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직

 

1. 단어
1.1. 公職
1.2. 供職
1.3. 公直
2.1. 개요
2.2. 생애
2.3. 대중매체에서


1. 단어



1.1. 公職


국가 기관이나 공공 단체의 일을 맡아보는 직책이나 직무. 일반적으로 공직이라고 하면 이쪽을 가리킨다.

1.2. 供職


국가 기관이나 공공 단체의 일을 맡아 수행함 또는 직무를 성실히 행함.

1.3. 公直


'공평하고 정직하다'는 뜻의 '공직하다'의 어근.

2. 후삼국시대호족



'''신라국 연산군장군
백제국 장군
고려국 봉의공
공직
'''
'''시호'''
'''봉의공(奉義公)'''
'''삼공'''
'''사공(司空)'''
'''향직 품계'''
대상(大相)
좌승(佐丞)
정광(政匡)
'''삼중대광(三重大匡)'''
'''이름'''
공직(龔直)
'''생몰연도'''
? ~ 939

2.1. 개요


후삼국시대호족. 신라, 양길, 궁예신하로 있다가 왕건역성혁명을 보고는 후백제로 넘어갔으나 후에 후백제가 견신검견금강의 후계자 문제로 기우는 것을 보고 고려로 다시 귀순하였다.

2.2. 생애


고려사에 그의 열전이 남아있다. 그는 연산군(燕山郡)[1] 매곡현(昧谷縣)[2]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용감하고 지략이 있어 신라 말 그 고을의 장군이 되었으며 궁예가 나라를 세운 후 밑으로 들어갔다가 왕건의 역성혁명 이후 많은 반란이 일어났다. 그때 처남이었던 경종이 처형당하자 후백제로 넘어가 견훤의 심복이 되었으며 장남 직달(直達), 차남 금서(金舒) 및 딸 하나를 견훤에게 볼모로 보냈다. 그러나 공직은 일찍이 후백제의 조정에 들어갔다가 나라가 무도함을 보고는 귀부한 것을 후회하며 직달에게 말했다.

공직: "이제 이 나라를 보니 사치하고 무도한지라 내 비록 과 가깝긴 하지만 다시 오고 싶지 않구나. 들으니 고려 왕공의 문덕은 충분히 백성을 안정시킬 만하고 무덕은 충분히 포악한 자를 제압할 만하므로 사방에서 다들 위엄을 두려워하고 그 덕을 사모한다고 하는구나. 내가 그에게로 귀부하고자 하는데 너의 뜻은 어떠하냐?"

직달: "볼모로 들어 온 이래 이 나라의 풍속을 살펴보니 부강한 것만 믿고서 교만하고 뽐내는 일만 힘써 다툴 뿐이니 어찌 나라가 제대로 될 수 있겠습니까? 지금 아버님께서 현명한 군주에게 귀부하시어 우리 고을을 보호하고 안전하게 하고자 하시니 또한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저도 마땅히 동생과 누이와 함께 틈을 타서 귀부할 것입니다. 비록 귀부하지 못할지라도 아버지의 현명한 결단에 힘입어 남은 경사가 자손까지 이어진다면 저는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아버님께서는 염려하지 마시옵소서."

공직은 마침내 귀부를 결심하였으며 태조 15년(932년) 아들 영서(英舒)와 함께 고려 조정에 귀부했다.

공직: "신이 보잘 것 없는 고을에 살면서 주상께서 백성을 잘 교화하신다는 말을 오래 전부터 들어왔습니다. 비록 주상을 도울 힘은 없으나 신하의 절의를 다하기를 바라나이다."

라고 태조에게 뜻을 밝혔다. 이에 태조가 기뻐하여 대상(大相)에 임명했으며 백성군(白城郡)[3]을 녹읍으로 주고 궁궐 3필과 채색 비단을 내려주었는데 그의 아들 함서(咸舒)를 좌윤(佐尹)으로 삼고 왕실의 친족이었던 정조(正朝) 준행(俊行)의 딸을 영서의 아내로 삼아주며

태조: "경은 치란과 존망의 기미를 환히 살펴보고 짐에게 와서 귀부하였소. 짐은 이를 매우 가상하게 여기고 왕족과 인척을 맺게 하여 나의 후의를 보이니 경은 마음과 힘을 더욱 다하여 변경을 진무하고 우리 왕실의 울타리가 되어 주시오."

라고 격려하였다. 이에 공직이 감사를 올린 뒤

공직: "후백제의 일모산군(一牟山郡)[4]

은 우리 고을과 접한 곳으로 신이 귀화한 후 항상 침입과 약탈을 자행하여 우리 백성이 생업에 편히 종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바라건대 신이 그 곳을 공략하여 우리 고을의 백성들이 노략질을 당하지 않고 오로지 농사에만 힘쓰도록 만들어, 귀부한 뜻을 더욱 굳게 하고자 하옵니다."

라고 건의하니 태조가 이를 허락하였다. 견훤은 공직이 항복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분노하여 볼모로 있던 직달(直達), 금서(金舒) 및 공직의 딸을 잡아가두고 다리의 힘줄을 단근질하여 끊으니[5] 직달은 후유증으로 죽었다. 훗날 후백제가 멸망한 뒤에 나주에서 포로로 잡아 둔 후백제 장군 구도(具道)의 아들 단서(端舒)를 금서와 교환하여 금서는 공직에게 돌아왔다.[6] 태조 22년(939년) 공직이 좌승(佐丞)을 지내다가 병사하자 태조가 사자를 보내어 조문하고 정광(政匡)으로 추증하였으며 시호를 봉의(奉義)라고 하였다. 함서를 후사로 삼았으며 사공(司空)·삼중대광(三重大匡)으로 추증하였다.
공직은 본래 고려 소속이었다가 역모에 연루되자 망설임없이 후백제로 갈아타더니 다시 고창 전투 이후에 패권이 고려로 넘어가자 후백제를 통수쳐서 후삼국시대의 구도를 단숨에 뒤엎어버린 장본인이자 후삼국시대 호족들의 전형이라 할 수 있는 인물이다. 고려의 입장에서는 후백제와의 접경 중앙에 위치한 요충지였던 매곡을 후백제에 넘겨 오랫동안 고려를 고생시켰던 원흉이고[7] 후백제 입장에서는 다시 고려로 넘어가는 바람에 전세를 불리하게 만들어놓은 역적이며 후백제 멸망의 한 원인을 제공한 인물이라 번갈아가며 두 나라를 곤경에 처하게 만든 희대의 인물이라 할 수 있다.

2.3. 대중매체에서


[image]
[image][8]

'''폐하! 전쟁에서는 질수도 있고 이길수도 있사옵니다!'''

'''너무 하시옵니다! 어르신! 정말 너무 하시옵니다!'''

2000년 KBS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이정웅[9]이 역할을 맡았다. 본래 태봉 소속이었다가 왕건의 정변 이후에야 후백제로 넘어가지만 여기서는 처음부터 후백제의 장수로 등장한다. 때문에 역사상으로는 사화진 전투 당시에 매곡성을 지키며 후백제의 상주 방면 진군을 막는 역할이었으나 여기서는 후백제군을 이끄는 지휘관으로 역할이 역전되어 조령으로 행군하던 홍유의 부대를 견신검과 함께 기습하여 전멸시킨 것으로 크게 활약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얼마 안가 왕건이 상주 전선으로 복귀하고 조령에서 죽령으로 행군하던 도중 왕건의 기습을 당하여 패주하게 되고 급하게 견훤의 아버지가 있는 사벌주성으로 달려가서 아자개에게 도움을 요청하지만[10] 비웃음당하고 쓸쓸하게 완산주로 돌아가는 안습한 행보를 보여준다.[11] 나주 전투에서도 견훤의 동생인 능애와 함께 군사를 이끌다가 왕건에게 또 기습을 당해서 패주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노장이미지였으며 마지막에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을 염두에 두었는지 비중을 많이 주었으나 본인의 건강 문제로 중도하차하면서 고려에 귀부하기도 전에 대사상으로 전사 처리되었다.
[1] 현재 세종특별자치시충청북도 청주시(구 청원군) 일대.[2] 현재 충청북도 보은군 회인면.[3] 현재 경기도 안성시.[4] 지금의 충청북도 청주시(구 청원군) 문의면.[5] 단근질이란 불에 달군 쇠로 몸을 지지는 형벌을 말하는데 다리 힘줄을 불에 지져 못쓰게 만들어 앉은뱅이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6] 공직의 딸은 돌아왔는지 기록이 없어 불분명하다.[7] 공산 전투 이후에 어려움에 처한 왕건이 물을 먹은 삼년산성 전투가 이 근방에서 펼쳐졌다.[8] 오프닝에서의 공직, 바로 옆에 있는 장수는 애술이다.[9] 1996년 KBS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 권근 역을 맡았었다.[10] 사화진 전투 이후 아자개는 상주 땅을 통째로 왕건에게 넘겨주게 되는데 소식을 들은 견훤은 배신감을 느끼고 이 때부터 아버지인 아자개를 사실상 적으로 바라보게 된다.[11] 사화진 전투에서 패배하고 완산주로 돌아왔을 때 견훤이 패배해서 돌아온 공직을 보고 분개하여 처형을 명했으나 신료들이 겨우 견훤을 막아서 목숨을 건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