
두 유적이 위치한 지역은 현대 밀 재배종의 원산지인데, 네발르 초리에서 발견된 밀 농사 흔적은 아마도 인류최초의 밀 재배였던 듯하다. 슈미트는 야생 곡물을 채집하여 식량원으로 삼던 이곳 사람들이 어느 순간부터 집단적으로 곡식을 재배하기 시작했다고 추정했다. 집단사회체계를 농경 정주생활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는 기존 학설과 정반대로 수렵 채집민들에게서도 집단 체계가 나타날 수 있고, 농업 또한 이들이 조직적으로 할 수 있다는 이야기라, 기존의 상식과는 반대된다. 이 때문에 슈미트 교수는 이 유적이 샤머니즘적인 수메르 신화의 조상 격에 해당하는 원시신앙을 믿던 사람들이 만들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즉, 사냥 및 채집을 하는 수렵생활 → 원시적인 농업활동에 따라 먹을 것이 충분히 확보 → 사람들이 신을 섬기는 유적을 만드는 여력이 되는 것이 인류 역사의 흐름이라고 생각하였는데, 이 당시 농업을 했다는 증거가 아직 발견되지 않았기에 '''먼저 종교가 있었고, 종교적 제단을 만들기 위해 사람이 모일 수밖에 없었고 그 인력을 먹여살리기 위해 농업이 발달한 게 아니냐는 가설이 나온것이다.'''
사실 그동안에도 기존 이론을 두고 문제를 제기한 이들이 있었다. 단순히 놓고 봤을 때 원시적인 농업[10]은 결코 수렵채취보다 식량을 많이 얻기 힘들었고, 영양학적으로도 수렵채취 쪽이 더 나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어떠한 이유 때문에 사람들이 다수 모였다면, 일정 지역 내에 제한적인 식량만이 생산되는 수렵채취보다 인위적으로 식량 생산을 증가시킬 수 있는 농업이 매력적이었을 것이다. 즉 위의 가설이 맞는다면 인류가 농업으로 전향한 미스테리가 어느 정도 풀리는 것. 확실한 건 발굴이 더 진척돼야 알 수 있겠지만 기존 학설을 뒤엎을 수 있는 괴베클리 테페의 고고학적 중요성이 여기에 있다. [11]

5.1. 천문 현상과의 연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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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황소자리플레이아데스 성단과 비슷하여 천문학적인 요소가 들어간 것이 아닌가 하고 추정하는 사람도 있다.
괴베클리 테페가 시리우스의 위치를 기록하는 천문대의 역할을 해왔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현재 시리우스는 북반구 대부분의 위치에서 볼 수 있는 밝은 별이지만, 기원전 1만 년 전에는 1년 내내 지평선 아래에 있는 전몰성, 즉 관측이 불가능한 별이었다. 지구의 세차운동으로 적위가 증가하여 기원전 9300년 무렵 시리우스는 터키에서 처음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해당 지역에 사는 주민들에게는 못 보던 밝은 별이 남쪽 지평선 부근에서 나타난 듯이 보였을 것이다. 이 시기는 괴베클리 테페의 건립연도와 맞아떨어진다.
또한 시리우스가 지평선에서 떠오르는 위치는 지구가 세차운동을 함에 따라 수백 년 단위로 변화하는데, 이들이 돌기둥들이 배치된 방향을 연장한 선과 일치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만일 정말로 시리우스 출현이 괴베클리 테페를 건립하는 동기가 되었다면, 시리우스 숭배는 고대 이집트보다도 더 과거부터 전해져 내려온 유서 깊은 종교적 믿음이다. 하지만 수렵채집 활동으로 살아가던 원시부족이 문자도 없이 천문 관측기록을 어떻게 후세에 전할 수 있었냐는 의문이 남는다.
'떠돌아다니던 수렵민들이 갑자기 어떤 계기로 모여서 신전을 건축하게 되었는가?' 하는 의문에 대답하고자 '혜성 소나기'를 거론하기도 한다. 그린란드의 아이스 코어, 지구 궤도 이심률 변화, 북아메리카 지질 역사 등을 종합적으로 분석하여 기원전 1만 1천 년 무렵에 지구는 황소자리 유성우의 극대기에 돌입했고, 이때 대규모 혜성 충돌이 발생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밝혀졌는데, 이 사건이 괴베클리 테페의 건립 동기가 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한 발 더 나가자면, 혜성 충돌로 인해 전 지구적인 재앙이 발생했는데, 이 사건에 종교적인 영감을 얻은 한 무리가 이를 기록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살아남기 위해 한곳에 정착하여 모여 살게 되었고, 자연히 농업을 터득하게 되었다는 것. 앞의 황소자리의 예와 비슷하게 돌기둥에 새겨진 동물들의 형상과 배치는 별자리와 관련이 깊으리란 추측이 많다.

6. 슈미트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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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우스 슈미트 Klaus Schmidt 1953.12.11-2014.07.20
이 유적의 발굴 시작부터 모든 것을 관리했던 클라우스 슈미트 교수는 2014년 7월 20일 수영 중 심장마비로 만 60세 나이에 급사했다. 이후 클라우스 슈미트 교수의 아내이자 터키 고고학자인 치으뎀 쾩살 교수가 유적을 관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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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으뎀 쾩살 Çiğdem Köksal
치으뎀 교수의 페이스북에 발굴 관련상황과 더불어 남편 클라우스 교수의 일화를 터키어로 설명했다. 꽤나 활발하게 활동하고있다.

7. 기타


스톤헨지를 세운 사람들이 이 유적에 살던 사람들의 후손일 수도 있다. 기원전 1만 년 전 아나톨리아 지방에 살던 사람들이 흘러흘러 현재의 영국까지 넘어간 것으로 DNA 검사 결과 확인되었다는 것인데, 괴베클리 테페와 관련성까지 가진 건 아니지만 아나톨리아 출신이고 비슷한 모양의 돌유적이라는 점에서 학계의 관심이 모이고 있는 중.
이 지역이 IS로 개판이 된 시리아 국경 접경 지역이라 유럽 난민 사태 등으로 인해 발굴에 차질이 생길 듯하다. 2014년 8월 이스탄불 대학의 이희수 교수가 이곳을 방문할 때 난민 수용지 근처라 검문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도 터키에서는 세계적인 유적지가 될 전망을 안고 기대하고 있으며 열심히 발굴 및 연구를 지원하고 있다. 위에 T자 돌탑들도 2016년 중순에 개장될 우르파 고대 박물관에 들어가 보관 중이고, 중무장한 군이 배치되어 학자들을 경호한다. 이희수 교수는 이 돌탑들을 보고 싶어했으나 박물관에 이동하여 개장 준비 중이라는 말을 들었다. 조금이라고 볼 수 있을까 해서 박물관에 갔지만, 당연히 개장하려면 한참 남았다고 거절당했다. 그래도 터키 내 인맥을 동원하고 외국인으로서 보고 싶기에 여기까지 왔다고 애원하여 마침내 부관장에게 특별히 개인적 관람을 허락받았다. 정해진 시간이나마 직접 보았는데 겨우 10% 수준 발굴되었음에도 상당수 유적이 출토되어, 일부만 봤는데도 감명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세계적인 관광지가 되고도 남을 것 같다는 소감을 적었다. 다만 인근 동네들이 정국이 좋지 않은 터라 문제이다.
만약 당신이 터키를 간다해도 이곳 여행은 자제하는 것이 좋다. 현재 이 주변은 바로 옆의 시리아 내전 때문에 대한민국 외교부의 철수권고 지역이다. 2019년 무렵에는 시리아 상황이 많이 정리되었는지 유럽에서는 괴베클리 테페의 여행광고가 시내의 광고판 등지에서 보이기 시작했다.
2017년 9월 28일, 터키언론에 따르면 괴베클리 테페와 동시대의 유적이 티그리스강 근처 하산케이프 지역에서 발견이 되었다고 한다. 연합뉴스 다음 뉴스 네이버 뉴스 놀랍게도 괴베클리 테페를 세운 수렵, 채집생활을 하던 수준의 사람들이 천 년간 거주하다 떠나간 도시 유적이다. 터키 정부의 아나톨리아 지역 개발계획에 의해 댐 예정지 조사를 진행하다 발견된 곳이라 몇 년 뒤 해당 지역이 수몰될 예정인 것이 문제다.
체사레 에밀리아니는 괴베클리 테베가 건립된 무렵을 바탕으로 '''인류력'''이라는 새 기년법을 만들었다. 에밀리아니는 현재 쓰는 달력에서 1만 년을 더하고 기원전 10001년을 0년으로 삼는 것으로 인류 발전사, 문화적 중립성, 0년 문제 등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서기 2020년은 인류력 12020년이 된다.

7.1. 아르메니아의 반발


아르메니아는 원래 고대 아르메니아 시절부터 아르메니아인들이 살던 영토였다고 주장한다.[12]
아르메니아인들은 성경에서 방주를 만들었다고 기록된 노아의 5대손 하이크(Hike)가 시조이며, 대홍수 직후 처음 땅을 밟은 노아가 신에게 공물을 바쳤다고 알려진 아라라트 산을 자신들의 상징으로 삼았고, 고대 아르메니아 시절에는 그 유명한 로마 제국과 전쟁을 벌일 정도로 그들의 역사는 깊다. 수많은 외침을 받은 이 지역에서 지금의 터키 전신인 오스만 제국의 무슬림들이 기독교인들인 아르메니아인들을 지배하기 시작한 건 16세기 무렵. 그동안 자치 구역으로 자신들의 삶을 이어갔지만 19세기 국가와 민족의 개념이 대두되는 민족주의가 전 세계를 뒤흔들었다.
1915년부터 1918년에 걸친 아르메니아 대학살 이후, 아르메니아인들은 터키에 여러 영토를 빼앗긴 채 아라라트 산 바깥쪽 작은 땅으로 내몰렸다. 아르메니아인들은 그들의 긍지가 담긴 이 유적지를 원래부터 자신들의 역사인 것마냥 광고하는 터키에 대해서 분노를 느끼고 있다. 잘 알려져있다시피 터키인의 정체성은 중세에 동양에서 이주해 온 자들의 후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르메니아도 이 유적과 문화적으로 연관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여서 아르메니아인들의 주장도 확실친 않다. 하지만 원주민이 아르메니아인이란 건 성경 쪽에서도 나오는 일이고 터키인은 이주민이라 더더욱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르메니아 사람들은 터키 이름인 괴베클리 테페 대신 예전 아르메니아 이름인 '포르타사르(Portasar)'로 불러주길 희망한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가 포르타사르라는 알파벳으로 구글 검색하면 뜨는 사이트들도 죄다 아르메니아 관련 사이트가 대부분. 여기선 괴베클리 테베가 아니라 이 이름으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영어나 프랑스어 등 위키피디아를 봐도 괴베클리 테페를 아르메니아어 명칭으로 설명하진 않는다. 다만 본문에 아르메니아에서는 포르타사르라고 불린다 정도로만 언급될 뿐.
또한 괴베클리 테페가 발굴된 지역은 전통적인 메소포타미아 지역이자 문명권이었던 지역이기에 아르메니아의 주장이 억지라는 의견도 있다. 뭐 메소포타미아 최상류 지역에 아르메니아 인들이 다수를 차지하는 시기가 있었으나 최소 7세기 이슬람 발흥 시기 이후 기존 원주민인 셈계열 아람-아시리아인들은 동로마, 이슬람의 분쟁지대가 된 해당 지역을 떠나기 시작하고, 그 공백을 이슬람의 위협을 피하여 동로마 영내나 그 접경지대로 아르메니아인들이 대거 이주해서 해당 지역은 아르메니아 대학살 이전까지 아르메니아 인들이 다수를 차지했기에 고대 문명이랑 아르메니아는 무관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진짜 토착민족이 누구인가를 전 세계에서 가장 찾기 힘든''' 소아시아와 메소포타미아 지역이라는 큰 차이가 있어서 같은 문제로 대입해서 보기는 힘든 실정이다. 15000년 전이면 사실상 현재의 민족 분류를 대입하기도 힘들다. 저 지역 근방에 자리잡은 현재 민족들 공통의 조상의 범주로 넘어가버리기 때문. 뭐 투르크계가 아르메니아인 이후에 들어왔다는 데는 이견이 없긴 하다. 이건 터키인들도 이미 아는 사실이니까...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아르메니아인들의 언어는 인도유럽어족에 속한다는 점이다. 본래 흑해 북부 연안이 고향인 사람들로, 이들이 이 지역까지 이주해 온 시기는 아무리 이르게 잡아도 기원전 4000년 즈음이었을 터다.
2011년부로 유네스코 잠정세계유산에 등재될 당시 아르메니아는 여기가 터키 이름으로, 터키 것으로 알려진다고 결사반대했지만... 미국도 유럽도 이런 아르메니아의 반대에 외면하고 있다. 그도 그런 게 여기에 아르메니아인이 살았다는 증거 또한 없다. 물론 사람뼈를 통하여 DNA 채취를 하여 알아본다고해도 아닐 가능성이 더 높다.[13][14]

8.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 다소 특이하게도 슈퍼스트링에 등장한 백백교에 대한 가설로 언급되었는데 바로 이 유적이 X차원에서 막 넘어온 아지태가 세운 인류 최초의 유적이라는 것이다. 자세한 건 항목 참조.


9. 관련 문서




[1]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을 대표할 것[2]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3]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4] Dietrich, Oliver & Schmidt, Klaus. (2010). A Radiocarbon Date from the Wall Plaster of Enclosure D of Göbekli Tepe.. Neo-Lithics. 2/2010. 82-83.[5] 만약 사실이라면 기존의 가설과는 달리 수렵채집인들도 대규모 시설을 만들 만한 사회적 역량이 있었다는 뜻이 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6] 유적의 기둥에서 문자로 추정되는 기호는 발견되었다.[7] 수렵생활 → 농경&정착생활 → 국가 및 종교의 출현이 일반 상식[8] 1997년에 나온 총, 균, 쇠에 이미 관련 언급이 나온다.[9] 2천 년이란 시간이 실감이 안 오는 사람을 위해 말하자면, 고구려가 건국될 때 세워진 사찰을 지금까지 그 건물 그대로 쓰고 있다고 보면 된다.[10] 현대의 품종개량 및 유전자조작한 농작물에 비하면, 자연상태의 원시 농작물은 결코 수확량이 많지가 않다. 거기에 보릿고개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작물은 수확하기에 너무나도 오래 시간을 요구한다는 문제점도 있다.[11] 농경은 무리를 이룬 수렵집단의 유지를 위해 불가피하게 시작하게 되었다는 새로운 가설.[12] 확실히 튀르크족(돌궐족)보다는 아르메니아가 선주민이라곤 하지만 이 유적은 1만 년도 넘는 유적이다. 그 시절에는 튀르크족이고 아르메니아족이고 나발이고...[13] DNA는 RNA보다는 안정된 구조라고는 해도 환경변화에 상당히 약한 고분자다. 괜히 체내에 DNA 수복 시퀀스가 존재하는 게 아니다. 산소나 미생물에서 거의 완벽하게 차단된 호박 속의 모기라고 해도 그 피에서 DNA를 채취하는 게 말이 안 되는 판인데 땅에 묻히기 전까지 각종 미생물의 영향을 잔뜩 받았을 사람 뼈에서 DNA를 채취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14] 설령 채취에 성공한다 해도 문제가 있다. 민족이라는 개념은 문화적 구분일 뿐 생물학적으로는 별 의미가 없다. 거기다 앞서 말한대로 이 유물이 만들어진 시점부터 현재까지 이른 시간이 1만 년도 넘는다. 이 정도 기간이면 민족상의 분류가 의미가 없을 정도로 그 사이에 혈통이 뒤섞였을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