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시마 미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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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정치인. 일본 참의원 3선 의원이며 현 사회민주당 당수이다. 간 나오토 정권에서 내각에 입각하여 특명담당장관을 역임하기도 했다.
2. 상세
미야자키현 노베오카시 출신으로 학창시절에는 전국 모의고사에서 1등할 정도로 수재였다. 1980년 도쿄대학 법학부를 졸업해 1985년에 사법연수원에 들어가게 되는데, 그 동기가 사카모토 츠츠미이었다. 1987년 사법고시를 통과하여 변호사가 되었다. 도쿄도에서 변호사생활을 하던 중[2] 일본사회당이 사회민주당과 민주당으로 대분열하자 사회민주당에 입당하여 정치생활을 시작하였다. 즉, 이 사람은 사회당 시절 사람이 아니라 사민당 때 이 당에 들어온 사람이다.
1998년 비례대표로 참의원 선거에서 당선된 뒤 2004년, 2010년, 2016년 네번 모두 전국 '''비례대표'''로 당선되었다. 지역구로 나가면 떨어질 게 확실해서 계속 비례대표 참의원 의원으로만 남아있는 듯 하다.
이후 선거에서 사회당 시절의 역사와 맥을 잇지 못하고 참패해 버려서 그 책임을 지고 사퇴한 도이 다카코[3] 의 후임으로 일본 사민당 당수직에 오른다. 그러나 임기 중 일본 사민당의 지지율은 바닥을 치다 못해 '''지하실로 파고 들어갔고'''(...) 결국 참의원 선거에서 한석을 확보하는데 그치면서 당 대표직에서 사퇴했다.
2016년 제24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는 당시 당수인 요시다 다다토모는 낙선했고 지역구도 전멸했고 혼자 비례대표로 당선되었다.
민진당과의 합당에 반대하기도 했다.[4]
2020년 2월 22일 당 대회에서 치뤄진 당수 선거에서 무투표로 당선되어 6년만에 당수로 복귀했다.
5월 14일 참의원 후생위에서의 질의를 통해, 후생노동성이 결함이 발견되어 지자체에서 반품된 임산부를 위한 천 마스크의 검품 비용으로 약 8억엔을 지출했다는 것을 밝혔다.#
2020년 11월에 임시 당대회에서 당이 갈라지기로 결정하자 사민당에 남는다고 한다. 한편 이 과정에서 데루야 간토쿠 의원이 후쿠시마에게 '''"선대로부터 이어진 유산을 갉아 먹은 건 당신이다"''', '''"당신은 사회민주주의, 사민당 선언을 말할 자격이 없다."''', '''"총선에서 승리하고 싶으면 당신이 중의원으로 전업해 당선되라."''', 이후 기자들의 질문에 "후쿠시마가 지역구 출마를 하면, 비례에 새 인재를 영입할 수 있다. 그게 바로 당세 확장이다. 하지만 그녀는 비례대표에 매달려서 승부를 하지 않았다"고 연이어 비난했다.
3. 여담
- 이름은 분명 4글자 다 한자인데 福島みずほ로 불리는 경우가 많다. 이는 후보의 이름을 직접 적어야 하는 일본 선거 특성 상 기억하기 어려운 한자를 히라가나로서 기억하기 쉽게 하기 위한 것으로, 꽤나 상용되고 지명으로도 존재하는 후쿠시마와 다르게 미즈호(瑞穂)는 꽤 쓰기 어려운 한자이기 때문. 이는 비단 후쿠시마 미즈호 뿐만 아니라 일본 정치인 상당수가 행하는 방침이기도 하다.
- 어머니는 육상부 출신이라고 한다. 그래서 후쿠시마 미즈호가 사민당 당수로 있었을 시절에는 당 광고에 유독 뛰는 광고가 많았다.
- 변호사 시절부터 위안부 문제에 적극적으로 임하고 있다. 아시아 태평양 전쟁 한국인 희생자 보상 청구 사건을 담당한 변호사 중 한 명이었다.
- 하타 유이치로가 사망하자 "하타 유이치로 씨가 돌아가신 걸 듣고 충격에 놀라고 있습니다. 참의원에서 지금까지 신세를 졌습니다. 아직 53세입니다. 급서가 정말 아깝습니다. 아직 믿을 수 없습니다."고 밝혔다.#
4. 이념
여성주의, 아동보호 등을 내세우고, 진보적인 경제 정책을 주장하여 간 나오토 내각 하에서 장관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러나 국방이나 외교 분야에서는 거의 무지한 게 아니냐는 비판도 있다.[5] 북한에 대해서도 온건한 스탠스를 취하는 편이라서 자민당 쪽에서는 늘 까댄다.