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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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의 왕족. 인조의 막내아들이자[3] 귀인 조씨의 둘째 아들이고, 소현세자, 효종, 인평대군, 용성대군의 이복 동생이며 숭선군의 동복 동생이다. 동복 누나 효명옹주는 권신 김자점의 손자 김세룡의 아내이다.
2. 생애
한성부 창경궁 별실에서 태어났다. 8살 때인 1648년에 '낙선군(崇善君)'으로 봉해졌다.
책봉받은 지 불과 1년 뒤인 1649년에 아버지 인조를 잃었다. 인조의 뒤를 이은 낙선군의 이복 형 효종은, 비록 낙선군의 생모 귀인 조씨와 사이가 나빴지만 그 소생인 이복 동생들에 대해서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은 것을 가엾게 여겨 재위 초반에는 노비를 150명씩 내려주는 등 잘 대해줬다.
그러나 2년 뒤인 1651년에 김자점의 옥사에 엮여 어머니 귀인 조씨는 사약을 받고 죽었다. 낙선군과 그 형제들에 대해 유배를 보내라는 이야기가 많았으나 처음에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고 해서 작위만 삭탈하는 정도로 끝냈다. 그러나 대신들이 상소를 계속 올려 1년 뒤인 1652년에 낙선군과 형 숭선군은 강화도 교동으로 귀양을 갔다. 거기서 소현세자의 3남 경안군과 함께 지냈고 3년 뒤엔 누나 효명옹주도 교동으로 와서 같이 살았다. 그러나 홍우원, 송시열, 이경여 등 신하들이 무고함을 호소하여 4년 뒤인 1656년 16세 때에 풀려난 뒤 관작이 복구되었다.
이후 낙선군은 편복 차림[4] 으로 궁궐에 출입했다가 탄핵을 받았으나 현종의 배려로 그냥 넘어갔으며 , 현종이 온양 온천으로 행차할 때 같이 가기도 하고, 조카손자인 숙종이 왕세자 시절 행했던 관례에 종친 자격으로 참석하기도 했다. 1673년에는 행중추부판사(行中樞府判事)에 올랐다.
어릴 때부터 당파 싸움에 휩쓸려 고생을 많이 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행동을 굉장히 신중하게 하여 행실에 대한 평판이 좋았다. 또한 현명한 것으로 유명했다. 그래서 숙종 대에는 종친의 중요한 어른으로 우대받았다.
3. 사망
1695년 3월 14일 향년 55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묘소는 지금의 경기도 연천군 청산면 궁평리인 경기도 양주군 청송면에 있다.[5] 부인 동원군부인 김씨와 합장한 형태로, 1986년 4월 10일 연천군 향토유적 제1호로 지정받았다. 다만 2000년대 후반에 한동안 방치 상태로 놓여 문제가 된 적이 있었다(관련 기사).
1772년(영조 48년)에 그의 위패를 수진궁(壽進宮)에 두었다.
4. 가족과 후손
강릉 김씨 김득원의 딸 동원군부인 김씨와 혼인했다. 슬하에 자녀는 없었고 측실도 두지 않아서 선조의 9남 경창군의 장손인 청평군 이천(淸平君 李洤)의 차남 임양군 이환(臨陽君 李桓)[6][7] 을 양자로 들였다. 임양군은 딸 셋과 해풍군 이수, 해릉군 이관, 해은군 이당, 이렇게 3남[8] 을 낳았고 해풍군은 2남, 해릉군은 1남, 그리고 해은군은 5남을 낳아 대를 이으면서 현재의 전주 이씨 낙선군파를 형성하고 있다.
4.1. 역대 종주(宗主)
- 낙선군 이숙(樂善君 李潚)
- 임양군 이환(臨陽君 李桓): 낙선군파 1대 사손(嗣孫)[9]
- 해풍군 이수(海豊君 李燧)[10]
- 여천군 이증(驪川君 李增)[11]
- 이소구(李韶九)[12]
- 이종영(李鍾永)
- 이건중(李楗重)[13]
- 이기응(李紀應)
- 이재봉(李載鳳)[14]
[1] 군호는 전라남도 순천시에 있었던 낙안군(樂安郡)에서 유래했다.[2] 후술하겠지만 양자이다.[3] 적자, 서자 상관없이 막내아들이라는 뜻.[4] 便服. 평상시에 간편하게 입는 옷.[5] 궁평초등학교 바로 왼편 언덕 소나무 숲에 있다.[6] 처음에 작위를 받았을 때 이름은 서원군(西原君)이었다.[7] 개봉한 이름인 임양은 강릉의 별호인 임영(臨瀛)에서 유래한 것이다,[8] 봉작명은 임양군의 부인의 본관인 해주(海州)에서 따온 것이다.[9] 사손의 대수는 종주의 대수에서 1을 빼면 된다.[10] 그의 둘째 아들인 여선군 이학(驪善君 李壆)이 1748년에 알 수 없는 모반에 휘말려 섬에 유배되고 후에 주살됨에 따라, 1755년 봉작명이 삭탈되었다가 1864년 신원(伸寃), 3년 뒤인 1867년에 복작(復爵)되었다.[11] 사촌형제들과 함께 연좌제로 걸려서 봉작명이 삭탈되었다가 후에 신원 및 복작되었다.[12] 인흥군의 6대손으로, 1873년에 고종의 명으로 사후양자로 들어갔다.[13] 초명은 이구인(李龜仁)[14] 이기응의 동생 이홍응의 아들이다. 이기응에게는 첩에게서 난 자식밖에 없었으므로 정실에서 난 양자로 들여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