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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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의 왕족. 인조와 후궁 귀인 조씨 사이의 2남 1녀 중 둘째이자 장남이다. 소현세자, 효종, 인평대군, 용성대군의 이복 동생이며 낙선군의 동복 형이다. 동복 누나 효명옹주는 권신 김자점의 손자 김세룡의 아내이다.
2. 생애
1639년 10월 17일[2] 에 한성부 창경궁 별실에서 태어났다. 8살 때인 1646년 '숭선군(崇善君)'으로 봉해지고 영국원종공신(寧國原從功臣)에 책록받았다.[3] 1648년 간택을 통해 신익전[4] 의 딸 신씨와 혼인하였다.
1649년 아버지 인조를 잃었다. 인조의 뒤를 이은 숭선군의 이복 형 효종은 비록 생모 귀인 조씨가 사이가 좋진 않았으나 그 소생인 이복 동생들에 대해서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은 것을 가엾게 여겨 재위 초반에는 노비를 150명씩 내려주는 등 잘 대해줬다. 그러나 2년 뒤인 1651년에 김자점의 옥사에 연루되어, 어머니인 귀인 조씨는 사약을 받고 죽었다.
숭선군과 그 형제들에 대해 유배를 보내라는 이야기가 많았으나, 처음에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고 해서 작위만 삭탈하는 정도로 끝냈다. 그러나 대신들의 상소가 계속되어, 1년 뒤 숭선군 형제는 강화도 교동(喬桐)으로 귀양 가 한동안 소현세자의 3남 경안군과 함께 지냈고 3년 뒤엔 누나 효명옹주도 교동으로 와서 같이 살게 된다. 그러나 홍우원, 송시열, 이경여 등 신하들이 무고함을 호소하여 4년 뒤인 1656년 18세 때에 풀려난 뒤 관작이 복구되었다.
이후에는 사옹도제조(司饔都提調)[5] 를 맡고, 신덕왕후 강씨의 부태묘사(副太廟事)로 모든 종친을 거느리고 3차례나 상소를 올린 끝에 윤허를 받아 역사를 원만히 집행하는 등, 왕실의 크고 작은 행사에 주로 참여하였다. 1680년 42세 때는 조카손자 숙종에게서 '현록대부 보사원종공신'에 봉해졌다.
3. 사망
1690년 1월 6일[6] 향년 52세로 별세하였다. 숙종은 깊은 애도의 뜻을 표하고 앞으로 3년 동안 상을 마칠 때까지 봉록을 주라는 특명을 내렸다.
묘소는 충청남도 공주시 이인면 오룡리[7] 종산 해좌에 있으며 현재 충청남도 지방문화재 지방기념물 제6호로, 신도비 좌대 귀부(龜趺)는 충남 유형문화재 제61호로 지정되어 있다.
4. 매체에서
- 송민재(유아기), 최유진, 오은찬, 정택현(10대) - 2013년 JTBC 《궁중잔혹사 - 꽃들의 전쟁》
[8] 의 딸로 설정해 놓았다.
극 중에서는 실제 역사를 비틀어 소용 조씨가 두 번째 출산에서 딸을 낳자 아이를 버리고 평민의 아들과 바꿔치기 하는 장면으로 그려졌다. 이를 두고 종친회는 법원에 명예 훼손으로 대응하였고 법원에서 명예훼손이 아니라고 결정을 내리긴 했으나 결국은 JTBC 측에서 사과방송을 내보냈다. 그 외에도 소용 조씨의 딸 효명옹주에 대해서도 인조의 딸이 아닌, 조 소용이 입궁 전에 정을 통한 가공의 인물 남혁5. 가족과 후손
부인 신씨 사이에서만 2남 4녀를 두었다.
장남은 동평군 이항(東平君 李杭)이며, 차남은 동성도정 이강(東城都正 李棡)인데 아주 어린 아기 때 사망하여 실질적으로는 동평군이 독자였다. 따라서 현존하는 숭선군파는 전부 동평군의 자손들이다.[9]
장녀는 해평 윤씨 윤세정, 차녀는 파평 윤씨 윤정호, 그리고 3녀는 순흥 안씨 안수정 , 마지막으로 4녀는 양주 조씨 조명봉과 결혼하였다.
큰아들 동평군에 관한 내용은 동평군 문서 참조.
5.1. 역대 종주(宗主)
1. 숭선군 이징(崇善君 李澂).
2. 동평군 이항(東平君 李杭). - 숭선군파 1대 봉사손. 사손(嗣孫)의 댓수는 종주의 댓수에서 '-1' 하면 된다.
3. 반양도정 이소(潘陽都正 李炤).
4. 학성군 이경(鶴城君 李坰).[10]
5. 이진악(李鎭岳).
6. 이병수(李秉洙).
7. 이형중(李馨重).[11]
8. 이민응(李湣應).
9. 이재기(李載冀).[12]
10. 이덕용(李悳鎔).
11. 이해성(李海晟).
12. 이완주(李完柱).
13. 이우종(李愚宗) - 현재 봉사손.
[1] 군호는 경상북도 선산군의 옛 지명이었던 숭선군(崇善郡)에서 유래했다.[2] 양력 11월 11일.[3] 1644년에 일어난 심기원 등의 모반을 평정하고 그 공으로 책봉된 공신의 직책. [4] 효종 대의 도승지를 지냈으며 사후 영의정에 추봉되었다. 선조의 부마 신익성의 동생.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 조씨의 언니를 아내로 맞는 등, 왕실과 겹겹히 인척 관계에 있었다.[5] 조선시대 임금의 식사와 대궐안의 식사 공급에 관한 일을 맡은 관청인 사옹원의 총책임자. 실무 책임자는 아니다.[6] 양력 2월 14일.[7] 이때 그의 아들 동평군이 지관을 보내 숭선군의 묘자리를 검색하다가 지관이 이곳을 추천하여 동네주민들과 싸움을 벌인 끝에 숙종은 동평군의 편을 들어주며 여기에 묻힌다.[8] 하지원의 동생 전태수가 연기했다.[9] 동성도정의 경우는 1872년 고종의 명으로 군(君)으로 추증받았고, 사후양자로 능원대군의 증손자인 낙신군 이인환(樂新君 李人煥)으로 지명했다. 낙신군에게 아들이 없어서 조카인 학림군 이후성(鶴林君 李厚星)을 들여서 대를 잇게 하였다. 사실 항렬자 통일령으로 인해 사후양자의 의미는 없기는 하다.[10] 생부는 태조 이성계의 3남 익안대군 이방의의 11대손 이홍서(李弘緖)이다. 반양도정에게는 첩에게서 난 자식밖에 없었기 때문에 정실에서 나은 양자를 들여오게 된 것이다.[11] 생부는 성종의 12남인 무산군(茂山君)의 10대손인 이창록(李昌祿)이다. 1900년에 편찬된 선원속보 무산군편에서는 이름이 주중(柱重)으로 적혀 있다.[12] 생부는 성종의 12남인 무산군의 12대손인 이병석(李炳錫)이다. 가계상으로 이형중하고 종조손(從祖孫)관계로 공통조상이 진사(進士)를 지낸 이용진(李龍鎭, 무산군의 9대손)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