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류
복룡(伏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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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 잠수 장비가.. 라고 생각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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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하면 이런 모습이 된다. 마치 아미맨 짝퉁처럼 보이겠지만 농담이 아니다. 사진 속의 것은 '''야스쿠니 신사'''에 놓여 있는 물건이다.
일본군은 패전 시기에 즈음해서 수도 없는 자살공격병기를 만들었다. 가장 유명한 카미카제를 필두로, 신요, 오카, 가이텐, 카이류[1] 등이 끊임없이 이어졌지만 적어도 사람이 탑승해서 조종하는 병기이기는 했다.
하지만 일본군의 막장행각은 끝을 몰랐으며, 결국 맨몸뚱이에 잠수복 하나 입혀놓고 폭탄을 쥐어준 후 자폭시키는 무기가 개발되어서 훈련까지 들어갔는데 이것이 바로 후쿠류(伏龍).[2] 이른바 '''인간 기뢰'''이다.
더 간단히 요약하면 일본 육군의 대전차무기인 자돌폭뢰의 일본 해군판, 대함버전이다.
계기는 엄청나게 단순했다. 1944년 일본은 거의 패전을 예상할 수 있을 정도로 몰리고 있었고, 본토 주위에 적이 기뢰를 깔 수 있겠다고 생각을 했다. 이 기뢰를 없애기 위해서 만든 것이 후쿠류의 시작이었다. 즉 원래는 '''인간 기뢰가 아니라 인간 소해함'''이었던 것이다. 이것도 막장이지만 상황은 더 안좋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오키나와 전투'''가 벌어진 것이다. 카미카제용 비행기가 부족해서 93식 연습기까지 카미카제에 동원할 정도로 자원이 부족하고 급해진 것이다. 그래서 자폭 준비를 하고도 자폭을 못하고 있는 훈련병들을 써먹을 생각을 한 해군 사령부에서 '''맨 몸에 잠수복 입혀서 적함을 깨부숴보자'''라는 발상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개발된 이후에는 요코스카 방어전에 투입되기 시작했다. 당시 일본 해군의 본토결전 전략은 먼저 카미카제가 적 기동부대에 자폭하고, 수송함이 접근하면 가이텐과 신요가 자폭하고, 마지막으로 상륙정은 후쿠류로 상대한다는 '''자폭과 자폭과 자폭으로 완성'''되는 전략이었다. 물론 엄밀하게 따지자면, 가이텐과 신요가 자폭하고 후쿠류 부대가 상대하기 전인 수심 10-15m 지점에서는 계류식 기뢰가 깔리긴 했다. 본토방어용 해안포대 같은거 만들어서 날려먹기도 했고...
상술했듯 2차 대전 당시의 일본군에서는 육해공을 막론하고 수도 없는 자폭 무기 체계를 고안했는데 이 후쿠류는 '''그 막장성의 정점을 찍은 물건'''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이쪽 분야에서 실제로 외국인들에게 제일 많이 목격된 사례인 카미카제랑만 비교해도 사람이 그냥 들어가도 운이 나쁘면 죽을 수도 있는 수중에 맨몸으로 들어가서 기뢰를 냉병기로 운용해야 한다(...)는 점에서 카미카제의 막장성을 아득히 능가한다. 대전차총검술은 운이 좋으면 전투가 끝나고도 살아남을 수 있지만 후쿠류는 '''그냥 목숨을 소모하는 게 목표다.'''
사실 활대기뢰라고 해서 후쿠류와 비슷한 무기체계가 과거에 존재하기는 했다. 길다란 막대기 끝에 폭탄을 매달아서 선수에 매달아놓고 적을 들이받아서 폭파시키는 충각의 업그레이드판 같은 무기였는데 . 충각의 확장판이라는 한계상 어쩔수없이 도태되긴 했지만 실전 사례도 있고 일단 들이받기만 하면 어찌저찌 효과적인 타격을 줄수있는 무기였다.
그런데 그건 어디까지나 사람보다 훠어얼씬 튼튼한 배에다가 달아놓은거였지 이건 사람이 들고 찌른다는게 치명적인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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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적으로 재료가 부족했기 때문에 해군 공작학교에서 기존의 군수품을 중심으로 1개월만에 양산되기 시작했다. 밀폐식 잠수복은 허술하게 만들어낸 고무옷이었고, 여기에 잠수 헬멧, 3.5리터 압축 산소통 2개를 짊어지고, 산소흡수용과 유동식 식량 흡수용 튜브가 가슴에 있고, 허리에는 조절용 밴드를 착용했으며, 자세 제어를 위해서 납을 집어넣은 신발을 신었다. 그리고 잠수함에서 사용하던 것과 같은 화학식 공기 정화장치를 사용했는데 이건 정말로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자세한 것은 문제점 항목에서 상술한다.
유효 잠수 심도는 15미터 였으며, 15미터 깊이에서 다시 수면으로 올라올 때는 잠수병을 방지하기 위하여 10미터 깊이에서 2분간 머무른 후 다시 올라와야 했다. 보고에 따르면 비교적 짧은 훈련기간 이후에 사용자들은 자신이 원하는 심도를 자유롭게 조절이 가능했으며, 해저에서 시간당 2,000미터를 이동할 수 있었다[3] .
애초에 잠수복에 폭탄 하나 들고 들어간 상황이기 때문에 적을 공격하면 무조건 죽는다는 자폭병기 특유의 문제가 있다. 하지만 후쿠류의 문제점은 그정도로 끝나지 않았다.
일단 간단한 것부터 시작하자면, 잠수복이 결함품이므로 수시로 물이 들어왔다. 실제로 잠수가 어려웠다. 앞서서 언급한 것처럼 기성의 고무옷을 날림 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전문공작소도 아니고, 학교에서 2개월 만에 3,000개가 조달될 예정으로 제작되었기 때문에 품질 관리따위는 이미 고려되지도 않은 상태였다.
여기에 잠수용을 고려해서 무게도 엄청 무거웠다. 적어도 65kg. 일반적 잠수복도 가볍지는 않지만 이 잠수복은 뭍에서 걸어들어가는 시스템이었던 것을 고려하면 이건 지나친 감이 있었다. 중세 기사의 전신갑주가 20kg이고, 그 3배의 두께로 제작하면 자동소총 탄도 어찌어찌 막을 수준의 갑옷을 만들 수 있다.
그나마 조금 들어가다 물 들어온다고 보고하면 나올 수라도 있지, 깊이 잠수한 뒤부터 침수를 인지하여 복귀하다 올라오기 전에 물이 들이차면 죽는 수밖에 없었다.
잠수 헬멧에는 유리창이 붙어 있었는데 자기 발 밑 밖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시야가 엉망이었다.
이게 왜 문제였냐면 무게 등의 문제도 있어서 각 대원들은 잠수복을 입고 정해진 위치까지 걸어들어가야 했고, 개별 대원이 물속에서 방향을 잡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물속에 줄을 처놓고 그 줄에 있는 매듭으로 거리와 위치를 표시했다. 때문에 진지 변환은 거의 불가능했다.
원래라면 각 대원에게는 손전등과 나침반이, 소대장에게는 특수 잠망경이 지급되었다고 하는데,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잠수헬멧의 가시성이 최악'''이어서 실질적으로는 눈 뜬 장님의 형상이었다.
여기에 더해서 각 소대원들의 의사소통은 2-5미터의 수심에서는 호흡장비를 확성기로 사용해서 하고, 그 이상 심도에서는 금속을 부딪치는 것으로 신호를 보내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육상과의 의사소통은 불가능해서 이후에 전략 전술의 변화가 있어도 대응할 수가 없었고, 각 대원들간의 의사소통 역시 쉽지 않았다.
그리고 공격수단의 문제인데, 기본적으로 5식 격뢰의 경우는 무게가 10kg에 달했다. 이것도 처음에는 20kg이었다가 이정도면 충분하다고 해서 줄인 것었다. 최초의 길이는 5m. 바닷속에서 20kg에 5m짜리 봉을 휘둘러서 적 상륙정을 명중시킨다는 것은 어처구니 없는 묘기다. 결국 그 일본군도 포기하고 5식 격뢰의 실제 사양은 10kg에 2m가 되었다.
하지만 이것마저도 수심 6m에서도 휘두른다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여기에 이 폭약만으로 함선 근처에서 터뜨리거나 파편비산을 통한 공격을 해서는 턱없이 위력이 부족하다. 결국 적의 상륙정을 직격해야 했다. 그런데 앞서 언급한 것처럼 각 대원들은 시야가 거의 막힌 상황이고, 상식적으로 말해서 이런 잠수복을 입고 걷거나 헤엄쳐서 적함을 쫓아가는 것도 가능할 리가 없었다. 이러니 '''우연히''' 머리 위를 지나가는 상륙정 외에는 아무 것도 상대할 수 없었다.
결국 일본 해군은 이들을 3열로 배치해서 '''얻어걸릴 확률을 높여본다''' 정도 외에는 해결책을 내놓지 못하였다. 더구나 이들은 안전거리가 60m이기 때문에 20m간격으로 늘어선다라는 진형을 만들었는데, 참 이도저도 아닌 형상이었다.
후쿠류의 최대 문제점은 산소 공급기에 있었다. 후쿠류의 산소공급시스템은 앞서서 언급한 것처럼 잠수함의 그것을 활용한 '''장시간의 잠수를 목적'''[4] 으로 하는 화학식 반순환 시스템이었다.
정확하게는 호흡을 통해서 배출된 이산화탄소를 기계에 있는 가성소다를 포함한 흡수캔을 이용해서 탄소를 걸러내고, 다시 산소는 산소탱크로 들어간다는 구조였다. 이걸 활용해서 잠수시간을 5시간 이상으로 늘렸고, 호흡시에는 기포가 발생되지 않는 등 장점이 많았다. 심지어 해군성에서는 이걸 대형화해서 더 장기간 잠수시키려는 계획을 짜기도 했다. 이렇게 말만 들으면 획기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날림으로 만들어져서 제 성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기본적인 문제를 제외하고도 설계상의 문제도 심각했다. 해당 장비가 기본적으로 코로 흡입하고 입으로 배출하도록 설계되었기 때문이다.[5] 이렇게 된 이유는 반대로 호흡하면 3,4번 만 해도 이산화탄소 중독으로 실신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하지만 직접 시도해보면 알지만 이건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다. 결국 이걸 실수해서 입으로 호흡하다가는... 하물며 전투시에 격렬한 움직임으로 인해 호흡량을 늘리기 위해 입이 저절로 벌어진다는 것까지 감안하면 이게 전투장비란 것을 고려할 경우 한마디로 말해 정줄을 놨다고 봐야 한다. 게다가 이런 개념의 잠수장비는 현대에 '리브리더'라는 이름으로 사용되는데 구조도 매우 복잡하고, 사용을 위해 교육받아야 할 내용도 많다. 21세기 기술로도 복잡한 물건을 당시 안습한 일본의 기술과 히로뽕 빨아가며 일하는 여고생들의 실력으로 만들었으니...
그래도 위의 경우는 약과이다. 호흡용 통이 깨지거나 호스가 벗겨지거나해서 호흡회로에 바닷물이 들어가면 일은 더 심각해진다. 흡수캔 속의 가성소다, 즉 '''수산화나트륨은 물과 격렬하게 반응해서 끓어오르고, 이 과정에서 발생한 끓어오르는 강염기는 호흡기로 들어가서 폐를 구워버린다.''' 실제로 훈련중에 이 사고로만 적어도 10여 명이 사망했다.
후쿠류 부대는 앞서 언급한 문제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진형을 짜서 대기하는 형상이다. 그리고 움직이지도 못한다. 그리고 한 명이 터지면 그에 의해서 모든 부대원들이 크던 작던 영향을 받는 것은 불문가지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그것이 아니다. 후쿠류 전술은 기본적 전제는 후쿠류 특공대 위로 아무런 의심도 없이 상륙정이 돌진해온다는 것에 기반한 것이다. 하지만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묘사한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첫 장면이나 오키나와 전투를 생각해보자. 요새전같은 경우도 그렇지만, 상륙작전에는 기본적으로 함포사격과 공중폭격을 동반한 화력지원이 따르기 마련이다.
후쿠류 부대원들의 경우는 60m의 거리를 유지했다. 이 부분은 다시 언급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상대의 제압사격에 안전한 것은 아니다. 상륙 직전의 예비 함포 공격이나 미군 특유의 항공대가 소해를 위해서라도 뿌려댈 소형 폭탄이 하나라도 인근에 떨어진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수중 폭압으로 인해서 유폭되지나 않으면 다행이고 기본적으로는 한 방에 전멸이다.
이정도는 이해하고 있던 일본 해군도 해 뜨기 전에 바닷속에 들어가기 시작해서 버티다가 해가 지고 나면 전장을 이탈해서 바다를 벗어난다라는 전략을 세워두긴 했지만... 이건 공군의 정찰을 피해볼 수는 있어도 제압사격 한 방에 날아간다는 근본적인 해답은 되지 않았다.
운이 좋아서 한 번 정도는 기습이 될 수도 있지만, 일단 한번 당하고 나면 반자이 돌격에 대해서 기관총 난사로 상대한 것처럼 쓸려나갈 수 밖에 없는 구조인 것이다.
앞서 여러번 언급했듯이 안전거리는 60m다. 이건 자살공격을 하는 사람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해당 공격에 의해 주변에 있는 다른 후쿠류들이 휩쓸려서 공격능력을 잃어버리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문제는 '''수중이라는 환경상 충격파등이 별로 상쇄되지도 않고 엄청난 속도로 다가온다는 점이다.''' 당장 이런 이유로 인해 잠수함 주변에 폭뢰가 터져도 잠수함이 우그러들어서 그냥 격침당하거나 균열이 발생해서 물이 들어오는 바람에 적진 한가운데로 부상할 수 밖에 없는 일이 발생한다. 문제는 잠수함같이 격벽과 대압력구조를 가진것도 아니고, 꼴랑 조잡한 잠수복 하나 입은 상태에서 적어도 상륙정 하나는 직격하면 개발살낼 수 있 는 수준의 폭탄이 수중에서 터졌는데 주변 사람들이 멀쩡하기를 비는 것은 멍청한 일이다.
여기에 더해서 들고 있는 폭탄의 재질도 안좋다. 조악하게 제조되었기 때문에 그냥 들고 있어도 물속에 있으므로 침수현상이 발생해서 불발되거나 망가지는 것은 그냥 양호한 수준이고, 방금 이야기했듯이 충격파로 인해 연쇄폭발할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 더 큰 문제였다. 따라서 사실상 주변에서 1발이라도 터지면 근처에 있는 후쿠류들은 연쇄폭발하거나 충격을 받고 기절하거나 부상을 입거나 폭탄이 망가져서 공격불가상태가 되므로 안그래도 허접한 공격능력이 더 떨어진다. 아니, 그 전에 앞에 언급된 것 처럼 호흡관이 터져서 헬게이트가 열리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원래는 방공호를 파고 있던 훈련병들을 중심으로 투입할 예정이었지만 워낙에 훈련과정에서 사고가 다발하였기 때문에 해군육전대의 노병들도 여기에 포함되었다.
후쿠류 부대는 원래 요코스카의 5개 대대를 포함해서 사세보 등지에 총 10개 대대가 창설될 예정이었고, 요코스카에서 훈련되던 잠수부대 480명을 시작으로 해서 총 3,000명이 훈련을 받았다. 최종적으로는 6,000명이 목표.
일본 해군의 경우는 미군의 본토 상륙작전이 9-10월에 쿠쥬쿠리 해안을 중심으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었고, 10월 중순까지는 후쿠류 부대를 배치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하지만 몰락 작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투입된 후쿠류 중에서 성과라도 내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기적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이 이미 정해진 지 오래였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참 다행스럽게도 그 전에 종전이 이뤄져서 실전 투입은 없었다. 카미카제를 제외한 일본 특공병기들의 결과는 죄다 이 모양이다.
마지막으로 미 해군 기록중에 1945년에 두 차례 상륙정과 상륙지원함이 자폭잠수부들의 공격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다만 이들이 후쿠류인지 여부는 불명하다. 애초에 잠수부들이 함선에 폭탄을 붙이는 등 육박공격을 가하는 것은 당시의 특수전 사례에도 매우 많았다.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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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 잠수 장비가.. 라고 생각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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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하면 이런 모습이 된다. 마치 아미맨 짝퉁처럼 보이겠지만 농담이 아니다. 사진 속의 것은 '''야스쿠니 신사'''에 놓여 있는 물건이다.
일본군은 패전 시기에 즈음해서 수도 없는 자살공격병기를 만들었다. 가장 유명한 카미카제를 필두로, 신요, 오카, 가이텐, 카이류[1] 등이 끊임없이 이어졌지만 적어도 사람이 탑승해서 조종하는 병기이기는 했다.
하지만 일본군의 막장행각은 끝을 몰랐으며, 결국 맨몸뚱이에 잠수복 하나 입혀놓고 폭탄을 쥐어준 후 자폭시키는 무기가 개발되어서 훈련까지 들어갔는데 이것이 바로 후쿠류(伏龍).[2] 이른바 '''인간 기뢰'''이다.
더 간단히 요약하면 일본 육군의 대전차무기인 자돌폭뢰의 일본 해군판, 대함버전이다.
2. 상세
계기는 엄청나게 단순했다. 1944년 일본은 거의 패전을 예상할 수 있을 정도로 몰리고 있었고, 본토 주위에 적이 기뢰를 깔 수 있겠다고 생각을 했다. 이 기뢰를 없애기 위해서 만든 것이 후쿠류의 시작이었다. 즉 원래는 '''인간 기뢰가 아니라 인간 소해함'''이었던 것이다. 이것도 막장이지만 상황은 더 안좋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오키나와 전투'''가 벌어진 것이다. 카미카제용 비행기가 부족해서 93식 연습기까지 카미카제에 동원할 정도로 자원이 부족하고 급해진 것이다. 그래서 자폭 준비를 하고도 자폭을 못하고 있는 훈련병들을 써먹을 생각을 한 해군 사령부에서 '''맨 몸에 잠수복 입혀서 적함을 깨부숴보자'''라는 발상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개발된 이후에는 요코스카 방어전에 투입되기 시작했다. 당시 일본 해군의 본토결전 전략은 먼저 카미카제가 적 기동부대에 자폭하고, 수송함이 접근하면 가이텐과 신요가 자폭하고, 마지막으로 상륙정은 후쿠류로 상대한다는 '''자폭과 자폭과 자폭으로 완성'''되는 전략이었다. 물론 엄밀하게 따지자면, 가이텐과 신요가 자폭하고 후쿠류 부대가 상대하기 전인 수심 10-15m 지점에서는 계류식 기뢰가 깔리긴 했다. 본토방어용 해안포대 같은거 만들어서 날려먹기도 했고...
상술했듯 2차 대전 당시의 일본군에서는 육해공을 막론하고 수도 없는 자폭 무기 체계를 고안했는데 이 후쿠류는 '''그 막장성의 정점을 찍은 물건'''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이쪽 분야에서 실제로 외국인들에게 제일 많이 목격된 사례인 카미카제랑만 비교해도 사람이 그냥 들어가도 운이 나쁘면 죽을 수도 있는 수중에 맨몸으로 들어가서 기뢰를 냉병기로 운용해야 한다(...)는 점에서 카미카제의 막장성을 아득히 능가한다. 대전차총검술은 운이 좋으면 전투가 끝나고도 살아남을 수 있지만 후쿠류는 '''그냥 목숨을 소모하는 게 목표다.'''
사실 활대기뢰라고 해서 후쿠류와 비슷한 무기체계가 과거에 존재하기는 했다. 길다란 막대기 끝에 폭탄을 매달아서 선수에 매달아놓고 적을 들이받아서 폭파시키는 충각의 업그레이드판 같은 무기였는데 . 충각의 확장판이라는 한계상 어쩔수없이 도태되긴 했지만 실전 사례도 있고 일단 들이받기만 하면 어찌저찌 효과적인 타격을 줄수있는 무기였다.
그런데 그건 어디까지나 사람보다 훠어얼씬 튼튼한 배에다가 달아놓은거였지 이건 사람이 들고 찌른다는게 치명적인 문제였다.
3. 실상
3.1. 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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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수복을 입는다.
- 일명 봉기뢰라고 불렸던 5식 격뢰(五式撃雷)를 든다.
- 일반적으로 10명이 한 조가 되어서 본토 인근 바다에 미리 잠수해서 대기한다.
- 마침 머리 위로 미군의 배가 지나가면 들고 있던 기뢰로 찌른다.
- 결과는 알아서 상상해보자. ,
3.2. 구조
기본적으로 재료가 부족했기 때문에 해군 공작학교에서 기존의 군수품을 중심으로 1개월만에 양산되기 시작했다. 밀폐식 잠수복은 허술하게 만들어낸 고무옷이었고, 여기에 잠수 헬멧, 3.5리터 압축 산소통 2개를 짊어지고, 산소흡수용과 유동식 식량 흡수용 튜브가 가슴에 있고, 허리에는 조절용 밴드를 착용했으며, 자세 제어를 위해서 납을 집어넣은 신발을 신었다. 그리고 잠수함에서 사용하던 것과 같은 화학식 공기 정화장치를 사용했는데 이건 정말로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자세한 것은 문제점 항목에서 상술한다.
유효 잠수 심도는 15미터 였으며, 15미터 깊이에서 다시 수면으로 올라올 때는 잠수병을 방지하기 위하여 10미터 깊이에서 2분간 머무른 후 다시 올라와야 했다. 보고에 따르면 비교적 짧은 훈련기간 이후에 사용자들은 자신이 원하는 심도를 자유롭게 조절이 가능했으며, 해저에서 시간당 2,000미터를 이동할 수 있었다[3] .
3.3. 문제점
애초에 잠수복에 폭탄 하나 들고 들어간 상황이기 때문에 적을 공격하면 무조건 죽는다는 자폭병기 특유의 문제가 있다. 하지만 후쿠류의 문제점은 그정도로 끝나지 않았다.
3.3.1. 날림으로 만들어진 무거운 잠수복
일단 간단한 것부터 시작하자면, 잠수복이 결함품이므로 수시로 물이 들어왔다. 실제로 잠수가 어려웠다. 앞서서 언급한 것처럼 기성의 고무옷을 날림 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전문공작소도 아니고, 학교에서 2개월 만에 3,000개가 조달될 예정으로 제작되었기 때문에 품질 관리따위는 이미 고려되지도 않은 상태였다.
여기에 잠수용을 고려해서 무게도 엄청 무거웠다. 적어도 65kg. 일반적 잠수복도 가볍지는 않지만 이 잠수복은 뭍에서 걸어들어가는 시스템이었던 것을 고려하면 이건 지나친 감이 있었다. 중세 기사의 전신갑주가 20kg이고, 그 3배의 두께로 제작하면 자동소총 탄도 어찌어찌 막을 수준의 갑옷을 만들 수 있다.
그나마 조금 들어가다 물 들어온다고 보고하면 나올 수라도 있지, 깊이 잠수한 뒤부터 침수를 인지하여 복귀하다 올라오기 전에 물이 들이차면 죽는 수밖에 없었다.
3.3.2. 심각한 불편함
잠수 헬멧에는 유리창이 붙어 있었는데 자기 발 밑 밖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시야가 엉망이었다.
이게 왜 문제였냐면 무게 등의 문제도 있어서 각 대원들은 잠수복을 입고 정해진 위치까지 걸어들어가야 했고, 개별 대원이 물속에서 방향을 잡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물속에 줄을 처놓고 그 줄에 있는 매듭으로 거리와 위치를 표시했다. 때문에 진지 변환은 거의 불가능했다.
원래라면 각 대원에게는 손전등과 나침반이, 소대장에게는 특수 잠망경이 지급되었다고 하는데,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잠수헬멧의 가시성이 최악'''이어서 실질적으로는 눈 뜬 장님의 형상이었다.
여기에 더해서 각 소대원들의 의사소통은 2-5미터의 수심에서는 호흡장비를 확성기로 사용해서 하고, 그 이상 심도에서는 금속을 부딪치는 것으로 신호를 보내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육상과의 의사소통은 불가능해서 이후에 전략 전술의 변화가 있어도 대응할 수가 없었고, 각 대원들간의 의사소통 역시 쉽지 않았다.
그리고 공격수단의 문제인데, 기본적으로 5식 격뢰의 경우는 무게가 10kg에 달했다. 이것도 처음에는 20kg이었다가 이정도면 충분하다고 해서 줄인 것었다. 최초의 길이는 5m. 바닷속에서 20kg에 5m짜리 봉을 휘둘러서 적 상륙정을 명중시킨다는 것은 어처구니 없는 묘기다. 결국 그 일본군도 포기하고 5식 격뢰의 실제 사양은 10kg에 2m가 되었다.
하지만 이것마저도 수심 6m에서도 휘두른다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여기에 이 폭약만으로 함선 근처에서 터뜨리거나 파편비산을 통한 공격을 해서는 턱없이 위력이 부족하다. 결국 적의 상륙정을 직격해야 했다. 그런데 앞서 언급한 것처럼 각 대원들은 시야가 거의 막힌 상황이고, 상식적으로 말해서 이런 잠수복을 입고 걷거나 헤엄쳐서 적함을 쫓아가는 것도 가능할 리가 없었다. 이러니 '''우연히''' 머리 위를 지나가는 상륙정 외에는 아무 것도 상대할 수 없었다.
결국 일본 해군은 이들을 3열로 배치해서 '''얻어걸릴 확률을 높여본다''' 정도 외에는 해결책을 내놓지 못하였다. 더구나 이들은 안전거리가 60m이기 때문에 20m간격으로 늘어선다라는 진형을 만들었는데, 참 이도저도 아닌 형상이었다.
3.3.3. 사람 잡는 산소 공급기
후쿠류의 최대 문제점은 산소 공급기에 있었다. 후쿠류의 산소공급시스템은 앞서서 언급한 것처럼 잠수함의 그것을 활용한 '''장시간의 잠수를 목적'''[4] 으로 하는 화학식 반순환 시스템이었다.
정확하게는 호흡을 통해서 배출된 이산화탄소를 기계에 있는 가성소다를 포함한 흡수캔을 이용해서 탄소를 걸러내고, 다시 산소는 산소탱크로 들어간다는 구조였다. 이걸 활용해서 잠수시간을 5시간 이상으로 늘렸고, 호흡시에는 기포가 발생되지 않는 등 장점이 많았다. 심지어 해군성에서는 이걸 대형화해서 더 장기간 잠수시키려는 계획을 짜기도 했다. 이렇게 말만 들으면 획기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날림으로 만들어져서 제 성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기본적인 문제를 제외하고도 설계상의 문제도 심각했다. 해당 장비가 기본적으로 코로 흡입하고 입으로 배출하도록 설계되었기 때문이다.[5] 이렇게 된 이유는 반대로 호흡하면 3,4번 만 해도 이산화탄소 중독으로 실신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하지만 직접 시도해보면 알지만 이건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다. 결국 이걸 실수해서 입으로 호흡하다가는... 하물며 전투시에 격렬한 움직임으로 인해 호흡량을 늘리기 위해 입이 저절로 벌어진다는 것까지 감안하면 이게 전투장비란 것을 고려할 경우 한마디로 말해 정줄을 놨다고 봐야 한다. 게다가 이런 개념의 잠수장비는 현대에 '리브리더'라는 이름으로 사용되는데 구조도 매우 복잡하고, 사용을 위해 교육받아야 할 내용도 많다. 21세기 기술로도 복잡한 물건을 당시 안습한 일본의 기술과 히로뽕 빨아가며 일하는 여고생들의 실력으로 만들었으니...
그래도 위의 경우는 약과이다. 호흡용 통이 깨지거나 호스가 벗겨지거나해서 호흡회로에 바닷물이 들어가면 일은 더 심각해진다. 흡수캔 속의 가성소다, 즉 '''수산화나트륨은 물과 격렬하게 반응해서 끓어오르고, 이 과정에서 발생한 끓어오르는 강염기는 호흡기로 들어가서 폐를 구워버린다.''' 실제로 훈련중에 이 사고로만 적어도 10여 명이 사망했다.
3.3.4. 손쉽게 제거당함
후쿠류 부대는 앞서 언급한 문제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진형을 짜서 대기하는 형상이다. 그리고 움직이지도 못한다. 그리고 한 명이 터지면 그에 의해서 모든 부대원들이 크던 작던 영향을 받는 것은 불문가지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그것이 아니다. 후쿠류 전술은 기본적 전제는 후쿠류 특공대 위로 아무런 의심도 없이 상륙정이 돌진해온다는 것에 기반한 것이다. 하지만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묘사한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첫 장면이나 오키나와 전투를 생각해보자. 요새전같은 경우도 그렇지만, 상륙작전에는 기본적으로 함포사격과 공중폭격을 동반한 화력지원이 따르기 마련이다.
후쿠류 부대원들의 경우는 60m의 거리를 유지했다. 이 부분은 다시 언급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상대의 제압사격에 안전한 것은 아니다. 상륙 직전의 예비 함포 공격이나 미군 특유의 항공대가 소해를 위해서라도 뿌려댈 소형 폭탄이 하나라도 인근에 떨어진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수중 폭압으로 인해서 유폭되지나 않으면 다행이고 기본적으로는 한 방에 전멸이다.
이정도는 이해하고 있던 일본 해군도 해 뜨기 전에 바닷속에 들어가기 시작해서 버티다가 해가 지고 나면 전장을 이탈해서 바다를 벗어난다라는 전략을 세워두긴 했지만... 이건 공군의 정찰을 피해볼 수는 있어도 제압사격 한 방에 날아간다는 근본적인 해답은 되지 않았다.
운이 좋아서 한 번 정도는 기습이 될 수도 있지만, 일단 한번 당하고 나면 반자이 돌격에 대해서 기관총 난사로 상대한 것처럼 쓸려나갈 수 밖에 없는 구조인 것이다.
3.3.5. 연쇄폭발 가능성
앞서 여러번 언급했듯이 안전거리는 60m다. 이건 자살공격을 하는 사람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해당 공격에 의해 주변에 있는 다른 후쿠류들이 휩쓸려서 공격능력을 잃어버리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문제는 '''수중이라는 환경상 충격파등이 별로 상쇄되지도 않고 엄청난 속도로 다가온다는 점이다.''' 당장 이런 이유로 인해 잠수함 주변에 폭뢰가 터져도 잠수함이 우그러들어서 그냥 격침당하거나 균열이 발생해서 물이 들어오는 바람에 적진 한가운데로 부상할 수 밖에 없는 일이 발생한다. 문제는 잠수함같이 격벽과 대압력구조를 가진것도 아니고, 꼴랑 조잡한 잠수복 하나 입은 상태에서 적어도 상륙정 하나는 직격하면 개발살낼 수 있 는 수준의 폭탄이 수중에서 터졌는데 주변 사람들이 멀쩡하기를 비는 것은 멍청한 일이다.
여기에 더해서 들고 있는 폭탄의 재질도 안좋다. 조악하게 제조되었기 때문에 그냥 들고 있어도 물속에 있으므로 침수현상이 발생해서 불발되거나 망가지는 것은 그냥 양호한 수준이고, 방금 이야기했듯이 충격파로 인해 연쇄폭발할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 더 큰 문제였다. 따라서 사실상 주변에서 1발이라도 터지면 근처에 있는 후쿠류들은 연쇄폭발하거나 충격을 받고 기절하거나 부상을 입거나 폭탄이 망가져서 공격불가상태가 되므로 안그래도 허접한 공격능력이 더 떨어진다. 아니, 그 전에 앞에 언급된 것 처럼 호흡관이 터져서 헬게이트가 열리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3.4. 실제 배치
앞서 언급한 것처럼 원래는 방공호를 파고 있던 훈련병들을 중심으로 투입할 예정이었지만 워낙에 훈련과정에서 사고가 다발하였기 때문에 해군육전대의 노병들도 여기에 포함되었다.
후쿠류 부대는 원래 요코스카의 5개 대대를 포함해서 사세보 등지에 총 10개 대대가 창설될 예정이었고, 요코스카에서 훈련되던 잠수부대 480명을 시작으로 해서 총 3,000명이 훈련을 받았다. 최종적으로는 6,000명이 목표.
일본 해군의 경우는 미군의 본토 상륙작전이 9-10월에 쿠쥬쿠리 해안을 중심으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었고, 10월 중순까지는 후쿠류 부대를 배치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하지만 몰락 작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투입된 후쿠류 중에서 성과라도 내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기적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이 이미 정해진 지 오래였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참 다행스럽게도 그 전에 종전이 이뤄져서 실전 투입은 없었다. 카미카제를 제외한 일본 특공병기들의 결과는 죄다 이 모양이다.
마지막으로 미 해군 기록중에 1945년에 두 차례 상륙정과 상륙지원함이 자폭잠수부들의 공격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다만 이들이 후쿠류인지 여부는 불명하다. 애초에 잠수부들이 함선에 폭탄을 붙이는 등 육박공격을 가하는 것은 당시의 특수전 사례에도 매우 많았다.
4. 여담
- 이걸 생각해낸 인물이 해군 군령부 제3부장 쿠로시마 카메토(黒島亀人)이다. 그리고 이 사람이 바로 카미카제 전법을 포함해서 신요, 오카, 가이텐, 카이류 등을 상상해낸 장본인이다. 하지만 정작 자기는 특공 안했고, 자결도 안 했으며, 심지어 전범 재판까지 피해서 천수를 누리다가 72세의 나이로 죽었다. 애초에 해군 자폭병기의 경우, 대부분 이 사람이 착상하고, 겐다 미노루가 승인하고, 실제 개발은 하위 실무자들이 했다. 그런데, 이들중 누구도 책임을 진 사람이 없고, 전범으로 처벌되지도 않았다.
- 비슷한 전술이 대함도 아니고 대전차 전술로도 있었다고 한다. 폭탄을 안고 땅 속에 파묻힌 채로 대기하고 있다가 적 전차가 오면 자폭해서 적 전차를 파괴하는 전술이라고 하는데, 문제는 이것 역시 하기 위해서는 사람이 폭탄을 안고 직접 땅 속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 미군에서 이걸 막기 위해서 나온 게 M4 셔먼의 전장 개수형 중 하나인 불도저 셔먼.
- 실전투입은 한 번도 안 된 병기지만, 사상자는 꽤 나왔다. 이유가 궁금하다면 위로 다시 올라가봐라. 또한 1945년 6월의 공습으로 훈련중이던 교관과 훈련병 등 약 280여명이 사망했다.
- 이 부대에는 주로 장남들이 많이 투입되었다. 이유는 '혼자서 고독하게 버틸 수 있어야 된다'라는 조건을 달았기 때문이다. 지원도 아니고 강제 차출이었다고 한다.
- 본문을 읽으면서 잠수시간이 5시간인데 새벽에 들어가서 밤에 빠져나온다는 것에 당연히 의문을 가졌을 법한데 이것은 오류가 아니다. 다만 공기 없이 버티란 것은 아니고, 수중참호나 상선을 가라앉힌 거주지 등을 통해서 부대원들이 내부에서 머물 수 있게 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건 너무나도 전쟁말기 일본스럽게 이 것은 단 하나도 완성되지 못하고 구상으로 그쳤다. 하지만 완성되었더라도 상륙작전이 벌어지는 곳의 수심 6m 정도의 해안이니 실용성은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함정.
- 후쿠류의 존재를 알아낸 미군은 의외로 이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표시했다. 이미 자살특공공격을 많이 당해봤던 경험을 감안해본다면 성과에 관계없이 해당 공격이 가해질 것은 분명하고, 상륙작전에서 잘하면 고생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인데, 위의 구조도 등도 미군에서 제작한 것이다. 그리고 의심징후가 나타난 지역을 표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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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정작 일본에서는 왜 미국에서 저러는지 이해를 하지 못했다고 한다. 자기들의 경우는 이런 무기의 문제점을 몰랐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전장을 시찰하러 왔던 스즈키 간타로(鈴木貫太郎) 수상은 이 무기의 실용성에 의문을 품고 실전투입을 반대했다고 한다.
- 이 후쿠류 부대에 편성되었다가 살아남은 사람으로는 배우인 안도 노부루(安藤昇), 이후 드라마로 제작된 관료들의 여름, 날마다 일요일 등을 저술한 소설가 시로야마 사부로(城山三郎) 등이 있다.
[1] '''자폭용''' 2인승 잠수함이다.[2] 伏은 '엎드릴 복'자로 표기한다.[3] 다만 이 보고라는 것이 일본군 특유의 프로토타입을 기반으로 한 개발보고서라서 신뢰도가 의심스럽다는 문제가 존재한다. 통신수단 부분이나 잠망경의 시야 같이 묘하게 괜찮은 평가가 나온다 싶으면 대부분 출처가 초기 테스트 기록이다. 본문을 보면서도 이런 부분을 유념할 것.[4] 일본 해군은 제로센 때 조종사가 견디기 힘들 정도로 긴 체공시간 유지라는 삽질을 하고도 이때까지 정신을 못차렸다.[5] 참고로 현재의 잠수장비 교육을 받아본 사람은 알겠지만, 기본적으로 입으로 흡입하고 코로 배출하게 교육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